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나가는 모습을 보고 시를 짓다::
할아버지가 써래와 쟁기를 들고 일을 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단재는 어린나이에 시를 짓는다.
朝出負而氏 論去地多起 '이른 아침에 써래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세.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
특별한 것 없는 이 시는 써래를 '而'자로 쟁기를 '氏'자로 농기구의 형상을 표현하였고, '論'자는 '沓', '去'나는 밭갈다(田井)의 음역으로 이러한 한자들을 빌어 작문한 소년답지 않은 기발함과 재치에 마을사람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당나라 사람의 시를 읽다::
단재가 당나라 사람이 쓴 시를 읽다가 "4월 남풍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四月南風大麥黃)" 하는 대목이 나오자, '거참 이상하다. 지금은 분명 4월이고 저 들판의 보리가 새파란데 어찌 누르다고 할까?'하며 머리를 갸우뚱하였다. 그리고는 얼른 붓을 들어 "4월 남풍에 보리가 더욱 푸르다(四月南風大麥靑)"로 고쳐 놓았다. 소년단재의 총명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보이는 일화이다.
::가덕서숙에서::
밤늦도록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모두들 코를 쥐고 문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하며 우와좌왕하는데 유독 단재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골똘히 책만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람! 누가 뒷간에 가지 않고 이방 안에다 실례를 했는가 말이야?"
학생들이 코를 움켜 쥔 채 방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책장 넘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단재가 앉은 곳이 흥건히 젖어 있지 않은가.
"아니! 자네..."
학생들은 어이가 없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이윽고 읽던 부분을 마저 다 읽은 신채호는 얼굴을 들고 흥분한 표정으로, "여보게들! 이 신묘하고 깊은 뜻을 가진 글을 좀 보게나! 참으로 뛰어난 문장 아닌가"하며 책을 들고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학생들은 저마다 "이크! 가까이 오지 말게!" 하고 도망하며, "그보다는 자네 뒤를 먼저 보는 게 옳을 것 같아" 하며 놀렸다. 그제서야 단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례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작을 훔치고::
몹시도 추운 어느 겨울날 밤이었다. 잔뜩 웅크리고 누운 가족들은 추워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낮은 신음 소리를 듣다 못해 단재는 한밤중에 밖으로 나왔다. 이 시간에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히 생각하며 고샅길을 서성이다가 이웃집 헛간 옆의 장작이 수북이 쌓인 새초가리에 눈이 멎었다.
'저것만 있으면 온 식구가 따뜻하게 밤을 지낼 수 있을텐데 …. 주인 모르게 저걸 가져갈까? 결국 도적질이 되고 마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양심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추위에 떨고 있을 가족 생각을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아궁이 앞에 앉아 군불을 지피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한 것이 수치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다 태워 버리고 싶어 나뭇가지를 한꺼번에 잔뜩 집어넣고는 그 매캐한 연기 속에 눈물을 떨구면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부자에게 구걸::
식량이 떨어져 며칠을 굶다 못해 이웃에 사는 부자집 대문을 단재는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웬일이오?"
"다름이 아니라 이 집의 남는 식량을 조금 빌릴까 합니다. 후일 반드시 갚겠습니다."
본시 돈을 모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베푸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거지 행각의 이 손님이 부자에게는 반가울 리가 없었다.
"지금 손님이 있으니 몇 시간 후에 다시 오는 게 어떻겠나?"
시큰둥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품이 거절을 못하여 적당히 미루는 것 같았다.
단재는 무안하여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도 약속한 몇 시간 후 그는 다시 이 집을 찾았다. 오기도 난데다가 사실 당장 굶어 쓰러질 판이어서 앞 뒤 가릴 게 없었다.
이번에는 주인 아닌 다른 사람이 나왔다.
"안됐습니다. 우리 주인님께서는 조금 전에 다른 볼일이 생겨 인근 마을에 출타중이십니다. 조금만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
이 말에 단재는 바람같이 주인이 갔다는 동네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거기서도 방금 다른 마을로 갔다고 했다. 그는 또다시 주인의 뒤를 쫓았다.
