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bsTZY6KbgqY
2024.2.4(주일) 민수기 1:1~19 ‘’건강한 공동체“ 예산수정교회
교회는 신앙공동체이며, 믿음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한자로 함께 공, 같을 동, 몸체를 씁니다. 영어로는 ‘community’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일치’라는 뜻의 ‘unity’의 합성어로, 함께 일치, 즉 하나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각각이 함께, 하나를 이룬 곳 또는 함께 하나를 이뤄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게는 부부요, 조금 넓게는 가정, 교회, 국가, 인류로 넓혀갈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 안에서 갈등하고 분파를 만들고 분열해서 갈라지는 일도 있습니다. 사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각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군사로 서야 합니다(1~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족속과 조상의 가문을 따라 20세가 넘은 남자 중에서 특히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을 계수하라고 하십니다(2,3절). 왜냐하면 이스라엘 12지파의 20세 이상 된 남자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행진할 때 군대 조직을 갖춰전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개역한글은 3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다워야 합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고 구원선이다. 그래서 교회는 부흥성장이 안될 수 없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교회는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이론에 매여 경직되고 메말라 버린 오늘날의 교회와 거리가 멀다.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과 뗄래야 뗄 수 없다. 영혼 구원이 교회의 전부임을 말하고 있다. 영혼 구원에 의한 성장과 역동적 현상이 자연스런 교회의 모습이다.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역동적 영혼 구원의 역사가 활발한 교회가 성경적 교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유람선 교회’가 돼 버렸다. 원래는 유람선 교회가 아니었는데, 변질됐다. 유람선 교회는 소속된 교인들끼리 재미있게 한가하게 편히 지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 자랑하길 넉넉하고 평안하고 은혜롭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유지가 잘 된다고 한다. 조금 세련되고 진보된 유람선교회들은 성경공부 제자훈련으로 교인들의 교양과 인격과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데 힘을 쓴다. 그러면서 영적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평안하고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밖의 불신자 영혼에 대해 무관심하다. 역동적이고 좋은 교회라는 일부 유람선교회들은 성경공부 제자훈련과 함께 전도에도 힘을 쓰지만 유람객과 같은 기성 교인들을 더 많이 오게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크게 성장하는 것을 자랑과 만족으로 여기며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쇠퇴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주의 지상명령이 선교라고 여기면서 교회 주변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불신자들,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가까운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다. 그들을 등한시하며 팽개치다시피 하면서 멀리 타국의 불신 영혼을 건진다며 해외 선교에 힘을 더 기울이는 유람선도 아주 많다. 대형 유람선·중형 유람선·소형 유람선들의 공통적 특징은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자 예수의 유언이며 성령강림 내주의 목적인 불신영혼 구원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끼리 화목과 현실 안주, 교세 확장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교인들끼리 친목과 교제, 평안과 여러 가지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과 동네, 자국의 불신영혼 구원을 그보다 최우선으로 여기며 전력을 기울여 불신영혼 구원에 힘쓰는 교회가 구원의 방주교회인 ‘구원선 교회’다. 교양과 도덕과 인격을 갖춘 교인으로 만드는 게 최우선 목표가 아니라, 그보더 더 우선적으로 불신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할 줄 아는 교인으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구원선 교회의 모습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불신자 구원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구원선 교회’는 0.5%에 불과하고, ‘유람선 교회’가 99.5%나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폐쇄’가 늘어나 교회 수가 점점 줄고 기독교 인구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교회가 다 없어진 것처럼 한국교회도 이대로 가다간 공멸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군함'이라는 것입니다. 유람선의 경우 소수의 항해사들과 일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승객들은 편하게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반면 군함의 경우 각자 역할은 다르겠지만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전투를 위해 함께 준비하고 전투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마하나임’(창 32:1~2) 야곱은 메소포다미아에서 가나안으로 귀향 하는 도중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과거는 고독과 두려움과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이 고향 땅을 향하여 길을 진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에게 나타났습니다. 야곱이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야곱을 만나 주었습니다. 부푼 가슴으로 고향 땅에 돌아오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난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을 때 야곱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을 때 야곱이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이란 ‘군대들', '진영들', '떼들' 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가 많고, 질서가 있었고,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임전태세를 갖춘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수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26:53절에 예수님께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였습니다. 시편 68:17에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말은 수없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천사는 질서가 있습니다. 군대는 질서가 생명입니다. 계급, 조직, 규율이 있습니다. 명령 계통이 엄하고 철저합니다. 천사들의 세계도 군대와 꼭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늘군대입니다.
