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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지 보강과 치열한 전초진지전
제 1 절 작전 개요
유엔군과 공산군은 '51년 11월 27일 일시적이나마 잠정 군사분계선에 대한 문제가 일단 매듭을 짓게 되자, 이를 변경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양측은 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두고 대진하면서 수색정찰과 소규모의 국지전을 통하여접촉을 유지하게 되엇다. 이러한 전선의 소강상태는 대체로 '52년 봄까지 지속되었다.
양측은 교착딘 전선에서 전투보다 진지강화와 부대정비에 전력하였으며, 전초 엄호부대사이의 빈번한 탐색전과 소규모 전초진지 전투를 통하여 상호 접촉을유지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면서 방어태세를 강화하였으며, 공산군도 병력과 장비를 꾸준히 증강시키며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쟁의 양상은 쌍방 공히 상대방의 주진지를돌파하는 공격보다는 주저항선을확보하기 위하여 방어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전초의 전술적 운용은 지상작전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딘다. 이 전초는 경계부대로서 이를 지연.저지. 와해시킴으로서 주방어진지에 배치된 주력부대로 하여금 방어태세를 강화할 수 있는시간적 여유를 제공하는 전방경계부대 및 일반전초와 전투전초의 임무를겸하여 수생하였다.
이밖에도 양측은 전투전초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경계수단으로 수색정찰대를 운용하여 제한된 규모의 공세적인 전투정찰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공산군의 전투정찰대는 소대 내지 중대규모로, 드물게는 대대규모로 편성되어 공중으로부터의 관측과 폭격을피할 수 있는 야간에 실시하였다.
반면에 국군과 유엔군은 통상 주대 내지 대대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 대개의 경우 주간에 공산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 한 국부적인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주저항선에 배치된 전방 연대는 공산군의 야간침투를 저지하기 위하여 국지경계부대를 운용하였다. '52년도 초에 전개된 대표적인 전초진지전은 두매리 부근전투, 사천강 부근 전투, 크리스마스고지 부근 전투, 575고지 전투, 662고지 전투, 호도 전투 등이 있으며 앞장 동계전투에서 두매리와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는 소개 되었지만 간략하게 다시한번 소개하도록 하겠다.
상방의 전투정찰대의 접전은 때때로 전략.전술적 요충지의 통제권을 다투는 작전으로 변하여 격전을 치르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작전지역의 범위는 예외없이 국부적으로 한정되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ㄴ 전투정찰과 제한 목표 공격작전을 통하여 유엔군은 주진지 전방의 유리한 지형지물을 확보하고 전초진지를 강화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군에게 전투력의 소모와 출혈을 강요하였다.
'52년 초 동부전선의 문등리 지구와 서부전선의 고랑포 지구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그리고 정찰전이 ㅈ로 전개 되었으며, 이외에는 특기할 만한 격전이 없었다. 이 기간엔는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활동이 빈번하였다.
적은 지상전 소강과 아울러 아군진지에 대하여 삐라 포탄의 발사를 시작하였으며, 한편 1952년도 들어서 유엔군이 세균전을 실시한다도 비난하고 나섰다. 이 허위선전은 3월에 최고조에 달하였고, 중공신문은 유엔군의 비라용 폭탄 파편을 세균용 폭판파편이라는 등 공산세계 특유의 터무니 없는 선전을 되풀이 하였다.
공산군은 교착된 전선상황하에서 시간적 공간을 활용하여 병력뿐만 아니라 장비와 진지의 유개화 등 전력이 강화되어 언제 대규모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으로, 유엔군은 이러한 적의 세군전 등 국제 사회에 대한 여론전의 의미에 촌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적의 대공세는 적의 대패배로 끝날 것이라며 유엔군은 언제든지 이를 격퇴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다. 공산군은 이 시기에 군사력은 대폭 강화하였지만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만큼 수준에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1952년 5월 12일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북대서양조약기구 총사령관으로 전출하고 미 육군에서 클라크 대장이 그를 후속하였다. 재핝 유엔군 편성에 있어서도 작년 말 미 제1기병사단의 일본 홋카이도 전출과 미 제40, 미 제45사단의 한국전 투입이 있엇는다.
특히 한국군의 향상과 발전은 전란 3년에 들어서면서 놀라울만한 것이였으며 장교단의 도미 유학과 우수한 신병훈련으로 급속히 강화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지리산 공비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방에서 2개 사단을 차출하여 편서하게 되었다. 그 결과 '51.11.25일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게 될 백야전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에 백선엽 소장이 임명되었다. 백야사에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 경찰부대가 배속되었다. 백야사의 공비토벌작전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952년 4월 14일까지 4단계로 구분하여 실시되었다. 이 작전을 통해 정부는 후방지역에서 치안을 확보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군은 병참선에 대한 앉전을 기하게 되었다. 이후 후방지역에서 준동하던 무장공비는 조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제 2 절 방어진지 보강
1. 공산군의 방어진지 보강
공산군은 휴전협상 기간을 끌면서 전력의ㅏ 열세를 만회하고자 노력했고, 그들의ㅣ 진지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적은 유엔군의 사기를 꺽고일부 배앗긴 진지도 탈환하면서 군사력을 과시하여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전략하에 유엔군 진지 중 돌출되어 잇거나 취약한 진지를 선정하여 공격하는 작전을 진행하였다.
