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봉화 烽火
나라에 병란이나 사변이 있을 때 신호로 올리던 불이다.
눈에 잘 띄기 위해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 信號 보낸다.
낮의 연기를 따로 봉연 烽煙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화 烽火 자체는 기원전부터 쓰였지만, 당시 봉화는 단순한 수준이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불을 밝혀
'변경에 무슨 일이 있다. 그러니 지원을 부탁한다'라고 알리는 정도였다.
더 복잡해지게 된 것은 중국 후한 때부터 흉노의 침공이 잦아지자, 단계별로 체계화되었다.
이때부터 봉화를 올리는 봉화대가 변방에서 여러 봉우리의 봉화대를 거쳐 수도 낙양에 전달되는 식의 릴레이 연결 체계가 잡혔고, 적의 규모나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단계별로 각기 다른 5가지 정보 전달법이 생겨났다.
* 단계별 봉화 전달방법
1단계 - 10명 이하의 외적이 변경 밖에 출현할 때,
낮에는 봉연 1개를 올리고, 밤에는 거화 1개를 올린다.
2단계 -외적 10명 이상이 변경 밖에 출현하거나, 100~500명이 변경에 진입할 때,
낮일 경우 봉연 2개, 밤에는 거화 2개.
3단계 - 외적 1,000명 이하가 변경 진입하거나, 혹은 500~1,000명이 봉화대를 공 격할 때,
낮에는 봉연 3개, 밤에는 거화 2개.
4단계 - 외적 1,000명 이상이 봉화대를 공격할 때,
낮에는 봉연 3개, 밤에는 거화 3개.
5단계 - 외적에게 봉화대를 포위당해 위급할 경우.
낮에는 무조건 되는 대로 봉을 높이 쌓고, 밤에는 거화 炬火를 계속 붙였다 떼었다 하여,
멀리서 보면 불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위험 상황인 것 을 알림.
두 길이 넘는 성벽이지만 돌격대는 순식간에 네 곳의 성벽 위에 올라갔다.
먼저 올라간 돌격대가 수비병들과 접근전을 벌이며, 창과 칼로 치열하게 싸우며 갈고리가 걸린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선두 공격병 30여 명이 성벽 위로 재빨리 올라간다.
그리고는 30여 개의 사다리를 성벽 곳곳에 대고는 많은 수의 돌격대가 성마루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로는 공격병들의 수가 기하급수적 幾何級數的으로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사다리 삼십여 개가 동시에 성벽 곳곳에 세로로 놓였다.
삽시간 霎時間에 산마루 망루 5곳을 점령해 버렸다.
선봉 돌격대의 일부는 말을 줄로 묶어 점령한 성벽 위로 끌어 올리기도 하고,
다시 반대편 남쪽으로 줄로 묶은 말을 한 필씩 조심히 내리기도 하였다.
돌격대 일부는 성벽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성벽 반대편 즉, 남쪽 아래의 적병들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산 정상의 망루 10여 개가 접수되었다.
이제 한 군들은 성벽 사수 死守를 포기하고 도망가기 바쁘다.
흉노족과 비교해 신체가 왜소한 하화족, 한군 漢軍들은 접근전에서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 기세를 몰아 점령한 망루 양쪽으로 수비병들을 밀어버린다.
부상 당한 수비병들은 항복할 도리밖에 방법이 없다.
일부의 군사들은 항복한 수비병들을 닦달하여 성벽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항복한 적병들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부역 賦役을 담당하게 된다.
자신들이 힘들게 쌓고 지키던 성벽을 자기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부역행위 附逆行爲를 어쩔 수 없이 하고있는 것이다.
이를 이적행위 利敵行爲라 여기며, 부역에 태만 怠慢한 포로병에게는 가차없이 칼날이 날아간다.
위협이 아니라, 바로 즉결처분 卽決處分이다.
그런 자들은 살려두면 언젠가는 후환 後患이 발생한다.
폭동의 주동자 主動者나 반란 사건의 장본인 張本人이 되기 십상 十常이다.
성벽이 7할 정도 무너지자 무너진 성벽의 돌들과 통나무와 사다리를 이용하여 길을 만들어 버린다.
이제는 말을 타고 동시에 3명씩 성벽을 통과한다.
그러자 산마루 반대쪽 허리의 또 다른 곳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여,
이젠 4~5장 丈 정도로 더 넓게 무너뜨리고, 높이를 무릎 높이까지 낮추어 버린다.
* 장 丈의 길이 기준은 10척 尺이 일장 一丈이 되는 것이 원칙이나,
보통은 성인 남자의 키 높이를 말한다.
또, 1 척 尺의 기준은 현재는 30cm이지만, 진시황릉이나 다른 유물 등을 보면, 당시에는 1자 (척 尺)가 22.5cm 정도이다.
손이 큰 사람의 한 뼘 길이다.
그렇게 당시의 도량형 기준으로 산출 算出한다면,
8척 장신 長身이라면 180cm 가량의 헌헌장부 軒軒丈夫다.
큰 대로 大路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곳으로 말 다섯 필이 동시에 지나간다.
이각 二刻이 채 되기 전에 3천 명의 군사들이 장성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사백 명의 군사는 무너진 성벽을 사수 死守하며, 항복한 적병들을 이용하여 산허리 두 곳의 성벽을 더 낮추어,
소 수레가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장성 주변의 험하게 돌출된 부분은 깎고,
깊은 골짜기는 메우는 대규모 도로공사를 진행하고,
나머지 육백 명의 군사들은 삼백 명씩 나누어 좌우로 성마루를 계속 점령해 가고 있었다.
