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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432 그리스도인의 가정(마가복음10장1-12절)
성경말씀은 마가복음 10장 1절에서 12절까지 봉독합니다.
[마가복음 10장]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인내심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더니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조급한 민족으로 그렇게 국민성이 점점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러다보니까 이혼율이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아마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나라별로 민족단위로 하면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이혼율이 높고 결손가정이 참 많다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이혼이 빨리 이루어지는가..
그런데 옛날에는 대개 여자들이 잘못해가지고 이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옛날에 여자 잘못은 애기를 못 낳는 거야.
옛날에는 애기를 못 낳아가지고 그런 경우 혹 있지만, 애기를 못 낳아도 세컨드가 들어왔으면 들어왔지 이혼까지 가는 일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은 애기 못 낳는 것은 별로 이혼 사유가 안 되는 것 같아요.
낳으면 좋고 안 낳으면 더 좋고..
사람들이 후대가 끊어지는 것을 별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어찌해서 오늘날 이혼이 쉽게 다반사로 이루어지느냐?
그것은 아들은 아들대로 거의 왕자병 환자들이고, 딸들은 전부 하나나 둘 길러가지고 거의 공주병 환자처럼 그렇게 길러지기 때문에 참지 못해요.
조금 기분 나쁘고 조금 감정 상하면 거의 참지 못하고 너무 쉽게 이혼을 하는 거죠.
저 가까운 주변을 둘러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제가 잘 아는 사람 하나는 신혼여행 갔다오는 길에 그냥 싸워가지고 바로 이혼 했어요. 그냥..
그런데 이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2천년 전 예수님 시대 그런 때에도 이런 이혼이 더러 있었는데, 이혼이라기보다도 그냥 아내를 내버리는 거야. 그냥..
아내를 내어 쫓아버리는 이런 남자들의 만행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가지고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시험해볼려고 아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겁니다.
[마가복음 10장]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몰라서 묻는 게 아니고 ‘어떻게 대답하는가 어디 보자’ 이런 심보를 가지고 묻는 거죠.
..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만약에 ‘내어버리는 것이 옳다’ 하면 ‘당신의 사랑은 어디 간거요?’ 할 것이고,
‘내어버리면 안 된다’ 하면 ‘모세는 내어버리라 했는데요..’ 하고
이쪽으로도 안 되고 저쪽으로도 안 되는, 이른바 양도논법(兩刀論法)이라해서 양쪽으로 칼을 들이대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게..
항상 그랬죠. 질문이..
예수님께서 대답을 바로 하지 않죠?
대답이 아니고 반문하죠.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4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이 법이 있기는 있죠.
모세가 신명기 24장에 보면 ‘아내를 맞이했는데 부끄러운 일이 보이거든 이혼증서를 써줘서 내 보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것을 아주 잘못해서 남자들이 못되게 그렇게 해석할 때는 이혼증서만 써주면 아무든지 얼마든지 내보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문제는 부끄러운 일이 발견된다 할 때 그 부끄러운 일이 뭐냐?
나중에는 음식을 너무 짜게 만들었다.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내보내는 구실로 삼아서 아내를 쫓아내는 거야.
아내가 마음에 안든다고 내보내는 게 아니라, 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니까 쫓아내는 거야.
이런 아주 나쁜 심리가 있었는데 이 법의 정신이라는 것은 남자들이 아내 내어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들이 못되고 못되어가지고 아내를 내어버릴 때 최소한 그 여자가 다른 사람과 재혼할 수 있도록 권한을 보장해주는 ‘이혼이 확실히 되었다.’ 하는 것이라도 해주라.
이것이 법 정신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은 남자들에게 아무 때나 기분내키는 대로 여자를 내버릴 수 있는 권한을 권리를 준 게 아니라,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에 재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도록 그런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해 줄려고 하는 그런 것이 법 정신이지, 내어버릴 수 있다. 이게 정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나 성경을 볼 때, 아니면 성경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가 걸어가는 실정법이라도 법 정신이 있어요. 법 정신..
법 철학도 있고 법 정신이 있는데, 그 법 철학과 법 정신을 잘 생각해봐야 돼요.