천사는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천사는 주로 성도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악한 자를 징벌하는 일들을 수행합니다. 그러한 임무수행을 위해서는 자연히 권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34:7에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항상 전쟁에 임할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전투에 임할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각 성도가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공동체의 질서와 원칙을 지키며, 자신의 은사와 직분에 따라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적용) 나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교회의 질서와 원칙을 잘 지키며, 은사와 직분에 따라 공동체를 잘 섬기고 있습니까?
2.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4~16절).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돕는 자들은 각 지파의 회중에서 부름을 받아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전투 지휘관의 역할까지 맡았습니다(4,16절). 하나님은 이들을 지명하여 부르셔서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시고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일사분란한 군대로 정비되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각 지파 우두머리의 직무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회중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고 말씀하십니다.
지도자, 직분자 뿐 아니라 성도 또한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자기정체성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자연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많은 헌신과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라는 신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세 가지 유형의 정체성으로 정리된다. 첫째 예수님의 피로 구속되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이고, 둘째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누리고 나누고 전파하는 ‘사랑의 전도자’이며, 셋째 세상에 대한 성경적 대안과 온전한 회복을 확신하는 ‘지혜로운 용사’이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성경은 우리를 일컬어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한다(벧전 2:9). 그리고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선포한다(요 15:19). 더 나아가서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었는데 그 간격이 얼마나 큰지 생명과 죽음으로 선언하며 그 본질적 차이를 현격히 드러내고 있다(요 5:24). 우리가 진정으로 전도하길 원하고 내가 사는 곳이 복음화되길 원한다면 우리의 하나님 자녀됨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확실히 받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이것은 필연코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셨다(딤전 6:12). 히브리서에서는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 10:32)고 말씀하신다. 복음은 고난과 함께 온다(딤후 1:8). 사람들은 이러한 싸움 가운데서 복음의 참 생명과 참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주눅 들어 하나님의 자녀됨을 숨긴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랑의 전도자’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때 우리는 ‘행복’이 아니라 ‘고난’ 속으로 던져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를 멸시하는 바로 그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그 열쇠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마치 MBC를 보려면 채널을 맞추어야 하듯이 세상과 성도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은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 큰 까닭에 밖으로 나누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사랑을 누리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이 나눔을 통해 전도를 하고 이 나눔 속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지혜로운 용사’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즉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에 일꾼으로 세워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하면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비전이다. 어두운 곳에 빛이 들어가면 주변이 밝아지는 법이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면 맛을 내는 법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혼돈에 빠져 갈 바를 모른 자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어야할 거룩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지혜로운 용사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길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면 그 곳이 바로 길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기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함을 늘 삶의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로 가득찬 공동체가 바로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적용)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적으로 지키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열심과 내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3. 피차 순종하며 협력해야 합니다(17~19절).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지명하신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소집합니다(17,18절). 그리고 전쟁에 나갈 남자를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분류하고 그 수를 집계합니다(19절). 이처럼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명령하시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바로 순종합니다. 또한 부름받은 각 지파의 지도자들도 모세와 아론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협조합니다. 이처럼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지도자 뿐 아니라 구성원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이해타산없이 순종하며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라는 말은 공동체의 개념입니다. 바울은 서로 짐을 지는 일을 가지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인 영성을 추구하지 말고 서로 도와 주는 믿음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참 율법은 서로 섬기고 서로 상대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나의 참 제자’(요13:34,35)라고 말씀하면서 참 제자들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요13:12~17)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유월절을 하루 앞둔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식사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 이야기를 보면, 거기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물항아리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죠? 