허겁지겁 뒤쫓아간 그는 인근 마을 입구에서 비로소 그 부자와 만날 수 있었다.
"아까 저와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사람아, 그렇다고 예까지 무엇하러 찾아와."
단재는 분노에 찬데다가 쉬지 않고 뛰어오느라 아직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
"밤이 깊었소만, 우리 집 사랑에 가서 기다리면…."
부자의 지연 전술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순간 단재는 번개같이 달려들어 부자의 갓과 상투를 움켜쥐었다. 불 같은 성미인 10대 소년의 손에서 갓은 발기발기 찢겨져 땅에 내동댕이 쳐졌고, 상투는 뜯기어 풀어 헤쳐진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흘러 내렸다.
"당신 따위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더 낫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재물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 기회에 똑똑히 알아두라구."
단재는 큰 소리로 부자를 꾸짖었다. 갑작이 봉변을 당해 꼴이 말이 아닌 부자는 밤중이라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줄행랑을 놓았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에 단재는 이내 자신이 너무 흥분하였던 점을 후회하였다. 없는 자의 슬픔, 딱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큰 일에나 작은 일에나 비위에 거슬리거나 사리에 벗어나도록 푸대접을 받는 경우 그는 불같이 날뛰었다.
::재상 신기선과의 관계::
재상을 지낸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책을 읽던 때의 일이다.
단재는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속독법으로 신기선의 사저에 있는 책을 독파하였다. 이 말을 듣고 신기선은 단재의 재능을 시험하기로 하였다. 신기선은 책을 한 권 집어들고 가장 까다로운 대목을 물었다. 그러자 단재는 거침없이 술술 외며 시원스럽게 풀이까지 하였다. 다시 다른 책들을 꺼내 몇 가지를 더 물어 보았으나 여전히 청산 유수였다.
"허허,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신기선은 단재의 비상한 재능과 학구열에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 집 책도 다 읽었다니, 내가 자네에게 더 큰 배움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할 차례다. 서울 성균관으로 가게나. 내가 천거해 줄테니 어서 올라가게."
단재는 이렇게 신기선에게 인정받고 성균관에 입교할 수 있었다.
신기선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단재였으나 공과 사는 분명하게 구분하여 차후 단재가 언론을 통하여 구국의 활동하던 시절 일진회원 신기선의 매국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성토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스승들과::
성균관 관장서리인 수당 이종원은 단재의 재능과 실력이 갈수록 두드러지자, 많은 관생들 중에서 그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는 단재가 나이 어린 제자임에도 학문적인 소양은 오래지 않아 자기를 능가하고 말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자네 한 사람뿐이네." 라고 이종원은 말할 정도였다.
당시 경학을 가르치던 이남규도 단재의 재능을 누구못지 않게 인정하였다. 그는 어디에 가던지 "나의 제1제자는 신채호, 제2제자는 변영만이다."라고 거침없이 이야기하곤 하였다.
::유인식과 상투::
안동출신 유림 동산 유인식과 성균관 동재에서 함께 공부하던 단재는 상투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단재는 유인식이 상투를 고집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보오, 동산은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해 나가겠다면서, 대체 그 상투는 언제까지 고이 보존하시겠소?"
"단재 자네가 단발을 했다고 나한테까지 그걸 강요할 수는 없네. 내게 있어서 상투는 바로 민족적 자존심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바는 동산 한 사람이 단발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오. 온 민족이 하루 빨리 개화하여야 할 시기에 민족을 위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뜻을 모은 우리가 그까짓 상투하나 잘라내지 못하고 있다면, 저 산적한 일들을 누가 나서서 다 합니까? 재래 유생의 보수적인 몸가짐을 고집하면서 어떻게 구국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거요?"
"…."
"동산도 어서 그 거추장스러운 상투를 자르시오."
단재의 논리가 하도 당당하여 결국 유인식은 고집해 온 상투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상투에 민족적 자존심을 걸었던 내 소견이 좁았던 것 같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은 보다 더 큰데서 살려내야 하는 것을…."