이에 반해 미 제8군은 휴전협정에 합의한다는 거슬ㄹ 부여주는 한편 협상이 부당하게 지연될 경우 공격작전도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공격작전이란 제8군사령관으로부터 별도의 지시가 없는 한 적의 고역으로 피탈된 중요 지형지물을 탈환하기 위한 반격에 국한한다는 것이었으며, 불필요한 희생을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이 에하 부대에 전달되자 일부 예하 지휘관들은 자기부대 병력사용으로선 듯 모험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마저 있었다.
공산군은 이전가지 폭우와 같은 유엔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야간에만 진지공사를 실시할 수 있었으나, 잠정 휴전기간이 설정된 이후 이 기간을 이용하여 밤낮으로 진지공사에 전력하였다. 그들은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ㄷ르오 제2차 세계대전시 프랑스의 마지노선이나 독일 서부방벽을 능가할 만큼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적은 화력의 열세를 극보하기 위하여고지의 후사면을 이용하여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일부지역에서는 후방 40km 지역까지 지하 보루를 형성한 진지가 있었으며 이런 진지는 섷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연결되었다.
거미줄처럼 파해쳐진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 나 되는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동굴로 통하고 있었으며 또한 후바의 산기슭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cm으,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중국 공간사에 의하면 "중공군은 1952년까지 갱도 7,789개, 길이 198.7km를 구축하였고 엄체호 75만개, 유개 및 무개 참호 길이 3,420km를 작업 완료하였으며, 북한군이 판 갱도는 총 1,730개 88.3km 였고, 각종 엄체호가 3만여 개 참호길이 260km 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적은 사격으로부터 병력을 보호할 수 있는 엄폐를 위해 통나무. 바위. 모래 등 무엇이든 사용하였다. 예로써 국군 제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적은 진지 내에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까지 마련되어 있을을 정도였다.
공산군은 고지를 점령했을 때는 즉시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고지 정상부근에서 아군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고지를 일주하면서 참호공사는 게속되었다. 공산군은ㄴ 유엔공군과 중포병의 화렧[ㄹ{로부터 그들의 방아진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유엔군의진지와는비교가 안 될 정도의 강력하 지하 참호에 병력과 장비를 수용하였다. 후사면으로부터 터널을 파기 시작하여 전사면까지 관통시키고 고지의 내부에 종횡의 망상통로와 각종의 포좌를 만들어 거의 고지 전체를 거대한 보호덮개로 축성하였다. 그들은 야포, 전차 등을 당속에 은폐시켰다가 사격시에는 당굴 입구로 끌어내어 사용하고 있었다.
적은 방어진지 주변에는 몇 겹의 철조망으로 둘러사고 진지정면에는 수많은 살상지뢰를 묻었다. 더욱이 그들은 진지 피탈실르 고려하여 제2전선에 이르는 사이에 지뢰호를 파서, 후퇴하면서 즉각 지뢰를 매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적의 방어진지의 구조는 공중 및 야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매우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공산구는 이와 같은 지하요새를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휴전회담이 시작된 첫해 동안에 주로 구축하였다. 이들은 확실히 회담의 책략을 통하여 시간을 벌어 방어력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때 구축된 진지에 대하여 모택동 선집 제15권에 "어던 사단도 3개월의 시량을 보고나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잇어 셍활은 대단히 좋다"고 평가하였으며, 북한 공간사에도 '산악지형의 특성에 맞게 갱도식의 축조물과 그것과 연결된 참호, 교통호들로 이루어진 갱도식진지 방어체계가 튼튼히 완성되었으며, 전퉁서 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까지 갖추어져 전투원들은 적의 포위 속에 드는 경우에도 오랫동안 자립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2.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진지 보강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이 계속하여 회담에 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당시 지상작전의 규모와 빈도는 휴전회담의 추이에 따라 그 강도는 크게 좌우되고 있었다. 아군은 협상이 주요쟁점을 둘러사고 난항에 빠질 경우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적으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조건을 수락하도록 강요하는 수단으로서 군사작전을 전개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이른바 적극방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지속적인 제한목표 공격으로 압력을 유지하고 적에게 전투력의 소모와 출혈을ㄹ 강요하며서 적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려 하였다.
유엔군은 방어진지를 공산군 만큼 공고하게 설치하지 못하였지만 , 제1차 세계대전시의 참호에 가까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유엔군은 화력의 우세를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주저항선을 주로 고지 전방의 전사면에 설치하고 있었다. 주저항선에는 개인호와 기관총 등 화기진지를 구축하고 교통호로 연결하였으며, 중요지형 정상부근에는 벙커형태의 전방지휘소와 관측소를 설치하였다. 진지와 벙커는 잘 위장하고 각종 ㅈ애물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야전축성은 공산군의 소규모 공세에는 충분히 지탱할 수 있었다.
주저항선 전방에는 완충효과를 갖게끔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초를 두었으나 주저항선 후방에 예비참호를 구축하지 않음으로서 유엔군 진지는 공산군 진지에 비하여 종심이 너무 얇았다.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정찰기지를 운용하여 방어지대의 종심을 증가시켰다.
