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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24)번째 게송과 청목소의 내용(김성철(2021), 『중론』, p402)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 苦를 청목소에서 청목은 왜 法이라고 번역했는지 궁금합니다.
24 - 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即無有定性. 苦가 만약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道가 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청목소 : 法若定有。則無有修道。何以故。若法實者 則是常。常則不可增益。若道可修。道則無有定性。法이 만일 확고히 존재한다면 수도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만일 法이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상주한다는 말인데 상주한다면 더 증장될 수도 없다. 만일 도가 닦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에는 확고한 자성이 있을 수 없다.
2)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22), 23), 24), 26)번째 게송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24 - 22)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24 - 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即破於滅諦.
24 - 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即無有定性.
24 - 25)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상기 게송의 밑줄 친 부분의 의미는 모두 같은 의미로 번역이 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볼드체의 색칠한 부분의 한자가 바뀌어져(노란색 : 若苦약고, 초록색 : 苦若고약) 있습니다. 구마라습이 이렇게 바꾼 특별한 까닭이 있을까요?
3)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21)번째 게송이 若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김성철(2021), 『중론』, p400 )되어 있는데, CBETA의 원문은 苦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로 되어 있습니다. 苦를 若으로 바꾸어 쓰신 이유가 별도로 있으신가요?
답변입니다. 질문이 길기에 나누어 다시 인용하면서 답하겠습니다.
질문1)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24)번째 게송과 청목소의 내용(김성철(2021), 『중론』, p402)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 苦를 청목소에서 청목은 왜 法이라고 번역했는지 궁금합니다.
24 - 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即無有定性. 苦가 만약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道가 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청목소 : 法若定有。則無有修道。何以故。若法實者 則是常。常則不可增益。若道可修。道則無有定性。法이 만일 확고히 존재한다면 수도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만일 法이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상주한다는 말인데 상주한다면 더 증장될 수도 없다. 만일 도가 닦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에는 확고한 자성이 있을 수 없다.
답변
(먼저 질문에서 " 청목은 왜 法이라고 번역했는지"라고 쓰셨는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님의 오타(誤打)이겠지만, 청목은 <중론 게송>을 산스끄리뜨어로 주석한 분이고, 번역자는 구마라습 스님입니다. 따라서 " 청목은 왜 法이라고 주석했는지" 라고 묻든지 "구마라습은 왜 法이라고 번역했는지"라고 물어야 옳습니다.)
질문하신 대로 24-24) 게송의 전반부는 "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로 되어 있는데, 청목소에 대한 구마라습의 번역에서는 이를 인용하면서 "法若定有。則無有修道"라고 쓰고 있습니다. '苦'자를 '法'자로 바꾸어 놓는 겁니다. 그런데 24-24) 게송의 산스끄리뜨 원문을 보면 이 게송에 대한 구마라습의 번역 자체가 파격이든가, 아니면 청목이 주석하면서 참조한 <중론 게송>이 현존하는 산스끄리뜨본 <중론 게송>과 다른 판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구마라습의 한역문과 산스끄리뜨 원문을 대조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
고(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수도(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도(道)가 수습(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24) svābhāvye sati mārgasya bhāvanā nopapadyate/
athāsau bhāvyate mārgaḥ svābhāvyaṃ te na vidyate//
도(道)가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道의] 수습(修習)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도가 수습된다면 그대가 말한 자성으로서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보듯이 산스끄리뜨 원문에는 '苦'가 아니라 '도(道, mārga)'라고 쓰여 있습니다. 만약에 산스끄리뜨 원문을 그대로 한역한다면 "24) 道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첫 글자인 '苦'자를 '道'자로 바꾸어야 산스끄리뜨문과 일치하는 번역이 됩니다.
구마라습 스님이 번역하면서 '도'자를 '고'자로 바꾼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산스끄리뜨 원문의 출처인 월칭(짠드라끼르띠)의 <중론> 주석서(<쁘라산나빠다>)에 실린 <중론 게송>이 구마라습이 번역한 ' 산스끄리뜨문 청목소의 <중론 게송>'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주석자인 청목이 이를 바꾸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제 생각에는 구마라습 스님이 <중론 청목소>를 번역한 후 후대에 이를 필사하여 복사본을 만들거나 목판본으로 판각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나서 '道'자를 '苦'자로 잘못 옮겨쓴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에서 보듯이 24-24) 게송 바로 앞의 24-23) 게송을 비교해 보면 앞의 여섯 글자가 똑같습니다.
24 - 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即破於滅諦.
24 - 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即無有定性.
따라서 필사자가 24-23) 게송을 베껴 쓴 후 그 다음의 24-24) 게송을 필사하면서, 원래는 "24 - 24) 道若有定性, 則"라고 베껴야 하는데, '道'자 이후의 다섯 글자(若有定性, 則)가 바로 앞의 23) 게송과 똑같기에, 무심코 23) 게송의 앞 부분을 옮겨쓰는 실수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24-24) 게송의 첫 글자가 '苦'가 되든 '道'가 되든, 청목소에서는 이를 '法'으로 바꾸어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청목소 : 法若定有。則無有修道。何以故。若法實者 則是常。常則不可增益。若道可修。道則無有定性。法이 만일 확고히 존재한다면 수도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만일 法이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상주한다는 말인데 상주한다면 더 증장될 수도 없다. 만일 도가 닦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에는 확고한 자성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게송과 주석의 번역문이 다른 예를 <중론>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중론> 제24장 18게와 이에 대한 청목의 주석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여러 가지 인연(因緣)으로 생한 존재를 나는 무(無)라고 말한다. 또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또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18)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upādāya pratipatsaiva madhyamā//
연기(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 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 공성]은 실로 중(中)의 실천이다.
