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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매장및묘지등에관한법률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앞으로 묘지를 조성할때 개인묘지의 경우 현행 24평에서 9평 이내로, 집단 묘지의 경우 현행 9평에서 3평이내로 면적이 제한된다.보건복지부는 지난 18일 묘지면적의 제한과 납골당 운영 민간참여확대 등을 골자로하는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특히 납골당 시설설치의 경우 현행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했다. "가족 또는 종중이나 종교기관 기타 비영리법인이 납골시설을 설치할 경우 는 신고로서 가능하게한다"는 개정안에 따라 교계 납골당 건립이 한층 쉬워 질 전망이다.보건복지부는 이와함께 묘지면적 기준초과등 불법이 자행될 때 1회에 최고 5백만원의 벌금을 부과할수 있게했고, 분묘에 대한 개정법시행 뒤 5년의 유예기간을 둬 불법 무연고 묘지는 강제로 묘지를 이장할수 있게 했다.
"매묘법"개정안은 10월7일까지의 공람을 거쳐 관계부처협의, 국무회의를 거 쳐 국회상정 절차를 남겨두고 있어 빠르면 내년 7월1일부터 시행될 전망이 다.한편 정부의 법개정 노력과 함께 사회종교단체들의 장묘제도 개선움직임 이 최근 활발해지면서 매장위주의 장묘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정부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유골이 영롱한 보석으로 변신 ‘사리성형’ 뜬다.
장례문화, 의식이 바뀝니다.
http://blog.daum.net/bangyang/1983
http://blog.daum.net/kimchijusayo/229
10분 만에 영롱하게 성형,부패없이 영구 보관
납골당과 장묘문화 바뀔 신기법, 신기술.
(주)레스틴피스가 개발한 ‘휴안주’(休安珠)기술로 재탄생한 인체 사리가 영롱하다.
죽은 이의 유골분을 가져가면 단 10여 분 만에 보석처럼
영롱한 사리로 만들어주는 곳이 있어 화제다.
경기 고양시 벽제화장터 경내에 있는 사리성형센터(이하 센터)에서는 요즘 죽은 이의 유골을 몸에 지니거나 집에 안장할 수 있는 광물질 사리로 만들어준다 이 보석형 사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부패하거나 변질되는 등 화학적 변화가 없어 냄새나 혐오감 없이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
더욱이 유골분이 사리로 변하는 모든 과정을 유족이 볼 수 있어 신뢰를 얻고 있다. 이처럼 유골을 보석과 같은 사리로 ‘성형’함으로써 별도 시설 없이 어떤 장소에서든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도록 개발한 주인공은 (주)레스틴피스(회장 김옥평).
이업체는 국립 충주대학 과학기술연구원 교수진과 지난 10여 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지난해 3월 사리성형 기술을 완성하고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미국등에 세계 특허 출원한 상태다. 이전에도 유골을 사리성형해 보관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대부분 막대한 시설투자로 고온(1800°C)상태에서 장시간(2~3시간)유골분을 용융하는 성형과정을 통해 유골의 일부만 사리성형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휴안주’ 기술 미국·중국 등에 특허출원 하지만‘휴안주(休安珠)’라고 명명된 레스틴피스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3.7kw/h,700~950℃)에서 단시간(10분)에 사리성형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과 우수성을 가진다.
낮은 온도에서 성형된 사리는 상대적으로 기품 있고 영롱한 모습을 가질 뿐 아니라 항온, 항습, 방취, 방충시설이 필요하지 않아 다양한 사리함에 담아 원하는 장소에 모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뿐 아니라 유족이 원하는 경우 브로치, 펜던트 등으로도 만들 수 있다. 1월 3일 오전 11시 30분 센터를 찾아 유골분의 사리성형 과정을 확인 취재했다.
이날 공개 사리성형에는 장묘업체 관계자와 각 문중의 대표자들이 유골분이 사리로 바뀌는 과정을 보기위해 참석했다. 모든 과정은 한 치의 숨김없이 모두 공개됐다. 업체 관계자들에 의해 화장된 유골분이 센터안으로 들어오자, 원기술 개발자인 정현택 연구소장((주)미광 대표이사)은 여기에 밀가루처럼 생긴 하얀색 가루를 섞었다.
