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1) 수필
큰아들 내외가 들어섰다.
“땅 팔고 좀 편하게 지내시지요!” 하지만 “뭐가 편한 거냐? 맨날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살 순 없잖나?”
그래서 아들에게 일거리를 보태주게 되었다. 농사 핑계로 아들 한 번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아들은 땡볕을 무릅쓰고 들깨 모를 다 옮겨 심고 돌아와 한마디 거든다.
“일일이 사진 찍어서 한 2년만 글 카페에 올려놓고, 그다음 해부터는 그 사진대로 따라서 하면,
언제 어느 때 뭘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요?”
“그래, 그것참 좋은 생각이다. 난 왜 미처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농사일지를 따로 개설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래간만에 I카페 꾸미기를 들락거렸지만 잘되지 않는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시도해 보도록 하자.
“풀하고 씨름하다 결국 내가졌네요!” 농약통에 제초제를 섞고 있는데 임씨(86세)가 지팡이를 짚고 지나가길래
한마디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응대한다 “그러게, 졌네 졌어!”
그 임 노인은 내가 풀을 뽑을 때마다 제초제를 쓰라고 훈수하던 터였다.
밭고랑의 풀을 손으로 뽑고 또 뽑아도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괭이나 호미질로도 힘든데, 손으로 풀을 움켜잡고 씨름하기를 얼마나 했던가?
결국 오늘 두 손 번쩍 들고 청천 농약사엘 들러서 제초제를 사 왔던 거였다.
간밤에 한줄금 쏟아져 내린 비에 마을 뒤로 흐르는 박대천이 얼마나 불어났는지 궁금하여
이른 아침에 어슬렁거리며 건너가 개울물을 살펴보았다. D의 모친이 집 울타리 곁에서 잡초를 뽑다 말고
나를 보면서 허리를 편다. 그미는 평소 동천에 해뜨기 전에 집을 나서면 서천에 해가 넘어간 어스름에야
집에 돌아오는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부인이다. 남편 생전에도 그랬고 혼자된 지금도 여전하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서 “제발 일 좀 그만하세요!” 해도 막무가내다.
칠십팔 세나 되었고 허리가 많이 굽었지만, 평생 해온 들일을 멈출 수 없는가보다.
소낙비가 지나간 개울을 내려다보며 “물이 많이 안 불었네요!” 했더니 “야~! 그러네요, 물 구경 나오셨어유?”한다. 그렇지, 개울물이 자잘자잘 노래하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구경이긴 하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집엘 들렀다. U씨는 스스로 직접 써서 액자를 만들어 걸어놓은 가훈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84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고, 그 이듬해에 이 가훈을 써서 붙여 놓았다고 했다.
가훈
1. 건강!
2. 오늘 할 일을 미루지 말자!
3. 절약!
평소 그의 삶의 모습을 보면 “참 부지런하구나!”라고 느꼈는데, 그 가훈을 보니 학벌과 신분의 여하를 떠나서
그는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도 많은 세상에서 자기가 결정하고 만든 가훈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건너오세요. 음료수 한잔하시게요.” U씨의 전화를 받은 후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옆집을 찾아갔다. 이미 불판에서는 불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소주병을 따서 종이컵을 채우고 있다.
아침부터 살짝 비를 뿌리는 그날은 ‘공치는 날’인 셈이었다. 엊그제 옥수수 수확에 동원되었던 이웃들을 불러
대접하는 중이다. 술과는 사돈의 팔촌인 나를 위해서는 파인애플쥬스가 마련되어 있다.
“늙은 말이 콩을 좋아한다더니, N형 밥엔 콩도 많네!” 하는 Ch씨의 농담을 반찬 삼아서, 보리밥도 준비되었다.
옆에 앉은 N씨도 속없는 웃음으로 맞장구친다. “이렇게 점심으로 때우지요, 뭐!”
화기애애한 이웃들의 모습이 정겹다.
앞마당 목련나무 그늘에 꽃무릇이 더부룩 하니 솟아 올라왔다.
“이거 다 죽은 거 아냐?” 하던 N씨의 소리를 땅속에서 엿들었나 보다.
밤새 소리 소문 없이 쑤욱 올라온 꽃대를 보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상사화
-세상을 향하여
창끝을 치켜세운
상사화의 어린 순
뭣이 그리 두려웠더냐
무기를 먼저 앞세웠나
무더운 여름
후덥지근한 바람과 어우러진 소낙비에
어린 순 솟구치며
볼그스레 미소 짓는다.
내가 세운 건 칼날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화해의 손짓이요
하늘 향한 기도의 손이라오
세상이 너를 속이더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는 싯귀를
상사화도 어느새 익혔나 보다 -觀-
비 내리는 소리가 창문을 통해 후두둑거린다. 엊저녁보다 그 톤을 좀 더 높였나 보다.
늦장마라 해야 하나 가을장마라 해야 하나. 우산을 쓰고 집 앞을 서성거리던 이웃집 가장은
미소를 살짝 흘리며 말했다. “고추가 다 물러 빠지고, 병이 와서 고추농사 이젠 틀렸네요.”
그 웃음은 결코 좋아서 웃는 게 아니고, 그야말로 쓴웃음이라 해야겠다. -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