혹한의 기후는 다소 공산군ㅂ보다는 유엔군에게 유리하였다. 한풍이 몰아치는 추위속에서 남쪽에 위치한 국군과 유엔군은 비교적 공산군이 위치한 북족 응달보다는 양호한 편이었다. 유엔군은 양지바른 남쪽 사면에서 충분한 보급품과 난방기구 그리고 따뜻한 방한복을 지급받아 월동준비를 끝내고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바년에 공산군은 보급품도 난방기구도 충분치 못한 가운데 하루종일 음지에 있어야 헸기 때문에 한층 더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엔군보다 신체적 곤란을 덜 받으며 혹심한 겨울 추위를 견디어 내었다. 오히려 보급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유엔군은 많은 동상자를 내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정찰과 매복을 자주 교대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정도였다. 미 공간사에는 "공산군이 추위에서 버틸 수 있엇던 것은 선천적인 순응성과가난과 결핍을 이여내는 정신력 그리고 엄격한 규율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해안으로부터 서해안에 이르기까지 전 전선의 주저항선 방어진지는 종심 깊은 참호선으로 연결ㄷ되면서 날로 강화되었고 그 결과 이전에 비해 훨신 큰 희생과 손실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상대편의 방어선을 돌파하거나 또는 그 일각을 점령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쌍방은 출혈이 큰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단ㄴ념하게 되었다. 나도 살고 적도 살게 한다는 소극적 관념이 전선을 지배하는 가운데 유엔군의 사상률은 점차 낮아졌으나 적은 이와 같은 소강기간을 이용하여 전력의 균형을 회복한 다음 유엔군의 방어선에 또다시 중압을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회담과 작전의 양면에서 그 어느 쪽도 상대방의 후퇴를 강요할 수가 없는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길고도 지루한 교착상태가 계속되었다. 일단 전선이 고정되면 피아간의 협상을 통해 작전을 조기에 종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전쟁은 장기 소모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3. 1952년 초 전선의 상황
1952년 초 전선 상황은 유엔 당국이 협상을 통하여 전쟁을 더 이상 확ㄷ대하지 않고 결말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적의 계속적인 증원으로 쌍방의 세력이 점차 균형을 이루게 됨으로서 대규모 작전에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상전투는 지난해에 비해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고 다만 진지쟁탈전에 의하여 약간의 출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지난해 회복한 한강유역을 포함한 전선일대를 확고부동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지금 이만한 소강상태를 얻게 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강유역은 37도선~38도선 내외에 걸친 광대한 유역으로 반도를 제패하는 심장부를 이루는 곳이다.ㅣ
아군은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피한 것은 전년의 경험에서 얻은 것과 같이 전년적 공격이 중요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막대한 희생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히 제한적인 지상전투를 계속하는 동시에 공중폭격 또는 함포사격으로써 적의 후방을 자주 고격하여 군사기능을 마비시키는 작전ㄴ을 취하였다.
그러나 적도 그간 공군력을 증강하여 백 대 이상의 제트기가 왕왕 편대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아군 전투기와 B-29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공군력은 적의 그것에 비하여 결정적으로 우세하여 적기가 우리 후방 깊이 침범해 올 정도는 아니었다.
미군의 폭격과 함포에 의하여 적이 받은 타격은 점점 심하여 병력, 병기 등의 소모, 건물 철도 교량 비행장 함선 기타의 파괴가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적은 여전히 침략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야음을 타서 전선으로 보급을 계속하여 우리의 간극을 노리고 있으므로 결국 소모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제8군은 1952년 1월 중에 미 제1군단 포병들이 중포와 전차를 고지 정상에 추진하고 경사면에 구축된 적의 축성진지를 직접사격하는 동안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11사단을 제5사단과 교체하는 한편, 미 제9군단 소속 국군 제6사단을 국군 제3사단이 인수케 하엿으며, 도한 미 제45사단에 이어 제8군에 배속되어 전선에 배치된 미 제40사단을 미 제24사단의 진지를 인수케하는 부대교대를 실시하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2월 2일 "빅 스틱"이라 명명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유엔군사령관에게 건의하였다. 이 작전의 요지는 미 제1군단 정면을 북쪽 예성강선으로 추진하고, 미 제1해병사단으로 동해안에 상륙양공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예상되는 아군 손실 1만 1,000명으로 승인되지 않을 것에 대비하여 "홈 커밍"계획을 22일 다시 제출하였다. 이 계획은 앞의 게획과는 다르게 공격 날짜를 4월 1일로 하고 공격시 국군만을 운용하며 상륙작전을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미 제8군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지상 작전은 아군 전선의 안전과 경계에 필요한 정찰 미 ㅊ역습만으로 제한한다"는 유엔군사령관의 작전방침 대문이었다.
한편 미 제8군은 '52. 2월 초, 위의 계획과는 관계없이 지금까지 각 부대가 실시하고 있던 타성에 젖은 수색정찰전의 반복실시를 극복하고자 "클렘 업"이란 유인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은 아군이 전서네서 일체의 접적활동을 중지하고 철수한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유인한 후 반격으로 포획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선의 양상은 교착상태에서 때때로 전초진지 주위의 주요고지를 목표로 쟁탈전이 전개되곤 하였다.
한편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4월 1일 제한된 진격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2개의 계획안을 작성하였다. 먼저 "촙스틱 6계획"은 증강된 국군 1개 사단으로 미 제9군단 정면에서 평강까지 진격함으로서 현제9군단 전선을 금성-평강선에서 정리한다는 것이고, "촙스틱16 계획"은 국군 제1군단으로 하여금 남강하구(고성)에서 진격케 함으로서 전선을 남강선으로 추진한다느것이었다. 2개의 제한된 공격계획은 모두 강력한 항공 및 포병지원이 수반이 전제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사령관은 촙스틱6 계획이 목표선인 방어선으로서 지형이 불리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 다만 촙스틱16 계획은 미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히에 승인하였다.