이게 바로 휴안주 사리성형 기술의 첫 번째 비기(秘技)로, 유골분이 천연광물질과 섞이면 용융점이 2000℃에서 800℃로 뚝 떨어진다. 그리고 유골분과 함께 녹아 사리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기능도 한다. 유골분과 비밀의 천연광물질이 7대3의 비율로 섞이자 직원들은 이 가루를 검은색의 탄소판에 옮겨 담았다. 소장용 보석함에 담긴 성형 사리. 김옥평 회장이 특허출원 등록한 ‘휴안주’기술은 저온에서 값싸게 유골분을 사리로 만든다.
동글하게 수십개의 홈이 파인 탄소판은 이 기술의 두 번째 비기. 나노입자로 만들어진 탄소판은 유골분이 한톨도 다른 곳으로 새나가지 않게 막음과 동시에 사리가 된 유골이 눌어붙지 않고 똑똑 떨어지게 하는 기능을 한다. 나노 입자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성형 후에도 유골분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탄소판을 다시 사용한다 해도 다른 이의 유골분과 섞일 확률은 0%다. 가정용 전압인 220V로도 사용이 가능해 업체는 앞으로 전기로를 버스에 장착해 이동식 사리성형 서비스를 할 예정. 따라서 전국 어디에서도 유골분이 있는곳이라면 단10여 분만에 사리성형이 가능해 장례 절차에 지친 유족의 부담이 최소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골분이 전기로에 들어간 지 7~8분 지났을까. 전기로의 문이 열리고 탄소판이 밖으로 나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유골분은 상온에 나온 지 2~3분 만에 급속도로 식으며 연초록과 푸른색을 띤 사리로 변했다. 연두색,초록색,심지어 에메랄드처럼 푸른색을 띤 사리도 있었다. 사리의 색깔은 죽은 이의 나이와 약물복용 이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심지어 흑진주 빛을 띠는 사리도 있었다.
나이가 적을수록 연초록이나 푸른 색깔을 띠고 더 영롱해지는데, 나이가 많고 뼈주사를 많이 받은 노인이라 해도 몇차례 성형을 거치면 아름다운 사리를 얻을수있다. 유족이 원하면 브로치·펜던트로 제작 이와 관련해 업계에서는 사리성형이 납골당 일색의 장묘문화를 바꾸는데 혁명적 구실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사리성형의 키포인트는 그 아름다움과 함께 만드는 과정이든, 보관 과정이든 사리에 화학적 변화가 없어 환경오염이 일절 없다는 점이다.
보석처럼 또는 유리알처럼 풍화작용에 의해 닳으면 닳았지 절대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 무색무취하고 변색, 변질되지 않는 특성이 반영구적으로 보장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따라서 세월이 가면서 유골분이 썩어 뭉치고 냄새가 진동하는 등 납골에 따른 각종 폐해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성형된 사리는 가정의 보석함처럼, 사리함을 둘 작은 공간만 있으면 반영구적으로 쾌적하게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화장한 고인의 유골은 97%가 칼슘성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습기를 잘 흡수해 변질되기 쉽고, 한번 변질되면 악취가 나고 심하게 훼손된다. 그래서 각납골당은 유골의 변질을 최대한 막고자 항온·항습 장치, 항균·방습 시설을 하느라 많은 돈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고급 납골당의 유골 봉안 가격은 천정부지로 비싸진다. 사리성형이 장묘문화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밖에없는 이유는 또있다. 화장한 유골분의 납골당 수요능력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국내의 화장률은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70% 선으로 이제 화장문화가 정착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공설·법인·종교단체 납골당의 봉안능력은 2003년 125만3128위에서 2008년 254만876위로 2배 증가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봉안 수는 8만3231위에서 67만6678위로 무려 700%이상 급증했다. 대도시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2008년 기준으로 봉안능력 대비 봉안 수 비율은 부산93%, 서울92%, 광주74%,인천54%등으로 전국 평균(27%)보다 훨씬 높다.
이상태로 가면 대도시 근교에선 납골당을 더는 구할수없는 ‘봉안대란’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사리성형 과정. 1.화장한 유골분과 사리로 가공할 물질을 배합 2, 3.탄소판에 유골분을 배열 4.고온의 전기로에 배합한 유골분이 담긴 탄소판 투입 5, 6, 7.전기로에서 꺼낸 유골분이 열기가 식는 동안 영롱한 사리로 변신한다.