성경에 있는 이런 법들도 율법들도 항상 우리가 율법이라고 하면 반발심을 가지고 맞설려고 하는 육신의 소욕이라는 게 있다는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딱 안 지킬려고 하는, 하던 것도 법이라면 하기 싫어하는 그런 기질이 타락한 본성속에 있는데, 그 법 정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법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고, 편하게 하는 것이고, 능률적으로 하는 것이고, 질서가 있게 하는 것이고, 복되게 하는 것이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건전하게 하는 것이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예요.
자세히 보면 그 법이 참 감사한 거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뭐뭐 하라 그러면 못하겠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더 하고 싶은 그런 타락한 본성의 기질이 있는데,
여기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것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고, 마태복음에는 이런 말이 없는데, 마가복음에는 왜 이런 말이 나오느냐 하면 로마에서는 로마판도에서는 여자들이 아주 남자들도 문란하지만, 여자들도 꽤 문란하고 또 그 여자들이 문란한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그런 사회의 전통이 없고, 유럽의 알프스 산맥 이하 아니면 저쪽에 스페인 프랑스 사이에 피레네 산맥 이하 그리스까지 남구라파 쪽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제멋대로야.
그 세계는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기본이고 여자들은 더 심해요.
여자들이 바람피우지 않으면 바람피울 남자 세상에 어디 있어요?
지 혼자 무슨 바람이 나겠어요?
여자들이 더 문란해져가지고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로마세계에서는 여자들도 꽤 못됐어요.
그래서 옛날 영화라든지 가끔 보면 여자들이 상당히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절에,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마태복음에는 없어요.
유대인 세계에서 간음하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 판이니까 여자들이 간음하는 것은 거의 없는 얘긴데, 로마 그리스 세계는 신들도 문란하니까 그 신들을 따라서 그런 문란한 신들을 존경하니까 사람은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더 첨가된 것 같죠?
그래서 버림받은 여인에게 재혼의 길을 열어주는 그런 것이 법 정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이 바리새인들이 그런 것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려고 질문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오늘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 내지는 청년들이 가끔 오해하는 게 9절이죠.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이 ‘짝지어 주신다’는 말을 마치 창세전에 예정론적으로 짝지어 주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실수를 하는 거예요.
제가 2005년도에 어느 꽤 큰 교회에 제2청년회라고 30살 넘는 청년회야.
집회를 갔는데 거기에서 제가 그 청년들을 보니까 전부 결혼을 안 한 사람들이야.
결혼하면 그 청년회가 아니니까..
2청년회는 30살 이상인데 하한선만 30살이고 그 상한선이 없어요.
그러니까 꽤 연세가 드신 어른들이 있는 거야.
연세드신 총각 처녀들이 있어서 결혼을 안하고 못하고 이렇게 왔는데..
그래서 제가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이 있어서 얘기를 했죠.
결혼 안하고 자꾸 너무 눈이 높아가지고 가리고 하다가 안 하는 게 아니고 나중에 못하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 같아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예정이 아니다.
여기에서 짝지어 준다는 것은 결혼식하는 당일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배우자로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 하고 고백을 공식적으로 고백을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례자가 그 자리에서 짝지어주는 것이지, 창세전부터 예정론적으로 짝지어주는 것이 아니다. 했더니 그 교회가 충격을 받은 거야.
온 청년들이 창세 이후로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는 거야. 처음 하니까..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주고 다 창세전에 예정론적으로 짝지어 주셨다...
그 때 저를 초청했던 청년회 회장이 어제 에스라 하우스에 방문을 했어요.
그런데 그 때 벌써 서른댓살 먹었을텐데, 아직도 결혼 안한건지 못한건지..
그리고 그 때 달맞이 언덕이라는 식당에 갔어요. 달맞이 언덕이 보통 언덕이 아녜요.
굉장히 고급 음식점이었는데, 나이가 좀 든 처녀가 자기가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갔는데, 내 평생에 그렇게 고급음식상을 잘 못받아본 것 같아요.
장가 갈 때도 그만큼 못받았는데..
그렇게 음식상을 차려놓고는 그 자매가 그래요.
자기는 틀림없이 고무신도 짝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한 짝이 있을 것이다.
그 짝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자기에게 접근해오는 꽤 괜찮은 청년들을 마음놓고 발로 찼다는 거야.
예정되었으면 발로 차도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참 믿음 좋죠.
마음놓고 발로 찼는데 하나도 안 돌아왔다는 거예요.
한번 차면 그길로 다시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니까 아무도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 하도 궁금해서 어제 물어봤어요. 어제 저녁에..
