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 3. 31(목)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지음(知音)은 마음까지 통하는 절친한 친구

옛날 중국 진(晉)나라에 거문고의 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백아(兪伯牙)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자신이 태어난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문고 소리를 몰래 엿듣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향 친구인 종자기(鐘子期)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종자기는 "지음(知音)"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백아가 달빛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는 달빛을 바라보았고,
백아가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도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백아의 속 마음을 읽어냈던 것입니다.
결국 유백아는 자신의 소리를 알아 주는
종자기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이듬해 백아가 다시 고향땅을 찾았을때
종자기는 죽고 없었습니다.
백아는 친구의 묘를 찾았습니다.
마지막 최후의 한 곡을 뜯고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이세상에, 자기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故事)입니다.
이때부터 지음(知音)은
"마음까지 통할수 있는 친한 친구"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지음의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 내고 영혼을 읽어내는 친구,
부부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지만
마음이 통하는 면에서는 부부나 연인을 뛰어넘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관계의 사람,
벗과 우정을 나누는 방법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지음입니다.
그 벗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서로 지음이 되도록 승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에서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아도
마음의 소리, 영혼의 소리를 읽어내고,
"힘내세요!" 하며 밝은 미소를 건네는 친구에게서
진정한 지음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유백아(俞伯牙)

초(楚)나라 영도(郢都) 사람으로 이름은 서(瑞)이고, 자는 백아(伯牙)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이다. 초(楚)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에서 상대부(上大夫)를 지냈고, 거문고에 정통했다. 초나라의 은자인 종자기(鐘子期)가 유백아의 거문고를 잘 감상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동안 연주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유백아의 친구인 종자기는 벗의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춘추시대에 진나라의 상대부 유백아는 초나라로 사신을 나갔다. 어느 날 밤, 달빛이 청명하여 유백아는 뱃전에 앉아서 거문고를 치고 있었는데 종자기라고 하는 청년 나무꾼이 옆에서 몰래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유백아는 그를 발견하고 그에게 무슨 노래인지 물었다. 종자기는 말했다. “공자가 안회를 잃었음을 슬퍼하는 노래입니다.” 유백아는 그하고 음악에 대해 담론을 하였는데 그가 대답하는 것은 막힘이 없었다. 유백아는 너무 놀라 다시 곡 하나를 연주하여 곡 중에서 산의 높고 큰 형상을 표현하였다. 종자기는 이를 듣고 말했다. “높고 울창한 뜻이 고산에 있습니다.” 유백아는 계속 연주하여 물이 힘차게 흐르는 것을 표현했다. 종자기는 듣고 다시 말했다. “세찬 뜻이 흐르는 물에 있습니다.” 유백아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은 진정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참다운 벗이오.”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汉)시의 고금대에 있는 유백아와 종자기의 석상
두 사람은 즉시 결의형제를 맺고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다음 해 유백아가 시기를 맞추어 찾아갔을 때 종자기는 이미 병이 들어 죽었다. 유백아는 너무 비통하여 종자기의 묘 앞에서 마지막 노래를 연주하고 거문고를 부셔버렸다. 이는 자기의 유일한 지음의 친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뜻이었다.
유백아와 종자기의 진한 우정이 탄생한 지역
중국 후베이성의 성도 우한은 어떤곳인가?
우한(武汉)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성도(省都)로 총 면적은 8,494평방 킬로미터이며, 현재 1,022만 명의 상주 인구가 있다. 지리적으로는 중국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중국의 배꼽’이라고 불린다. 여름 평균 기온이 35도를 웃돌아 ‘중국의 4대 화로’라고 불리는 도시들 가운데 하나에 속하기도 한다.

삼국지의 유명한 ‘적벽대전’이 일어난 적벽, 중국에서 가장 큰 댐이 있는 이창(宜昌)이 모두 우한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에겐 양쯔강으로 더 잘 알려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인 장강(长江)이 우한을 지나 흐른다. 우한은 중국 중부지역 내 과학기술, 문화교육의 중심지이며 과학기술교육의 전반적인 환경이 베이징과 상하이 다음으로 우수하여 중국 내 대도시 및 중형 도시 중 3위이다. 무한시는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 세 지구로 되어 있는데, 한구는 그 중 상업과 교통이 가장 발전한 곳이고 한양은 무창과 한구를 잇는 위치에 있다. 주요한 볼거리로는 황학루(黃鶴樓), 동호(東湖), 무한장강대교(武漢長江大橋), 신해혁명무창기의기념관, 보통사(寶通寺), 장춘관(長春觀), 귀원사(歸元寺), 고금대(古琴台), 청천각(晴川閣) 등이 있다.
고금대