보수적인 퇴계 자손도 사리성형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수적 장묘문화가 뿌리박힌 유명 종중에서도 사리성형을 한 사례가 나왔다. 퇴계 이황선생의 자손(진성이씨)인 고(故)이윤학 씨가 그 주인공. 지난해 11월 11일 작고한 이씨의 시신은 화장을 한 뒤 이황선생 직계자손들의 문중 납골당인 진선궁에 모셔졌다.
이씨의 유골분은 49재를 지낸 직후인 12월 29일 성형을 통해 사리로 변했고 다시 진선궁에 봉안됐다. 이씨의 가족들은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유골함에 봉안해 보관에 따른 갖가지 문제가 일시에 해결됐다. 언제라도 찾아가서 내손으로 만질수있고 볼수있어 좋고, 사리가 꼭 보석같아 이질감도 생기지 않는다”고 좋아했다.
이씨의 가족들은 매장된 이씨의 형과 형수, 아버지, 어머니 묘지를 개장해 이들의 유골도 사리로 만들기로 했다. 레스틴피스 김옥평 회장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시신과 유골 보관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만 남겨놓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절망을 안기는 것일 뿐”이라며 “사리성형은 결국 장묘문화의 대안이 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추모문화 또한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레스틴피스 김옥평 회장“맞춤식 추모식의 기술 -납골당 포화, 중국특수 기대”-
저온에서 단시간에 유골분을 사리로 성형할수 있는 기술을 개발, 장묘문화의 신기원을 이룬 (주)레스틴피스 김옥평 회장(사진)을 만나 사리성형 기술을 개발한 동기와 그 가능성에 대해 들어봤다. 김 회장은 “사리성형은 국내뿐 아니라 포화상태에 이른 납골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국등 전 세계적으로 장묘문화를 바꿀수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다음은 김 회장과의 일문일답. -저온 단시간 사리성형기술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가? “친구 부모님의 유골이 납골당에서 3년 만에 새까맣게 썩어 냄새를 풍기는것에 충격을 받았는데, 충주대학 과학기술연구원과 (주)미광이 저온에서 단시간에 유골분을 사리로 만들어내는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긴 시간 실패가 계속됐지만 그들의 성실함과 체계적인 이론에서 언젠가 성공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읽고 투자했다.
그 가능성을 믿었고 꿈이 현실로 이뤄졌다.” -사리성형의 의의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휴안주 사리성형은 유족 본인의 여건에 맞는 추모를 가능케 해주는 가장 탄력적인 방법이자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사리성형의 세계화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팔고자 하는 게 맞춤식 추모라는 이름의 치유 과정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산업화, 대도시화의 영향으로 더는 부모님을 가까이 모실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렇다면 생전에 계시던 곳에 모셨다가 충분한 추모과정을 거친 뒤 자연으로 돌려보내드리는게 유일한 해법일 수밖에 없다. 사리를 가지고 있다 후손이 싫으면 숲이나 강에 안치하면 된다. 공해가 없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 -휴안주 사리성형이 특히 화장이 법제화된 중국에서 히트를 칠 것 같다. “중국은 최대의 시장이다.
중국은 이미 화장은 기본이고 납골당도 포화상태다. 그래서 3년이 지난 유골은 지정된 산 같은 곳에 뿌리도록 돼 있는데, 중국 베이징에 사는 한 지인이 유골의 일부를 가져와 사리성형을 해달라고 애원했다. 아버님의 유언이 대서양에 유골분을 뿌려달라는 것이었는데, 일부분은 사리로 만들어 미국에 사는 오빠 집에 가져가고 싶어 했다. 중국은 특히 각가정이 자신들만의 신을 모시는 경우가 많아 더욱 가능성이 높다."
현대 한국천주교인의 장례문화 2016-05_임종에서 장례까지
한국의 장례문화(故이병희先生)
이제가면 언제 오나? -전통상여 장례
상여소리(천장행렬)
장례와 묘지 선택은 종교에 따라 본인이 선택해야 합니다. 거제 관포 양씨들은 종교나 가치관이나 가문의 정체성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해 후손들이 갈팡질팡입니다. 뿌리도 알지 못하고, 정체성도 없고, 후손들에게 교육도 시키지 못하고,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읍니다. 특히 묘지 제도는 양명생 형님 혼자만의 일이 아님니다.