그분 결혼 했느냐 하니까 아직도 못하고 벌써 그 때 37살이었으니까 4년 지났으니까 마흔이 넘었겠죠.
결혼도 못하고 저 어디 선교사로 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청년들 제가 자주하는 얘긴데 절대로 창세전에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주례하는 그날 그 자리에서 하나님 이름으로 짝지어 주는 거예요.
책임도 배우자를 찬 것도 본인 책임이고 받아들이는 것도 본인 책임이야.
그리고 결혼 생활 잘못되는 것도 하나님 책임이 아닙니다.
전부 본인 책임이야.
그래서 선택의 자유가 우리에게 있고 책임도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은 곧 책임이라는 거예요. 책임..
그것을 잘 몰라서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정된 짝이 있을 것이다. 아주 숙명론적으로..
여러분 숙명론은 이단입니다. 이단..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예정이라는 것은 구원의 대상자만 예정되었다 하는 것이지, 우리 행동 거지라든지 이런 것은 거의 예정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특별한 몇 가지만 예정하신 뜻대로 경륜을 따라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지, 오늘 아침에 넥타이를 내가 파란 것을 맬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예정이 아닙니다.
내 멋대로예요.
신을 고무신을 신을 것인가 구두를 신을 것인가 전부 예정이 아니고 우리 선택이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청년들 결혼 안 한 분들은 예정된 짝이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있지 말고, 그리고 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돼요.
찾아봐야 돼요.
그리고 너무 눈을 높이지 말고,
제가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갈수록 점점점점 결혼을 안하거나 못하거나 늦게 하거나 했다가도 빨리 이혼하거나 이런 식으로 가면 교회도 안 되고 민족도 안 돼.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한국이 최하위라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혼율도 그렇게 높아..
그래서 이혼율이 높은 이야기를 할려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편하게 아무 어려움도 없이 너무 귀하게 이렇게 길렀기 때문에 조금만 감정이 상하면 못 견디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자매가 여럿이 있어서 더불어 살아가고 아웅다웅 해보고 이런 감정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걸핏하면 이혼을 하는 거야.
우리 어머니들대부터 우리 할머니는 제가 못 봤으니까, 그 시절만 해도 힘들고 어렵고 기분나쁘다 이런 것 때문에 이혼하는 것은 상상이 안되고 말도 안 됩니다.
하루 종일 구박당하고..
요즈음 시어머니는 옛날 시어머니에 비해서 천사죠. 날개만 없다뿐이지..
옛날 시어머니는 그야말로 며느리를 그렇게 못살게 하고..
그래도 이혼같은 것은 상상도 안 해봤어요.
그래서 우리 딸들을 너무 지금 얼러서 너무 그렇게 참을성 없이 기르는 것이 아니냐..
아들도 마찬가지..
그래서 가정에서 아이들 기를 때 하나나 둘인 나머지 너무 귀하게만 기르게 되면 그 인생이 앞으로 힘들어요.
그리고 여럿이 함께 크면 사회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제가 요즈음은 조금 뜸해졌는데, 라디오 방송에 매일 나갈 때에는 가정문제를 가지고 전화로 상담해오는 분들이 꽤 많았어요.
양편 말을 다 들어보기는 어려운데, 어쩌다 양편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세상이..
옛날에는 남자들이 못됐어요.
옛날에는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외도를 하고 했는데, 요즈음은 양쪽 말을 다 들어보게 되면 대개 여자들이 더 못됐어요.
우리 샤론교회 말고 딴데..
여자들이 진짜 못됐어요.
그렇게 하고는 내가 구시대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여자들이 그렇게 나오면 남자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딱 못살게 충분히 못살게 하더라고.. 요즈음 여자들이..
그래서 저도 딸을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되죠.
우리 교회에 딸들이 많죠..
그 딸들 단속을 잘 해야 되겠다..
그리고 죽어도 같이 못살겠다. 이런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제가 이렇게 좀 이야기를 해보니까 남자도 여자를 너무 모르고, 여자도 남자를 너무 모르고..
그래서 정말 결혼할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요.
나이를 상당히 먹었는데도 그런 거야.
그래서 도시에서 대형 교회에서 ‘결혼 예비자 학교’ 이런 것을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은 내가 보니까 해야 되겠더라고..
가끔 제가 이런 얘기를 하죠?
악기를 우리 피아노가 고급 피아노인데, 내가 치면 상당히 소음이죠.
