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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9:1-4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겸손해지도록 자연의 여러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증언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위엄을 주장하는것 못지않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깨우치기에 적절합니다 다윗이 양보하기 싫어하는 교만한 사람들을 공포로 후려치고 부드러운 책망으로 권고한 후에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친절하게 그 신자들을 초청합니다.
1. 본문 1절은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입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또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게 합니다.
그러나 지위가 높은 유명한 사람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그들에게 명령하기가 더 어려우므로 다윗은 특별히 그들에게 말합니다.
칠십인역이 sons of rams로 한 것은 히브리단어들의 유사성으로 빚어진 과오였습니다.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유대인 주석가들은 모두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말할 때, 그들은 가장 냉담한 논평으로 모호하게 곡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천사들로 해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별들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위 높은 사람들이 거룩한 열조들을 의미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다윗의 유일한 의도는 교만으로 도취되어 하나님을 대항해 그들의 뿔을 높이 쳐들고 있는 이 세상 군주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레, 우박, 폭풍, 번개로서 하늘의 어떠한 권세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완악하고 목이 곧은 거인들을 순종시키시는 것으로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고 특별히 권능 있는 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미친 듯이 모든 신적 특권을 가르치면서 불경건한 행동으로 그들의 높은 지위를 남용하는 것보다 더 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겸손하게 자신들을 맡기고 또 그들의 연약함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강제로 강요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라고 명령합니다.
시편 29 편
그들은 자신의 위험한 상상에 기만당하여 자기들이 소유한 능력이 하늘로부터가 아닌 다른데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교만을 버리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며 여호와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도록 권면합니다.
2. 본문 2절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여호와께 그의 이름의 영광을 돌리며 그의 성소의 광명에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칼빈)" 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엄에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는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님에게 탈취한 것으로 여깁니다.
'돌리다' 라는 반복은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올바른 자백을 강요한다기보다 그들이 부지런히 재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소의 광명'(칼빈)이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천국이 아니라 문맥에 분명하듯이 하나님 영광의 상징들로 장식된 언약의 성막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선지자는 모든 사람들이 미신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경배로 돌아오도록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나타내셨던 이 장소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막연하게 어떤 하늘의 능력을 경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유일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이 경외를 받으셔야 하는데 이것은 세상의 모든 어리석은 고안물과 또한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진 예배들이 교정되기 전까지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3. 본문 3-4절은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 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입니다.
이제 자연의 경이들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합니다.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작품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능력을 잘 찬양합니다.
하늘과 땅의 전체 구조를 통해 자연의 일상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다윗은 시편 19편 1절에서처럼 해와 별들, 또 하늘의 모든 것들과 땅의 모든 풍요한 것들을 제시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세상이 처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증거 할 뿐 아니라 무감각한 자를 일깨우고 또 그들을 무시한 채 그들을 끌어내 겸손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작품들을 선정합니다.
시편 29 편
이방 시인이고 향락주의자이며(Epicurean) 하나님을 악하게 한 멸시한 호레이스까지도 그의 송시(Odes) 중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Lib. I. Ode xxxiv.).
"하늘과 기도로부터 도피자인 나는 모든 종교적 두려움을 조롱하였다.
광적 철학의 혼란된 학문에 깊이 묻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돛을 올리고 내가 이전에 떠났던 축복의 항구로 다시 돌아가리라."
"자, 보라! 저 두려운 하늘의 폐하를, 그는 때때로 구름을 불로 쪼개시며,
낮의 어버이신 불멸의 주피터 신이로다.
석양에 산들바람이 살랑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하늘의 얼굴이 고요하고 아름답도다. 그의 천둥치는 군마(軍馬)와 날개 달린 전차는 사라졌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대담하게 멸시하는 자들이 천둥이나 폭풍, 또 맹렬한 폭동과 같은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의식으로 무례하고 무감각한 사람들을 후려치는 이런 실례들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게 합니다.
또 아무리 그들이 게으르고 무관심하더라도 그들을 행동하도록 일으킵니다.
다윗은 태양이 매일 떠오르며 생명을 주는 빛을 널리 뿌린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 비가 그 습기로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내린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천둥이나 사나운 폭풍우, 그리고 이와 같이 맹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치는 것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가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졸음, 그보다 우리의 혼수상태를 그 거대한 소음으로 일깨우는 저 소리들입니다.
이 말씀이 가능한 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내쫓아버리려는 완악하고 무모한 사람들에 대하여 지적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비유는 곧 다윗의 의도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양보하지 않으려는 완악한 사람들을 두렵게 굴복시키려는 것인 사실을 충분히 나타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이 장엄하고 격렬한 폭풍 속에서 들린다고 세 번씩 반복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는 그것이 능력과 위엄으로 가득 찼다고 덧붙입니다.
시편 29 편
시29:5-8 여호와의 소리가
이 시편에는 "여호와의 소리" 란 말이 일곱 번 의미 있게 반복됩니다(1-9).