제한된 공격작전이지만 이 계획의 승인으로 전선에는 일시 활기를 되찾는 듯 하였으나, 이도 4월ㄹ 28일 그간 공전의 난항을 거듭하던 휴전협상에서 유엔군이 이른바 "일괄타결안"을 제시함으로서 협상의 분위기를 저해할 작전은 피한다는 밴플리트 장군의 명령으로 29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4월, 5월이 지나가면서 회담은 공전을 거듭하였고, 전선상황 역시 경미한 수색전을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에 6월 10일 밴플ㄹ리트 장군은 다시 "촙스틱6 계획"과 유사한 공격계획인 "미 제9군단에서 한국군으로 하여금 평강 북쪽의 새로운 진지선으로 진격케함으로서 철의 삼각지대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여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었다. 이유는 휴헞협상에 악영향을 줄 수 있고, 성과에 비해 예상되는 손실이 크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1952년 봄의 전선 상황도 여전히 대규모 공격작전을 보류하고 계속 정찰과 기습을 통하여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진상태는 '51년 말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쌍바의 방어진지는 더욱 굳어져 있었으며, 다만 아군의 경게선 및 주저항선의 요부에서의 소규모 공방이 전투 촛점이 될 뿐이엇다.
양측은 전초진지와 주진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접촉선상의 감제고지와 능선의 확보를 중시하게 되었다. 특히 군시분계선을 휴전조인 당시의 접촉선으로 확정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쌍방 간에 보다 유리한 전략적 전술적 위치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하여 휴전회담이 종료될 때까지 전초거점 쟁탈전이 국지적을로 전개되어 끊임없는 혈전이 벌어졌다.
유엔군의 전초진지 중에는 불모고지. 백마고지. 포크찹고지. 수도고지. 크리스마스고지. 저격능선.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해안분지 북쪽일대와 31고지 등 절대적으로 확보되어야 할 주요지형이 많았다. 만일 이 고지들이 적에게 점령되었을 경우네는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역습을 감행하여 탈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전쟁 첫해의 격동기 못지않게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ㅣ
이와 같은 전초선 상의 중욪지형은 대부분 상대방의 주진지를 완전히 감제할 수 있는 고지이거나, 주진지를 이협할 수 있고 상대방에게 피탈될 경우에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요충지였다.
유엔군은 화력가 기동면에서 그리고 해군 및 공군 전력에서 절대적으로 우세를 확보하고 잇었으나, 해발 1,000m이상이거나 험산준ㄹ령의 전투에서는 이와같은 우세를충분히 발히할 수 없었다. 오히려 차량보다는 지게와 같은 재래식 도구가, 육중한 곡사포보다는 인력으로 운반할 수 있는 박격포가 더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1952년 초부터 4월가지 전선의 상황은국부적이면서도 격렬하던 진지쟁탈전을 일시 중지시키게 하여 전선에서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5월에 들어서면서 공산군은 대규모의 전투정찰을 개시함으로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작전을 전개하는 이면에는 '51년도 유엔군의 하계작전 및 추계작전에서 강요당한 출혈을 감추고 그들의 전투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제 3 절 치열한 전초진지 쟁탈전
1. 양측의 탐색전 전개 양상
양측은 상대방에 대한 기선을 확보하고 방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상대 정보파악이 중요시 되었다. 이를 위해 정찰전과 아울러 전초의 전술적 운용이 지상 작전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 특히 수색정찰대 운용을 강화하였고 제한된 규모의 공세적인 전투정찰도 실시하게 되엇다.
수색정찰은 적의 방어진지나 활동을 탐색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실시하였으며, 전투정찰은 매복. 습격 등의 활동으로 적 포로를 획득하는데 주 목적을 두고 운용되었다. 공산군도 마찬가지로 정찰전을 전개하였다. 교착된 전선에서의 정찰활동은 주로 야간에 전개되었다. 따라서 부대는 적의 침투로를 저지하기 위해 진지주변에 철조망과 지뢰. 조명지뢰. 부비츄랩. 네이팜탄. 백린 등을 설치하는 등 각종 장애물과 방호시설은 강화하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정찰대와 작은 충돌로 전투가 확대되어 쌍방간에 수 시간동안 포격전이 전개되기도 한다. 이때 쌍바의 병력은 진지내에서 보호를 받아 인명피핵가 거의 없으나 포격이 끝난 후 장비를 점검하고 부수 하는등 반복적인 활동을 수행해야 했다.
공산군의 정찰대는 흔히 소내 내지 중대규모로 드믈게는 대대규모로 편성되어 공중으로부터 관측과 포격을 피할 수 있는 야간에 국군 및 유엔군의 방어선에 대한 정찰을 실시하엿다. 예로서 금성 동서방면에 배첻된 중공군제12군은 1951년 말붙터 1952년 1월 하순 사이에 정찰활동을 총 805차례 실시하였으며, 이는 매일 평균 12개 반이 출동한 셈이었다.
