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작은 사람을 왜 쓰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작은 사람을 왜 쓰시는 것일까?
나처럼 별 볼 일이 없고 초라한 사람을 왜 쓰시는 것일까?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세상은 돈이 있거나 돈을 동원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 권좌에 있거나 권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막강한 조직이 있는 사람들, 세계적인 또는 국내적인 수준의 학벌이 있는 사람들, 국내외적으로 유명 인사들, 어떤 분야에 혁혁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 쇼맨십이 뛰어나고 그럴듯한 말과 재미있는 말로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사람들에게 일을 주고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에 해당 사항이 하나도 없는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었다. 세상을 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흰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여우가 따먹지 못하는 포도를 시다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악하고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며 폄하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시작되어 과거로 흘러가는 크로노스 시간의 허무와 잔인함, 흥망성쇠, 희로애락에 천착(穿鑿)하지 않으며 세상의 가치에 반(反)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자유와 은혜를 즐거워한다.
하늘의 움직임에 작은 나를 맡기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인도, 네팔, 미얀마, 기타 여러 나라에서 소식이 온다.
매끼니 식사와 수술을 요하는 긴박한 요청부터 장학금, 책값, 교복, 모기장과 위생시설들과 직원들의 인건비, 건축 수리비, 건물 건축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지원 요청이 온다. 때로는 장례식 고지와 결혼식 청첩장까지 온다.
날아오는 모든 하소연에 일일이 기도하며 기다리라고 답신을 보낸다.
지난 20일 동안에 미얀마 난민들 긴급구호 두 차례, 소수부족민 11명의 신학대학원 장학금, 공부방 학생의 병원비, 우리 빈민가 공부방 출신의 신학생 장학금, 뉴델리 고아원 학생들의 책과 교복, 학용품비를 보냈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에이즈 고아의 학원비와 생일 공동식사 비용을 보냈다.
앞으로 남은 10일 동안에 사랑의 쌀 난민긴급구호 한 차례와 모기장과 말라리아 약 그리고 첸나이 달리트 대학생 17명에게 장학금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네팔 고아원 운영비와 데칸고원 희망공동체 어린이집과 공부방 운영비와 독거노인 점심식사와 도시락 나눔 비용을 보내야 한다.
송금 순서와 계획은 이렇게 세우고 기도하고 있지만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은 세월이 갈수록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늘어나는 것이다. 더욱 묘한 것은 일이 늘어나면 늘어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별히 기여하는 바가 없는 나는 일이 진행되고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감탄에 감탄을 발한다.
하나님의 통치, 나눔과 섬김을 위하여 작은 내가 하는 일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요한복음 14장 14절의 말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는 대로 기도하는 것과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대로 소란을 떨지 않고 않고 마음 비우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처럼 몸소 기획하고 능력과 인맥과 조직을 총동원해서 땀 흘리고 수고하며 과로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매사에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무능하고 부족하고 작은 내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신통방통하게 일이 되고 열매가 맺힌다. 열매도 차고 넘치도록 맺힌다. 하나님의 통치의 은총과 축복을 맛보는 것이다.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은 나 없이도 일하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별볼 일 없는 사람을 쓰실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였다.
하나님께서 작은 사람을 왜 쓰시는 것일까?
나처럼 별 볼 일이 없고 초라한 사람을 왜 쓰시는 것일까? 그냥 직접하셔도 되는 일을 굳이 겨자씨처럼 작은 사람을 써서 일하시는 것일까?
오랫동안 묵상해온 화두에 오늘은 콘크리트 바닥에 풀꽃이 피듯이 생각의 꽃이 피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약한 사람의 마음을 쓰신다는 생각이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고아와 과부, 난민, 가난한 사람들, 장애우들, 떠돌이들, 환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앞선다. 그들의 외로움, 슬픔, 배고픔, 헐벗음, 고달픔과 절망과 상처, 분노와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이 제삼자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고 내 아들 딸이고 내 부모이고 내 형제자매이고 내 친구로 다가온다. 더 나가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으로 온다. 그들의 사진을 보고 사연을 읽으면서 곧잘 꺽꺽대며 운다. 피골이 상접한 어린이들을 보면 내 죄! 사랑이 없는 내 탓!이라는 생각에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게 된다. 여린 마음으로 기도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길 기다린다.