그런데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치면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악기예요.
잘만 연주하면 이게 보통 아름다운 소리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름다운 소리뿐 아니라 요리가 나오고 하여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거야.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고..
또 아내가 남편을 잘 연주해봐요.
그것은 굉장하게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인격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워야 돼요.
너무 안 배우고 그렇게 결혼해가지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심지어 목회자도 마찬가지예요.
목회자가 성도들의 마음을 연주하는 것을 안 배우면 목회자가 성도에게 상처를 입혀요.
그리고 성도가 목회자에게 상처를 입혀가지고 결별하는 거야.
지난 회기에 미국에서 한 목사님이 시카고 쪽에서 오셨는데, 시카고에 대형교회가 20개가 목회자가 공석이라는 거예요.
담임 목사가..
어째서 공석이냐 여쭤봤더니 목회자가 성도에게 상처를 입히고 성도가 목회자의 가슴에 상처를 입혀서 다 상처뿐인거야.
교회들이 비어 있다는 거야.
본인도 목회하다가 나이가 우리 또래니까 은퇴 준비할만 한데도 교회에서 너무 상처를 크게 입고, 상처를 입기만 한 것이 아니고 상처를 줬겠죠.
그래서 목회를 다 접을려고..
그런데 놀랍게도 목회학 박사야..
그래서 목회 자체를 접을려고 그렇게 했는데, CTS를 통해서 ‘성경의 힘’을 보면서 얼핏 지나가면서 ‘신학은 사랑학이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여가지고 도대체 저분에게 가봐야 되겠다 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고, 우리 인생도 사랑이고 하나님도 사랑이시다. 그렇게 사랑의 신학이라는 그런 강의를 듣고 나더니 많이 울고 그 다음 회기에 그 교회 권사님을 보냈어요.
시카고에서 다른 일로 온 게 아니고 성경 강좌 들으러 온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힘을 다 가다듬어서 딱 교회를 하나 개척을 해서 정말 사랑의 목회 사랑의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
여러분 우리가 설교를 하든지 교육을 하든지 간증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우리 모든 노력들이 교회 안에서 첫째는 믿음이 증진되게 해야 돼요.
믿음이 증진되게 하지 않는 설교는 빵점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어요.
둘째 소망이 증진되게.. 소망이 점점 더 분명하게 해야 돼요.
세 번째는 사랑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고 더 커지게..
그러니까 믿음이 증진되고 소망이 증진되고 사랑이 증진되게 하지 않는 설교와 사역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성경을 가르치거나 배우거나 할 때에 교회에서 하는 모든 우리의 활동이 정말 이것이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증진되게 하는 거냐?
간단하잖아요. 그러면 좋은 거야.
그게 안 되면 다 쓸데없는 겁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증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목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녜요.
결국은 상처뿐인 영광이야.
상처만 주고 받고 헤어집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가정을, 가정도 하나의 작은 교회니까, 가정이 천국을 닮은 그런 작은 교회인데, 그 가정에서 하는 모든 행동 모든 말 모든 일들이 신뢰, 믿음 인격적 신뢰 즉 믿음이 증진되게 하는 거냐?
소망이 점점 더 밝아지게 하는 거냐?
그리고 사랑이 점점 더 깊어져야 돼요.
여러분 부부 생활 속에 권태기가 오도록 했다는 것은 잘못 산거야.
권태기가 왔다, 권태기다 이렇게 된다는 것은 가정 생활 잘못해 온 거야.
인생이 너무 짧아서 권태기가 온다는 것은 잘못됐어.
우리가 너무 사랑할줄 모르고 또 믿어줄 줄 모르고 서로 바라고 기대할줄 모르고 이렇게 해서 말과 행동이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증진되지 않게 살아버리면 우리 인생은 실패라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새로워지기 틀렸다 하면, 절망이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거예요.
절망하자마자 바로 죽음을 향해 가는 거예요.
키에르 케고르라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희망없음 자체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교회나 가정이 다시 말씀드리는데, 점점 더 믿음이 깊어지게 인격적 신뢰가 더 두터워지게, 우리의 행동 우리의 말에서..
그 다음에 우리의 소망이 점점 더 커지게 더 밝아지게..
그리고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해야 정상이죠.
13절입니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젊은이이고 관원’이라고 하죠.
공직에서 상당한 지위에 오른 젊은이예요.
