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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의 다른 점은
출 24: 12-18. 마 17: 1-9
1400여년의 사이를 두고 두 사람이 각각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처음의 사람은 기원전 1400여년 전에 시내산에 올랐던 모세였고, 다른 한 사람은 모세보다 1400년 뒤에 산에 오른 예수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분들이 산에 오르는 것을 통해 세계 역사가 바뀌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따라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출 24:12)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자 구름으로 산이 가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시내산 전체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구름은 적어도 6일 이상 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이레째날 하나님은 모세를 구름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 광경을 출애굽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출24:17)
불같이 보이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모세는 40주 40야를 머물러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 아래로 내려올 때 하나님은 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역사에 매우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지고 옴으로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법도(율법)의 체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1400년 뒤 나사렛 예수님께서 역시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가시지 않고 가장 가깝게 지내며 사랑하는 친구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을 데리고 산을 올라 가셨습니다. 그들이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transfigured)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마태복음을 기록한 성 마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저의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 라"(17:2)
제자들은 이런 광경을 처음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은 믿어지지 않는 황홀경 속에서 또 하나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보다 1400여년 전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와, 예수보다 800여년 전에 살다가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디어 이 황홀경 속에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 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 이다"9마17:5)
베드로는 정말 그러고 싶었을 것입니다. 산아래 내려가 봤자 예수님을 해치려는 무리들이 매사에 트집을 잡고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회적으로나 신분상으로 괜찮은 사람들보다는 헐벗고 굶주리거나, 낭패와 실망 당한 사람들이거나,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들만 구름 떼처럼 모여드니 베드로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변화산(헐몬산 또는 다볼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산아래 예수님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세상권세를 초월해서 하늘의 권세를 잡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베드로는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렇게도 존경하고 숭상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세상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기 변화산 신비의 세계 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도 때로는 베드로처럼 변화된 신비의 세계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족을 거느리고 직장이나 사업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며 소망을 걸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크면서 실망감을 갖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업도 만만치 않습니다. 넘어야 할 산들이 첩첩이 쌓일 때 너무 피곤하고 짜증스럽습니다. 교회 생활도 생각대로 흡족함을 느낄 때보다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현실 세계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신비의 세계가 있다면 현실의 삶의 무거운 짐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떠나서 거기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찬송가222장)
베드로가 한껏 들떠서 말씀드리고 있을 때 빛난 구름이 그들을 가리웠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거룩한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17:5)
(This si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hear him.)
제자들은 이 음성에 압도되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엎디어 두려워 떱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17:7)(Arise, don't be afraid!).
이 말을 듣고 눈을 들어 보니 거기에는 예수님만 홀로 계시고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 라"(17"9)
예수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은 그들의 눈으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믿으려 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 여기서 두 사람을 비교해 봅시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올라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산 아래로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예수는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후에 산 아래로 내려와서는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He gave the world himself). 이것이 유대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이 흉내낼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입니다. 유대주의와 기독교신앙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 율법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법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형벌이 따릅니다. 물론 완벽하게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바라볼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러했고 웨슬리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Himself)을 내 놓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 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비탄과 번민 속으로(in our heartache)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속으로(in our weakness)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의 모든 죄와 삶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아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기독교 교육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성육화(incarnation)를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크신 은총이 없습니다. 두 팔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환호할만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하나님이 함께 걸으시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겪고 있으니 얼마나 우리를 잘 이해할 것입니까?
그러나 세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신의 위치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神이신데, 神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어리석은 결심을 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토니 켐펠로(Tony Campolo)라는 사람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희랍인들은 인간은 두 가지로 형성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것(the physical)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the spiritual)입니다. 희랍인들에게 육적인 모든 것들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과 인간의 육체는 모두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all spiritual things)은 선하고 완전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의 몸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희랍인들에게는 미친 짓(crazy)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왜 영적이신 하나님이 육적이고 악한 부문(the physical, evil realm)으로 스스로 낮춰서 오시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희랍인들은 복음을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격하시키고 말았습니다. 희랍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있어서도 안될 일로 치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발전시켜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다는 것은 대단한 은총의 선물로 이해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목이 갈 하면 먹을 물을 공급해 주시고, 굶주리면 먹을 것을 배부르게 주셨으며, 이방인들의 침략이 있으면 하늘의 천군들을 보내시사 막아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택한 백성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여 구원의 길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세계 속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을 설득하여 자신의 뜻과 목적한 바를 성취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외교관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설득하여 내가 뜻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를 많이 연구합니다. 요즘에는 "설득심리학"이라는 책까지 출판되었습니다. 엊그제 학회에서는 '설득심리학'에 대한 주제 발표가 있었습니다. 로버트 치알디니가 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6가지 불변의 법칙"에 대해 어느 목사님이 발표를 하였습니다.