한편,
선봉대 천 부장 담비와 정돌식은 혼하 渾河를 거쳐, 연주 燕州와 유주 幽州까지 쳐내려 갔다.
남하 도중에 장성에서 피운 봉홧불을 보고 미리 전투태세를 갖춘 한의 병사들이 요충지 서너 곳에서
진을 치고 저지하였으나, 기세 오른 흉노족의 돌격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인지경 無人之境으로 거칠 것 없이 유주까지 남하하여 관부 官府와 큰집들을 들이쳐
금은보화와 비단, 콩 등 곡식과 우마 牛馬까지 포획하여 북으로 되돌아간다.
불과 이틀 만에 목표치를 달성하고 장성으로 되돌아왔다.
내려갈 때는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는 이틀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전리품을 챙겨오는데,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
선봉대가 적의 추격대를 따돌리고 마지막으로 장성을 통과하자,
통나무와 큰 돌들로 무너진 장성을 대충 메꾸고는 모두를 회군하였다.
통나무와 돌로 장성을 메꾸는 이유는 적의 추격을 두려워하여 막는다기보다는
추격병들에게 ‘더 이상 추격하기가 어렵다’라는 명분을 주기 위해서다.
흉노족은 전시에는 여분의 말을 두, 세 마리씩 더 몰고 다닌다.
그중 전투에 자신이 있고 욕심이 많은 전사 戰士는 여분으로 다섯, 여섯 필 匹의 말을 더 데리고 다니기도 한다.
타고 달리던 말이 지치면 즉시 다른 말로 갈아탄다.
그러니 기동성이 아주 뛰어나다.
하루에 칠백 리를 능히 주파 走破할 수 있다.
그 여분 餘分의 말 등을 비워서 회군하는 병사는 없을 것이다.
칼과 창 같은 병장기는 물론이며 도끼와 청동제 그릇과 거위와 닭, 오리, 양과 염소 등 가축과
콩과 여러 곡물, 그리고 귀한 비단과 면으로 짠 천들...
그중 곡물은 사람의 먹거리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새끼를 밴 가축들의 사료용이며
또한, 적의 군량 軍糧을 없애버리는 효과도 있다.
초원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품들이다.
말 등에는 온갖 종류의 노획품들이 그득그득하게 채워져 있다.
이번 전리품은 엄청나게 많았다.
수십 년 만에 남벌을 감행하니 그 전리품이 대단하였다.
소와 말이 만여 필에 비단과 천, 곡식은 소달구지로 이 천여 대가 넘었다.
양과 염소. 닭과 거위 등 다양한 가축들도 우마차에 싣고 회군한다.
소와 말 잔 등에도 갖가지 전리품이 실려있다.
금은보화도 서너 수레가 넘었다.
젊은 여인도 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소 수레에 싣고 간다.
아군의 피해는 성벽을 공략할 때 20여 명이 전사하고, 3백여 명이 다친 것에 비하여,
후한 군은 5백여 명이 전사하고, 도망간 병사와 부상자는 얼마나 많은지도 모른다.
막북으로 돌아온 묵황야차 소왕의 병사들,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전공에 따라 골고루 나누어주고, 전사자 가족과 부상병에게는
진심 어린 위로 慰勞와 아울러 포상품 褒賞品을 넉넉하게 챙겨 주었다.
전사자 가족에게는 특별히 포로를 2명씩 배정하였다.
죽은 전사자에 대한 앙갚음을 노예에게 분풀이하던지, 데리고 일을 시키든지 또는,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려도 관계가 없다.
지금의 시각 視覺으로 바라보면,
흉노족은 약탈경제 掠奪經濟에 의존 依存하는 도적이나 강도와 같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척박한 땅에서 1년의 태반 이상을 얼음으로 언 땅에서
추위와 맞서 가축을 돌보며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들이다.
방목하는 가축들이 1년에 한, 두 번 새끼를 낳는 외에 별다른 생산성이 없는
그들에게는 다른 종족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마치 배고픈 늑대나 표범이 토끼나 양 떼를 공격하여 주린 배를 채우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연에서, 인간관계에서 도태 淘汰되어 버린다.
약육강식 弱肉强食이고 적자생존 適者生存이다.
약탈은 내가, 우리 가족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수단이자,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약탈, 납치를 많이 한 부족이나 용사 勇士는 영웅으로 우대하고, 대접 待接 받는 시대다.
그리고는 초원에서 축제의 밤을 벌인다.
노획품 鹵獲品의 가치는 지난 일 년간, 초원에서 온 가족이 힘을 모아 가축을 기른 수익보다
서너 배 이상으로 많았다.
한 명의 전사 戰士가 일주야 만에 전 가족이 일, 이 년 동안 피땀 흘려 이룬
수확을 웃도는 소득 所得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목숨을 건 위험을 무릅쓰고 장성을 넘어간다.
아니,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도 불사 不辭하지 아니하는 그 용맹함에 남쪽 농경민들은 치를 떨고 있다.
묵황 소왕 이중부와 사로국 천 부장들의 감회 感懷가 새롭다.
오 년전,
헨티산맥 전투에서 후한과 남 흉노의 연합군에게 패퇴 당하면서 포노 선우와 을지 소왕의 전사,
그리고 전투 중에 전멸하다시피 죽어간 수많은 동료의 분풀이를 어느 정도 한 것 같아 위안이 된다.
남벌에 참여한 전사들은 개별적으로 노획물을 서너 마리의 말 등에 잔뜩 싣고 귀가하고,
백 부장과 천 부장들은 전리품을 여러마리의 소 수레에 가득 싣고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간다.
전사자와 부족장의 몫까지 챙겨 가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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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만이네요.
원보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