이것은 자연 현상으로 나타난 우뢰소리를 영적(靈的)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는데 호응(呼應)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뢰소리를 들을 때에 과학적인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해석을 지나서 별다른 경역에 도달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시인과 우리는 자연 현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낍니다.
이 시인의 사색은 과학자가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공기를 진동시키는 음성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靈魂)을 진동시키는 음성입니다. 자연계(自然界)는 우리가 핑계할 수 없으리만큼 하나님께 대해 증거합니다(롬1:19, 20).
1. 본문 5-8절은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 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레바논을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칼빈)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 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입니다.
선지자가 인간의 완악을 굴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두려운 분인 사실을 나타냅니다.
선지자는 교만한 자들의 광증(狂症)과 주제넘게 들떠 있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그 사람들은 번개로 대기를 가르고 높은 산을 뒤흔들며 높이 치솟은 나무들을 넘어뜨리고 뒤엎으시며 그 천둥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모든 비이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떠는 데 유독 감성과 이성을 부여받은 피조물인 인간만이 동요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더구나 특별한 재능과 학식을 갖고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의 마음을 울리지 않도록 그들의 귀를 막기 위해 마술을 사용합니다.
철학자들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 분의 하신 일로부터 아주 멀리 분리시키지 않는 한 그 사람들의 열등원인들에 대하여 충분히 노련하게 추론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자연의 것에 고정시키고 또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다면 그 모든 것은 악마의 학문입니다.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을 알고 싶을 때 그 사람의 얼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사람의 손톱에 시선을 집중하였다면 그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당연히 조롱받을 것입니다.
시편 29 편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 속에서 자신의 손길을 분명히 나타내시는데도 그의 손길을 그들이 깨닫지 않으려고 억지로 간접 원인(mediate causes)과 근접 원인(proximate causes)에서 벗어나 스스로 엉켜 있는 철학자들의 어리석음은 더욱 큰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레바논의 백향목"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높게 치솟은 아름다운 백향목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레바논' 과 '헤르몬산' 그리고 '가데스 광야' 를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장소들이 유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고도의 시적 비유를 구사합니다.
다윗이 '레바논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송아지같이 뛰며'(칼빈), 또 '시룐'(한편 헤르몬산이라고도 불리어짐) 이 가장 빠른 동물들 중의 하나인 '들송아지' 처럼 뛴다고 말하였을 때 다윗은 참으로 과장법을 동반한 고상한 시적 비유를 사용합니다.
또 다윗은 무서운 천둥 소리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 천둥소리는 그 산들의 기초를 거의 뒤흔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라고 말할 때 이것은 수증기가 하나님의 망치로 맞아 번개와 벼락으로 터져 나온다는 비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운석(Meteors)에 관한 책에 이런 문제를 잘 추론합니다.
그러나 근접 원인에 관계되는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점을 빠뜨립니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는 만일 우리가 자연의 조성자에게로 마땅히 안내된다면 참으로 유익하고 즐거운 공부가 되리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접 원인을 만날 때 그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수많은 장애물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중지 당하고 지체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전 생애 동안 아무 발전이 없이 기초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결코 알 수 없을 그러한 때에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민함과 신중한 열심만이 칭찬받을 만합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우리를 하늘까지 들어올림으로 어떤 혼란스러운 소리도 우리의 귀를 때리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가슴에 파고 들어와 우리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진동하다'라고 번역했던 (야힐)이란 히브리어를, '하나님께서 가데스 광야를 해산의 고통으로 진통하게 하셨다' 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광야를 통과할 때 발생했던 이적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너무 난해하고 또 곡해되었기에 우리는 반대합니다.
다윗은 오히려 인간의 공통 감정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같습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천둥, 우박, 폭풍우를 만났을 때 더 무서워합니다.
시편 29 편
시29:9-11 여호와의 소리가
자연계 보다 더 높은 세계에서 나는 음성이 있습니다(10, 11).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통하여 그의 장엄한 음성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때에 이 시인은 높은 세계에서 천사들의 찬송을 듣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영감의 소유자만이 들을 수 있는 천사들의 찬송입니다.
본문에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시인이 우레 소리를 듣는 때에 영적으로 본 것은 심판주 하나님의 자세(姿勢)입니다.
우레 소리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우레 소리도 지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함 없이 살아 계셔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본문 10절에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① 우레 소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② 동시에 하늘 위의("그 전에서"란 하늘 성전) 천사들의 찬송을 듣습니다(9).
③ 살아 계신 심판주 하나님의 왕권을 보았습니다(10).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힘을 얻으며 따라서 평강을 누립니다.
특히 1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그 위에 많이 진술된 뇌성으로 나타난 자연 계시를 특수 계시의 광명에 의하여 해석하는 결론 말씀입니다.