이처럼 단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독선적이라 할 정도로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단재는 유인식뿐만 아니라 당시 성균관의 고루한 유생을 보기만 하면 먼저 긴 머리칼부터 깎아 버리라고 종용하였다. 말하자면 정신과 육신이 아울러 개화해야 한다는 신념의 관철이었다.
::아들 관일을 잃고::
첫 아들을 본 단재는 무척이나 기뻤다. 부인 풍양조씨가 젖이 풍족하지 않자 부족한 살림에도 독수리표 분유를 사서 관일에게 먹일 정도로 끔찍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풍양조씨가 분유를 잘못먹여 관일은 우유에 체해 죽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단재는 집앞 도랑에 분유를 몽땅 쏟아 부으며 부인을 한탄하였다.
이 일을 기화로 하여 단재는 이후 중국 망명시 부인에게 논 5두락을 주고 친정으로 돌려보내며 이혼을 한다.
친구들이 이를 탓하자 단재는 "서로 편하자는 것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나"라고 간단히 대꾸하였다.
::바지 춤에 매달린 위장약::
바지춤에 무엇인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친구 변영만이 물었다.
"자네, 이건 또 무슨 보물 쌈지인가?"
"아무것도 아니야. 보물이 아니라 그저 위장이 좀 나빠서 약을…."
"아니 위장약이라면 집에서 끼니 때마다 복용해도 될 텐데, 뭐하러 이처럼 거추장스럽게 매달고 다니나?"
"글쎄 난들 그걸 모르겠나. 집에 두면 약이 남아나질 않아서지. 먹성 사나운 우리 집 아낙이 무슨 보약이라도 되는 줄 알고 이 위장약을 나 몰래 찾아 먹고는 하니 어떻게 하겠나. 이렇게 가지고 다녀서라도 내 병부터 고치고 봐야지."
::술과 단재::
어느 날 신문사에서 월급봉투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던 단재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온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으슬으슬 떨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며 예쁘게 차려 입은 여자가 갸웃이 내다보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어머, 비를 맞고 서 계시는군요!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오셨다가 비가 뜸해지거든 가시지요."
단재는 춥기도 하고 비도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아 그집 사랑채에 잠시 들었다. 장지문을 열어 놓고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비 오는 바같 풍경이 가뜩이나 정서가 여린 그의 심사를 몹시도 뒤흔들어 놓았다. 가슴 밑바닥부터 촉촉히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문 밖으로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여주인이 주안상을 차려왔다.
아직 20대 청년의 객기 탓인지 이날 단재는 몹시도 취했다. 본시 술에 약한 체질이면서도, 빗소리를 들으며 낯선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 매우 흥취가 돋구어져 연거푸 마셔 댄 까닭이었다.
그러다가는 술에 취해 깜박 잠이 들었다. 이윽고 잠이 깨었을 때 그는 꽤나 쑥스러워서 안주인을 볼 용기가 안났다.
"잘 쉬었다 갑니다."
단재는 글을 한 줄 남기고 살그머니 그 집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이튿날 출근한 단재는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더니 한 친구를 붙들고서는,
"여보게, 급히 돈이 좀 필요하니 한 달만 좀 빌려 줄 수 없겠나?"
"아니, 자네 어제 월급을 타지 않았나? 그 돈을 하룻밤 사이에 다 썼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쯤 되자 단재로서는 빈털터리가 된 어제의 일을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집에 와서 보니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지 뭔가? 그렇다고 어제 일을 안사람에게 내색할 수도 없고. 이봐, 내 사정을 좀 봐주게."
"하하하, 우리 단재 선생께서 정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빈털터리가 되셨구만!"
신문 논설에서는 더없이 명쾌한 논조를 제시하는 단재였지만, 인간적인 면모에서는 허술한 점도 이렇게 없지 않았다.
::담배와 단재
::
단재는 술은 좋아하지만 많이는 못 마셔 두서너 잔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담배만큼은 유명한 골초였다. 글을 쓸때는 언제나 줄담배를 즐겨하였다. 장죽에 기사미라는 잘게 썬 잎담배를 담아 피우는데, 다 타면 재를 털고 또 피우고 하여 나중에는 대통이 뜨겁게 달아 손으로 쥘 수 없을 정도까지 된다. 그러면 대통만 창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내밀어 그 열이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피워 무는 식이었다.
