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1월 16일,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를 점령하였고, 폴란드 총독부를 설
했다. 1939년 10월 4일에 게슈타포가 바르샤바에 돌입하여, 유대인 거주구역도 독일의 지배하에 놓였다.
1940년 3월, 바르샤바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장티푸스가 유행하자 독일 점령당국은 유대인 평의회에
명령하여 유대인 거주구역 주위에 벽돌벽을 건설하여 격리 하도록 했으며, 게토 지역은 높이 3m, 길이
18㎞의 벽돌담으로 둘러 쌓였다.
1940년 10월 2일 게토 건설을 정식으로 명령했다. 게토로 지정된 지역은 본래 유대인 거주지역의 2/3
정도에 해당했다.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Ghetto)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 설치됐다. 바르샤바 인구의 30%에 해당하던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3,399㎡. 도시의
총 면적의 2.4%에 불과한 작은 구역에 밀집 수용되었다.
1941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설치된 게토의 담장
게토(ghetto) 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게토의 저변에 있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유럽에서 무척 오래된 현상이다. 가톨릭 교회도
그랬지만, 종교개혁 주도자인 루터도 유대인을 극도로 싫어했다. 샤일록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자로
묘사한 ‘베니스의 상인’에서 알 수 있듯이 셰익스피어도 유대인을 미워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세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 당국은 유대인이면 반드시 ‘다윗의 별’ 표를 가슴에 붙이고 다니라고
규정했고 유대인을 게토라는 비좁은 구역에 몰아넣어 일반인과 떼어놓았다.
독일만 유별나게 유대인을 못살게 구는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유대인을
억누르기로 이름났던 프랑스나 러시아에 비하면 독일은 유대인이 그나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1912년 독일 총선에서 반유대주의 정당이 기록한 득표율은 겨우 0.6%였다.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인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통치자가 된 뒤 기류가 확연히 바뀌고 유대인 차별이
공식 정책이 되었지만, 같은 시기에 미국의 흑인 차별과 독일의 유대인 차별에 질적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게토는 역사적으로는 1179년 제3회 라테라노공회에서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교도와의 교류를 금지한
데서 발단되었고 1280년 모로코에서 회교도들이 유대인을 분리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게토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00년대 중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별도의 지역을 정하여 유대인들을 그곳에서만 거주하도록 했다.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게토가 설치되었고, 1555년 로마에 게토가
설치된 후 일반화되었다. 독일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베네치아의 운하에 있는 작은 섬에서의 정착
허가를 얻었는데 새로 세워진 주물공장이 있는 지역이어서 ‘새 주물공장’이란 뜻의 이태리어 게토
누오보(Ghetto Nuovo)로 불리었다.
그 후 터키의 유대인들이 인근 지역인 ‘구 주물공장’이라는 뜻의 게토 베키오(Ghetto Vecchio)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게토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독일은 바르샤바에 이어 폴란드의 다른 도시 크라코프, 우치 등에도 케토를 설치하였고 소련 침공 후에는
발트해 3국과 소련 등지에도 게토를 설치하여 총 1,000 이상의 게토를 설치해 유대인을 격리조치 하였다.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식사량도 독일인
평균(2,400㎉)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쳐 결국 1942년 7월까지 기아와 질병 등으로 12만 명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나치에 의해 설치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죽음의 도살장이었다면,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우치에 설치된 게토에는 20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되었고 이 중 45,000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어
나갔다.
폴란드 우치(Ludz)시의 게토 모습
폴란드 우치(Ludz)시의 게토 모습
우치시 게토, 쓰레기더미 밑의 땅을 파서 먹을 것을 뒤지고 있는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바르샤바 게토에 형성된 시장
한 남성이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기아로 숨진 유대인들의 시체를 옮기고 있다
사실상 게토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기 전 강제 이주시킨 유대인
집단촌이다.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게 학살 수용소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42년 7월 22일이었다. 그 해 9월 12일까지 약 30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송되어 나간 유대인들이 말살 당하고 있다는 정황은 점차 수용소 내부에 알려졌고, 공포에 질린
유대인들은 대응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소수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전투 조직(Żydowska
Organizacja Bojowa)을 조직하여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1943년 1월 9일, 하인리히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 1900-1945)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유대인들을 이송할 것을 명령했고, 1월 18일 두 번째 강제 이주가 시도되자 최초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비밀리에 무기를 확보하며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유대인들은 SS대원을 20명이나 살해했지만 그
대가로 1,000여명의 유대인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송 작전은 일시 중지되었다.
힘러는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를 주도한 최고 책임자였다. 나치 강제수용소와 학살대인
특수작전집단을 창설한 사람이자, 최종 지휘 책임자로서, 600만에서 12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산업적 규모로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연합군에 의해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자
자살하였다.
게토 봉기 후 항복하는 유대인들
1943년 4월 18일, 무력으로 빈민가를 제압하고 이송 작전을 개시한다는 정보가 전해졋다. 즉시
게토의 주민들에게 경고가 알려지고, 벙커에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4월 19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SS대원들이 다시 들이닥쳤다. 권총, 수류탄, 화염병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유대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 사이 죽어간 유대인은 13,000명을 헤아렸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인 슈트로프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체포되거나 학살된 유대인은 56,065명. 바르샤바 게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저녁 8시
15분에 모두 상황은 종료됐다."
Jürgen Stroop (center, in a field cap) with his men in the burning
of Warsaw Ghetto, 1943
Jürgen Stroop (center, in a field cap) with his men in the burning
of Warsaw Ghetto,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