그리고 이 사람이 가치추구를 보세요.
가치추구를 하는 게 ‘내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출세하겠습니까?’ 이런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더 성공하겠습니까?’ 이런 것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성공도 할만큼 했고 출세도 할만큼 했고 가진 것도 많아요.
그러니까 이런 정도 같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각으로 어느 모로 보나 복받은 사람이예요.
어느 모로 보거나 정말 복받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각이었는데,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이 말은 좀 묘미가 있는 말인데,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님이여’ 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 속에는 내가 선하기는 선한데,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선한 것을 네가 알기는 아느냐?
그런 뜻도 들어있는 거예요.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죠. 그렇죠?
어려서부터 이런 것을 다 지켰다면 가정도 대단한 가정이야.
그리고 복도 유산이었는지 모르지만 부자이고 관원이라는 거죠.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할 수 있겠나? 어렵겠지..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때 간 이후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까..
여러분 만약에 이 부자된 것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죠.
부자가 부자로 계속 남아가지고 움켜쥐고 있으면 그러면 곤란하다는 거죠.
여러분 부자는 어디를 봐도 실력이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 부자를 보면 무슨 실력이 있든지 실력이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 실력이 있든지 아니면 상품 개발 실력이 있든지 무슨 실력이 있어요.
그리고 대인관계를 잘 하든지 어떤 수단이 있든지 일반 사람보다는 뭐 하나 더 있어야 부자가 되는 거야.
전부 경쟁을 하는데, 실력이 없어서는 부자가 안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실력이 더 있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실력 없는 사람을 돌아볼 의무가 있다는 거야.
이것이 예수님의 시각이예요. 성경의 관점입니다.
부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부요하고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렇게 하면 바로 ‘좌빨’ 그럽니다.
‘좌파요 빨갱이’를 좌빨이라고 해요.
그러면 예수님이 좌파요 빨갱이 되게요.
조금이라도 분배를 이야기 하거나 공평을 이야기 하거나 평등을 이야기 하면 그냥 좌빨이라고..
우리 사회가 화해가 안 돼요.
별로 부자도 없으면서..
내가 볼 때 우리 교회는 다 내가 눈이 높아서 그런지 아무도 부자 아니잖아요.
모르죠. 내가 모르는 숨은 부자가 있을지 몰라도..
생각해보세요.
가난한 사람이 모든 부자의 것을 빼앗아 공산주의식으로 갈라먹자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부자는 일정한 부를 갖고 있어야 된다고 봐요. 부가 없으면 투자가 안 되니까..
다 갈라먹어버리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계속해서 자기 실력을 가지고 다 끌어모아버리면 가난한 사람은 설 자리가 없는 거죠.
지금 앞으로 우리 법이 안 달라지면 법을 탓할 수 없는게, 전부 아이들을 하나나 둘 낳아가지고 어려운 일 힘든 일 위험한 일 안 할려고 해요.
조금만 먼지만 나도 안 할려고 하죠.
이른바 3D업종 안 할려고 하잖아요.
그런 3D업종이 아닌 곳은 제한되어 있어요.
그리고 아들이 하나 아니면 둘 밖에 안 되는데, 그런 위험한 일 더러운 일 힘든 일 안 할려고 하다보니까 일자리가 없는 것이고, 결국은 비정규직 같은..
그래서 영원히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비참한 거죠.
지금 현재 법으로 2년만 지나면 정식으로 정규직으로 안받아주면 그냥 쫓겨나야 돼요. 지금..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것은 여야가 다 달려들어도 힘들고 기업은 기업대로 자기 입장을 생각해야 되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힘써서 될게 아무 것도 없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데모해서 되는 게 아니고, 천상 부자들이 마음을 넓혀야 돼요.
여러분 부자들은 멋을 부릴 수 있어요.
가진 자들은 정말 멋을 부릴 수 있습니다.
멋드러진 일 칭송받을 일을 할 수 있어요.
문제는 안 한다는 거예요..
나중에 보면 사람이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이 둘입니다.
사람이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과, 돈 하나님. 둘 중에 하나예요.
돈이 하나님 다음으로 힘이 있으니까..
그래서 대개 돈 하나님이 훨씬 더 말을 잘 들어요 기도를 잘 들어요.
진짜 하나님은 잘 응답이 안 되니까 진짜 하나님보다 돈 하나님을 훨씬 더 매력적으로 생각해서 잘 못 벗어나요.