하나님께서 거절 못하는 성품을 쓰신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NO”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감동감화의 역사가 그들과 그 일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감과 계시를 주어서 나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면 반드시 준비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NO” 라고 대답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되니 거절하지 않고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 기다림이 며칠 일 수도 있고 몇 달 일수도 있고 몇 년 일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에 나는 “NO”라고 말하지 않고 기다린다. 바보처럼 기다린다. 수모를 당하고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응답이 오길 기다린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루심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쓰신다는 생각이다.
일의 진행이 더디고 어려움과 블록킴이 많을 때 이것이 사람의 생각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를 깊이 생각한다. 사람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곧 이루ㅇ어질 것 같아도 즉각 포기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끝까지 버틴다.
인도교단의 요청으로 건물을 지어서 새 일을 실행하기로 하였는데 안과 밖에서 어려움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두 나라, 두 교단 사이에서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4, 5년 정도 되었을 때 참고 견딜 수가 없어 후원자들에게 후원금을 반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후원자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을 되돌려 받지 않겠습니다. 현장에 계신 분이 알아서 쓰십시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햇수로 10년 만에 데칸고원에 오늘의 ‘희망공동체’를 일굴 수 있었다. 1995년에 시작하여 2002년에 비로소 완성된 것도 있다. 2012년에 시작해서 2022년에 끝난 것도 있다.
현장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종일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사흘을 기다려서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나누고 섬기러 간 사람으로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야단을 칠 수도 없었다. 그냥 사람을 기다리고 건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사람들이 약속을 기억하고 제 때어 오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몸에 배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해주신다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인내심을 훈련시켜 주셔서 우리 사역의 프로젝트는 긴 것이 30년, 짧은 것이 11년이다. 물론 미얀마 난민 긴급구호는 4년 되었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 속전속결의 자세와 고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공감하는 마음을 쓰신다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 오면 바로 일을 즉각 처리하였다. 결코 지체하지 않았다. 준비된 것이 오면 사람이나, 건물이나,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을 바로 진행시켰다. 때로는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라면 다른 경비를 돌려서 일을 진행시키기도 하였다.
미얀마의 기근 구호, 인도의 홍수 구호, 네팔의 지진 구호, 네팔과 인도의 코로나 구호, 미얀마의 난민 구호, 인도 마니푸르 폭동 난민 구호 등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들은 먼저 신속하게 긴급구호를 시작하였다.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형제자매들, 지진과 쓰나미로 고통을 겪는 형제자매들의 자리에서 나누고 섬겼다. 고아와 과부의 자리에서 섬겼다.
하나님은 무한히 기다리면서도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신속하게 반음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모든 선하고 가슴 따스한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쓰신다는 것이다.
내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일까? 주변에 있는 친구들, 교우들, 목회자들 대부분이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이었다. 형제자매들 또한 그러하였다. 참으로 우리 사역에 동참하는 후원자들의 대부분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내 주변에 있어 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강퍅하고 완악하고 무관심하고 폐쇄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흉보며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내가 받은 큰 축복이었다.
온유하고 겸허하고 여린 사람들, 눈물이 많은 사람들, 심장이 뜨거운 사람들, 굶주림과 헐벗음의 슬픔을 아는 사람들, 고아와 과부의 시정을 아는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위해 손해를 기꺼이 보는 사람들,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식탁으로 초청하는 사람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자기들이 한 일을 결코 과시하거나 나발을 부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들, 교우들, 목회자들을 불러서 나를 써주신 것이다. 그들이 있어서 내가 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나를 써주시는 것인가!
세상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써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주변의 훌륭한 사람들을 불러서 나처럼 별 볼 일이 없고 초라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다. 성령님의 역사다. 겨자씨와 누룩을 사용하시는 천국의 비밀이다.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사람 쓰심에 두 손을 높이 들고 감사와 찬미 영광을 바친다.
할렐루야!
주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이다!
2024년 6월 22일 토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