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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말씀/ 야고보서 2:1-26 요절/ 야고보서 2:18 | 2024. 10. 6 | |
야고보서 제 2 강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신자의 삶은 경건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1장 후반부에서 참된 경건은 말을 절제하는 것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경건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긍휼로 나타납니다. 이 긍휼을 행하는 자가 참된 믿음의 소유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해 긍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신자들도 이 세속의 흐름 속에 휩쓸려 긍휼을 잊어버리고 경건에서 멀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긍휼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을 외모나 그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와 같은 인간조건을 보고 평가하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교회마저도 이런 세상의 영향을 받아 사람을 차별하여 대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의 모임이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신분이 비천하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할지라도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교회 식구들을 영광스럽게 바라보고 차별없이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어느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회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즉 부자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안내자는 그 사람을 눈여겨보고는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내밀며, 미리 비워 둔 자리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올 때는 고개로 ‘저기 서 있으세요. 정 다리 아프며 내 발등상에 아래 앉든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누가 봐도 명백한 차별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4절입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차별하는 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차별이 왜 악한 생각일까요?
5-7절을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유하게 하셨습니다(고전1:26-29).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영광의 주 예수님은 가장 부유하시지만 가장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시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죄인을 향한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이 긍휼을 받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차별주의, 외모지상주의, 인본주의, 물질주의를 버리고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섬깁니다. 또한 내 자신이 비록 가난하다 하여도 슬퍼하거나 운명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것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둘째,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차별은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을 정면으로 불순종하는 죄입니다. 사람을 조금 차별하는 것은 살인이나 간음에 비하면 별로 대단치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10,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차별은 형제의 인격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보면 차별은 인간의 본성과도 같아 보입니다. 차별하지 않고자 하지만 습관적으로 차별할 때가 많습니다. 이 문제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2,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반드시 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허물과 죄를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얼마나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었는가?’입니다. 우리는 일반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졌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의 모든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한없는 긍휼로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은혜를 아는 자라면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내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먼저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긍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긍휼히 여길 때 차별치 않습니다. 우리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목자님이 돕는 양은 영적인 소원도 없고 가정환경도 좋지 않고 몸도 아픈 양입니다. 이런 양을 돕는건 부담도 되고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목자님은 아무 조건 없이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매주 일대일 공부도 섬기고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돕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상한 갈대라도 꺾지 아니하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라도 끄지 아니하십니다. 죄로 인해 상한 갈대와 갖고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 나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죄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하는 나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도우시고 살리십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깁니다. 긍휼이 사람을 살립니다.
셋째,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이제 야고보는 긍휼 없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일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인가를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당장 입을 옷이 없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어죽게 생긴 그 사람에게 말로만 평안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어려운 사람을 말로 위로할 때도 영혼 없는 말을 하기보다 따뜻함과 진심이 담긴 말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심겨진 믿음은 내 마음을 건드리고 마음은 내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참된 믿음은 긍휼을 베푸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긍휼의 마음이 생기지 않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믿음 따로, 행함 따로 시대입니다. 말 뿐인 믿음만 가지고도 충분히 신자로 인정받고 구원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17절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이 약간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죽은 믿음’입니다.
신자의 의로운 삶은 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의 결과이며 열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과 호흡이 분리될 수 없고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은 반드시 호흡을 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흡이 없는 생명은 죽은 생명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자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것은 유대인이라면 아침저녁으로 고백하는 말이었습니다(신6:4).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고백만 하고 고백에 합당한 삶,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고백으로만 끝나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진짜 믿음이요참된 경건입니다.
21-26절은 참된 믿음의 본을 보여준 아브라함과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불신 가운데 있을 때,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확증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그는 문제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삶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특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를 인내케 하시고 온전함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호수아 2장을 보면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듣고는 벌벌 떨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하나님을 믿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기 민족을 배반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발각되면 당장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겨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과 믿음은 영혼과 몸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고 선한 행실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에서 본 것처럼 믿음에 따른 행함은 위험이 따르고 손해가 따릅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자꾸 지식적인 믿음, 말 뿐인 믿음에 머무르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송장 썩는 냄새와 같이 고약하여 불신자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고 혐오감을 줍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에 순종하여 가을학기 30명 양들 명단을 얻고 7명의 새 양들을 얻고자 캠퍼스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캠퍼스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갔지만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긍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제게 임하였고 더 나아가 양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양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두려워서 다가가도 도망가는 이들, 두려워서 초청에 응하고 오지 못하는 이들, 두려워 말씀에 순종하고 담기지 못하는 이들이 불쌍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돕고 섬길 수 있을까? 하는 긍휼의 마음으로 뜨거워져서 담대하게 양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연약하고 작은 저의 믿음을 봅니다. 주님이 주신 긍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동역자들과 양들과 가족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을 통해 참된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복음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복음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도록 도우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며 긍휼을 베푸는 삶으로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