저는 小國나라를 떠나 大國에서는 장례나 묘지 문화에 영원히 신경쓸 문제가 없읍니다. 첫째 국토가 한국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의 묘지는 제한적인 법적인 한계가 없어 永久的입니다. 그것은 법으로 아무도 규제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관포 양씨들이 앞으로 후손들의 장례를 대비해서라도 時祭日에는 門中文化와 후손들의 正體性을 위한 쎄미나seminar도 열고 토론도 하고, 의견도 나누는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화상으로 대화가 가능하고 카톡으로 또는 메일로 쎄미나 의견이나 발표가 가능하고 의견 교환이 가능하며, [카페] [啓示板]에 거제문중에서 [노트북]으로 회의내용을 그자리에서 올리면 전국 어디에서나 또는 세계각국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 내용을 바로 보고, 회의 내용에 대한 글을 확인이 가능하고 의견도 보낼수가 있고, 주장도 가능합니다. 하세요. 저도 참석 합니다.
1799년 기해년에 茶山선생 17세때 44세의 당대의 대학자 권철신이 儒佛仙 광학회를 개최한다는 소문을 듣고 섣달그믐날 저녁 서울 수표동 자택에서 天眞庵 주어사를 100여길을 멀다하지 않고 눈길을 혜치고 새벽에 도착한 26세의 당대의 선각자인 실학파 광암 이벽은 천학논증으로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열었읍니다. 거제남원 양씨의 선구적인 인물은 현재는 양명생 형님만이 할수밖에 없읍니다. 용기를 내시고 하세요 ~ 주저 하지 마세요 ~
아래 문양공 양성지공의 후손들이 어떻게 하는지 크릭 하시면 時祭때 몰려오는 전국 후손들의 무리에게 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저가 그곳에 참석하여 시제에 참석하였다가 문양공 평창공파 후손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아버님께서 만든 報牒이 맞다고 믿고 갔다가 너무 엉터리라는 사실로 돌파리 양가라고 쫓겨낫고 그후로 부산 동래양씨 국회의원인 양극필 종문이 항상 돌파리 양가라고 조롱해서 양또정이, 양정덕이 아저씨, 형님에게 찾아가 족보를 만들어야 한다니 코웃음치고 웃기지 말라고 해서, 혼자의 힘으로 1984년 양씨중앙종친회의 의결을 거쳐서 처음으로 大同譜(甲子譜)를 만들어서 양정덕 아저씨에게 갔다가 드렸더니, 경력, 학력이 빠졌다고 했읍니다. 그후에 1986년에 郡守公派譜(丙寅譜)를 刊行하였습니다. 이제 만드는 관포 양씨 차세대 보첩은 관포 양씨 양처해 선조님 비문 처럼 독단적으로 하지마시고, 정말 역사에 길이 길이 汚點을 남기지 않도록 저에게 상의하여야 합니다. 장목면지를 엉터리 자칭 사학가라는 사람에게 의탁해서 제대로 안된데도 어느 누구 한사람 지적도 못하는 얼간이들이 역사에 길이길이 오점을 남겨 고치는데는 限界를 두고 있듯, 우리 남원양씨 문중의 朝鮮朝때의 帶方君派譜가 바로 그것입니다.
http://blog.daum.net/bangyang/2638
정덕이 아저씨는 출장가서 양씨들이 항렬을 물으면, 남원에 가서는 正자요. 통영에 가서는 德자요. 했다니 얼마나 나는 바보요 하고 다녔는지 ~ 이름 있고 돈은 있어 梁氏中央宗親會에서 찬조금을 요청하면 덧덧하게 行列은 못대고 돈만 냈다고 했읍니다. 이것은 뿌리 없는 자손으로 만든 윗대 선조들의 矛盾으로 후손들이 사회생활하는데 크나큰 걸림돌을 채어 주어 사회생활하는데 주저 주저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꼴이 되어 마치 실력은 있어도 정덕이 아저씨 대학 졸업장이 없어 국장 진급 못했어 술만 드시면 祖上 원망했던 기억 나시지요? 이런 현실을 타개하는 중심 인물은 형님만이 아랫 동생들을 설득할수가 있을 것입니다. 거제 관포 양씨 동생들은 용기가 없어 아무것도 못합니다. 인터넷의 저의 싸이트에 들어와 저는 누굽니다. 안녕 하세요? 우리 마누라 애들 올려 주세요 하지 못하고, 댓글만 슬그머니 올려 놓고 인사도 안하고 나가는 용기 없는 놈들이 사회에 나가 무얼하겠읍니까?