이에 비해 국군과 유엔군은 통상 중대 내지 대대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 공산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 국부적인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주저항선에 배치된 전방 연대는 공산군의 야간 침투를 사전에 저지하기 위하여 수색정찰을 운용하엿다. 국군과 유엔군은 어느 날의 경우 하루에 68회의 수색정찰대를 전방에 투입하였으며, 한 달 동안 제8군의 전부대가 전투정찰을 실시한 회수는 247회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정찰활동을 통하여 유엔군은 주진지 전방의 유리한 지형지물을 확보하고 전초진지를 강화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군ㅇ에게 전투력의 소모와 출혈을 강요하였다. 교착된 전선에서의 전투정찰은 최선의 훈련수단이기도 하여 이를 통해 장기간의 진지근무로 해이해지는 병사들의 정신상태를 바로잡고, 후방에서 보충ㄷ된 신병들에게는 실전에서의 자신감ㅇ르 가질 수 있어 짧은 시일 안에 장병들에게 고동의 전기를 연마하는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특히 담력과 용기를 기르는데 있어서 야간정찰 이상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이어ㅣ에도 국군과 유엔군은 잔투정찰과 국지작전을 통하여 가능한ㄴ 많은 수의 포로를 획득함으로서 적정을 파악하고 있엇다. 정찰을 통한 포로획득은 적정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유엔군은 포로를 획득한 병사에게는 포상휴기ㅏ를 줌으로서 정찰활동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포로 획득하는 방법 가운데는 적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그 부근에 며칠 밤 매복하여 기다리다 수리병이 출현할 때 생포하긷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우전이 전개되고, 소총사격에 의하여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빈번하였는데 비하여 포로를 생포하는 경우는 적었으며, 공산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각 연대가 매일 밤 적어도 1개조의 정찰대와 2~3개조의 매복조를 투입하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있었다. 정찰대는 사전에 야간 매복요령 및 사격기술을 연마하고 실전과 다름없는 에행연습을 실시한 뒤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정찰전을 통해 비록 폴로를 통한 적정파악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교착된 전선 상에서 해이해질 수 있는 장병들을 긴장시키는 한편 귀중한 경험과 훈련의 기회를 갖게 하엿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엇다.
2. 소규모 전초진지전의 전개
가. '51년 12월~'52.1월사이의 전투(일명 '51년도 동계전투라 함)
(1)크리스마스고지 전투('51.12.25~'52.2.13)
어은산1277
문등리
1213
390 B 984
수색 A 크리스마스고지 내동
1090 (북) 1090(남)
988 1220
백석산
(가) 전투 개요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1951년 12월 25일을 전후하여 어은산 일대의 중공군 제204사단이 백석산 북방의 국군 제7사단의 최북단 전초진지인 1090(북)고지 부근의 무명고지에 대해 공격을 감행함으로서 전개된 전투로서 후일 크리스마스전투라 명명되었다. 이 고지는 어은산과 백석산을 연하는 종격실 능선상의 고지들인데, 피아가 현 주저항선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의지의 충돌로서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당시 적은 중공군 제63군 예하 제204사단 제612연ㄷ대로서 어은산을 주축으로 890-1218-984고지를 연한 선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1090고지를 기습과 강습을 병행하여 점령 확보함으로서 그들의 주진지 일대에 데한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휴전회담이 결렬될 경우 공세이전에 대비하려 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1951년 11월 중순 국군 제8사단과 교대하여 이곳에 투입된 후 이미중공군 제204사단과 일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한 바 있다. 사단은 이 고지가 지형적으로 감제가 가능한 군사 및 전술상으로 주요한 전초진지이므로 이를 결사적으로 확보한다는 방침이었다.
(나) 전투 경과
1951년 11월말 1090고기 부근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DUKE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된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다음과같은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1) 제3연대(대전차대대공격대대 배속)는 12월 10일 08시에 행동을 개시하여 12월 12일 06시까지 제5연대 진지를 인수하여 좌일선의 지구를 담당하라
2) 제5연대는 12월 12일 06시까지 현 진지를 제3연대에 인계하고 오미리에 집결하여 사단에비에 임하되, 1개 대대를 제8연대에 배속하라
3)제8연대는 현 임무(우일선)를 계속 수행하되, 제5연대의 1개 대대를 12월 12일 06시부로 직접지히하여 진지를 보강하라
이에 따라 제3연대는 1220고지에 CP를 개설하고 제5연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우일선에 제1대대를, 중앙에 제2대대를, 그리고 좌일선에 제3대대를 배치하고 배속된 대전차공격대대를 예비로 두었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강력한 눈보라로 인해 시계가 제한된 가운데 17시 40분경 20여 명의 적 정찰대가 무명고지 B일대의 진전을 탐색하다가 제1대대 전초소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들이 물러간 다음 400여발의 포탄이 고지에 작열하면서 곧이어 1개 대대규모의 적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기도는 1090고지를 기습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한 대대장은 1090(남)고지의 예비중대를 1090고지(북)으로 추진하여 종심을 강화시키는 한편, 자대화력으로 제3중대를 지원하며 날이 밝기까지 무명고지 A를 고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3중대는 적의 수차에 걸친 파상공격을 1시간여를 견디게 되자 적은 B고지 쪽으로 자진 철수하였다.
자정 무렵까지 역습준비에 임한 제3중대는 다음날 새벽에 전 중대를 지휘하여 B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대대는 어둠을 이용하여 4회에 걸쳐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적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09시경 다시 제1중대를 제3중대를 초월하여 공격을 감행 드디어 B고지를 15시 30분에 장악하였다. 다시 어둠이 갈리며 19시 35분에 적이 370여 발의 포탄 사격에 이어 집중공격을 가하여서 중대는 2시간 만에 A고지로 철수한다.
다음날인 12월 27일, 대대장은 제1중대와 제3중대에 합동으로 공격토록하여 11시에 목표에 대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일단 A고지로 철수하였다. 대대장은 야포를 이용하여 B고지 북쪽 1218고지의 적 박격포진지를 제압하고 적의 증원을 차단하며 다시 강공으로 목표 B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다시 적은 18시 30분에 2개 중대 규모의 증원부대로 기습을 감행해와 결국 다시 A고지로 철수한다. 다음날 28일, 대대는 다시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백병전 끝에 09시 50분에 고지 정상을 탈환하였다. 군단장과 사단장이 격려차 연대 지휘소를 방문한 11시 45분에 다시 적이 기습을 감행해 왔으나 아군 3개 포병대대의 화력집중에 적은 격퇴되었다.
