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밭
강현옥
오늘, 지인이 단톡에 사진을 올렸다. 거창 창포원에서 찍은 활짝 핀 연꽃 사진이었다. 순간 눈앞에 작년에 즐겨 찾던 연밭이 아른거렸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연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연밭은 머잖아 연꽃의 향연이 펼쳐질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연밭 사이로 난 여러 갈래의 산책길은 마음이 가는 데로 선택할 수 있어 좋다. 밀집된 공간에서 벗어나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보자 가슴이 확 트였다. 무성한 연잎 사이로 드문드문 꽃봉오리들이 보였다. 머잖아 기품 있는 청초한 연꽃들의 향연이 펼쳐질 것을 알리는 서막 같다.
하지만 걸으면서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작년에 자주 왔던 산책길인데 마치 처음인 양 낯설었다. 작년에 이곳을 거닐며 느꼈던 감흥, 연밭과 주고받던 밀어와 교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내가 연밭을 처음으로 찾았던 때는 작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동시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서 동시 스터디를 만들었다. 실력 있는 선생님도 모셨다.
처음에는 이론 위주의 공부를 했다. 덕분에 창작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두 달 후부터 매주 창작 동시 한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동시를 거의 써본 적이 없던 나는 고민이 되었다.
그때 예전에 수업한 학생들이 생각났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에게 일기 한 편과 독후 활동 작품 한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었다.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넘쳐나도,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한 편으로 줄여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는 모습을 보며 단호하게 안 된다며 선을 그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과제를 하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숙제를 꾸역꾸역 해오던 학생들이 새삼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덩달아 ‘제대로 한 번 써보자’ 하는 투지가 일어났다.
동시의 소재를 찾을 겸 해서 평소에 말로만 듣던 집 근처에 자리한 연밭으로 갔다. 처음 본 연밭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잘 조성이 되어 있었다. 산책길과 함께 연밭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전망대, 정자와 쉼터, 흔들거리는 작은 그네들이 운치를 더해주었다. 거기에다 주변에는 기차를 개조해서 만든 이색적인 레일 카페도 있었다. 그동안 왜 이곳을 찾지 않았는지 후회될 만큼 근사했다.
연밭은 아직 오월 초입이어서 줄기는 보이지 않았고, 아기 손바닥만 한 연잎들이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처음 본 어린 연잎이 신기했다. 물베개를 하고 누운 듯한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연밭을 소재로 동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연잎을 바라보았다. 연잎이 무슨 말을 걸어올까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논리적인 사고구조의 한계와 빈곤한 상상력만 절감할 뿐이었다. 현실에 찌든 내게 '동심이 남아있기나 한 건가'라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부터 시간이 나면 연밭으로 나갔다. 여린 잎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어느새 둥글넓적해졌다. 그러다 물 위에 올라 온 줄기에 번데기처럼 똘똘 말려있더니 며칠 뒤 활짝 폈다. 하늘을 향해 뒤집어진 초록 우산 같았다.
온종일 해만 바라보는 연잎에게 '너는 해를 좋아하지?'라며 짓궂게 말을 건넸다. 그러면 연잎은 바람에 실려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아니라고 항변했다. 난 씩 웃으면서 '내 눈은 못 속여'라며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나와 연잎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대화는 메모를 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메모한 대화들을 다듬었다. 몇 번의 퇴고를 거쳐 동시로 태어나면 느껴지는 뿌듯함이란. 그러다 가끔씩 분에 넘치는 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때면 연밭을 한 번 더 돌기도 했다.
드디어 만개한 연꽃은 눈부시도록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연잎이 펼쳐진 초록 무대에서 연꽃들이 미인 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쓴 동시가 '누구일까?'였다. 비가 그친 후 연잎에 맺힌 물방울은 투명 구슬처럼 맑았다. 무성한 연잎이 어우러져 바람에 흔들릴 때면 초록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았다. 그런 연밭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동시로 풀어내고 싶어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매일매일 새로움을 보여주는 연밭은 내게는 동시의 메신저 같았다. 논리적으로 무장한 뇌 구조에 감성의 물꼬를 터준 마중물이었다. 만나면 끝없는 수다를 떨고 그 수다를 밤이 되면 동시로 빚느라 잠을 놓치기도 했다.
그러다 추위가 찾아들면서 연잎은 노쇠한 몰골로 헝크러진 채 땅으로 쓰러지고,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로 동시 스터디도 잠시 쉬게 되었다. 차가운 바람만 몰아치는 황량한 연밭은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동시에 대한 열정도, 연밭에대한 생각도 사라져갔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좋아했던 내게 서정적인 감성으로 채워주었던 연밭이 사라지자, 또다시 서평을 즐겨 쓰던 예전으로 돌아갔다.
지금, 지인이 올린 사진 속에서도, 만개를 눈앞에 둔 연밭도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답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연밭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자연과의 교감을 일깨워주고 불꽃처럼 타올랐다 스러져간 시절 인연. 그때의 연밭이, 연꽃이, 연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