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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79
ㅡ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오도된 교육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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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역사 글을 쓰게 된 원인이 두 가지가 있는 데 오늘 쓰는 이 한 편이 그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광해에 관심을 가지고 글 몇 편을 쓰다가 멈추었습니다.
그러다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를 당쟁이나 정쟁 입장이 아닌 다른 시긱으로 봤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오도된 교육관에 의해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영조와 사도세자 같은 비극은 현재도 진행중이라는 관점에서 역사 글 비슷하게 쓰다가 이왕 쓰는 거 조선시대를 한 번 써보자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 교육이 엄청난 잘못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7년이 넘어 지금까지 해 오고있는 현직 도의원으로서 총 10 번의 도정질문을 하면서 절반이상을 교육문제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본회의장에서 내 외침은 항상 메아리없는 외침이 되고 맙니다.
들으면 교육강0이나 도자사도 공감은 한다고 말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문제는 대통령도 손을 못 되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오도된 교육관은 250년 전 우리가 성군이라고 일컷는 영조라는 왕이 편집병에 걸렸을 정도로 심각하게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그 편집병으로 자식을 뒤주 속에 가둬 잔인하게 죽이고 맙니다.
250년이 지난 영조와 사도세자 비극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제도권이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 놓은 뒤주 속에 가두어 져 매일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청소년 자살율,
광적인 교육열에 빠진 엄마를 죽이고 마는 비극,
시방 우리 아이들은 교육지옥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다.
내 글이 조금이나마 그런 학부모들의 오도된 교육관을 바꾸어 주는 계기가 되었음 정말 좋겠습니다.
이 글은 가능한 많이 퍼다 날려 많은 분이 보았음 합니다.
물론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의 오도된 교육관 뿐만 아니라 아주 복합적이고 복잡한 정치상황과도 맛 물려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차츰차츰 알아 보기로 하고 오늘은 영조의 오도된 교육관으로만 들어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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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오도된 교육관ㅡ
영조는 조선 제 21대 왕으로,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총 52년간으로,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끈 왕으로 알려져 왔다.
영조는 나름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폈는데,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거나 개정하였다. 조선 초기 태종이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설치했던 신문고 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백성들이 국방의 의무대신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줄이고 똑같이 걷는 '균역법'을 제정하고 나라 살림에도 앞장 선다.
영조는 학문을 좋아해 서적의 편찬과 보급에도 힘썼다. 유능한 학자를 육성하고 그 학자들이 실학에도 눈을 뜨기 시작해서 조선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하지만 영조가 아무리 성군이었고 백성에 관한 정책을 폈으며 탕평책으로 정치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지만,
영조시대는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벽서사건 등에서 수 십 만 농민들이 반란세력과 같이 들고 일어설 만큼 백성들은 엄청난 어려움속에서 살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정조에 의해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1735-1762,]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제 22대 왕 정조의 친 아버지이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무예가 뛰어 났다고 일려졌다. 영조를 대신하여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이에 노론들은 사도세자 대리청정 행위를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영조 또한 사도세자 대리청정을 신하들 앞에서 잘해도 핀잔, 못해도 핀잔을 주면서 개망신주기 일쑤였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사도'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잘 표현 되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빠졌다. 그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는 괴이한 행동을 함으로 해서 영조의 눈 밖에 벗어나기 시작한다.
영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노여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 영조는 사도세자와 만나고 오는 날은 자기 귀가 더럽혀 졌다고 귀를 씻을 정도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서 철저한 따돌림과 엄청난 미움을 받게 된다.
영조의 이런 행동에 사도세자의 광증은 더 심해져 도를 넘어 서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영조 38년 5월 22일에 나경언의 고변 사건이 터지고 만다. 나경언은 역모가 있다고 영조를 뵙기를 청해 놓고 역모를 말하는 대신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낱낱이 고해 바친다.
이에 영조의 사도세자를 향한 분노는 하늘을 찌르듯이 높아졌고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사도세자는 석고대좌에 올랐으나 영조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나경언의 고변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쌓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들어가는 벌을 받기 바로 전 날, 사도세자가 궁녀를 칼로 베어 죽이고 칼을 들고 영조를 죽이러 가겠다고 하는 것을 사도세자 부인인 혜경궁홍씨와 친어머니인 영빈이씨가 말리자 그 둘까지 죽이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날 친어머니인 영빈이씨가 영조를 만나 전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영조에게 자세히 말하고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청했다고 한다.
'사도'라는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다음 편에서 말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도제자 부인인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만 나온다.
한중록은 조선 당쟁 정치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주 문제가 있는 저서이다.
아무리 그래도 친어머니가 세자인 자기 자식을 죽여주라고 주청했을까?
어쩠든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사도세자 친모인 영빈이씨가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고했다는 다음 날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한다.
그 날 영조실록(1762) 기록을 보면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임금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 하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1762년 사도세자는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28세의 나이로 뒤주 속에서 죽고 만다.'