뇌성이 구속 받은 성도들에게는 공포를 주지 않고 위안과 힘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자연 계시는 이중언어(二重言語)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불신자에게는 위협이고, 신자에게는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편에 "여호와의 소리"란 말이 일곱 번이나 나오는 것은 계10:3에 이른 바 "일곱 우레"란 말씀에 응합니다(Delitzsch).
1. 본문 9절은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입니다.
1) 본문 9절 상반은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입니다.
암암리에 비교가 이루어집니다.
시편 29 편
하나님의 음성이 야생동물들에게는 그렇게 큰 능력과 영향을 미치는데 인간들이 그 음성에 감동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악이며 괴이한 일입니다.
자연의 모든 과정 속에서, 참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비열한 배은망덕입니다.
그러나 야생 동물들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최소한의 진기하고 놀라운 일에서 그 인간들에게 지혜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밉살스런 무감각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다른 짐승들보다 '암사슴'이 언급된 것은 그것이 새끼를 낳는데 어렵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은밀한 곳이나 동굴 속까지 파고들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덮개가 없는 까닭이거나, 혹은 번개나 비, 폭풍우 등이 나뭇잎을 강타하여 나무를 벌거벗기고 말기 때문입니다.
2) 본문 9절 하반은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온 세상에 가득차고 또 가장 먼 곳까지 음성이 미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오직 그의 교회에서만 찬양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알기 쉽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신자들에게 자신을 온유하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에서 여러 방법으로 천둥을 치는 하나님의 무서운 음성이 귀를 때리며, 또 인간의 마음을 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기보다는 그들을 떨게 합니다.
이것은 귀머거리의 귀를 돌려 폭풍우와 비, 천둥 번개 속에서 그 소리를 듣도록 하는 내용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복종시킬 만큼 이 공동 학교에서 많이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지혜롭게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특별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음성으로 친근하게 교훈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르게 선포하지 못하며 다만 자원하여 그를 경배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계되는 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온 세상을 꾸짖고 또 하나님의 음성이 모든 지역을 통하여 울려 퍼지고 있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다만 하나님의 성전에서만 노래되고 있다고 한탄하는 하소연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29 편
그러나 다윗은 모든 경건한 자들의 본을 따라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도록 권고하고 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을 세운 것처럼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그분에게 합당한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는 하늘과 산들과 삼림에서 천둥과 소나기와 폭풍 가운데 들리는 음성보다는 다른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분명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게 하심으로 우리를 친절하게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벙어리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분명히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고 주를 찬양하기 위해 우리의 입을 열게 하는 것만이 구원의 교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를 찬양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곳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당시에는 유대 이외의 다른 모든 세상에서는 경건에 대한 빛을 아무데서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학자들까지도 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일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다만 냉담한 것일 뿐입니다.
또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종교는 가장 맥빠진 것들 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참 경건으로 인도하고 또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며 섬기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진리가 반짝이는 곳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뿐입니다.
2. 본문 10절은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일시에 세상을 뒤엎으시고 모든 시대에 하나님이 인류의 심판자라는 것을 증거 하신 때 하나님의 그 진노에 대한 유명한 실례를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에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미는 더욱 확대됩니다. 다윗은 앞에 나온 주제를 계속 취급합니다.
지금도 온 땅을 멸망으로 위협하는 홍수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어 하나님 한 분만이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비록 그 요소들이 가장 격한 날씨에 의해 뒤섞이고 혼합된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에서 이 폭동들을 진압하시고 완화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다른 증거들 가운데서 언급합니다.
시편 29 편
이와 같은 설명을 위해 다윗은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3. 본문 11절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이전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이다 볼 수 있도록 그의 명백한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선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전에 취했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들을 압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무하고 격려하시며 그들을 강하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힘'이라는 말은 인간 모든 상태로 이해합니다.
경건한 자들의 생명보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다윗은 이런 은혜와 평강을 '복' 이라는 말로 확대합니다.
하나님이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하시는 사람들이 그들의 번영하는 생의 과정 속에서 또 그들의 완전한 행복에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평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태도로 우리의 번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으로 소망할 것을 배우며 또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시므로 우리가 무적의 요새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시30:1-5 여호와여 내가
다윗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큰 위험에서 구원받은 큰 경험으로 하나님을 향합니다.
먼저 다윗은 혼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같은 의무를 수행하도록 그들을 초대하며 격려합니다(1-5).
다음에 다윗은 번영 속에서 너무 자신만만하여 우쭐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방심이 징벌 받은 것은 당연했다고 고백합니다(6-10).
세 번째로 다윗은 슬픔을 간단히 나타낸 후 다시 감사로 되돌아갑니다(11-12).
1. 먼저 본문 주제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다윗의 집 낙성식 때 불렀던 시 -칼빈)에 대하여 상고 하겠습니다.
주석가들은 이 시가 다윗에 의하여 기록된 것인지, 혹은 바벨론 포로에서 유대인들이 돌아온 후 선지자들 중의 어떤 한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것인지 의문을 갖습니다.