그래서 돈 맘몬 신을 섬길 것인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그 둘 중에 택해야 되는데, 부자들은 대개 맘몬 신을 더 섬겨요. 하나님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그 뒤에 보세요.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왜냐하면 당시에는 거꾸로 거든요.
아까 청년이고 부자요 관원이고 그리고 가치추구가 세상적인 게 아니고 무슨 선한 일을 더해서 영생을 얻을 것인가..
이 정도 같으면 일등 신앙인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폭탄같은 선언을 하셨다는 거죠.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으로서는 불가능이야.
여러분 사람 가지고는 부자를 구원할 수 없어요.
누가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할 수 있어요.
이게 좀 어려운 말인데,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어떤 부자가 정말 이 부자가 된다할지라도 내가 부자라고 해가지고 밥을 열그릇 먹는 것도 아니고, 옷을 하루에 열벌 스무벌 입는 것이 아니구나.
많이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그것을 확실히 알고 진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 내가 이 돈이라는 맘몬 신보다 하나님을 더 확실히 봤을 때만 이것을 나눌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할 수 있어요.
사람 이론 지식 갖고는 이데올로기로는 안 돼요.
지금 현재 여야가 좌파 우파 안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정말 이 부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버리면..
여러분 그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 봤잖아요.
하나님을 만나버리니까 나누라 분배하라 할것 없이 스스로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은 네배나 값겠나이다.’
예수님은 아무 말 안 했는데, 이제 우리가 앞으로 누가복음에서 볼 거거든요.
그러니까 부자도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가 돈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나면 그것은 헛빵이고, 그런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을 뻔 한거야.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버리면 돈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을 만나야 그 사람이 나눌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 할 수 있고..
그 뒤에 보세요.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좀 민망한 것 같아요.
베드로는 버릴 것이 있어야 버리죠.
자기나 내나 우리는 별로 버릴게 없어서 예수 믿기 훨씬 수월해요.
가진 사람은 어려워요.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정말 참 가치, 하나님 안에 있는 참 가치를 발견해버린 사람은 얼마든지 부자거나 말았거나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정말 하나님 위해서 자기 가진 것을 내려놓을 수 있고 줄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백배로 더 받을 수 있어요.
저는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제가 지금 유치한 얘긴데, 제가 하도 가진 것이 없어서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베드로 민망하게 자기 재산도 잘 모르지만 별로 가진 게 없었어요.
저도 시골 논 서마지기 그 동네에서는 괜찮은 거예요. 논 서마지기가..
그리고 집도 터는 내 것이 아니고 건물만 내 것이었어요.
통통 팔아가지고 전도자로 나설 때 전도 장비를 샀죠.
16mm영사기를 다 사고..
몽땅 다 사서 복음을 위해서 아비고 어미고 일가친척이고 친구고 다 버리고 하던 일 꽤 많았거든요. 그것도 다 버리고..
제가 친구를 얼마나 많이 내버렸는데 등져버렸는데, 지금 친구 얼마나 많아요?
백배? 저는 몇백배 친구 더 많아요.
내가 고향 친구 있어봐야 맨날 술친구 아니면 고스톱 친구 이런 것들인데..
여기만 해도 백명이 넘잖아요. 제 친구가..
전국적으로 제 친구가 얼마나 많겠어요?
집도 지금 내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에스라 하우스가 얼마나 큽니까? 너무 크니까 큰일이죠.
내가 주를 위해서 버린 것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차피 다 하나님 것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고 한 것이 그 백배가 문제가 아니죠.
핍박은 물론 겸하여 받았죠.
지금도 제가 가진 것 다 하나님 것이니까 그게 얼마든지 믿음으로 더 하나님이 훨씬 더 큰 가치이시다. 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만 하나님을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이 줘도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에게 재물을 많이 주면 위험해요.
신앙이 안 된 사람이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 위험하다니까..
그래서 여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 하는 것은 상당히 생각할 말씀이고,
..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틀림없이 핍박을 받고 욕을 먹습니다.
벌써 차원이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욕 안 먹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반드시 욕을 먹고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미친 사람 정신나간 사람 기본이죠.
그런 말도 한번 못 들어본 사람은 좀 미안하지만 너무 소극적으로 믿은 거예요.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게 조심할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먼저 된 사람이 잘 안 되어가지고 죽을 때까지 손에 쥔 것 놓지 못해 가지고 죽을 때까지 안 놓고 붙들고,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못놓고 죽을 때까지 간 사람 있어요.