사도세자의 죄목은 궁녀를 죽인죄, 여승을 궁녀로 만든 죄, 20여일 동안 남모르게 수상한 행동을 하며 유람한 죄 등 등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상으로 들어난 죄이었다.
그 이면에는 더 무서운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처단할 수 밖에 없게만든 조선 당쟁의 비극이 숨어 있었다.
사도세자 죽음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 당파싸움으로 인한 정확하게 말하면 노론 벽파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도세자 죽음을 놔두고 노론도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 진다.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노론강경파, 시파는 사도세자를 동정하여 죽음만은 면하게 하려는 노론온건파를 말한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라 일부 탕평책을 썼지만 영조시대는 노론정권 시대였다. 특히 나주벽서사건 이후는 노론이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도세자는 소론이 일으킨 나주벽서 사건 때 소론에게 온정론을 폈다. 이에 노론들이 사도세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물론 노론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도세자 비극의 원인을 당파적 이유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영조의 오도된 교유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조가 이처럼 극도로 사도세자를 미워한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끼?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 아들 정조도 죽이려했지만 정조는 공부 열심히 하고 극도의 성실함을 보였기 때문에 영조가 마지막 직계 혈통인 정조 만큼은 끝까지 지켜준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먼저 아들( 효장세자)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만다.
영조는 지금으로도 늦은 나이(42세)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니 얼마나 소중하고 귀여운 자식이었을까?
온 궁중의 축복 속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영조가 태어난 지 1년 후에 왕세자로 책봉된다. 조선 역사상 없는 일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왕위 자질을 시험하기위해 15세 어린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소중히 여기는 아들이었다.
영조가 어린 사도세자를 얼마나 끔찍히 소중하게 여겼는 지는 아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도세자가 3세 때인 1738년의 어느 날 경종의 장인 어유구(魚有龜·1675∼1740)가 입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안고 있었다. 두 해 전 생후 13개월 만에 전례 없이 세자로 책봉하면서 영조는 이렇게 썼다.
“너(사도세자)는 내가 늦게 얻었지만 하늘이 특이한 자질을 부여했다.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달라서 자라서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사도세자 이선’·수원화성박물관 엮음)
영조가 이런 소중한 아들을 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을까?
영조가 사도세자를 당쟁의 희생물로서만 죽이기까지 했을까?
설마 아버지가 지기 친아들을 죽이기까지 하겠냐 하면서 뒤주 속에 스스로 들어간 사도세자 심정은 뒤주 속에서 하루 하루 날이 갈수록 어때했을까?
하루 이틀 그 이상이 지나면서 뒤주 속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의 엄청난 고통속에서 사도세자의 피맺힌 외침의 소리가 지금 내 귀에도 울리는 거 같다.
" 아바마마, 소자의 죽을 죄가 무엇이옵니까? "
사도세자에 죽음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것 처럼 당파싸움, 사도세자의 광증등 여러 설이 있지만 나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앞서 말한 것처럼 영조의 오도된 교육관이 문제라 본다.
영조가 왕이었지만 조선의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무수리 출신 천민의 아들이라는 출생 열등감에 사로잡혀 신하들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기위해 영조는 학문에 열중하고 몸가짐에도 아주 철저하게 조심했다.
그러한 것이 지나쳐 영조는 스스로 편집증에 걸려 버렸다. 영조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도신하들 보다 더 뛰어난 학식으로 우뚝 서길 바랬다. 이런 생각이 지나쳐 영조의 과잉 교육열과 오도된 교육관으로 변해 버렸다.
요즘 세대 부모들과 거의 똑같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사십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이자 당시 유일한 아들이었다. 영조의 당시 기쁨과 아들에 대한 기대는 실록에 나온 기록만 봐도 상상을 초월한다.
아들이 돌이 지나자마자 세자로 정하고 조기교육을 실시하며 사도세자 세살 때는 조선 최고의 학자가 가르키게 한다.
사도세자도 어릴 때는 이에 어느 정도 부응하여 천재적인 모습도 보여 영조를 흡족하게 해준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 부터 시작한 공부에 사도세자가 진절머리를 내면서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공부시간에는 머리가 어지럽다는 꾀병을 부려 빠지기가 일수여서 영조의 분노를 사게 된다.
결정적으로 세자가 열살 될 무렵 영조가 세자를 직접 불러 '공부하기가 싫으냐' 묻자 사도세자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하여 영조의 분노에 불을 질러 그 이후부터 영조는 사도세자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영조가 천민의 아들이라는 출생신분의 열등감때문에 편집증적인 질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영조의 편집증적 병이 오도된 애정으로 변하고 또 오도된 교육관과 함께 사도세자에 대한 강력한 증오로 변한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영조는 아직 어린 15세 밖에 안된 사도세자를 대리청정으로 시험 해 본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앞서 말한 노론의 지독한 견제로 대리청정으로 인한 정신적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영조 또한 이런 사도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보다는 신하들 앞에서 사도세자를 구박하면서 반 병신으로 만든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라는 영화에 이런 모습이 잘 표현 된다.