(다 )전투 결과
12월 28일 06시 연대는 우일선의 진지교대를 단행하고 예비인 대전차공격대대를 육덕곡으로부터 미네소타선으로 추진하여 중앙일선의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제1대대는 제2대대에 1090(남)고지를 인계하고 연대지휘소 부근으로 집결하였다.
이 무렵 전선의 상황은 동해안의 남강하구에서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평온을 유지했으나, 상기 지역의 무명고지에 대한 격전으 펼친 까닭에 이 고지를 크리스마스고지라 명명하게 되었다.
전투기간 중 제7-3-1대대는 적 172명 사살, 포로 5명이었고, 아군은 22명 전사에 109명 부상 21명 실종이었다.
이 무렵 포로 획득을 위해 중동부 전선의 미 제2사단에 배속된 네덜란드 대대는 공산군 전초기지인 평강 남방 10KM 별고지(430)를 공격하였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된 콜롬비아 대대도 김화지구 적 전초진지(400고지)를 기습하여 그들의 방어시설을 파괴하였다.
(라)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 비무장지대 안으로 탐사제한
1)참전용사 윤여민 증언(제7-5-11중대, '15)
'51년 겨울에 양구북방에 위치한 어은산 일대 크리스마스(1090고지)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피아간에 역습에 재역습에 주인이 시시각각 바뀌는데 10중대가 피탈되면 11중대가 탈환하는 형식의 전투다. 당시 제3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2) 참전용사 이재봉 증언(제8-16-3대, '16) : '51.2.17일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에 잇는 고지에서 10월경에 중공군을 상대로 ㅊ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중공군과 6일간의 전투 결과 중대원 중 6명만 생ㄷ존하고 대부분 전사했으며, 신병을 보충받아도 금방 전사자가 발생하여 피해가 컸다.
3) 배금석(제7-3-3대) : '50년 8월 30일에 입대하여 제7사단 제3연대 중화기 중대에 배치되어 백석산 전투를 했다. '52년 말 경에는 어은산 남방고지에서 방어 임무중에 새로운 부대오 교체하는 시기에 적이 기습공격을가해 아군 연대에 많은 피해가 났다.
4) 김희범(제7-3-1-2중) : '51.11. 13일에 입대하여 7사단으로 갔다. 양구 전방 문등리 위의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서 당시 눈이 어깨까지 내리는데, 중공군과 교전 중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 밤에는 적군이 점령을 반복하는 가운데 많은 전사자가 생겼다. 나도 여기서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제1중대 전경용 참전용사도 동일 증언)
(1) 두매리 부근 전투('51.12.28~'52.1.8일)
(가) 전투 개요
이 전투는 '51.12.28일부터 다음 해 1월 8일까지 문산 정면의 임진강 북쪽 두매리 부근에서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박임항 준장)과 중공군 제68군 예하 제188사단이 전개한 전형적인 전초진지 쟁탈전이다. 당시 제1사단은 주저항선을 임진강북안의 사천-백학산-사미천을 연하는 선으로 추진하여 좌전방에 제11연대를, 우전방 두매리 남쪽에 제 12연대를 배치하고 제15연대(-)를 예비로확보하고 있었다.
(나) 전투경과
평촌
개성 하리 사시리
*122
*철모고지 *89
*두매리고지
*무명고지
*대덕산 237 *104 12-1대 = 15-2대
11연대 = 12연대
*백학산 229
국군 제1사단의 제12연대는 중앙으로, '51.10월 29일 주저항선을 제임스타운선으로 추진, 배속된 제15연대 제2대대를 우일선, 중앙에 제1대대와 좌일선에 제2대대를 각각 배치하였다
한편 연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188사단 에하 제523연대는 12월 28일 저녁 무렵 에비대를 투입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해 왔다. 16시를 기해 적은 제5중대가 확보하고 있던 철모고지 전방 300M지점에서 신호탄을 신호탄을 쏘아 올림과 동시에 104고지와 두매리 고지 부근을 향해 600여 발의 박격포탄을 집중하였다.
이에 제17포병대대에서 미리 준비한 탄막사격을 집중했고 미 제999포병대대에서 적의 예상 포진지에 대포병사격을 실시하였다.
연대장은 진전에서 적을 저지하라고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제1대대장은 배속된 제5중대에 백병전의 각오로 진지를 고수할 것을 엄명하였다. 잠시 후 적은 제5중대의 분견대가 점령한 두매리 고지 서북쪽 1.5KM 지점의 철모고지와 89고지에 2개 중대 규모로 공격을 가해와 진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철모고지의 분견대는 적의 공격 일파를 저지한 다음 고지 남쪽 300,M지점의 무명고지로 철수하였으며, 89고지 분견대도 두매리 고지로 철수하였다.
전방의 분견대는 적이 진전으로 진입하자 포병사격을 유도하면서 사격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사격전이 전개되는 동안 모든 유개호가 파괴되고 적이 진내로 돌입하자 분견대는 결국 104고지로 철수하면서 F-51전폭기가 두매리와 무명고지에 폭격을 개시했다.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장은 적의 기도가 차기 작전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12월 29일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피탈된 전진기지를 탈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2대대는 목표A(140)와 B를 탈취하고, 제1대대는 서쪽에서 견제 임무를, 제15-2대대는 동쪽에서 견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제2대대는 제6중대와 제7중대를 공격일선에 배치하여 무명고지와 두매리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공격개시 약 3시간 후에 우일선의 제7중대가 두매리고지 100M 전방까지 진출하였다. 결국 수류탄전과 백병전 그리고 진내전을 거듭한 끝에 10시10분에 목표 고지인 140고지를 탈환하였다. 이후 중대는 수차례 반복된 중공군의 여급과, 14시 30분경에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결국 백병전이 펼쳐지고 부득이 중대는 철수를 단행행야만 했다.