단재가 대한매일신보에 활동하던 시절,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정부가 진 빚 1천3백만원을 갚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국민 모두가 아끼고 아낀 돈을 신문사로 보내며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 단재는 그 즐기던 담배를 끊어 국채보상금으로 일금 2원을 냈다.
모두가 단재의 금연을 실패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라를 위한 보상금 모금 운동에 단재는 금연을 통한 기금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유학의 거절::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영국인 배설은 단재의 재질을 높이 사 미국으로의 유학을 단재에게 권했다. 더 많은 배움의 길을 터주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재는
"뜻은 감사합니다만, 지금 이 판국에 외국 유학이란 분에 넘치는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저 혼자 흡족하게 공부하겠다고 여길 떠나다니요."
"그렇게 거절만 하지 마시오. 단재 선생이 공부를 더 하면 장차 이 나라를 위해 더 큰일을 해 나갈 수 있을텐데. 내가 비용은 다 대겠소. 당신은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리라고 봅니다."
"나는 이미 이 겨레 이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할 결심이 서있으므로 지금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장님 후의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외국 유학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단재의 고집에 배설 사장도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단재의 역량을 보고 세계적인 석학으로 대성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싶어했던 배설이었지만 역사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단재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새해맞이 수세(守歲)::
새해를 맞이하는 섣달 그믐날에는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해를 맞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단재가 30대로 접어들던 섣달 그믐날 변영만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뜬눈으로 새해를 맞이하기로 친구들과 약속하였다. 모두들 술잔을 돌리며 시국담을 하고 있을 때 단재가 먼저
"우리가 오늘 밤 수세하기로 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하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는데 다름아니라 단재가 코고는 소리였다. 친구들은 "이봐, 단재. 수세를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나?" 하고 말하자 단재는
"아닐세. 아직 자는 것은 아니야."
그러다 좀처럼 잠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단재는 아예
"여보게들, 우리 잠자면서 수세합시다 그려…."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친구들이 제일 먼저 수세하자고 하였던 사람이 먼저 코를 골고 잤다며 말하자, 단재는 "상관 있소? 나는 꿈나라에서 묵은 해를 장사 지내고 새해를 맞았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일에서나 자신의 일에 당당했던 단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단재와 누더기 이불::
어느 날 벽초 홍명희가 한밤중에 우연히 단재의 집을 들렀는데, 단재가 덮고 자는 이불이 더럽고 남루하여 기겁을 하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이튿날 벽초는 다른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단재처럼 지저분한 사람을 미국에 유학보내면 분명히 한국 망신만 시킬 뿐이오."
친구가 벽초의 말을 단재에 전하면서
"어찌 그런 더러운 이불을 덮고 자나? 전에 보니 이불이 그처럼 험한 것 같지는 않던데."
하고 말했다. 그러자 단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벽초는 내가 미국 가는 것을 시샘하는 모양이오. 자기도 가고 싶겠지. 하지만 나는 외국 유학이 조금도 내키지 않아 승낙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가지나 않을까하여 그런말까지 늘어놓고 다니는구만. 졸장부 같으니!" 라고 말했다.
마침 모두들 더러운 이불에 관한 이야기는 단재의 할아버지뻘인 신백우로부터 그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얼마전 신백우가 움막집에 병든 팔순 노모를 모시고 가난에 허덕이는 단재와 이웃해 사는 딱한 날품팔이꾼 이야기를 듣고 쌀을 한 되 사들고 찾아갔다. 이때 단재가 함께 갔는데, 다른 물건을 사줄 돈이 있을 리 없어서 그냥 따라갔다가 병든 노인이 덮고 있는 이불을 보자 너무 안스러웠다.
"저 이불로 병약한 노인이 어떻게 추운 겨울을 지내겠나. 내 이불하고 바꿨으면 좋겠는데…. 내 것은 제법 두툼하거든."
"그거야 단재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않소."
그러나 그 이불은 신백우가 단재를 위하여 사준 것이라 실제로는 신백우의 허락이 필요하였다.