저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1992년 미국을 올때 미국 대사를 만나 면접하고, 영주권을 가지고 가족이 왔읍니다. 고국을 떠났어도 故鄕 親戚들의 정체성을 위해 족보를 밤세워가면서 모르는것은 전화로 일일히 물어 가면서 만들었읍니다. 그런데 특히나 덕봉이 숙자, 경자, 명자, 득춘이는 말이 안통하고, 명자는 아이큐 ~ 또 족보 타령이요~ 오빠는 불법체류자일텐데 우리는 出嫁 外人이니, 빼 버리고 오빠나 잘하시고, 살기도 힘드니, 전화를 끝내자고 끝어 버리는 못나고 매정한 인간들에게 ~ 할말이 없읍니다.
당시 뉴욕 김정일, 양정자 부부가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저도 그런것으로 추측했던 것 같읍니다. 그리고 양득봉이는 족보가 살아가는데는 필요가 없고 살아가는데는 素養(소양)만있으면 된다고 했으며. 황포에 사는 양씨 일가는 하느님 믿으니 족보는 안믿는다고 했고, 특히나 동생이는 목사니 조상제사는 우상 숭배로 몰아부치는 胡虜(호로) 같으니 따질것도 못되더래도, 개방은 해 두어 스스로 깨닫고 반성할때까지 마음의 문을 열고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民心은 天心입니다. 民心을 잡아야 統治 합니다. 흥도 할아버지 좀 잘 산다고, 족보 하자고 돈 좀 더내라고 하니, 너는 왜 못사노? 하고, 반대해서 족보 못했다고 하니, 그 후손들이 지금 뭐 잘 됩니까? 봉근 할아버지 당시 장목면의원 한다고 천하에 제일 똑똑한 우리 영감이 못한 족보를 아버님 뒤통수에 대놓고, 네놈이 어떻게 하냐고? 조롱하시던 그 후 손 어디 잘 되어 갑니까? 지금은 형님이 實勢입니다. 하세요 ~ 미루지 마세요 ~ 기회입니다. 계집 좋아하면 대가끊기고, 싸움 좋아하면 불구됩니다. 自制하고 살아야합니다. 그중에 가장 좋은것은 十誡命입니다. 봉구 할아버지 노름에 미쳐 동생 결혼단자까지 잡혀가면서 앞뒤를 못가렸다 해서, 저는 화투를 평생 않했습니다. 증조부님 큰 아들 하도 속을 썩이니, 손자 안고 이원수 너가 커서 갚아 달라고 어릴때 손자에게 하소연해서 말이 씨가 되어 우리 어릴때 두팔이 伯父님 여자 관계로 집안이 얼마나 많이 소란했어요?
1969년 己酉年 (기유년)에 發刊(발간)한 家牒(가첩) 序文(서문)
1969년 가첩 서문 내용
말이 나왔으니,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1980년 경에 斗漢이 아저씨께서 가지고 계시던 증조부님의 영정 사진을 저에게 주시면서 큰집 봉구할아버지 집에 있던 호적이나 족보를 어릴때 괘짝에 두었던 것을 꺼집어 내어 영문도 모르고 그저 재기차기 종이로 없애 버렸다고 했으며, 1969년 가첩할때에 가첩 序文을 찢고 가첩을 저에게 주시면서 아버님께서 보첩을 같이 고생하면서 힘들게 만들었는데, 고생하신 두한이 아저씨의 이야기는 한자도 없으시다고 섭섭해 하시면서 가첩 필요없다고 저에게 주어 序文없는 가첩 저가 가지고 있읍니다.