이에 사도세자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거의 광증에 걸리고 만다. 이때부터 사도세자의 괴이햐 행동들이 나타난다
이런 사도세자의 모습을 본 영조는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한 감정을 넘어 증오까지 하면서 조선 최대의 비극이 시작 된 것이다.
사실 사도세자는 당시는 잡서라고 했지만 삼국지연의 등 무예와 전술에 관한 책은 병석에서도 놓지 않고 볼 만큼 심취했으며 직접 무예도 단련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사도세자는 '무예신보'라는 조선 최고의 무예지도 직접 쓸 만큼 몸을 쓰는 방면에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사도세자는 체구도 컸고 건장했으며 무예도 아주 뛰어 났다.
그러나 영조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영조는 사서삼경등 유교경전만을 달달 외우기를 바랬다.
다른 분야에서는 뛰어난 자질과 흥미를 가진 사도세자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요즘 세상에도 너무 흔한 이야기 아닌가?
지금의 국영수처럼 오로지 사서삼경만이 전부로 안 조선시대의 오도된 교육관에 빠져있던 영조의 과잉 교육열이 이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다른 분야에서는 뛰어났지만 단지 사서삼경 고리타분한 학문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이런 영조의 오도된 교육관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광증이라는 병에까지 걸려 조금 이상 행동을 보였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영조는 그러한 것을 전혀 모른채
자기 눈높이에서만 사도세자를 바라보고 미워하고 증오했다.
영조의 이런 증오는 급기야 사도세자를 좁은 뒤주 속에 가두어 자기 아들을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게 만들고 만다. 영조는 아비에 의해 살해 당하는 조선 최대 비극적인 인물의 장본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 상상속에서나마 세자의 신분으로서 좁은 뒤주 속에 갇혀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 "아버지가 설마 나를죽이기 까지 할까?" 하면서 오늘, 내일을 기다리던 사도세자가 되어 보자.
상상만으로도 갑자기 숨이 막혀 오고 눈물이 쏟아 지려 한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 꺼내 보니 사도세자 손톱이 하나도 없이 다 빠져 있었다 한다.
얼마나 심한 고통속에서 몸부림 쳐 겠는 가?
뒤주 속에 갇힌 7일 동안!
이러한 비극이 조선시대에만 있었을까?
지금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보지 않는 가?
얼마 전 과잉 교육열에 사로 잡혀 아들을 학대하다가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슬픈 어머니의 이야기,
결과는 반대지만 비슷하지 않는 가?
오늘도 우리사회 일등주의 경쟁교육과 학벌위주 사회의 대입입시제도 때문에 부모들의 과잉 교육열과 오도된 교육관 때문에 우리 아들, 딸들이 사도세자처럼 좁은 뒤주 속에 갇혀 고통을 호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가?
세계 최고의 학생 자살율!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살이 20년차로 한국이 너무나 좋다는 獨 출신 기자·PD 안톤 숄츠는 한국사회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교육문제를 꼽았다.
“한국은 정말 좋은 점이 많은데 교육이 독일과 크게 다르다. 한국의 교육 수준은 높지만 핵심이 잘못됐다. 독일은 교육을 잘 받으려고 시험을 본다. 한국은 시험을 잘 보려고 교육을 받는다. 시험은 도구인데 한국에서는 시험이 목적이다. 요리를 하는데 재료가 아니라 프라이팬을 돌리는 기술에 집착한다. 한국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 자신처럼 고생할까 봐 애를 안 낳는다는 한국 사람들도 있다. 독일에서는 학원이 뭔지도 몰랐다. 독일에서 초등학생에게 밤 10시까지 학원에 다니게 하면 주위에서 정신상태를 확인하려고 할 거다. 독일 초등학생들은 오후 1시면 학교를 마치고 논다. 노는 게 창의성을 키운다.”
"스펙이 없으면 직장을 구하기 힘든 게 한국의 현실이다.
독일에서는 구직자를 찾을 때 사람을 보는데 한국은 학벌, 부모의 직업, 토플점수 같은 숫자를 본다. 독일에서는 아무도 토익점수를 묻지 않는다. 나도 토익, 토플을 한 번도 안 봤지만 큰 기업에서 통역 일을 했다. 독일에서는 시험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잘 풀 사람을 원한다. 그러니 창의성과 실질적 경험을 중시한다. 독일에서 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결국 ‘좋은 교육’ 때문이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교육문제를 날카로케 아주 쉽게 이야기 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교육을 바꾸지 못 하는 걸까?
요즘 학생들이 일등주의 대입체제 좁은뒤주 속에 갇혀
" 아빠, 엄마! 우리가 잘못 한 것이 무엇이나요? "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이처럼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늘 날 오도된 교육관과 교육열은 사도세자와 같은 비극을 지금도 수도 없이 만들어 내고 있고 앞으로는 더 많아 질 것이다.
물론 사도세자의 비극은 많은 것들이 복합되어 일어난 일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영조의 오도된 교육관과 교육열이 만들어 냈다는 것이 내 확신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없는 사도세자가 양산되고 있다.
이어서 혜경궁 홍씨 한중록과 사도세자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