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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배규택
시보네 에세이 55
여승과 노인의 순애보
- 풍기 장날의 전설 -
60-70년대 옛 장날은
시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신문이었고,
떠들썩한 라디오였으며,
온 동네의 심장박동이었다.
좌판 위에 놓인 건
무와 고추만이 아니었다.
누구네 집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느니,
건너마을 총각이 처녀를 꾀었다느니,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국밥 뚝배기처럼
보글보글 끓어 넘쳤다.
소백산 자락 풍기 장날도 그랬다.
먼지만 한 소문 하나가
아침나절 장터에 흘러들면,
점심 무렵에는 부풀고 부풀어
온 마을을 뒤덮는 구름이 되었다.
아낙들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 들고
오면서도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고,
노인들은 주막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에 세상 모든 이야기를
안주로 삼았다.
그런 풍기 장날을 오랬동안
달구고 또 달군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 들어도 믿기 어렵고, 그 시절에는
더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
여승과 노인의 순애보.
사랑 앞에 나이도, 승복도,
세상의 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소백산 자락의 기막힌 실화이다.
소백산에 내려온 노인
이곳은 예사로운 땅이 아니었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이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열 개의 명당,
이른바 십승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은 곳이 바로 풍기 금계동이었다.
소백산과 태백산이 두 팔 벌려
감싸안은 이 깊은 산골에는
전쟁을 피해, 세상을 피해, 운명을 피해
흘러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조종직 옹(당시 69세)도
그런 사람이었다.
황해도에서 내로라하는 농사꾼이었던
그는 해방 후 공산치하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
정감록의 글귀를 믿고 찾아든 곳이
풍기 금계동. 그러나
신천지에서 삶은 가혹했다.
정착한 지 3년 만에 아내가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월남한 지 10년째 되던 해에는
아들마저 잃었다. 강원도로 시집간
딸 하나만 남기고 노인은 홀로 남았다.
손바닥만 한 산전을 일구며
좁쌀 한 줌과 구호곡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
4대 독자. 이제
자신이 눈을 감으면 대가 끊긴다.
그 무게를 가슴에 안고
노인은 절을 찾았다.
불문에 귀의한 것은
신앙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마 그 외로움을 달랠 곳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발길이 닿은 곳이
풍기 동부동 영전사였다.
그리고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났다.
등불 아래의 신호
초파일을 앞두고 법당 한쪽은
연등 만들기로 분주했다.
할아버지는 굵은 손마디로
색종이를 접고 있었다.
칠십 평생 밭일로 단련된 손이었건만,
그날따라 종이가 말을 듣지 않았는지
자꾸만 이리 꺾이고 저리 구겨졌다.
그 옆에 사뿐히 앉아
거들기 시작한 이가 있었다.
당시 열아홉 살.
여섯 살에 부모를 한 달 사이로 잃고
주지스님 손에 자란, 열다섯에
계를 받은 여승이었다.
말간 눈에 흰 얼굴, 승복 속에서도
감추기 어려운 젊음의 기운이
봄꽃처럼 피어 있었다.
신도들과 다른 스님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범상하게 보아 넘겼다.
그러나 이미 그 사이에는
무언가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오가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넨 건 젊은 스님이었다.
"할아버지, 자식이 없으시이께네
쓸쓸하지 안니껴?“
노인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
"섭섭하지 안타 카믄 거짓말이제.
그라이 우에니껴. 나이도 많고,
밭이 있어야 씨를 뿌리잔니껴."
스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합장한 손 위로 등불 빛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이었다.
"지는요, 할아버지…
이 세상에 나서 씨 한 톨
뿌리지 못하고 간다는 기,
생각할수록 너무 허무해예."
할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파계인 줄 압니더.
그래도 지는 꼭 씨를 뿌려 놓고
가기로 결심했어예."
노인은 눈을 들어 스님을 바라봤다.
열아홉 살의 눈이 흔들림 없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이 진짜로…
늙은이를 놀리면 못쓰니더.
그 길은 젊은 사람 만나서
가는 길 아이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님은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 대를 이어드릴게예."
법당 안이 정적에 잠겼다.
촛불만 가늘게 떨렸다.
첫닭이 울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에 여명의
첫 빛이 번지는 시각이었다.
그 빛 속에서 스님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광채가 서려 있었다.
조종직 옹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칠십 평생 거친 세월을 버텨 온 가슴이,
그 순간만큼은 스무 살 청년처럼
두근거렸다고 한다.
세상이 말려도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강둑의
급류가 되어 쏜살같이 흘러갔다.
스님의 구애는 끈덕지고 진지했다.
처음엔 손사래를 쳤던 노인도
점점 마음이 기울었다.
마침내 스님은
13년을 입었던 승복을 벗고,
목에 걸었던 염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금계동 조 노인의
초가집 문을 두드렸다.
이 소문이 퍼지자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여승이 파계를 해도 분수가 있지,
하필 그 할아버지를 택한단 말이니껴?"
"10일도 못 살고 도망갈끼다.
두고 보소."
"소백산에 벼락이 쳐도
그런 벼락이 없다 카이."
