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이자익을 섬긴 조덕삼 장로와 금산교회 이야기
금산교회는 오늘도 수많은 한국기독교 순례자들이 “ㄱ자” 예배당을 보기 위해서 찾는 곳이다.
이 교회가 한국기독교 136여 년간의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ㄱ자” 교회로 그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전북 김제 모악산 남쪽에 위치한 금산교회는 1905년 테이트 선교사(한국명: 최의덕)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주에 선교기지를 둔 미국 선교사 테이트가 정읍을 가기 위해 모악산 자락을 넘어 김제군 금산리 용화마을 통과하곤 하였다. 용화마을은 전주로 가는 길목과 금산사 절간으로 가는 길목, 또 정읍과 김제읍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말을 타고 다니는 선교여행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곳 용화마을 마방(馬房)에서 말을 쉬게 하였다. 당시 마방의 주인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부자로 집안 대대로 유교를 믿는 보수적 가문의 조덕삼(趙德三1866-1919. 12. 17.)이었다. 어느날 조덕삼은 데이트 선교사에게 접근하였다.
“선교사님 저는 선교사님을 오랫동안 지켜보아 왔는데 왠지 마음에 쏠립니다.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오셨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데이트 선교사는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조덕삼의 사랑채에서부터 금산교회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남장로교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은 1892년이었다. 북장로교는 이미 1884년 알렌을, 이듬해인 1885년에 언더우드와 헤론 등을 파송함으로써 한국선교를 시작했으나 남장로교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1891년 첫 안식일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엇다. 첫째 목적은 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만났던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으로 알려진 이수정의 부탁대로 한국으로 선교사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언더우드는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 선교연맹(lnter- 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교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되었다.
1892년 9월 17일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일곱 사람의 선교사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남장로교 1진 7인의 선교사들인데, 레이놀즈(이눌서)목사 부부, 전킨(전위렴)목사 부부, 데이트(최이덕)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데이트(최마태)양, 그리고 데이비스양 이었다. 이것이 미국 남장로교의 전라도 지방 선교의 시작이 된다. 특히 데이트(최이덕) 목사 남매는 1894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하여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이 전주지부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전라도 지방의 최초의 교회 서문교회가 세워졌다.
▲이자익목사
한편 김제 지주 조덕삼(1867~1919)의 할아버지 조정문, 아버지 조종인은 본래 평안도 출신으로서 중국 봉황성,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 등 무역을 하는 거상으로 유명했다. 김제 부자로서의 조덕삼의 삶은 남쪽의 넓은 김제평야와 금산의 금광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꿈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김제평야의 광활한 농경지, 그리고 금산의 금광에 대한 꿈을 안고 재산을 정리하여 단독으로 배를 빌려 이삿짐을 싣고 남하하였던 것이다. 군산 앞바다에서 만경포구를 거슬러 김제읍을 지나 금이 많이 난다고해서 붙여진 금산에 도착한 조종인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금광업에 투자하면서 평안도 거상답게 토지를 매입하고 정착하며 아들 조덕삼의 앞길을 튼튼하게 하였다.
금산교회를 말할 때 조덕삼 장로 말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으니 조덕삼 장로의 머슴이었던 이자익 목사이다.
이자익은 본디 경남 남해 섬에서 고아로 생활하다가 뒤늦게 “바다 건너편에 있는 육지로 나가서 밥이나 실컷 먹었으면 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때마침 마음씨 고운 선주를 만나 ”아저씨 저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처럼 살고 있는데 육지에 가서 남의 집 머슴이라도 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선주는 이자익을 하동포구에 내려 주면서 용돈까지 챙겨 주었다.
이자익은 계속 걸어서 한 주막에 이르면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침식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걸어서 어느덧 전라북도 남원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남원에 있는 여러 집을 돌며 겨우 끼니를 때우면서 전주까지 왔다. 다행히 전라도는 인심이 좋아서 사랑채만 있는 집이면 잠자리는 거뜬히 해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입에 풀칠할 곳을 찾던 중. 1897년 어느 날 17세의 고아 이자익은 조덕삼의 마방 마부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조덕삼과 그의 머슴 이자익은 전주에서 찾아오는 데이트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함께 믿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 10월 11일에 세례도 함께 받고 집사도 영수도 같은 날 함께 되었다. 그 후 차츰 교회가 성장하여 교인이 50명쯤 되었을 때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인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김제 지방의 유지이며 금산교회 재정을 모두 감당하고 있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그 집의 머슴 이자익이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장로가 되게 되었다.
이때 교인들이 술렁이며 근심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러자 조덕삼은 교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인들 앞에 나가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드려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고 선언하였다.
그제야 투표결과를 놓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던 온 교회가 대환영을 하면서 조덕삼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히 자기 본분을 잘 감당해 나갔다. 후에 조덕삼도 금산교회의 2대 장로가 되었다. 지주 조덕삼은 자신의 집 마부를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시켜 장학금을 주어서 공부를 하게 했다.
▲조덕삼장로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된 후 자신의 교회에 청빙한 일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장로교 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다. 그런데 이자익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이다. 이렇게 빛나는 신앙생활을 살았던 조덕삼 장로의 손자가 바로 3선 국회의원이며 주일대사를 역임한 고 조세형 장로이다.
3대를 이어온 인연…. 오래전 이야기다.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 목사 기념관 헌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고 조세형 장로(금산교회, 3선 국회의원. 주일대사)와 이자익 목사 손자 이규완 장로(대전제일교회. 고분자화학 박사, 연변과기대 교수)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히며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으면 우리도 없고,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하고 정중히 인사했다. 어르신들의 섬김과 나눔을 대물려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2009년에 조세형 장로가 별세했다. 천정배 의원은 추도사에서 “김제의 이름난 기독교 집안이었던 당신 조부께서는 집안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하시고 동의하셨습니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가 바로 당신의 유전자였던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믿음의 가문이다.
1908년도에 건축된 금산교회는 11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전북 지방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된 “ㄱ자” 예배당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팟정리교회’ 혹은 ‘두정리(荳亭里)교회’로 불렸고 금산교회라는 이름은 1930년대 이후에 붙여졌다.
금산교회는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한국식과 서양식의 건축특징이 병존하여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5평 정도의 강단은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구조이면서 동시에 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연상케 한다.
금산교회당 안에는 초기부터 사용하던 풍금과 강대상, 강대의자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ㄱ’자 예배당은 그 골조가 100년 동안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2001년 봄 대대적인 개보수작업이 이루어져 지금 더욱 완벽한 옛 모습을 갖추고 있다. (소재지 :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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