그 주석가들은 '집' 이란 말을 '성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목이 분명히 다윗의 이름을 나타내는 대로, 여기서 말하여지고 있는 건물은 다윗 개인의 집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다윗이 자신의 궁전을 바치려 하였을 때 중병에 걸렸다는 가정(假定)은 확실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 역사에 기록된 내용에서 다윗이 자기 왕궁을 짓자, 곧 그 왕궁에서 조용히 거하면서 안식을 누렸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2)고 부끄럽게 느끼는 점을 말하였습니다. 그밖에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어떤 형태의 위험을 질병으로 제한하는 것은 아주 근거 없는 일입니다.
압살롬이 죽자 그의 도당이 제압되고 그들이 일으킨 치명적인 폭동이 진압됩니다.
그 후에 다윗은 추방됐던 곳에서 돌아와 이전에 머물던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오게 해주심으로 자신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자신의 행복한 상태에 너무 기쁘게 도취되어 부당하게 또 어리석게도 그 자신이 불행에서 완전히 자유라고 자신에게 약속했기에 하나님의 손에서 자기가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더구나 다윗은 장엄한 왕궁을 상속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의 왕국은 아직 평화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한 망각증세가 살며시 그에게 들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멸망의 바로 끝까지 그를 몰고 가는 위험에 그를 노출시킬 때가 아직 못되었습니다.
시편 30 편
그러므로 이 시편에서 다윗이 자신의 이전 상태로 자기를 회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닙니다.
압살롬의 근친 상간과 여러 악으로 더럽힌 다윗의 집을 다시 바침이 필요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다윗이 생명을 회복한 것과 다윗 왕국을 회복한 두 가지 복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왕국의 공적 임무들을 안정시킨 후에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다윗은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자신의 집을 하나님께 정중하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의식에 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데 대단히 느리고 냉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행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의 순수하고 합법적인 사용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그의 옛 백성들에게 부과되었습니다.
마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년 동안의 산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집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이 나그네라는 사실과 또 나그네인 그들을 보호하시고 또 그들에게 거주지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집을 빌어 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위한 징집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가 아직 그의 집을 바치지 못하였다고 진술하면 이것은 정당한 면제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동시에 이 의식은 누구나 자기 집을 올바르며 질서 있게 즐기도록 그들을 권면 했는데 이는 다만 그가 가정을 통제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성소처럼 되어지고 또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건과 순결한 예배가 그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 한해서입니다.
그 율법의 형태들은 지금 그쳤지만 그러나 우리의 용도를 위하여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딤전4:5)는 바울의 교리를 우리는 계속 지켜야 합니다.
2.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입니다.
다윗이 무덤으로부터 생명을 주는 대기로 끌어올림을 받았을 때에,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를 그의 손으로 끌어올리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으로 주를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다윗이 말하고 있는 그들을 인해서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하는 "대적"이란 말을 우리는 국내와 국외의 모든 원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30 편
사악하고 나쁜 성품의 사람들이 노예 근성의 아첨으로 그에게 알랑거리며 아부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를 대적하는 은밀한 증오를 가슴에 품고 기회만 있으면 그를 모욕하려고 준비합니다.
3. 2절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죽음 바로 직전에 이르렀을 때, 다만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며 또 자기가 그렇게 한 것이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를 받았다고 결론짓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분이시며 또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분이신 사실을 우리들로 확실하게 결론 짖게 하는 증명입니다.
히브리어 (라파) 가 '치료하다' 를 의미하기에 주석가들은 질병으로 한정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때때로 '회복하다' 혹은 '다시 세우다'를 의미하며 더구나 이 말은 제단이나 집에 적용되어 수리되거나 재건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떤 종류의 구출사건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매우 적당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단순히 질병이 아니고도 다른 많은 방법에서 위험한 상태에 직면합니다 다윗이 모든 슬픔과 극도의 위험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여 주실 때마다 그는 생명을 회복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 형태입니다.
따라서 의미를 확대하기 위해 다윗으로서는 즉시 그 다음 말씀을 이어갑니다.
4. 본문 3절은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라고 덧붙입니다.
만일 다윗이 급하게 자신이 강제로 내던져진 데서 반란의 불꽃이 꺼질 때까지 피하여 숨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했던 무덤과 구덩이에 그 시대의 흑암을 비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의 광대하심을 충분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생명이 회복된 자로 마치 자기가 죽은 후에 다시 살리심을 받았던 것처럼 현재의 죽음으로부터 놀랍게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또한 분명히 성경 역사를 보면 다윗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완전하게 절망으로 휩싸여 있었던가 하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시편 30 편
5. 본문 4절은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입니다.
자신의 감사를 더 잘 입증하려고 다윗은 모든 성도들을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자기와 합세하도록 합니다. 또한 한 부류로 다윗은 전체 몸을 묘사합니다.