"내 이불은 대부가 해다 준 것이니, 해다 준 사람과 덮는 사람이 다를뿐 아직 이불 임자는 내가 아니잖소."
"무슨 이야기인가? 이미 내 손을 떠난 이상 그것은 단재의 이불이니 단재가 알아서 하시오."
이렇게 하여 단재는 자신의 이불과 노인의 이불을 바꿀 수가 있었다. 단재는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에는 남의 이목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누더기 이불을 덮고서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단재였다.
::목욕탕에서 단재::
단재와 함께 목욕탕에 간 친구는 탈의실에서 단재를 보고 깜짝 놀랬다. 단재가 진홍색 여자 내의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선생, 이게 웬 변괴요? 이건 여자 내의가 아닙니까? 원 이럴 수가…."
친구가 하도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 있는데도, 단재는 별로 창피해하는 기색도 없이
"이게 여자거요? 그걸 내가 알 길이 있나. 일전에 어느 점포를 지나다가 보니 하도 빛깔이 곱기에 무심결에 그냥 사 입었을 뿐인데…." 하고는 유유히 욕탕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그 친구 얼굴이 빨개진 것이었다. 탈의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 보기가 민망하여 단재를 따라 얼른 욕탕으로 들어가 버렸다.
::단재의 천재성::
단재가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하던 때였다. 일과를 마치고 삼청동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 길가 추녀밑으로 비를 피하러 들어갔다. 한참만에 주인이 대문밖으로 나와 들어가 비를 피할 것을 권했다.
단재는 주인을 따라 그 집 사랑채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꽤 많은 책들이 쌓여 있어 단재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 한 책을 집어든 단재는 염치불구하고 그 다음날까지 책을 읽어 독파하고 주인에게 잘 간직해 두라는 말을 하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몇 달 뒤 그 집이 화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재는 그 집으로 찾아갔다. 주인을 만나 지난 번 그책은 어찌되었는지를 묻자 주인은 화재와 함께 불타버렸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단재는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면서 그의 기억력을 토대로 책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는데 며칠 후 먼저 책과 똑같은 내용의 책이 단재에 의하여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단재의 천재성에 모두들 깜짝놀랐다.
::단재의 유명한 세수법
::
단재의 세수법은 단재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
단재는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냥 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고 다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수를 하면 바닥과 옷이 온통 물에 젖어 버리곤 하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들을 하였지만, 단재는 오히려
"온 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이기가 싫을 따름이오." 라고 답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단재의 자존과 절개의 자세가 잘 드러난 면모였다.
::단재의 영어공부법
::
중국 망명시절 단재는 김규식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독학으로 영어의 기본은 닦아 놓았으나 좀더 많은 공부를 위하여 김규식에게 청하였던 것이다.
김규식은 특히 발음 공부를 무척 까다롭게 가르쳤는데 참다못해 단재는 춘원에게로 갔다.
"춘원한테 영어를 배워야겠소.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 사람이 꽤 까다롭게 그러는군."
이렇게 말하는 단재를 보고 이광수는 단재적 사고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단재가 네이버(neighbour)라는 단어를 '네이그흐바우어'라고 읽자 변영만이 그중 묵음이 있어 그냥 네이버라고 발음하면 된다고 가르쳐도 단재는
"내가 왜 그걸 모르겠소? 그러나 그건 영국인의 어법일뿐인데 내가 그것을 꼭 지킬 필요가 있겠소?" 하고는 여전히 '네이그흐바우어'라고 읽었다.
그리고, 영어를 읽으면서 '하여슬람'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하였는데 그 까닭을 묻자
"영문이나 한문이나 글은 다 마찬가지 아니오." 하며 태연하게 '하여슬람'을 섞어 영어를 읽었다.
이 무렵에 배운 영어실력으로 단재는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흥망사', 토마스 카라일의 '영웅숭배론' 같은 책을 읽고 해석하였다고 하니 단재의 재능이 무척 뛰어났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단재와 일본음식
::
중국 망명시절 단재가 한 친구와 함께 푸짐한 중국음식을 함께 하고 있을때였다.
