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의 달밤 그리고 심상(心像)
-폴포트. 크메르 루즈 그 미친 것들에게
몇 해 전에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나라다. 미친 위정자(폴 포트)의 등장으로 수백만 명이 처형된, 그리고 그 학살의 흔적인 해골과 뼈를 전시하고 관광수입을 벌고 있는 가슴 아픈 나라다.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않고 " 1달러!" "1달러!"를 외치며 조잡한 공예품을 들고 관광객 뒤를 맨발로 쫄쫄 따라다니며 구걸을 하는 가난한 나라이다. 가이드는 관광객들에게 애들이 불쌍하다고 돈을 주면 아니 된다고 교육을 시킨다. 그 뒤에서 아이들이 구걸해온 그 1달러에다 빨대를 들이대고 빨아가는 검은 눈들을 본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의 어려웠던 시절이 생각나서 1달러를 주기도 한다.
호치민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두어 시간 여 만에 내린 곳은 캄보디아 북쪽의 작은 씨엠립 공항이었다. 공항에는 어둠살이 내리고 있었고 올려다 본 하늘에는 초저녁 달 옆에서 큰 별이 하나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월남의 달밤이란 노랫말이 떠올라 속으로 불러보았다.
⎾남 남쪽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
십자성 저 별빛은 어머님 얼굴- ⏌
섬이 아닌데도 섬의 나라라고 노랫말을 지었다고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더니 결국은 그 구절이 “머나먼 나라”로 고쳐져서 불리게 된 노래다. 남쪽보다 더 먼, 어드메 쯤인지 짐작조차도 되지 않는 그래서 월남(越南)이라고만 부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전장으로 실려 온 대한민국의 어린병사들이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을 바라보면서 이역만리 두고 온 고향의 어머니를 그렸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베트남이 아닌 캄보디아에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가 생각났다.
첫날은 저녁을 먹은 후 호텔로 직행하여 잠을 자고 다음 날부터 정글 속에 숨은 유적들을 구경하러 다녔다. 밀림의 거목들이 문어 다리처럼 고대의 유적들을 칭칭 감아 조이고 있었다. 내 눈에는 신들을 위한다며 힘없는 백성들을 노예로 끌고와서 혹사시킨 사악한 인간영혼들의 뇌수를 빨아들이며 타락한 과거를 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앙코르와트 유적들은 전부 돌로 만든 사원이다. 사람을 교화 하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신들을 섬기기 위한 신전이다. 숲 속 곳곳에 흩어진 엄청난 규모의 돌 사원들을 '톡톡이(?)'를 타고 돌아보았다. 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했지만 신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외치며 어린 백성들을 신전을 짓는 노역장과 전장터로 몰아갔을 제왕들과 대제사장들의 사악한 얼굴이 1달러를 구걸하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와 겹쳐져 보이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느 사원 앞에는 천하태평인 부처가 눈을 감고 편안히 누워 있는 와불상도 있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타락한 인간들의 작태를 지켜봐도 시원찮았을 텐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누워서 잠만 자고 있으니 적어도 내 눈에는 사원 위에다 뿌리를 박고 자라는 나무 보다 하찮은 신으로 보였다.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동자는 참으로 아름답다. 호텔 로비에서 하루 종일 그들의 전통악기로 노래를 연주하는 소녀의 눈빛이 너무나 맑고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내게 미소를 보내 주었다.
"솔솔미파솔랄라솔 솔도미레도레"
라고 하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곧바로 "고향의 봄"을 연주 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노래에 감사해하며 당신의 눈은 코끼리의 눈을 닮았다고 했다. 캄보디아 코끼리의 눈은 우리나라 소의 눈처럼 악기(惡氣) 하나 없이 맑디맑다. 그 선한 눈을 한 코끼리와 백성들을 잡아다가 신전을 짓는 일과 전쟁을 치는 일에 동원 시킨 어느 집권자의 삶을 돌에다가 그림으로 조각까지 해두고 경배 드리던 곳이 앙코르와트 사원이다. 그 속에는 신들만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도 거기에다 경배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다던 신들조차도 빨아 먹을 게 없으니 떠난 것이다.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무지와 사악함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참으로 무미건조한 석조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걸어 다녔더니 다리가 아팠다. 사원의 해자 다리를 건너 보리수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동료들이 사원구경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내 곁에는 초등학교 1학년 나이 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와 그녀의 동생으로 보이는 너댓살쯤 되어 보이는 사네아이가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듯한 몰골로 커다란 쓰레기 마대를 내려두고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계집아이는 나를 보고도 "1달러"를 구걸하지 않는 것이었다. 배가 무척 고파 보였는데 다른 아이들처럼 구걸을 하지 않는 게 신기하기도하여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코끼리 같은 눈에 부끄러움이 감돌면서 고개를 외면하고는 동생을 감싸 안는다.