한편 제6중대는 무명고지에 대해 우회공격을 기도하였다.먽저 고지 일대에 포병으로 초토화를 시킨 후에 돌격하여 마침내 고지를 점령한다. 그러나 11시경에 적이 철모고지 방향과 대덕산 동족, 하리 남쪽에서 공격을 받아 결국 이 고지도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역습상황을 분석한 결과 목표탈취가 어렵다고 판단항여 전열의 재편을 도모한 후에 다시 공격하기로 하고, 제6중대를 104고지에, 제7중대는 그 우측에 배치하고 제5중대는 주진지로 복귀시켜 공격준비를 하였다.
'51. 12월 30일, 제5중대는 07시에 두매리 고지에 대한 역습을 개시하였다. 적의 집중사격으로 진출이 돈좌되기도 했지만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14시에 목표를 점령하고 즉시 대대에 증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증원병력이 오기도 전에 적은 전차포 직사포탄 100여 발을 집중하며 좌우능선으로 역습을 재개하여 결국 중대는 다시 104고지 후사면을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두매리 고지는 확보시 적진 후방 깊숙이 감제와 관측이 가능하여 구화리-개성 간의 주 보급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대내 적의 감제고지인 대덕산 동측에 대한 고립이 가능하고, 차후 공격 발판으로 사단의 주진지 전방에 대한 적의 수색활동을 제한할 수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사단장 박임항 준장은 해가 바뀐 '52.1.3일 1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12연대로 하여금 기필코 목표 A,B를 확보하라 명령한다. 이에 제12연대장 정영홍 대령은 제2대대를 대신하여 이번에는 제3대대를 공격제대로 한 작전지시를 하달하였다
'52. 1. 3일 08시를 기해 105MM야포 18문, 155MM야포 6문, 4.2" 박격포 8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두매리 고지일대를 집중포격하고, 이어 전폭기 4대가 엄호 폭격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3대대가 적진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진 30M까지 진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좌전방의 제10중대 제1소대의 김학명 중사 외 5명의 특공대원이 적의 화기진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면서 중대 주력이 돌진하여 적 47명을 사살하고 3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며 13시 10분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2개 중대 규모의 적 역습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일선의 제11중대는 전차포롤 적의 진지를 제압한다음 돌격을 감행했으나고지 곳곳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맞서는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이때 동쪽 경사면으로 우회한 제3소대가 적진으로 돌입하고, 동시에 중대 주력이 돌격하여 적진을 유린하였다.그러나 역시 진내에서 백병전을 펼치면서 적을 저지하였으나 결국 14시에 진지를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단장으로부터 공격임무를 부여받은 제15연대장 김진위 대령은 고지 탈환작전의 부진한 원인과 격전의 추이를 검토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작명을 내렸다.
1) 연대는 '52.1.5일 05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가 목표 B를 탈취하고 의명 목표 C를 점령한다
2) 제3대대는 두매리고지의 동측배를 급습하여 목표 A를 탈취한 다음 목표 C를 확보하라
3) 제2대대는 현 임무를 계속하라
'52.1.5일 제15연대는 제1대대를 좌전방으로, 제3대대를 우전방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3대대의 진격은 초반은 순조로웠으나, 고지 중턱에 이르러 급경사와 3면의 적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아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대대는 목표고지 배후에 포격을 집중하도록 요청하여 적을 제압하고, 제11중대는격전 끝에89고지를 확보하고 두매리 고질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반면 제9중대는 제2소대의 특공대가 돌격로를 개척하면서 적진으로 돌입하여 마침내 목표고지를 탈환하였다. 또한 제10중대는 신속히 무명고지로 방향을 전환하여 122고지를점령한데 이어 148고지마저 탈취하였다.
그러나 적은 13시 30분경 집중포격을 실시한 후 2개 중대 규모로 중군고개와 148고지 , 두매리고지에 대해 역습을 실시하여 주과부족으로 다시 철수하게 ㄷ된다.
다음날인 '52.1.6일, 연대장은 제1대대에 두매리고지 탈환을 명령하여 05시에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여 3시간 후 고지 중턱까지 진출했으나 혈전만을 거듭하였다.
제15연대장은 그동안 3차례의 탈환전에서 적이 많은 타격을 입었음에도 저항하는 것은 역습부대의 대량 투입과 화력의 증강에 있다고 판단하고 대포병 화력을 강하하면서 제3대대에 탈환명령을 내렸다.
제3대대는 '51.1.7일 , 야음을 이용하여 두매리 고지 200-300M 전방까지 이동한 후 05시를 기해 고격을 개시하였다. 30분이 지나 고지 중턱까지 진출하였으나 적의 박겨포 탄막이 진로를 방해하고, 날이 밝아 오면서 측방이 노출되어 적의 집중공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데데는 대덕산과 두매리고지 적 화력을 포병의 집중사격으로 제압한 후 09싱에 공격을 재개하여11시에 두매리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전날과 마찬가지로 2개 중대규모의 적이 역습을 해와 결국 고지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이번에는 사단장이 나서, 고지를 탈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매리고지 서남쪽 무명고지의 적의 측방사격 때문이라 판단하고 이를 탈취하도록 제12연대장에게 명령하였다.