다윗이 모든 기대 이상으로 보호하심을 받았고 또 이 실례를 통하여 모든 경건한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속적이고 무한하신 선하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때 다윗이 하는 이 권면은 자신의 구원은 물론 모든 교회의 일반적인 구원을 다 포함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풍부하고 신속하게 자기 백성들을 돕는데 익숙하신가를 되풀이합니다.
다윗은 한가지 특별한 실례로 확증한 다음 그의 생각을 일반 진리로 바꿉니다.
우리가 '온유함'(칼빈)으로 번역한 (하시딤)이란 히브리어는 다윗이 종종 이 말로 신자들을 묘사합니다. 그 의미는 이미 시편 16편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신자들의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마5:45)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선행을 하도록 자극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함보다 더 진실된 것은 없습니다.
하반절에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기념물'(칼빈)은 성막으로 돌려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마치 다윗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권고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기념물인 언약궤 앞으로 나오도록 한 것처럼 됩니다.
히브리어 글자 (라멧)은 때때로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념물'이라는 단어가 '이름'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쉽게 응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자기가 만드신 작품에 자신을 기억할 만한 가치를 부여하셨기에 하나님의 작품들은 영광을 밝히 보이고 또 이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6. 본문 5절은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입니다.
여기에서 "평생"이 "잠깐"에 반대된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긴 연속을 의미하거나 혹은 나날의 계속적인 시간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만일 하나님이 어느때에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면 하나님은 그 형벌의 준엄성을 완화하실 뿐 아니라 즉시 그의 진노를 진정하시고 또 누그러뜨리신다고 암시합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는 오랫동안 계속하십니다.
시편 30 편
다윗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계속적인 표명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에 관하여 특별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는 편을 택합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온유한 마음으로 또 얼마나 신속한 복종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매에 등을 돌려 복종하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젊음이 피게 되는 순간부터 거의 전 생애 동안 많은 축적된 고통으로 몹시 피곤하여 모든 사람들보다 더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면서 다윗은 그 자신이 잠깐동안 가볍게 고통을 받았으며 또 지나는 김에 조금 고통을 받았을 뿐인 점을 인식합니다.
이제 그렇게 큰 온유와 마음의 평정으로 그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귀하게 생각했고 또 세상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그 자신이 십자가의 인내에 대하여 더 묵묵히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번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마구 게걸스럽게 그 복을 먹어치우거나 혹은 최소한 나태함으로 그 복이 빠져나가 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슬프고 불행한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에게 자비와 복을 베푸신 일이 없는 것처럼 그의 준엄성에 대하여 즉시 불평을 터뜨립니다.
괴로움에 처했을 때 우리는 조급하여 못 참고 순간 순간을 한 시대처럼 여깁니다.
반대로 우리의 불평과 배은망덕은 아무리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오랫동안 계속될지라도 다만 우리로 그것을 순간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잠간이며 우리의 전 생애 동안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적이라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완악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수천 대에 이르러 우리를 향해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며 또 오래 참으시고 진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며 또한 항상 용서하신다고 자주 선포하신 것은 공연히 그렇게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련되어 있는 만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54:7) 라는 말씀은 날마다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 세상의 상태는 우리를 그런 비참 속으로 빠뜨립니다.
또한 간신히 우리가 하루를 어떤 슬픔이나 고통 없이 보냈다는 그런 고통의 다양성에 의하여 괴로움을 받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많은 불확실한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시편 30 편
그러므로 인간이 향하는 곳 그 어디에나 악의 미로(迷路)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종들을 여러 가지 불쾌하심의 표징으로 두렵게 하시고 또 그들의 그 오만을 꺾으신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달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항상 그들에게 뿌리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노염"과 또 하나님의 "은총"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저울질한다면 그들은 노염이 잠간인데 반하여 은총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그 저울이 입증하였다는 사실을 항상 발견할 것입니다.
이 은총은 훨씬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 일시적인 인생의 한계 안에 제한시키는 것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확실한 것은 누구든지 그 마음을 세상 위로 들어올려 하늘의 삶을 맛보는 자 외에는 그 누구도 기쁨으로 자기의 책벌을 참게 하는 이 영원하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무적(無敵)의 인내로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고 언급합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자주 그들의 고통을 완화하지 않으시며 또 비통함을 위로하지도 않으시며 그런 무겁고 계속적인 징벌을 결코 그의 백성들에게 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마음의 생각을 천국생활로 향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받는 괴로움이 지속되더라도 자신의 고통 속에서 결코 연약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아주 크고 많은 은혜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보다 백 배가 훨씬 넘는다는 그런 영예를 하나님의 선하심을 평가하는 데에 둘 것입니다.
둘째 구절에서 다윗은 같은 것을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는 비유로 되풀이 합니다.