결례라는 것은 청결하게 하는 예식, 세정식을 뜻하는 말인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외출하고 나서 돌아왔을 때나 식사 전후에 손발을 씻는 결례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먼지가 많은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이 손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는 위생상의 문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접촉한 부정한 것들을 제거한다고 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의식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목요일 저녁에 다락방에 모였을 때도 식사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손발을 자기가 알아서 직접 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에 가게 되면, 그 집에 있는 하인이 씻어주거나, 아니면, 지체 높은 손님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집에 왔을 때는 그 집주인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락방에 모였을 때는 특별히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해야 되는데,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제일 짠밥이 낮은 제자가 해야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도 발을 씻으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발을 씻게 되면, 자기가 제일 하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수석 제자니까, 제일 거드름을 피우면서 누가 빨리 자신의 발을 씻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그래도 우리가 제일 먼저 된 제자들이니까, 우리 '밑에 선'에서 알아서 기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래도 내가 세리였었는데...', 빌립은 '내가 그래도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무도 발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고, 섬김의 도를 직접 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시기 전에, 자신들이 직접 발을 씻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저 녀석보다는 내가 더 낫지." "저 친구보다는 내가 나이도 많고 경륜이 있지." "저 양반보다는 내가 그래도 많이 배웠잖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도땅은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 인구는 3%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이런저런 영향들이 있었겠지만, 간디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간디가 남긴 말 가운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왜 그런 말이 나왔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간디가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에도 영국 사람들은 간디를 혈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하고 무시했습니다. 간디가 버스에 탔을 때도 여기는 백인들이 타는 곳이지, 너 같은 인간이 타는 곳이 아니라면서 뺨을 때리고 버스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국 사람들은, 간디를 무시하고, 그를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지금 인도땅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선적인 종교를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말로는 사랑을 얘기하면서, 사람을 무시하는 이중적인 종교를 어떻게 참 종교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인도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2천 년이라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기독교인구가 3%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10억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고 하면 치를 떨면서, 그들은 힌두교의 신들을 섬기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 2:3-4)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겸손이라는 말을 원어의 뜻을 살려서 해석해 보면, 『자신을 자기의 가치 이하로 낮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헬라인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셨지만, 겸손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의 그런 놀라운 겸손함의 모습처럼, 너희들도 서로 겸손하게 살라고 권면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나은 자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먼저는, 남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기본적인 작업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분명히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자꾸 찾아내고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용)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내가 지체들과 함께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고 협력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큐티인간증] 종합선물세트 이광준님
저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셨고,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자식들에게 푸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여섯 형제는 항상 부모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이런 가정이 너무 싫었던 저는 예비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사이가 너무 좋으신 모습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는 ‘나도 빨리 저런 가정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하던 일에 싫증이 난 저는 주식을 하기 시작했고, 손해가 나자 아내 몰래 사채까지 썼습니다. 그러다 빚이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아내에게 이야기했는데, 아내는 그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계속 몰래 주식을 하니 아내는 제게 겁을 주려고 이혼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 어는 오히려 잘 되었다 싶어 얼른 이혼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다 이혼조정기간에 저희 부부는 지인의 소개로 처음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설교에 은혜를 받아 양육 후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평생 불교를 믿어 온 저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 중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고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2절). 이후 저와 아내는 부부 소그룹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내가 “사실 저의 남편은 주식을 할 뿐 아니라 신혼 초에 바람도 피웠고, 음주 운전도 네 번이나 걸린 죄의 종합선물세트예요”라며 펑펑 우는데, 저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아내의 폭로를 듣고 집에 오는 길이면 저도 아내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의 간증을 들은 한 여자 집사님이 아내에게 “아니, 어떻게 저런 남편하고 살았어요?”라고 하셔서 무척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세상에서 악과 음란을 행하다 쓰레기처럼 버려질 인생이었는데, 계수하여 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부부관계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19절)
적용)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저의 죄와 수치를 솔직히 나누겠습니다.
믿지 않는 다섯 형제에게 매일 큐티 말씀과 주일 설교 영상을 SNS로 보내겠습니다.
결 론
바라기는 우리 교회 각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의 군사가 되고, 각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확신하여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피차 서로 순종하고 협력하여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영혼구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수정교회와 한국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