설득심리학의 연구에 의하면 무엇을 얻으려 할 때 일보후퇴하고 이보전진의 전략이 필요하답니다. 만약 누구에게 5만원을 빌리려고 한다면 먼저 15만원을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첫 요구에 응하면 원하는 것의 3배를 받으니 좋고, 만약 그 요구가 거절되면 '5만원만 빌려달라"고 양보하면 상대에게 첫 번째 요구를 거절한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두 번째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품 매장의 판매원들도 고객이 오면 먼저 가장 비싸고 좋은 모델을 예외 없이 권합니다. 만약 고객이 그것을 구입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부하면 그때 비로써 적당한 가격의 모델을 제시해서 비싼 모델과 별 차이가 없음을 설명하면서 부추기면 사게 마련입니다. 이런 실례들을 찾아서 분석한 것이 설득심리학입니다. 설득심리학에서 조사한 6가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불변의 법칙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상호성의 법칙"입니다. 은혜나 거절에 대한 빚진 마음을 갖게되면 그것을 되 갚아야하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설득 당합니다. 둘째는 "일관성의 법칙"입이다. 한번 무엇인가 시작하면 버리기가 어려움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회적 증거의 법칙"입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습관입니다. 넷째는 "호감의 법칙"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부탁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미녀가 부탁하면 거절 못하는 것이 남자들입니다(예: 타파웨어 파티). 타파웨어 파티에서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제품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하면 호감을 갖게 되고 구매욕을 부추깁니다. 일단 사람들이 사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호감을 갖고 사게 마련입니다. 다섯째는 "권위의 법칙"입니다. 권위의 실체뿐 아니라 권위의 단순한 상징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여섯째는 "희귀성의 법칙"입니다. "한정판매! 얼마 없습니다.". "이 제품은 이제 5개밖에는 없습니다". "살려는 사람이 많은데 특히 너에게 준다" 등등의 말로 상품의 희귀성을 내 세우면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경쟁심을 일으켜 상품을 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설득의 법칙을 가지셨습니까? 동질감의 법칙이라고나 할까요? 나병환자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나병에 걸린 선교사들이 바로 예수님의 설득법칙을 따른 참 제자들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성육화 사건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군에서 오랫동안 전투를 치른 장군이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전쟁에 참전해 본 경험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아들은 전쟁과 역사 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통해서 지식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오랜 세월동안 야전군 사령관으로 전쟁터에서 세월을 보낸 노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전략전술이나 군사작전에 대한 견해에 늘 동의를 하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늘 "전쟁은 매우 진지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통해서 전술을 익힐 수는 없다. 반드시 전쟁터에서 경험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그 나라의 왕은 이 젊은 장군의 아들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확실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술을 온 나라의 군사작전에 적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군사전문가들이 이 젊은이의 작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작전 적용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진언을 했으나 모두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왕은 늙은 아버지, 노장을 물러가게 하고 아들을 그 자리에 앉혀 군작전을 지휘케 했습니다. 작전지휘권을 맡은 아들은 불과 며칠 사이에 40만명의 병사들을 잃거나 적군의 포로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중국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전쟁을 안 사람들은 결코 믿지 말라"(Never trust a man who knows the war only from books)라는 말을 속담처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장 경험이 없는 전술은 실제 전쟁터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보다 더 잘 설득하기 위해 멀리서 인간을 바라보시지 않고 직접 인간들의 경험 속으로 들어오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셔서 고통과 아픔의 우리의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의 슬픔을 함께 겪으시고, 인간이 되어지는 희열의 기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결코 다른 종교들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 해도 결코 같이 취급될 수가 없는 별개의 신앙이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음"은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지위를 끌어올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시킨 사건입니다.