단재는 음식을 배달하는 소년에게 음식맛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기에 이처럼 맛이 유별나지? 어디서 온 거니?"
"그 고기는 동양어라는 것으로,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희귀한 고기죠."
"뭐라고? 왜놈 음식이라고?"
그는 노발대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 버렸다. 대접한 친구가 도리어 미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정도였다.
토하고 나서야 단재도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왜놈 고기는 내 위장이 좀처럼 받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않은가."
::조카 향란과의 절연::
중국으로의 망명을 앞두고 임치정에게 맡기고 떠난 조카 향란의 결혼 문제로 단재는 위험스럽지만 다시 조국땅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아끼던 제자 김기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연락도 왔다.
단재는 향란이 수구파의 후손인 홍어길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향란은 숙부인 단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심하게 화가 난 단재는 향란과 혈육의 정을 끊는다며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서울 김기수의 집을 들러 하염없이 슬퍼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단재에게는 마지막 고국에서의 밤이었다.
::단재와 우응규::
베이징 시절 황해도 출신 우응규라는 청년이 단재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가난에 끼니를 굶는 스승을 보다 못해 변영만과 짜고 스승 몰래 스승이 앉는 자리 밑에 돈을 넣어 두었다. 그러나, 단재는 청소를 전혀 하지 않고 사는 터라 돈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도 밥을 굶었다.
단재가 쓰는 방은 외양간과도 같았다. 온갖 쓰레기가 방안을 구석구석 누비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단재는 책 읽는 것에 푹 빠져있었다.
가끔 변영만이 "이봐, 단재. 돼지가 아닌 이상 어찌 이런 꼴로 방을 둔채 생활한단 말이오?" 하고 질책을 하면 그에 못이겨 비를 들고 청소를 한다.
그러다 돈을 발견하면 "나는 돈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돈이 남아있네."하며 호주머니에 돈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중국 신문에의 기고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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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있던 단재의 명성은 중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어 중국 유력지 '베이징일보'와 '중화보' 등에 논설을 싣게 되었다.
단재의 탁월한 문장 솜씨에 신문의 발행부수도 많이 늘어났고, 중국 언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단재는 자신의 글을 한자라도 고치게 되면 그 신문에 글쓰기하는 것을 당장 그만두었다.
단재가 '베이징일보'에 보낸 원고 중에 '의(矣)'라는 토씨를 하나 빠뜨리고 발행하자 단재는 당장 집필을 거부하였다. 그 신문의 사장이 찾아와 사죄하였지만, 단재는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여 끝내 집필을 거부하였다.
::찢어버린 3·1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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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일어난 전국민적인 독립만세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도 남음이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소식은 단재에게도 들어가 단재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곧이어 단재는 크게 실망하고는 탄식하다 못해 "에잉!"하는 그 특유의 말투를 내던지며 독립선언서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불과 몇 년짜리 운동을 선언했군! 이 판에 평화 운동이 다 뭐하자는 거요?"
단재는 현재의 상황이 준비론이나 외교론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만이 유일한 독립의 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반대하는 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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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서 단재는 미국에 들어앉아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국무총리와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하였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질 않소! 그런데도 우리의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오?"
단재는 계속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쳐나갔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단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이때 문을 지키던 젊은이들이 이러는 단재를 막아섰다.
"못 나가십니다. 정부 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이 방에서 아무도 나갈 수 없습니다."
눈물로 만류하는 청년들의 눈에는 어느새 살기마저 감돌았다. 그만큼 정부 수립에의 열망은 비장했다.
단재 또한 처음의 뜻을 굽힐줄 몰랐다. 청년들의 협박과 위협에 오히려 호통을 쳤다.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더냐? 대의밖에 더 있는가? 민족적 대의가 용납할 수 없다."
그래도 청년들이 비켜서지 않자, "차라리 나를 죽이라."하며 그들을 밀치고 퇴장해 버렸다.