鳳九할아버지. 斗八이 伯父님 까망눈이 되어 族譜 戶籍 敎旨 문종이로, 벽지로, 바른것 아버지와 저가 어릴때 보고 아버님께서 얼마나 많이 안타까워 했는지 압니다. 미국을 건너온 후손들도 조상들의 교지 친필 귀중한 국보급등 읽을줄 몰라 저에게 들고와 問議를 하는 僑胞들도 있읍니다.
이 가첩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8대조 처해 선조님의 친필 월곡서원구재통문을 가지고 1980년경에 거제도에 카피해서 장목중학교 구대영 선생을 만나 보여 주었드니 몇자 읽어 보고는 아는체 하였으나 더 읽지를 못했고, 관포 仁祚 삼촌에게 주고 보라고 했더니, 관포양씨중에 이 글을 읽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는, 그냥 농짝속에 두 말도 않고, 넣어 버렸고, 또정이 아저씨께서 애들과 낚시 오셨어 마침 우리집 평상에서 만나서 글을 보였더니, 曩(낭)자를 보시고는 주머니 囊(낭)자는 아니고, 이상한 글을 썼다고 하셔서, 주머니 [낭]자가 아니고 지난번 [낭]자라고 설명해 드리자, 더 이상 말씀을 언급하시지 않으시고, 족보는 참으로 해답이 없는 과제라며, 고개를 저었읍니다.
17년동안 연구하고 선대를 찾아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시원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그날 혜여지신후 수차례 연락하였으나, 전혀 소식을 주지않아 포기했습니다. 그 후 1984년 갑자보를 발간하자 서울 한남동 저희집으로 찾아오셔서, 정덕이 아저씨에게 같이 가자고 하여 갔더니, 방수가 족보를 만들었는데 아느냐고 하자, 정덕이 아저씨께서 알고 있다고 했고, 또정이 아저씨는 족보를 보고 감탄을했읍니다. 그후 정덕이 아저씨 장례식장에서 저에게 오셔서 조카가 족보를 만든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많은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동래 양씨 분파도
거제도로 이주하신 기록이라도 남겼더라면, 호적이라도 후손들이 잘 보관 하였다면, 호적을 보고 가첩을 제대로 만들었을 텐데, 1969년 또정이 아저씨랑 만드신 가첩은 너무 어처구니 없이 만들어 저가 수년 동안 양씨 가문의 족보를 수집하고 검토 연구하는데는 10여년이 흘렀고, 아버님과 또정이 아저씨는 17년을 연구하였으나 그 뿌리를 못 찾아 결국 양성봉 도지사의 도움으로 동래 양씨들의 종가인 양도용씨 문중의 평창공파 가첩에서 가손없는 후손으로 등재하여, 저가 그 토록 망신을 당한 연유 입니다.
동래양씨 문중의 후손이 없는 梁起乾(양기건) 先祖(선조)님의 후손으로 달아논 가첩
우리 할아버지대에 공부를 안해 카망눈이 되어 글을 보고도 읽지를 못했고, 그나마 鳳吉할아버지 한문깨나 했지만,
입거제 處字海字 先祖님 고향을 찾아가서 그 윗대 應字奎자, 世字章字, 선조님의 산소는 墓(묘) 지석이 없어, 찾지 못하여, 그곳 處字海字 先祖님, 동생 處字晋字의 6대후손 奉基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물어도 알지를 못하였고, 더우기 배우지 못해서 수필본 보첩이 있어도 읽지를 못해서 저가 사진으로 촬영하고 돌려 보내 드렸습니다. 雨番派 派祖이신 勣字 선조님의 산소는 王稜처럼 封墳을 잘해 두었지만, 묘지석을 하지 않아, 그곳 有司들이 안내하지 않으면 알수가 없었읍니다. 先親께서 항상 장자 장손이신 處字海字 先祖님께서 잘못 하셔서 거제관포양씨들은 長子長孫이 번성하지 못하는 이유라며, 늘 恨하셨던 생각이 바로 입거제 선조님께서 집안단속을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恨했읍니다.
