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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청주] 설마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에레 38, 4 - 6. 8 - 10
† 제2독서 : 히브 12, 1 - 4
† 복음 : 루카 12, 49 - 53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성령의 불이 타올라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알고 찬미할 수 있도록 청합시다. 또한 이 세상에 정의의
불이 타올라 온갖 불의와 잘못이 그 불에 타 없어지도록 기도합시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올라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 남부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하기 전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밝히신다. 그러나 유다 왕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에 이끌려 예언자를 박해하고, 임금은 그들의
모략에 빠진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자기 동족들에게 예수님을 향하여 달릴 길을 끝까지
달려가자고 권고한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죄인들의 적대 행위를 견디시고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신 분이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인간적인 욕심에 얽매인 적절한 타협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된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불의한 타협의 끈을 태우고자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불’은 『성경』에서
심판을 뜻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불이 훨훨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고자 하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의
경우에는 불이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루카 3,16; 사도 2,3.19 참조).
결국 세상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를 없애 버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세례란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란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사업이 이 세상에 참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인간은 본디 혈연과 학연, 지연
등 수많은 관계의 사슬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관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관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태아가 탯줄 없이는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 가운데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잡혀야 인간 본연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하면 익숙한 만큼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얻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되새기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누리려면 무엇을 결단해야 하겠는지 묵상해 봅시다.
- 매일 미사 -
◈ [청주] 설마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 12,49-53
설마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크고 넓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라고 주님의 참 평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
정말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학교에 가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반대하셨습니다. ‘학비도
안대줄 것이고 너와 나는 이제 끝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니와의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친구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신부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에게
효도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님의 갈등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구나 하는 생각에 저의 결심을 굳히고 더
확고하게 ‘신학교에 간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허락하시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부모님과 소원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이때의 갈등과 분열은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한
진통이었습니다. ‘성장통’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제가 미국
교포사목을 하는 동안 한 통의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신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미안함을 표현하셨습니다. 지금은 매일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멀리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원만합니다.
등을 지거나 원수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란트에 따른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것을 더 강하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왜 너는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느냐? 왜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느냐? 나의 뜻을 존중해
주지 않느냐?” 하고 말하며 자기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것에
실망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며 실망과 상처를 지니고 결국에는 “네 마음대로
해봐라. 어디 잘 되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품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사자와 황소의 결혼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사자와
황소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데 하루는 황소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는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 하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소가 여물로, 풀로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화가 났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였는데 그
기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소도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준비한 것인데,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왜 안
먹느냐? 정성을 기울이고 사랑을 쏟은 만큼 화가 났습니다.
다음날은 사자가 준비하였습니다. 고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도
쇠고기로 준비하였습니다. 결국 황소와 사자는 서로를 위하여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으면서도 남은 것은 기쁨과 보람이 아니라
‘화’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말로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깨어서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으면 결국은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서로
맞서게 되는 이유는 잘못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주면 더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풍요로워집니다. 부유해 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사실
세상은 더 많은 소유와 지배,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우리를
유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을
선택해야 하는 당연함 속에서도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선언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와 상황,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집회서 15장 15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우리는 분명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눈앞에 보이는 축복이 다인 것 같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면 그 축복이 저주요, 오히려 지금의 저주가
축복이요, 영원한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게 되면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가
삽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있고 싶다고 해서 탯줄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혈육으로 된 핏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새 생명의 관계를 단호히 선택해야만
합니다. 혹 인륜의 도리에 소홀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주님을
먼저 택하면 그 다음은 주님의 풍요로 채워지게 됩니다. 부모 형제,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혈육을 먼저 택하게
되면 하느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7,13-1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과
연결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요구와 대결을 하며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택하면 나머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5장 13절에서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옛말에 “너,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 불의와의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오는 분열은
참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분열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분명한 것은 하느님을
선택하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의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그때에 환전상들의
가판대를 둘러엎으시고 누가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느냐며 화를 내셨습니다. 사랑을 강조하신 분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행동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진 거짓 평화와 맞섬으로써 분열을 가져 왔지만
그 분열은 멸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전제로 한
분열이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특별히
자녀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면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역작용이 날까 두려워하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급급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위한 값진 보물을
발견하였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주기위한 갈등, 분열은 감수해야
합니다.
어제는 감사한 날이었습니다. 한 형제님의 팔순을 맞이하여 본인의
뜻에 따라 가장 귀한 선물을 주문하였는데 가족 모두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8명의 가족이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쉬고 있는 자녀도 있었습니다. 미사봉헌을 마친 후 한 자녀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오늘 강론은 제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소망한 형제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하늘을 차지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비온 뒤에 땅바닥이 단단해 지는 것처럼 어떤 풍파가 있은 후에
일이 더 단단하게 여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사안일, 허위나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선택하는데
주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 평화를 위한 분열을 감당하는 가운데 행복한
한 주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오로지 주님만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스페인의 멜리데(Melide)라는 작은 성당에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십자가가 하나 있습니다. 글쎄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오른팔이 못에서 빠진 채 밑으로 내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옛날에 이 십자가 아래에서 어떤 형제님이 진심으로 뉘우친 뒤,
고해소에 들어가 신부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눈물 흘리며 고백했지요.