나중 된 사람은 언제? 죽기 직전에..
아름다운 일을 위해서 써보지도 못한 채 죽기 직전에 가서 아무 것도 아니다 했던 사람 있죠?
누구냐 하면 야곱이예요. 야곱..
야곱이 별로 가진 것도 없지만 130년 간 애를 먹인거야. 안 깨어지고..
먼저 된 자인데, 나중 된 사람이 많다는 거야.
혹시 여기 모태적 신앙이다 하는 분 중에 그런 사람이 더러 있어요.
모태적 어려서부터 자기 부모님 신앙 엉터리로 하는 것 많이 봤고, 교회에서 목사님 장로님들 싸우는 것 많이 봤고 해가지고..
전혀 믿음도 애먹이는 믿음이 있어요.
모태적 신앙인데, ‘못해요, 못해요.’ 그러면서 안하고 못하고 안하고 못하고..
평생 씨름하다가 나중에 영 진짜 죽기 직전에 가서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교회 말고 딴 교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렇게 안 되어야 되겠죠.
32절,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은 아마 일사각오하고 올라가시는가 보다..
우리에게도 단단히 각오하라 하시는가 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 거야.
바로 35절에,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다짐부터 받아놓고 하죠. 말도 안 하고..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참 단순한 것은 좋은데 지나치게 솔직하죠?
열둘이 지금 같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딱 이제 예수님의 일사각오하고 이번에 올라가면 세상을 뒤집어 엎는다. 이렇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깨어날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빨리 선수쳐야 돼.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느냐 하면 아마도 딱부러지게 말하는 것은 없지만 눈치있게 보면, 어머니가 치맛바람이 상당히 셌어요.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 이 두 여인이 재정적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의 3년 사역비 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 두 가정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 세베대의 아내 이 두 분이 뒷바라지를 한 것 같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미리 말을 다 해 놓는 게 좋겠다.
오늘날도 그런데 2천년 전이야 오죽하겠어요?
제가 이 두 사람의 순진한 용기에 머리를 숙입니다.
우리는 제일 못하는 것이 이것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아직도 여기 있는 겁니다.
평생에 이런 것을 못해 봤어요.
37절,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못한다’ 그래봐.
그러면 ‘자격 없어.’ 그렇게 나올 것 같으니까, 39절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뭔지도 모르고..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고 알듯말듯하게 말씀하시는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강도야. 주의 우편에 좌편에..
그것을 알았으면 섬뜩한 일이죠.
더 웃기는 것은 41절에,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똑 같아요. 그렇죠?
선수를 빼앗긴 것 뿐이지 똑같잖아.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 끝없이 흐르는 문제입니다.
누가 주의 우편에 좌편에 예수님이 맨날 섬기는 자, 끝이 되고 마지막이 되고 종이 되고 계속해서 제자들과 이게 예수님과 안 맞는 거예요.
오늘은 맞느냐?
오늘도 잘 안 맞아요.
항상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됩니다.
46절,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여리고를 벗어나게 되면 예루살렘으로 바로 올라가게 되는데
여리고에서 벗어날려고 할 때에,
..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바디매오’라는 말이 ‘디매오의 아들’이예요.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 ‘바나바’ 있죠? ‘바르 나바스’는 ‘위로의 아들’.
또 ‘바라바’. 예수님 대신에 풀려났던 바라바 있죠?
‘바르 아빠’예요. ‘아버지의 아들’이야.
누구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가..
이름도 지을 줄 모르고 이름 없는 사람도 있고..
여러분 서양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없어요.
여러분 서양 사람들 중에 자기 이름이 없고 요한슨 그런 것 있죠?
요한슨은 요한의 아들이야.
자기 아버지 이름만 있고 자기 이름은 없는 거야.
요한의 아들.. 요한슨..
요한슨 하는 말이 저쪽에 덴마크나 북구라파에는 얀센이라고 하죠?
원래는 히브리어로 여호하난이거든요.
여호하난..
여호하난이 우리는 요한, 저 북구라파는 얀. 프랑스에서는 짱이라고 해요.
우리가 참 발음을 잘 하는 거야.
데이비슨 하는 것도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할 뿐이지 자기 이름이 없는 거야.
바디매오라는 말이 디매오의 아들 자기 이름이 없고..