다윗은 단순히 그 괴로움이 오직 하룻밤 동안만 계속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만일 역경의 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였다면 저녁에나 혹은 석양 무렵에 슬픔으로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곧 그들에게 빛이 비추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교훈의 요점은 우리가 너무 완고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동안 고통의 흑암으로 우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항상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기쁜 일이 있도록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30 편
시30:6-10 내가 형통할 때에
다윗 왕국의 견고함과 부요함은 오직 주의 은혜입니다(7 상).
그러나 그때 다윗은 자만감에 빠졌습니다(6).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우"셨습니다(7 중).
하나님의 외면은 죄에 대한 보응입니다.
하나님의 외면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은 없습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므로' 다윗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임하였습니다.
다윗은 시련으로 자기 왕국의 견고함과 번영이 하나님의 은혜인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근심(회개)" 하였습니다(7하).
다윗은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위기상황에서 주님을 찾고 부르짖었습니다(8).
그 내용은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로 죽고 만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9상).
'내가 죽으면 누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누가 주님의 진리를 선포하겠습니까' 입니다.
이 표현은 불손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생각하며 한 말입니다.
이 생각에 근거하여 다윗은 주께서 도와 주시기를 간구 하였습니다(10).
자만감에 넘쳤던 다윗이 이제는 겸손히 하나님께 도와 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1.본문 6절은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입니다
다윗은 인간 자신의 필멸적(必滅的)이며 변하기 쉬운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지나치게 자신의 번영에 집착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분별한 방심에 형벌 받아 마땅한 자신을 깨닫습니다.
'형통하다'는 용어로 다윗은 그의 왕국의 평온하고 번영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형통한'이라고 번역한 (실루아흐)라는 히브리 단어를 '풍부'라고 번역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때때로 다른 곳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형통하다' 라는 단어가 그 문맥에 더 잘 일치합니다.
다윗의 말처럼 운명이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미소를 보낼 때, 또 두려움을 일으킬 만한 아무 위험도 없어 보일 때, 우리 마음은 깊은 잠에 빠져 우리의 행복한 상태가 계속될 것이고 또 모든 일이 항상 동일한 과정으로 계속될 것으로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이 육욕적인 자신감은 성도들이 그들의 번영 속에 빠져 있을 때 또 그들의 분노 위에서 딩굴 때 이 인간적인 자신감이 자주 성도들에게 기어 들어갑니다.
시편 30 편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렘31:18)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훈련시키시기 전에와 멍에에 익숙지 못한 자신을 야생 송아지에 비교하였습니다.
이 육욕의 자신감과 인간적인 자신감은 언뜻 보기에는 작은 범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자만심에 대한 형벌로부터 그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고 있는가를 능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그 뿌리를 살펴볼 때에 우리는 이 형벌에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무수한 죽음이 우리 눈앞에서 계속 일어날 때 또 우리가 두려워하고 조심하도록 우리를 일깨우는 많은 변화의 실례들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이 세상의 일반 운명을 초월하는 특권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악마 같은 교만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온 땅이 무분별한 변화 속에 뒤범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로는 그 각개의 부분들이 여기저기에 딩굴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류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항상 안정을 유지할 것이며 또한 불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분방함으로 그들은 방자하게 그들의 욕망, 곧 교만과 잔학성에 빠집니다.
또 그들은 기도를 게을리 합니다.
참으로 그것에 대해 치켜세우거나 혹은 그들을 감동시킬 필요성을 하나님께서 갖고 있지 않으시는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향하여 달려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역시 세상의 어려운 폭풍우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형통하게 보호하여 주시는 그들 자신의 경건한 안전 속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동요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왕국이 계속될 것이라는 소망을 안고 있는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날개 위에 높이 들려졌을 때, 신자들이 역경을 경멸할지라도 그들이 인생의 일반적인 고통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그들의 설명을 고통들을 참고 견디는 데 두고 있으며 매 시간에 상처를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게으름을 쫓아버리고 또 그들이 지명된 것을 알고 있는 전쟁을 수행하며 겸손과 경의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맡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외의 어떤 곳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다윗에게 적용됩니다.
다윗은 그의 형통한 상태에 대한 유혹으로 함정에 빠졌을 때 그는 그 완전한 형통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마음 속에 기약하였습니다.
같은 일이 경건한 히스기야 왕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시편 30 편
비록 히스기야 왕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또 그의 소원대로 되자마자 지독한 질병으로 만년에 고통을 받았을지라도 그는 교만과 헛된 자랑에 대한 육체에 허영으로 마음이 조급하여졌습니다(대하32:24).
이것은 우리가 형통할 때 사단이 그의 아첨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더욱 관대하게 대할수록 그 사람은 그런 덫(올가미)을 더욱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다윗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이 세상의 지위가 높은 많은 사람들처럼 모든 불행들에 도전할 만큼 그렇게 강퍅하게 되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사치와 포만(飽滿) 속에 빠졌을 때 무례하게 하나님의 모든 판단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무기력한 무관심이 그의 마음을 덮어 그는 기도에 열의가 없어지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의 불확실하고 무상한 번영 속에 너무 많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2. 본문 7절 상반절은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된 확신과 가정에서 나온 육적인 안전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묘사합니다.