사제는 그에게 사죄경을 외워주면서 다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했고 또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철저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완벽하겠습니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결심을 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똑같은 죄를 짓고 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이겠지요. 이 형제님 역시 결국 죄에 다시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청했지요.
지난번과 똑같은 죄를 고백하는 이 형제님의 죄 고백을 들은 신부님은
순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하시지요. 바로 그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당신
오른손을 못에서 빼내서 이 사람에게 직접 십자가를 그어주시면서
(사죄경을 외울 때 십자가를 긋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은 그대가 아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십자가를
통해 피를 흘리신 주님뿐이신데, 우리들은 내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떻게든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할수록 자신들이 더욱 더 초라해지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고 분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과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서로
갈라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과 자신만의 생각을
내세우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로 걸어가는 어리석은 행동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삶만이 주님의 반대편이 아닌 주님과 같은
편이 되어 참 행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제2독서에 말하듯이, 우리가 꾸준히 달려야 할 길입니다.
과학은 정리된 지식이다. 지혜는 정리된 인생이다(임마누엘 칸트).
스페인의 멜리데 성당의 십자가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교구
상현동성당 십자가.
다섯 페이지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 어느 날, 그는 파리에서 허름한 집을
찾아낸다. 주변에는 철길과 숲이 있었으며 집 앞에는 잔잔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졸라는 이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24년 동안 살았다.
그가 친한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평온하면서도 규칙적인 일상이
잘 표현돼 있다.
“아침 일곱 시쯤 일어나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지. 머릿속을
선명하게 하는 데 목욕만 한 것이 없다네. 아침 식사를 하고, 강변을
15분 정도 산책한 다음 책상에 앉지. 아홉 시부터 오후 한 시까지
글을 쓴다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말이지.”
졸라는 네 시간 동안 꼬박꼬박 다섯 페이지를 썼다. 하루도 빼놓지
않았기에 무시할 수 없는 양이었다. 이것은 평생을 지킨 맹세나
다름없었다.
졸라의 작업실 벽난로 위에는 아래 문장이 새겨져 있다.
“Nulla dies sine linea(한 줄도 쓰지 않는 하루는 없다).”
(‘Ambler’ 중에서)
다섯 페이지. 작가들에게 어떻게 보면 적은 양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 양이 매일매일 계속되어 쌓였을 때에는 그 어떤 사람도 무시하지
못할 양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만들지요. 우리 역시 그 작은 한 걸음을 무시하지
말고, 내디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참된 평화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복음묵상
'평화를 구하기 전에 먼저 참된 평화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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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 한다.
말씀의 의미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평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평화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과의
싸움은 필연적이라는 말씀이다.
그저 바라는 마음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평화라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일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평화도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이라는
자기투신이 있었기에 얻어진 열매이다.
악의 세력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원할 리가 없다.
복음적 평화를 위한 그 어떤 투신도 허락된 관계나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에서 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뻐하며 받아들일 리는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는 가족도 있을 수 있고, 친구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랑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무관심과 적대감 속에서 평화를 위한 투신은 자연스럽게 많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확실한 복음적 신념이 없다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참된 평화를 위해 너희가
지불해야 할 아픔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라고 하신다.
심리학 용어 중, 탯줄 끊기
(The cutting of a person’s psychological umbilical cord)라는
말이 있다. 독립된 인격체로서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엄마로부터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평생을 긍정적 탯줄이 아닌 부정적
탯줄에 묶여 산다. 부모와 가족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철저하게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필요하며, 그 힘이 있을 때 올바로
함께 할 수 있음을 말함이다.
사랑을 하려면 제대로 된 사랑을 해야 한다. 일그러지고 뒤틀린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항상 삶의 기준이 되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러기에 어떤 오해와 반목의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가장 좋은 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옳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 이것 역시
우리의 신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좋은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를
식별한 다음에 사용해야 하는 표현이다. 때로는 아픔을 감수하면서라도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길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연중 제20주일
2013년 다해 8월18일
어릴 때, 아버님께서 바둑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둑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바둑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알려 주기도
합니다. ‘내 돌을 먼저 살리고, 남의 돌을 잡아야 한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놓친다.’라는 바둑 격언이 있습니다. 바둑은
초석, 중반, 전투, 끝내기의 과정을 거칩니다. 결국 바둑의 승패는
집을 많이 차지한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바둑을 둘 때, 분위기가 좋으면 결코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도 어느 정도 들어줍니다. 그래도 결국 바둑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100집을 이겨도, 반집을 이겨도 똑 같은 1승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집을 얻기 위해서 자칫 상대방의 싸움에 말려들면
한 번의 실수로 다이긴 승리를 놓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둑이
여의치 않을 때, 이대로 가다가는 지는 것이 분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승부수’를 던지게 됩니다. 어차피 한집으로 지나,
100집으로 지나, 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무모할지라도 상대방의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패감이 부족해도 과감하게 패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둑의
묘미입니다. 그렇게 바둑을 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
바둑을 역전시키는 것 또한 짜릿한 기쁨입니다.