이승만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임정의 노선에 대하여 단재는 끝없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후 '신대한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해방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단재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금기시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김창숙과의 설전::
심산 김창숙은 단재보다 한 살위로 성균관 유생시절부터 함께 공부한 학생이고, 항일운동에서는 뜻을 함께 한 동지이고, 망명객사 북경의 서단패루 한세량 목사집의 단칸방 하숙생활에서는 한솥밥 식구로 1년여를 동거한 막역한 친구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신발을 밖에 벗어 놓지 않고 방안에 두어야 도둑을 맞지 않는데 단재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아 신발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이회영의 집에 갈때 맨발에 헝겁을 싸서 갔는데 이것을 본 김창숙이 새신발을 사주었다.
이 신발을 집어 든 단재가 지나가는 말로 중국인에 대한 불평을 하였다.
"한심한 공자님! 어쩌자고 후세 교육을 도적질만 가르쳤는지, 에이, 망할 것들. 중국의 공자가 한국의 좀도적 만큼은 교양이 없으니 이놈의 중국도 나라가 망할 것은 정한 이치지."
이 말을 들은 김창숙이 화를 벌컥 내며,
"이봐, 단재. 어쩌구 어째?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면 모두가 말인줄 알아. 이 고약스런 인간이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공자 성현을 무지막지한 욕설로 홀대하다니, 너와 내가 다같이 유림을 섬기고 공자 성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보은의 인정을 그 따위 몰상식한 언행으로 능욕을 보이는건가?"
"그래, 좋다. 심산이 죽을때까지라도 숭배한다는 공자가 제 후손들에게 도덕 윤리를 가장하여 음흉하기 짝이 없는 도적질만 가르친 것이지 무엇인가?"
"어허, 이것이 그래도 뉘우치지 못하고서."
"내가 뉘우칠 것이 무엇인가?"
"어허, 저 인간같지도 않은 것이 성현을 봉변하고서도, 에잇 금수만도 못한 인간."
"우리 민족에게 공자보다 훨씬 훌륭한 성현이 없었나? 우리에게 따로이 언어가 없었나? 우리 문자도 일찍이 있었건만, 자기 나라 전통을 무시하고 성현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남의 전통을 제것인양 아끼고 보살피면서 정작 제것은 등한시 해온 결과가 무엇이냐? 제나라까지 강도질 당해 백성은 노예가 되고, 지식층은 중국까지 쫓겨와서 망국민된 탄식만 토로했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뉘우치지 못하는 네같이 어리석은 자들이 한국에 자손으로 있어, 독립은 고사하고 유학, 성현, 공자에 매달려 도무지 제정신을 못차리니, 어이구 분해라 원통해라, 어찌하여 우리 화랑도정신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 설전에 조용히 있던 이회영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두 분 동지 이제 그만하시오. 심산이 하는 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단재 하는 말도 모두 옳은 말이오. 중국에 정말 도적떼가 우굴대는 천지는 사실 아니오. 또한 그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르오. 그러나 어떻게 하겠소. 우리가 민족해방운동의 큰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혈맹으로 뭉친 동지들인데 이깟 사소한 일로 싸워서야 되겠소? 서로 해로운 일이니 그만 화해하시오. 그래도 오늘 단재 말중에 많은 것을 얻었소. 고맙소."
이회영의 중재로 이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 길을 가는 단재와 심산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죽음앞에서도 친일과 비타협::
여순감옥에 갇힌 단재는 나날이 병이 깊어가 주위의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해 친지들이 단재의 일가뻘 되는 한 부호를 설득하여 그의 보증아래 단재를 가출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있던 단재는 이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 보증인이 당시 친일파로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위탁하는 것은 이제까지 지켜온 정신을 꺾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죽어서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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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가 여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단재의 유해는 천안, 조치원, 청주를 거쳐 신백우의 집에 도착하였다.
평소 단재는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해를 고국땅으로 가져 가야 한다고 해서 고향땅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단재의 유해가 돌아오긴 하였지만 묘소허가도 받을 수가 없어서 난감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단재의 친척중에 면장이 있어 그의 묵인아래 암장을 할 수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겨 이를 단재의 묘소앞에 세울 수 있었다. 후에 일제가 이를 알고 당시 면장을 파면시키기도 하였다.
출처:단제기념사업회 http://cafe.naver.com/danjae.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