신실한 신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들이 사로잡혔던 많은 위험들과 그들 눈앞에서 지나갔던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여러 가지 실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들은 그런 일들로부터 경고를 받고 하나님 앞에 그들의 마음을 쏟아놓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다윗은 이 일에 대한 의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현재의 부와 평안에 안주함으로 또 그의 돛을 성공의 바람에 활짝 펼침으로 하나님이 내려주셨던 복을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손에서 사임하려는 준비가 된 것 같은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복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통이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오는 안전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복을 신뢰하는 안전에 대한 확신 사이의 대조를 관찰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그의 산을 굳게 세우셨다"고 말하였을 때 어떤 주석가들은 그것을 시온 산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요새나 혹은 요새의 망루라고 이해합니다.
그 이유는 옛날에는 성채들이 일반적으로 산 위에나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은유적으로 견고한 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시편 30 편
그러므로 선지자가 시온산이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신 스스로 이룩한 보금자리에 안정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동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7절 하반에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사를 빼앗긴 후에 자신의 완악한 마음의 질병을 치료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놀랍고도 믿을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시고 또 흑암을 가져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성공의 밝은 불빛 속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그의 종들의 눈을 여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억누르며 또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미혹을 몰아내기 위하여, 또 마음을 달래는 심취로 우리를 마취시키는 그런 미혹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맹렬하게 두려움으로 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다윗이 그런 치유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가졌다면 우리로부터 이 육적인 확신, 곧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질식시킬 수 있는 가득 찬 질병인 이 육적인 확신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빈궁한 상태에 있는 것이 유익하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의 선한 상태를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때때로 감추셔도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밝게 비췰 때라도 그 빛은 우리를 맹인으로 만듭니다.
4. 본문 8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입니다.
이제 다윗의 징계 결과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전에 깊은 잠에 빠졌으며 건망증으로 그의 나태함을 촉진하였습니다.
이제 다윗은 공포와 두려움에서 갑자기 깨어나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녹슨 강철은 불 속에서 다시 가열되어 망치로 두들겨질 때까지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육적 확신이 일단 지배력을 갖게되면 십자가에 의하여 연화되고 철저하게 정복당할 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스스로 기꺼이 기도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고통이 우리들로 우리의 비참을 깨닫게 하는 반면에 그 고통이 다시 우리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청하도록 하는 고난의 중요한 점입니다.
시편 30 편
5. 본문 9절은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절을 '내가 소명의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지나치게 곡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피'라는 용어가 '생명'을 뜻하지 않고, '죽음'을 뜻하기에 마치 다윗이 '내가 죽으므로 하나님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라고 한 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은 다윗이 자신의 죽은 몸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그 다음 10절에서 더욱 확증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장래의 계승자에 관하여 그에게 하신 약속을 다 이루시기도 전에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그를 데려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분명히 하나님의 '진리' 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믿음 사이에 상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공허한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또 그런 후에 우리를 실망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으로만 풍요한 약속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시는 매개체가 됩니다.
더구나 장수하기 위하여 다윗은 하나님 찬양으로부터 우리가 출생되어 양육을 받는 것을 찬양하는 마치 그가 '오 하나님! 무슨 목적으로 주께서 저를 창조하시었나이까?
그러나 내 생애의 전 과정을 통하여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나타내는 그의 은혜의 증인과 전령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니이까?
그러나 나의 죽음이 이 임무 수행을 단절시킬 것이며 또 나로 하여금 영원히 침묵토록 하시리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한 논증을 끌어냅니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참된 신자들의 죽음도 그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다만 죽음에 대하여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편 60편에서 이미 취급한 상황을 덧붙였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상속자를 약속하셨을 때 장수의 소망이 그에게서부터 나오며 이 약속이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실패하지 않도록 그가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라고 그가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완전히 성취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다윗이 증거 할 때까지 자기가 살아서 자기 소원 이룸은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시편 30 편
이 구절 끝에서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라고 질문함으로 다윗은 이미 시편 60편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죽은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할 힘을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육체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동안에 이 경건한 의무를 수행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제함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단념하여야 하며 또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이 죽은 자들이 하는 것을 공공연히 취급하거나 혹은 그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목적, 곧 우리가 상호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서로에게 나타내는 그 인생의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 일에 종사하게 하다가 마침내 죽음이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의 입술을 닫고 맙니다.
6. 본문 10절은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입니다.
이 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이전의 불평을 연화하며 또 수정합니다.
안전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또 이런 조급한 성품 속에 빠져 있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슨 유익을 얻느냐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다윗은 더욱 무리한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그 자신을 격려합니다.
또 새로운 희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자비와 도움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애원한 도움을 다만 그분에게서만 홀로 기대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제일 위에 놓습니다.