그런 전략을 아주 잘 쓰는 나라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일까요? 예
‘북한’입니다. 북한은 이것을 벼랑 끝 전술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북한,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는 북한,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대북 경제 제제’가 있습니다. 북한은 뒤로 물러 설 곳도,
앞으로 나갈 곳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 쓰는 북한의 카드는
‘핵실험’이라는 초강수입니다. 그러면 미국과 강대국들은 북한을
달래려고 합니다. 그래서 6자 회담도 만들고, 남한으로 하여금
북한을 도와주도록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포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선을
향해서 함께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결코 쉽게
끝날 싸움도 아닙니다. 기다림과 타협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반전’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승부수’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너무 힘이 없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대사제로
이루어진 기존의 제도권은 너무 막강합니다. 로마는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에 대해서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변화는, 진실은 결코 숫자의 싸움이
아닙니다. 권력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열정에 있습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투지와 용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4.19 혁명, 광주 민주화 항쟁,
6.10 민주화 항쟁을 통해서 우리는 거대한 제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권, 복지, 자유 그리고 풍요는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람 앞의 촛불일지라도 끊임없이
타오르는 자유의 촛불, 희망의 촛불, 민주의 촛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들은 강물에 떠밀려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웃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와 불신이 가득한 어둠의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인생의 반전은 무엇인지, 내 인생의 승부수는
무엇인지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일부터 신부님들과 며칠 휴가를 떠납니다. 묵상글은 이제 서울에
가서 올릴 것 같습니다. 주님 사랑안에 건강한 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늘마음과 세상마음은 한 집에 있어도
2013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기름과 물이 어울리지 못하고 불과 물이 서로 반대 입장입니다.
이처럼 세상엔 양 끝이 있고 그 끝은 서로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물질세계의 물질들은 이렇게 영 다르지만 제 구실들은 잘 합니다.
그러나 같은 모습의 사람들이지만 실은 겉과 속이 많이 다르거든요.
의견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주장이 달라 언성이 높아지드라고요.
하늘마음과 세상마음은 한 집에 살아도 이렇게 서로 딴 세상을 사니까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3)”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자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2013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자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루카 12, 49-53)
[벼락을 맞았습니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저자 치과의사인
글로리아는 어느 날 조카와 함께 대학에서 물웅덩이를 넘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조카는 즉사하고 글로리아는 의사들이
이미 포기해서 병실밖에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영혼을 걱정하고 회개하기 보다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놓은 다이야반지를 누가 빼가지나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그는 건강할 때 나름대로 존경받고 열심한 신앙인으로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거의 빈사상태에서 자신의 과거의 삶을
하느님 은총 안에서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도 죄인인지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소년기에 낙태를 하고, 또 낙태하도록 타인에게 권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통감하게 됩니다. 또 기부할
때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알게 됩니다. 끊임없이 남을 험담하거나 업신여기는 자신의 교만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다시 살아나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함을 강연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글로리아가 자신의 세계에 빠져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지만 그는 빈사상태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아보고 성령의 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온 세상에 불을
지르며 다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살아계시고, 많은
사람들이 위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정 성령의 불로 타올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레미야가 동굴에 갇혀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런 묵상을 하였습니다. 나 역시도, 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등경위에 얹어놓고 밝게 밝히기 보다는
동굴 속 깊이 놓고 가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로리아라는 자매님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보다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뜻과 편리주의를
따라 살아가면서 자신의 영혼을 아니 자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동굴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우리 영혼에 불을 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의 교회는 너무나도 무기력합니다. 세속적인 법들이 하느님의
법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동성혼인법이나 낙태법이나 이러한 것들이
공공연히 얘기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류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머지않아 묵시록에서 말하는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는다 해도 이 또한 다 과학적의고 의학적인
것이지 성서의 말씀과는 무관하다고 교회가 말할지도 모릅니다.
종교일치 운동을 통해서 서로를 존중하고 미워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성사들을
변질시키거나 포기하면서까지 종교일치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비오 성인을 통해서 고해성사의
중요성과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파우스티나 성녀를 통해서 하느님 자비심의 기도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영혼들이 악으로 달려가고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간단한
기도문 까지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박해도 받고 때로는 가정에
분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세상에 바보가 되어야하고 때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볼 때, 많은 성인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프란치스꼬 성인이 그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랬고, 비오 성인이 그런 박해를 받았습니다. 멀리 다른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나 동료들에게 그런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정말 사람이 죽어 연옥에 갔다 오고, 하늘에 오르시어
편히 계셔야할 성모님께서 세상에 자주 발현하시며 인류에게
회개하라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의
때가 어느 때인지 알고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불로 타오르기를
간절히 청해야할 것입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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