”아이고 살다살다 벨꼬라지 다보니더"
그러나 여인은 도망가지 않았다.
쓰러져 가는 초가 한 칸,
토끼 궁둥이만 한 산전 300평,
좁쌀 한 줌으로 연명하는 살림이었건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아니, 행복해도 너무 행복했다.
깨가 쏟아졌다.
새벽같이 텃밭을 가꾸던 할아버지가
살림을 차린 후로는 햇살이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기침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동네 아줌마들은
빨래터에 모여 수군거렸고,
그 수군거림은 아랫마을 윗마을
국밥집 주막을 거치며 점점 살이 붙었다.
"아이고, 저 할배 오래 못 살겄다."
"아이다, 풍기 인삼을
매일 달여 묵는다 카더라."
"인삼이 문젠교? 저 눈빛 보소.
저건 인삼이 아이라 사랑이라.“
”얼매나 좋으면 저래 싱글벙글
얼굴에 꽃이 핀니더 안그러이껴“
”그케요 가로느께
꽃다운 신부 만나니께로
조아 죽는거 아인동 몰씨더“
장터에서 누군가 이 말을 꺼내면,
좌판 앞에 모인 아낙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깔깔거렸다.
금계동의 기적
환속한 지 한 달 만에
여인의 몸에 태기가 생겼다.
배가 점점 불러오자 마을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손에 땀을 쥐었다.
첫째 딸이 태어나던 날,
동네가 들썩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1월 23일 자정.
겨울 밤 금계동은 조용했다.
30여 가구가 띄엄띄엄
흩어진 산골 마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지만
아무도 집에 있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그 적막을 가르고 —
"아들이다ㅡ아!!!"
조종직 옹의 고함 소리가
소백산 자락을 흔들었다.
그 순간 마을이 터졌다.
만세 소리, 웃음소리,
박수 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누군가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쳤다.
쌀 됫박과 미역 더미가
초가 문 앞을 가득 채웠다.
한 노인의 경사가 아니었다.
소백산 자락 금계동 전체의,
아니 온 풍기의 잔치였다.
73세 노인이 23세 아내에게서
아들을 본 것이다.
그것도 50년 아래의 꽃다운 여인에게서.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나"는 말이
장터를 떠돌았다.
이 소문은 인근 고을을 넘어
전국으로 퍼졌고,
마침내 신문사 기자가
이 험한 산골을 찾아 들어왔다.
1971년 4월, 그 이야기는
선데이서울 지면에 실려 전국
독자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장터의 웃음꽃
그 후로도 두 자녀를
더 얻어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는 조종직 옹.
장날이면 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그 노인네
얼매나 힘이 좋은지 아니껴?
쌀 한 가마는 거떡없이 메니더."
기자가 찾아가 인터뷰를 하자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거리낌 없이 말씀하셨다.
" 그거요 걱정 안 합니더.
1주일에 세 번쯤 가이께네,
집사람이 수명 재촉한다고
단호히 거부해서 요새는
한 달에 세 번쯤 허락해 주니더"
기자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노인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심술궂게 웃었다고 한다.
완강한 체구에 탄탄한 피부,
아직도 젊음을 품은 듯한
그 눈빛이 기사에 고스란히 담겼다.
장터 주막에서
이 구절이 낭독되는 날이면
막걸리 사발이 연거푸 넘어갔다.
"밤이 좋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할배, 우스워 죽을 씨더."
"이 나이에 조상 볼 낯이
생겼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이 늘어진다 카이."
"풍기 인삼이 저래 좋다 아이껴.
우리도 열심히 묵자, 열심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이야기는
풍기 인삼의 효능으로,
십승지 금계동의 명당 기운으로
자연스레 번져 나갔다.
"금계동이 터가 좋아.
그러이께 십승지 으뜸 아이겠능교."
"거기 사는 양반들이
다 예사 사람들이 아이래."
풍기 장날,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새로웠고,
들을 때마다 더 재미있었다.
부처님도 아셨을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조종직 옹은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나셨다.
파계하여 속세로 내려온
그 여인은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로 자식들과 함께
풍기 어딘가에 살고 계신다고 들었다.
돌이켜 보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이 여인일지 모른다.
열아홉 살, 13년을 바친
승복을 벗기로 결심한 그 용기.
가난한 초가와 백발 노인을 택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그 진심.
세상 모든 입방아를 등 뒤로 밀어버린
그 담대함.
그것은 파계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깊은 자비였을지도 모른다.
한 노인의 외로움과 간절함을 향해
두 손을 내민, 그 작고 단단한 자비.
부처님도 그것만큼은
눈을 감아 주셨을 것이다.
소백산은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금계동 산비탈 어딘가에는
두 사람이 함께 일구던
텃밭 자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풍기 장날이면, 아직도
누군가 이 이야기를 꺼내 막걸리
한 사발에 웃음 한 자락을 얹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살아 있다.
금계동의 위용과 정감록의 전설,
그리고 풍기 인삼의
기운을 두루 품은 채,
그 사랑 하나 소백산 자락에
조용히 별빛처럼 남는다.
2026.5.10.
시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