거기다가 시각 장애인이야. 불행하자면 끝없이 불행하죠.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 사람이 분명히 듣기로는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는데, 그 사람 입에서 분명히 입력된 것은 나사렛 예수예요.
그런데 출력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야.
안에 뭐가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 사람 속에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로 바꾸는 믿음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시각이 안 좋은 사람, 시각 장애인이 오랫동안 시각 장애인으로 있는 사람들이 듣는 기능은 굉장합니다. 듣는 기능이..
거기다가 손 감각이 대단해요.
전에 성경 학교 시절에 우리 교단 목사님 중에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제가 볼 때 노벨상을 받아도 진작 받을분이 있어요.
김선태 목사님이라고, 시각장애인 목사님인데, 실로암 안과 병원을 설립해서 아마 몇 천명의 눈을 뜨게 했어요.
각막 기증을 받아가지고..
진주에 와서 집회를 하는데, 정전이 되어도 아무 상관 없대요.
점자 성경으로 하는데, 갈수록 눈이 더 밝아진대. 자기 눈은..
그런데 얼마나 정확하냐?
호텔을 딱 한번만 안내하니까 딱 한번 안내하자 그 다음에는 안내할 필요없어.
혼자 딱 가서 키를 딱 꺼내더니 자기 방문앞에 가서 더듬지도 않고 바로 들어가요. 딱 들어가서 착착착..
그렇게 감각이 발달한 거야.
딱 시각 하나가 장애가 있는 대신 다른 감각한 아주 발달한 거야.
듣는 귀가 굉장히 발달한거야. 듣는 귀가..
제가 옛날 라디오 방송 할 때 성경 질문을 생방송으로 하는데, 부산에서 어떤 시각 장애인 성도가 질문을 하는데, 꼭 두 가지를 질문해요.
‘오늘도 두가지만 질문 하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질문, 가장 수준높은 질문, 제가 까딱하면 대답을 잘 못할 뻔한 질문을 그 시각 장애인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 시각 장애인이라고 해서 믿음 없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여러분 겉옷이 비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옷 해봤자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때는 겉옷이 자기 이불이고 전 재산일 수 있어요.
그것 없으면 저녁에 누워 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바람에 놀라서 그것까지 내버리고 나왔어요.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왜냐하면 아까 그 기도가 두루뭉실 하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 거야.
구체적으로 말해라.
..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아주 대답이 정확하죠?
눈을 떠도 못 보는 사람이 있어요.
눈뜨기를 원하는 게 아니고 보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진짜 정답이야.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가라고 했는데 따라 왔어요.
어떤 사람은 따라오라고 해도 안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라 했는데도 따라와. 그렇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는데, 가서 외치는 거야. 내가 너에게만 말한다 하면서..
그래서 이 바디매오라는 사람도 마지막 기회를 잡은 거야.
지금 예수님께서 이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바로 십가자를 지거든요.
그 기회 놓치면 다시는 못 만나요.
그런데 여기 지금 마가복음에는 빠진 게 있는데,
이 때 그 유명한 삭개오 사건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여리고를 통과해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해서 올라갈 때 삭개오 사건과 바디매오 사건 두개가 있었는데, 여기 마가복음에는 빠진 거야.
빠진 것을 알뜰하게 챙긴 사람이 누가죠.
그런데 바디매오가 눈 뜬 사건보다 사실은 삭개오 사건이 더 큰 사건이죠.
삭개오는 눈을 뜨고도 못 봤잖아요.
눈 뜨고도 무엇 때문에 못 봤느냐?
돈에 눈이 멀어서 안 보인 거예요.
돈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이 안 보이다가, 돈 가지고 있어도 행복한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체험했어요.
그리고는 예수님 만났던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튼 삭개오도 마지막 기회를 포착한 사람이고, 바디매오도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데, 기회가 막 지나갈듯 하죠?
아슬아슬하게 지나갈듯 했는데, 듣는 귀가 있는 거야.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는데, 나사렛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듣는 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듣는 귀를 주옵소서. 기도해야 되겠죠.
그리고 보는 눈과 깨닫는 영,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되겠고, 우리에게 어떤 은혜의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의 카이로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때가 은혜의 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진리의 말씀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바른 것을 배우고 듣고 깨달아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늘 증진하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가정이 교회처럼 또 천국처럼 거기에서 믿음이 자라고 소망이 자라고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