처해 선조님 15살 어린 나이에 3살 많은 연상의 여인에게 장가가는 것은 당시 양반사회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였고, 어떻게 일찍 결혼하여, 일찍 喪妻하시고, 아들 시골 벼슬따라 정착하시면서 김해김씨 집안에 재가를 가셔서 호돌이 아들을 낳아 앙까(정율)아저씨 집안 대를 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없읍니다. 그래도 월곡서원구재통문을 남겨 주셔서 1980년경에 1799년 기미보첩등을 들고 양씨중앙종친회를 찾아가서 월곡서원구재통문의 글을 읽어 번역해주고 두문동 72현의 역사 고증을 함으로써 뿌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관포 하씨 집안은 우리 윗대 부터 앙숙이였습니다. 하도원이 구장 할때에 터무니 없이 세출을 많이 매겨 저가 어릴때 할아버지께서 면으로 군으로 들나들면서 항의하시던 일이 있지 않았읍니까? 관포 황씨 집안도 앙숙이였는데, 삼촌이 장가가는 바람에 흐야무야 했지만 장목면 인물편에 황상고도 저가 집필하는 모든 칼럼에는 없애 버렸습니다. 주먹보다 言論(筆)이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놈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가 어릴때 학교에서 수업 끝내고 집에 오는 도중에 두산 백부님께서 논물 때문에 황씨 집안 사람들과 대판 싸우면서 ["때려봣" 때려봤" 빰마때기를 때려밧"하고 싸우던 모습을 저가 직접 보았읍니다. 그리고 정덕이 아저씨의 이야기 입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정덕이 아저씨 술 담배 마작 좋아 하시던 아저씨, 저가 고학 할때에 명동에서 박영식 감독 카메라 빌려서, Bar에 다니면서 스냎촬영할때에 카메라를 들고, 당시는 공갈로 무조건 후라쉬로 떠트리고 안녕하세요? 사진 촬영하였습니다. 하고 하던 명동 거리 스냎사를 할때에 저와 단 두명이 하였는데, 저도 그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싸움을 많이 했어요. 人生의 길은 事必歸正입니다.
정덕이 아저씨가 앉아있다가 저를 보고 너무 놀라면서 거제도에서 올라와 고학하는 조카라고 했어 친구들이 저더러 姓이 어떻게 되는냐고 물어 저는 金가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우기는 친구가 저에게 용돈이라며 돈을 주었고, 그 후 어느날 북아현동 마루에 앉아 고생하지 말고 고향에 내려 가라고 타일르며, 용돈 쓰라고 몇푼을 집어 주면서, 꼭 공부해야만 사는게 아니라고 하였고, 이모는 아현동 시장 바닥에 나가 사과상자 놓고 사과라도 팔아서 돈을 벌어 보라고 했어요. 거제도에 갔더니 손근수 양반도 저를 집앞 평상에 앉으라고 하면서 꼭 공부만 할려고 하지 말고 일하라고 타이르듯 했는데, 웃기는 사람들 남 자식이라고 함부로 지껄인다고 생각 했읍니다. 자기 자식들은 공부 가르치면서 남 자식은 공부 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지? 그 후 족보를 만들어서 들고 가고, 성산동으로 가서 TV안테나를 천개천에 가서 30,000원짜리를 사다가 달아 주니, 저녁 식사시간에 통영수산학교 방학때 작은골에서 소먹이다가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기뻐서 동네로 뛰어 오면서 "해방이다"하고 소리치고 뛰어 오는데 갑짜기 김윤조가 나타나서 멱살를 잡고 일본은 망하지 않는다. 함부로 떠들지 말라고 빰을 후려쳐서 맞아다며, 관포 동광호 매표소도 先親께서 하셨는데, 일본 앞잽이가 되어 뺏어 갔다며, 회고담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런 앙금이 있어, 어느날은 김종찬이에게 전화로 장목면민을 위해 핸 일이 무엇이냐고 따졌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인생살이는 事必歸正입니다.
우리 집안에 자칭 국보라며 대학에서 명강의를 하시던 양주동 박사는 유복자로 태어나 외가에서 자라면서 심심해서 천자문을 천번을 읽고 한문에 도통해서 신라향가를 신랄히 비판해서 국어 국문학계에서 빛을 보았지만, 종친들은 뿌리없는 양가라고 조롱했읍니다.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가 뿌리를 챙겨 주지않아 항렬도 모르고 누구 자손인지도 모릅답니다. 그 후손들이 저와 미국에와서 중부지역에서 기독교에 다니면서 전교 하였지만 대꾸도 않했습니다. 뿌리 없는 자손들이 하느님 전교 한다고... 조상 이름 석자 모르면서 하나님은 어이아노??? 웃끼지 말라...