이런 비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큰 도시의 거리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발길 닿는 대로 목적지 없이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걸으면서 많은 사람과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세 번 머물렀었습니다. 그날밤 예수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오늘 거리 산책(걸음걸이)을 즐겼느냐? 무슨 흥미 있는 일이라도 보았느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예, 아버지. 나는 오늘 산책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나는 산책 도중에 세 번이나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길을 걷고 있는 제사장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제사장은 양손을 합장하고 자신에게 무언가 중얼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사람들을 위해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내 자신이 외로운 젊은이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청년은 생존의 수단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 요령과 지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숙달된 소매치기(an accomplished pickpocket)였습니다. 세 번째는 양손에 어린아이를 붙잡고 있는 어느 여인 안에 제 자신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를 떠났고 그 여인은 남편의 도움 없이 아기들을 돌보고 사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화를 계속합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 배울 수 있겠느냐?" 탄식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아버지, 나는 벌써 배웠습니다.". 아들이 대답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세상에 보낸 것은 나의 선함(goodness)과 나의 사랑(my love)을 말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지 않느냐?". "예, 아버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들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그들의 아픔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아들의 말에 아버지께서 물으십니다. "그들 자신이 선택한 아픔이 아니더냐?"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아버지, 그 아픔이 어디에서 왔건 간에 아픔은 아픔입니다"(Father, whatever it comes from, pain is pain). 아버지는 단호하게 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인간의 마음에 깊이 빠져있구나"(You let your human heart carry you away). "예, 아버지! 나는 인간의 마음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시며 그의 아들에게 다가서셔서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다시 그 날 큰 도시 안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시고 행복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잘 묘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와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나 그들의 증언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완전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것을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요,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는 구약성경과 함께 명백한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구약성경의 신앙은 충분치 않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그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어법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구약성경(모세율법과 예언자들의 예언들)에서 너희는 이런 것들에 대해 들었으나 그것 가지고는 불충분하므로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밝혀주신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신앙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약(the New Testament), 새언약(the New Covenant)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바뀐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갖고 구원과 축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관계를 허락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정말 우리의 구세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생명 바쳐 그 분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결단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 속으로 오셔서 함께 겪으시면서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이 영원히 사는 구원받는 길을 우리 앞에 제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라도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결심하고 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의 말씀이 들려 올 때 결심하고 말씀대로 순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놓으면 죽을 것 같은 삶의 무거운 짐들이 우리를 피곤케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으셨으니 세상의 줄은 놓아야 할 것입니다.
존 모워리(John Mowery)라는 사람이 어느 등산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등산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정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수년동안 준비한 후에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광을 혼자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등산길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등산을 시작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캠핑(camping) 할 기구들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더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마 안 가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높은 고지에 이르렀을 때는 어둠이 깊었을 때였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시거리가 제로였습니다. 모든 것이 캄캄하고 까맣게 되었습니다. 달도 없었습니다. 별들은 구름들로 가리워있었습니다. 그가 정상으로부터 100m쯤 떨어진 절벽을 오르고 있을 때 자신감에 넘쳐있던 등산가는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고 맙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그에게 단지 지나가는 어둠의 반점들만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공포와 고통의 순간 속에 좋은 기억, 나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마음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몸이 어디에 걸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마치 몸이 반쪽으로 찢어지듯 출렁거리며 매달려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허리에 묶여진 긴 로프에 그의 몸이 지탱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잠시 정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소리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도와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Help me, God! Help me). 그러자 하늘로부터 깊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살려주세요. 구해주세요".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소리칩니다. "너는 정말 내가 너를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입니다. 나의 하나님!". 그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붙들고 있는 로프를 끊어라. 줄을 끊으면 너는 산다"(Then cut the rope that is holding you up). 정적과 침묵이 다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더 세계, 더 세계 로프를 붙들었습니다. 로프를 끊는 순간에 그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더욱 세계 로프를 붙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 날 구조팀이 발견한 등산가는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지상으로부터 불과 2피트, 겨우 60cm 정도 떨어진 높이에 로프에 매달려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어느 날 지상으로부터 불과 60cm정도 떨어진 높이에 매달려 있을 분이 있을 것입니다. 거칠고 가파른 전투에 직면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외롭고 무서움에 떨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거친 전투장에 여러분들을 계속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큰 소리로 대답하십니다. "네가 만일 나를 믿는다면, 네가 지금 잡고 있는 세상 줄을 끊어 버려라". 왜 끊지 못하십니까? 왜 줄을 놓지 못하십니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이 붙들고 있는 죽음과 공포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용기의 믿음을 주십사고 기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