시편 30 편
시30:11-12 주께서 나의 슬픔을
다윗은 징벌로 인하여 자기와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30편 전체가 다윗이 기도 응답을 받은 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1. 먼저 시편 30편 전체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은 극한 환난 때에,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함께 찬송하자고 하였습니다(1-5).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주신 은혜는 결국 모든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럴 목적으로 한 개인에게도 은혜를 주십니다.
작은 거울 속에 태양이 비취는 것같이 한 개인에게도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합니다.
1) 다윗이 자기가 난관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건져 주신 사실을 성령으로 생각하고 깨달은 진리는 주님 안에서는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이 사실 많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징벌로 인하여 난처한 자리에 빠져 고생한 것보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건져주셔서 누리게 된 기쁨의 분량이 더욱 많다는 것입니다.
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란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 중심 생각을 하면은 인생의 한 평생에도 질병의 날보다 건강한 날이 더 많고 재앙의 날보다 평안한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재앙은 잘 기억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복은 잘 잊어버립니다.
이는 마치 장미의 냄새는 기억 못하나 가시에 찔린 것은 오래 기억함과 같습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 이라 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을 달게 받을 때에 그것 자체도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2) 다윗은 환난에서 건짐 받은 사실(1-5)을 역사적으로 말합니다(6-12).
그것은 곧 다윗이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때에 교만해져서 "내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6-).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복을 주셔서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교만해졌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얼굴을 가리우시게 되었습니다(7절).
다윗은 근심합니다. 다윗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줄 알았습니다(잠16:18,신8:11,14,19)
다윗은 하나님을 생략해 버린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근심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다윗의 회개의 태도입니다.
그 때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습니다(8-11).
시편 30 편
2. 본문 11절은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이 시편을 감사로 끝맺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안전하게 피하였던 것과 또 자기가 생애 마지막을 하나님 찬양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도움과 복이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고통 속에서 냉담하거나 완고하지 않았고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우울과 슬픔 속에서 애통해 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자기의 슬픔이 진노를 거두시게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자기를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최상의 가치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슬픔의 모든 감정을 성도들에게서 박탈하면서 성도들이 냉담한 무감각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이 자기 슬픔 속에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회개를 다윗은 '베옷' 이라는 단어로 나타냅니다.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통할 때에 베옷을 입는 것이 일반 관례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겸손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또 그들의 겸손과 자신들의 잘못을 베옷을 입는 것으로 증명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판단에 가까이 하게 하는 그런 죄책을 받아야 할 범죄 이상의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동양인들은 의식에 더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비록 참을성 있게 하나님께 복종하였을지라도 슬픔으로부터 자유스러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또한 다윗의 슬픔이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고후7:10) 근심이었습니다.
참된 회개를 증명하기 위하여 다윗은 스스로 베옷을 입었습니다.
'춤추다'라는 말은 방자하고 불경스럽게 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경이 언급하는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제자리로 옮겨갈 때에(삼하6:16) 하나님의 뜻, 곧 진리로 띠 두른 그 기쁨에 겨워 온전하고 거룩함으로 나타내었던 그런 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측해 보면 중요한 사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말하는 큰 위험을 혹자가 질병이라고 제한시키는 것은 부적당합니다. 다윗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부적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의 슬픈 의복을 벗어버린 것은 우울하고 슬픈 상태에서 기쁨으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이시라고 주장하면서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시편 30 편
3. 본문 12절은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보전하여 주신 목적을 깨닫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이 은혜를 하나님께 돌리는데 신중을 기한 사실을 충분히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육체, 어떤 사람은 영혼, 혹 마음의 더 높은 능력이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보완한 '나의' 라는 대명사가 히브리 본문에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이런 방법 곧 모든 사람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를 보충하면서 마치 이것이 모든 사람의 공적인 찬양에 의하여 찬양을 받을만한 가치를 가진 복이라고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대격으로 오히려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이 곡해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부여하였던 그 뜻을 지지합니다.
잘 알려진 '영광'을 의미하는 (카보드)라는 히브리어는 우리가 시편 16편 9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때대로 은유적으로 '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다윗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라는 말을 곧이어 추가한 것처럼 문맥은 다윗이 이곳에서 특별히 자신의 의무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뜻은 '오 하나님! 주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나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내가 알며 또 나의 혀로 주님에 대하여 내가 다시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므로 나는 주님에 대한 이 예배를 성실하게 찬양하겠으며 또 죽기까지 나의 책임을 완수하겠습니다' 입니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라는 말씀은 히브리어의 부연(敷衍) 설명법입니다.
마치 내 혀가 벙어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윗이 말하였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당연한 찬양에서 하나님을 탈취한다는 것과는 반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에 전념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11).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기쁨과 영광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다윗은 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12).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께서 땅에 오신 목적도 우리 속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평생 즐겁게 행 할 거룩한 의무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영영히 감사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