고금대는 백야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친구 종자기가 그 음악을 듣던 곳이다. 이곳을 흔히 유백아대(俞伯牙台)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다가 청나라 시대에 들어서 재건 되었다고 한다. 고금대는 우한시 한양구 귀산 서쪽 기슭, 월호(月湖) 동쪽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춘추시기 초나라의 악사 유백아(俞伯牙)가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심경을 토로하는데 산속의 나무꾼 종자기(鐘子期)가 음률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가 고산유수와 같은 포부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때부터 백아는종자기를 지기로 여겼다. 몇 년이 지난 후 백아가 다시 귀산을 찾았으나 종자기가 병으로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나머지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 버렸으며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의 깊은 우정에 감동되어 이곳에 대를 세워 기념했다. 고금대는 동쪽으로 귀산을 바라보고 북쪽은 월호와 가까이 있으며 호수의 풍경과 서로 어울려 경치가 아름답고 조용하고 쾌적하며 문화 자산이 풍부하다. 고금대는우한의 유명한 음악 문화 고적이자 후베이성과 우한시의 중점 문물보호 대상 중 하나이다.

고금대(古琴台)는 중국십대고곡의 하나인 "고산류수"의 발원 장소로 백댜야(伯牙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백아(伯牙)가 종자기(种子期)에게 연주한 두곡이 "고산유수(高山流水)'라는 곡조로 전해 내려온다.

유백아는 천풍도(天風操), 수선조(水仙操)와 같은 금곡(琴曲)을 완성했습니다. "순자(旬子)"의 관학편(觀學篇)에는 "그가 거문고를 타면 여섯필의 말이 풀을 뜯다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간밤에 용문동 소재의 '바다 양푼이 동태탕집'에서 酒님을 과하게 모신 관계로 승용차를 사전 집에 놓아두고 1711호 시내버스로 귀가했기에 아침 출근은 승용차로 편하게 아들녀석과 함께 출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전 한낮 옛사목회 부회장인 다윗형제가 긴급 SOS를 쳐왔습니다. 사연인즉 자기회사의 컴퓨터가 바이러스로 인하여 불통이기에 여직원과 함께 PC를 고치려고 용산전자상가로 왔다는 것입니다.

하여 함께 국내에서 제일 이름난 "명정보"로 안내했고, 그곳 책임자인 김이사와 평소 안면이 있던터라 잘 부탁을 드렸지요. PC를 정보센터에 맞긴 다윗형제는 안도하며 거하게 점심을 사고 싶다고 졸라서 지난밤 주임신부님과 함께 갔던 용문동 소재의 '바다 양푼이 동태탕집'으로 다시갔습니다. 지난밤에는 술잔을 비우기에 바빠서 동태탕의 진정한 맛도 음미 못했고 또 쥔장에게 행여 지난밤 상기인이 실언이라도 하지 않았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서비스를 한 쥔장에게 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쥔장 왈(왈) '절대 실언이 없었고 신부님 앞에서 자세도 너무 바르게 하여 놀랐다.'며 칭찬해 주어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입에 바른 소리일꺼라고 의아한 생각이 들긴하였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저녁에는 안토니오 형제님과 야고보형제님 내외분 그리고 호총무가 번개팅을 하자며 용산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지난밤에 주임신부님과 만난 것을 알곤 무척 궁금했나봅니다. 하여 그분들을 접대하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울 마나님이 용문동에 모임이 있어서 왔는데 용문동 재래시장에서 시장까지 보아 물건도 많았고 교통편이 좋지 않아 집에 같이 가자는 멧세지가 왔기에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이지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대월식당문을 나서야만 했습니다.

용문동 새마을금고 앞에서 기다리던 마나님을 태워 강변북로와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쌩쌩 거리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울 마나님은 소중한 분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뛰어나온 남편에게 무한한 존경과 깊은 신뢰감을 갖는 것 같았습니다. 일행에게는 대따 미안하기 그지 없는데... 그러나 일주일에 거의 한번 이상 늘 만나는 그분들은 아마도 제 마음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흑~흑~흑~
- 오늘의 일기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