대생이가 巨濟梁氏門中 [카페]를 개설하여 2009년.7월. 23일 부터 우리 집안 족보를 올리기 시작 했는데, 아래와 같이 대생이가 抗議(항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해서 주고 받는 내용입니다.
1.성년이전 사망한 사람의 삭제가 어려우면 유아(만 7세이전)때 사망한 사람 삭제 요망---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 -답변 :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도 핏줄이요, 형제며, 그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
돌아 갔다고 우리가 기억하지 않고 추모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 못하는 영혼이 된다.
2.재혼한 사람은 내용은 사실과 같게 기록 하드라도 현재의 남편, 처 이름만 기록---
좋지않은 추억 삭제 측면, - 답변 : 지나간 역사는 조작할수 없는 역사 과학이다. 인위적으로 고칠수가 없다.
가령 어머님이 돌아가신 자손은 계모(繼母) 자손으로 만들수가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해야 족보를 믿는다.
카페에 족보 올린것 카피못하게했다고 많이 원망했지만 풀어 주지 않는 이유는 저작권을 풀어 주지 않은것입니다. 형제간이라도 형이 쓴 글을 동생들이 마음데로 삭제하고 도용하면 저작권으로 고소 당 합니다. 미국은 그것이 철두철미 합니다. 변호사를 사서 고소하는것이 상식 입니다. 우리 세대가 죽고나면 우리 후손들은 많은 파가 갈라지고, 또 日帝시대에 일본을 건너간 후손들이 미국을 건너와서 뿌리를 찾지못해 수십년을 고생하는 제일교포들도 우리 일가였습니다. 실제로 저가 찾아준 일도 있습니다.
다음에 만드는 南原梁氏(남원양씨) 兵部公派中(병부공파중) 郡守公雨番派(군수공우번파) 巨濟門中(거제문중) 世譜(세보) 續譜(속보)도 잘못 하면 엉터리 족보가 되면 장목면지 처럼 영영 汚點을 남기는 族譜가 되어 우리가 죽고 나면 다음 차세대 자손들이 분파로 갈라져서 단합이 안됩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으로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은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南原梁氏(남원양씨) 兵部公派中(병부공파중) 郡守公雨番派(군수공우번파) 巨濟門中(거제문중) 世譜(세보)
續譜(속보) 編纂委員會(편찬위원회) 規程(규정)을 만들었읍니다. ~ 맨아래쪽 글~
http://blog.daum.net/bangyang/2638
이자료는 1980년경에 서소문 남원양씨 중앙종친회에서 의결을 거쳐서 남원양씨 병부낭중파 대사간공파세보를 편찬할때의 규정을 참고하였습니다. 필요없드래도 참고 하세요. 절때 비문처럼 독단적으로 하지 말기를 거듭 부탁 합니다.
자동차를 같이 타고 가던 득춘이가 양정덕이 자기들의 약력은 올려주지않고 호수는 보사부 사무관도 아닌데 사무관으로 올렸다고 두고 보자고 하니 바른말 잘하는 양두상 백모님께서 똑똑하다는 너는 못하고 두조아재 방수가 족보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우리 영감 소원을 이룬 방수가 못한것을 똑똑하다는 너는 무엇하고 남을 원망하느냐고 하니, 입 다물고 말못하더랍니다. 백모님께서 하신 말씀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림니다. 지금 현재는 형님이 실세 입니다. 하고 싶은데로 하세요 ~ 밀어 부치세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때에도 집행위원장이시던 김남수 주교님께서 미화 $3,000-를 주시면서 자네가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해서 500만 천주교 평신도 대표로 "파푸아뉴기니" 마당교구 대주교님과 그곳 邦人(방인) 두 사제의 초청장과 비행기표를 들고 저가 갔다가 왔읍니다. 두서없는 글 생각나는데로 적었읍니다. 또 연락하겠읍니다. 오늘은 시간상 줄입니다. 관포 동생 배상.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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