衆因緣生法。我說即是空。何以故。眾緣具足和合而物生。是物屬眾因緣故無自性。無自性故空。空亦復空。但為引導眾生故。以假名說。離有無二邊故名為中道。是法無性故不得言有。亦無空故不得言無。
여러 가지 인연에서 생한 존재를 나는 공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여러 가지 인연이 다 갖춰지고 화합하여 사물이 생기는데 이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그 실체[= 自性]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 더욱이 이 공도 역시 또 공하다.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거짓된 이름[假名]을 붙여 [空이라고] 설한 것이다. 또 유와 무의 양 극단[二邊]을 떠난 것이기에 이를 중도라고 부른다. 이 법은 그 자성이 없으므로 유라고 하지 못하고 공도 존재하지 않기에 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여기서 보듯이 게송에서는 '無'라고 번역했는데, 주석에서는 '空'이라고 번역합니다. 산스끄리뜨 원문은 'śūnyatā'이기에 '空'이 통상적 번역어인데, 구마라습 스님은 게송에서는 굳이 無로 바꾸어 놓고 청목의 주석에서는 空으로 씁니다. 이는 '無'와 '空'의 의미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한 구마라습 스님의 '전략적 번역' 같습니다.
따라서 24-24) 게송의 '道' 또는 '苦'를, 구마라습 스님이 청목의 주석에서는 '法'으로 번역한 것 역시 '전략적 번역'으로 생각됩니다. '고'든지 '도'든지 모두 '법'에 포함되기에 보다 포괄적 의미로 <중론>의 '법공' 논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질문2)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22), 23), 24), 26)번째 게송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24 - 22)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24 - 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即破於滅諦.
24 - 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即無有定性.
24 - 25)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상기 게송의 밑줄 친 부분의 의미는 모두 같은 의미로 번역이 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볼드체의 색칠한 부분의 한자가 바뀌어져(노란색 : 若苦약고, 초록색 : 苦若고약) 있습니다. 구마라습이 이렇게 바꾼 특별한 까닭이 있을까요?
답변
[먼저 말씀드릴 것은 위에서 24-25)라고 적은 게송은 24-26)게송입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님의 오타입니다.]
만일 범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했다면 24-24)의 첫 글자가 '道'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 열거한 게송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을 겁니다.
24 - 22)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24 - 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即破於滅諦.
24 - 24) 道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即無有定性.
24 - 26)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앞 부분만 한자의 음을 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약고유정성 ....
고약유정성 ....
도약유정성 .... (위에서 설명했듯이 원래는 '도약'인데, 필사자가 '고약'으로 오사했다는 가정 하의 복원)
약고정유성 ....
뒤의 세 글자가 '유정성'으로 똑같기에 앞의 두 글자를 '약고'든지 '고약'으로 똑같이 쓰면 문장의 리듬이 단조로워집니다. 그래서 '약고 → 고약 → 도약 → 약고'과 같이 변화를 주는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말로 작문을 할 때에도 같은 단어를 되풀이해서 써야 될 경우,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그 단어를 그대로 쓰지 않고 이음동의어를 쓰게 됩니다. '약고 → 고약 → 도약 → 약고'의 변화 역시, '대 문장가'이면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번역자'인 구마라습 스님의 '멋 부림'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불전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할 때 의지해야 하는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대지도론>에 실려 있는데, 원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경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 뜻을 이해하기 쉬운 것과 심오하기에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고 할 때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오늘부터 1.법에 의지해야 하며 사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2.뜻에 의지해야 하며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3.지혜에 의지해야 하며 알음알이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4.요의경에 의지해야 하며 불요의경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佛經有二義:有易了義,有深遠難解義。如佛欲入涅槃時,語諸比丘:「從今日應依法不依人,應依義不依語,應依智不依識,應依了義經不依未了義。」
우리가 불전을 읽고 이해하고자 할 때, '말'이나 '단어'에 매달리다 보면 본령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문장이나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반추하면서 이해해야 하는데,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불전의 가르침이 소재로 삼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아무 전제 없이 철학적으로 사유'해 보아야 합니다. 몇 날, 며칠, 몇 달, 몇 년을 사유하다보면, 내 나름의 해답이 얻어집니다. 그 이후에 다시 불전의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발견한 해답과 대조하면서, 경문을 해석할 경우 본뜻에 부합하게 경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채근담>의 한 구절인데, 불전은 아니지만, 불교를 공부할 때에도 우리가 지침으로 삼아야 할 교훈입니다.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며
한 글자도 펼치 보이지 않지만
항상 큰 광명을 내뿜는다.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여기서 말하는 '항상 큰 광명을 내뿜는 ... 한 권의 경전'은 '내 마음'을 의미합니다. 불교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이기에 불전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내 마음'으로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사유함으로써, 불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질문3)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21)번째 게송이 若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김성철(2021), 『중론』, p400 )되어 있는데, CBETA의 원문은 苦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로 되어 있습니다. 苦를 若으로 바꾸어 쓰신 이유가 별도로 있으신가요?
답변
cbeta뿐만 아니라 <대정신수대장경>의 원문을 찾아 보니 저의 오타입니다. 1993년 <중론> 번역서를 출간할 때부터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던 것인데,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새로 인쇄할 때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교수님 이렇게 자세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증거의 제시를 통하여 필사자의 실수로 인하여 결론적으로는 경전의 판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설득력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신 부분과 특히" 문장이나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반추하면서 이해해야 하는데,..." 라고 말씀해주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