나는 무심결에 배낭 주머니를 뒤져 한국에서 가져간 "인삼켄디" 하나를 그 소녀에게 주었다. 계집아이가 두 손으로 켄디를 받더니 곧바로 동생에게 준다. 어린 동생이 켄디를 싼 비닐을 뜯지 못하자 소녀가 다시 그걸 뜯은 다음 동생의 입에다 넣어 준다. 인삼켄디는 비닐을 뜯으면 싸한 인삼향이 풍기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맛있는 젤리다. 소녀도 그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굶주렸을 것이니 그녀도 배가 고팠을 터인데도 그걸 전부 동생의 입에다 넣어준다. 먹을 게 더 없는가하여 배낭을 뒤져보았지만 공교롭게도 그날은 호텔에서 아무런 간식거리도 챙겨 나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지니 인삼켄디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걸 다시 소녀에게 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소녀가 자신이 먹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내 기대는 빗나갔다. 먹지 않고 품속에다 고이 간직하는 것이었다. 그 소녀가 보살펴야 하는 누군가가 또 있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자기가 보살펴야 할 그 누군가가 눈에 밟혀서 켄디를 먹지 못하고 가슴에다 품은 것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고여 올라 왔다.
사원구경을 마치고 나온 동료들이 하나 둘 내 곁으로 몰려와서 함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돈을 주면 나쁜 사람들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먹을 것을 찾아보라고 하니 이사람 저사람 각자의 주머니에서 간식꺼리를 찾아내어 소녀의 손에 쥐어 준다. 소녀는 환한 얼굴을 하더니 비로소 관광객들이 준 과자를 먹었다. 이 장면을 함께 본 관광객들의 심상에 비친 그림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가난했던 시절에 학업을 포기한 채 공장에 나가 자신은 하꼬방(당시표현) 같은 기숙사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학비를 꼬박꼬박 보내어 공부를 시켜준 누나를 회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폭정의 지도자와 킬링필드, 신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자기백성을 학대한 제사장과 그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신전, 동원된 노예, 노예로 잡혀오기 전에 그들이 밀림 속에서 누리던 원초적인 자유, 노예나 다름없는 거지꼴의 현재 인간, 1달러를 외치는 아이들의 눈, 그 1달러를 빨아가는 또 다른 검은 눈, 호텔로비에서 비파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던 아름다운 소녀의 눈, 선하디 선한 코끼리의 눈, 어머니의 나라를 떠나 전장터로 파병되어 십자성을 쳐다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로움을 달래던 파월병사들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보리수나무 밑에서, 부끄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어린 동생을 돌보던 소녀의 눈 속에서 앙코르와트 사원에서도 만나지 못한 살아있는 거룩한 신을 보았다.
그 후 그 감동을 글로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졌지만 여행을 다녀온 지 2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그걸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가 여기다가 이렇게 쓰는 중이다. 그때 내가 무언가를 보기는 보았는데 내 심상에 비친 참이 무엇인지를 지금까지 알지 못한 때문이다. “남남 쪽 섬의 나라”라는 노랫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작사자 반야월 선생이 베트남이 섬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섬처럼 아득히 먼 곳이란 의미를 지닌 작사자의 마음에 비친 심상이 육지에서 격리된 돌아오지 못할 아득한 섬과 같이 보인다는 뜻이다. 죽음의 길에 올랐는데, 그 길이 바다위에 홀로 고립된 섬처럼 아득하고 외롭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기 심상에 비친 참이 무엇인지를 아는 눈, 이게 바로 현자의 눈이고 참 작가의 눈이고 문학의 눈이다.
월남의 달밤 (윤일로)
작사 반야월/ 작곡 김성근
남남쪽 머나먼 나라 (원작: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
십자성 저 별빛은
어머님 얼굴
그 누가 불어 주는
하모니카냐
아리랑 멜로디가
향수에 젖네
가슴에 젖네
월남의 달밤이란 노랫말의 전문이다. 남남 쪽 “머나먼 나라”라고 부를 때와 “섬의 나라”라고 부를 때 그 느낌이 어떻게 다르게 전해 오는가? “찔레꽃 희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이라고 부르면 또 어떤 느낌이 전해 오는가?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의식과 감정의 원형, 사물 뒤에 숨어 있는 본질, 나타난 행동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작가의 심상에서 보일 때까지 오로지 쓰고 또 쓰는 길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을 속이지 말고-.
“붉은 찔레”나 “섬의 나라”처럼 심상은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남들이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왕의 이름으로 속임수를 써 놓은 것도 다 보이는데 명색이 작가란 사람들이 현상 속에 숨은 “참”을 읽어내지 못하고 표피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참”이라고 쓰면 그게 바로 거짓말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먼저 꿰뚫어 본다. 절대로 거짓말을 쓰지 말고 모르면 모른다고 써야 한다. 작가가 거짓말을 쓰면 깨우치지 못한 독자들의 영혼은 작가가 늘어놓은 거짓말에 홀려서 구원 받을 길이 없는 천만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폴포트, 크메르루즈 "
그 미친 것들에게 국가권력을 맡긴 인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문학이 깨우쳐 줘야 한다.( 2016.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