따라서 제12연대 제3대대는 무명고지 공격를 위해 특공대를 양측으로 투입하여 적을 교란하면서 일제 돌격을 감행한 끝에16시 20분에 부여된 무명고지를 탈취하였다. 그러나 30분 후 대대는 적의 역습을 받고 진내전으로 이를 저지하였으나 역부족으로 17시 30분에 고지 남쪽 100M 지점의 무명고지로 철수하였다.
그러자 사단장은 다시 제15연대 제3대대와, 제12연대 제3대대를 투입하여 일거에 무명고지와 두매리고지를 탈환하도록 하였으나, 탈환하면 다시 역습을 받아 고지를 빼앗기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다) 전투 결과
사단은 미 제1군단의 명령에 의해 '52. 1.8일 전투를 종료하는 한편 예하의 제15연대를 임진강 남안의 원진지로 복귀시키고, 제12연대는 104고지를 중심으로한 새로은 전진진지에 견고한 축성공사와 함께 위력수색을 지시하였다. 반면 에 적은 대덕산을 중심으로 주진지를 계속보강하면서 두매리고지 전면에 지뢰지대를 설치하였다.
결국 국군 제1사단은 '52. 12. 28~'52.1.8까지 결국 두매리를 상실하였지만 기간 중에 적 사살 1,611명, 포로 4명의 성과를 올렸고 국군은 전사 129명, 부상 585명, 실종 2명의 손실을 입었다.
나. 1952년 춘계전투
미 제8군사령관은 '52. 4월 1일 제한된 진격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계획으로 먼저 "촙 수틱 6"은 증강된 국군 제1개 사단을 미 제9군단 정면에서 평강까지 진격하여 현 제9군단 전선을 금성-평강선으로 하는 것이고, "촙 스틱 16"은 국군 제1군단으로 남강하구까지(고성)진격케 하여 전선을 남강선으로 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당시 휴전회담 성사와 맞물려 실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52년 봄의 상황도 '51년 말과 같이 제한된 전초진지 상에서의 전투가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1952년 4월 전선 상황도
신계
이천
북1군
사리원 시변리 575고지 국12
중39군 중42군 평강 금성 ↓ 중12군 662고지 북3군
중15군 ● ↓ 중68군 북2군 국11
미45사 ● ●x-머스고지
국9 미7 미40 국6 수도사 국3 국7 미25 국8
금천 중64군 국1사 김화 미10군=국1군
중65군 중63군 국2군=미10군
영1사 철원 화천 양구
개성 ● 고랑포 동두천 미9군=국2군 인제
● 두매리고지 포천 춘천
사천강 문산 미1해병 미1군=미9군 가평
부근전초진지
(1) 사천강 부근 전투
판문점 4km 미 해병 5연대
한 해병 1연대
전초소대(2/1)
사천강
개성 5km
*288덕물산 장단(1중대(-1)) 문산 6km
*천덕산 203 *28
*군장잔 213
사천강부근 전투는 한국 해병연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한 존초진지 쟁탈전이었다. 이 전투는 국군 해병 제1연대가 1952년 4월 1일부터 5일까지 중공군 제195사단의 사천강 부근 전초진지 공격을 격퇴한 전투이다.
'52년도에 접어들어 국군 과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수도 서울의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으로 전 전선에 걸쳐 부대를 재배치하는 한편 부대의 인원, 장비의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중동부 펀치볼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국군 제1해병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함께 3월 17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사천강 및 한강하류와 서해안 일원의 주저항선을 인수하여 서울에 이르는 적의 주접근로인 개성-서울가도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 제1연대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로부터 사천강 일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제3대대를 좌, 제1대대를 우, 제2대대를 예비로 좌인접은 미 제1장갑수륙 양용차대대와, 우인접은 미 제5해병연대와 연대하였다.
이때 적은 중공군 제65군 제195사단으로 사천강 서쪽의 덕물산-천덕산-군장산 등 주요고지를 점하여 강 동안의 아군의 전초기지를 감제하고 있었다.
1952. 4. 1일 22:00시에 2개 대대규모의 적이 사천강을 건너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일시적으로 전초선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적시적이 예비대 투입으로 역습을 하여 실지를 회복하였고 적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4월 5일에는 우리 해병이 적 전초기지를 기습하여 12명을 사살하는 등 전초선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해병은 적사살 121명, 추정사살 126명, 포로 1명이었고, 아군은 전사 53명 부상 27명 실종 4명이었다.
이후에도 피아간에 기습전을 반복되었으며, 5월 18일에는 미 제45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9대대전투단도 연천 북방 아스널,이리고지 상에서 연대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백병전으로 맞서 고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2) 575고지 전투
금성 1km
*495
*573
율사리 쌍령등
*414
율곡 *575 제7-6중대
방평리 *549 제7-2중대
*649 제7-수색중대
*690
*770 교암산
2연대 7연대 *765 제7-7중대
금성천 6사 = 수도사
이 전투는 국군 제6사단이, 사천강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중동부 전선에서 치른 전초전투다. 사단은 양구부근에서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엿으며 , 미 제9군단으로 배속되어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제6사단은 1952. 3. 28일 제2, 제7연대를 좌우 전방으로 하여 미 제40사단이 방어하던 금성천 북방의 봉화산(477)-사천리-계암-442-교암산(770)-765-690 고지를 연하는 미조리선상의 주저항선을 인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죽동에 확보, 전선을 방어하였다.
[제6사단 전투경력]
'51.4.20~4.25 : 사창리전투, 5.17~5.23 : 용문산전투, 5.24~5.28 : 용문산-가평-춘천-화천(캔사스선으로 진출), 6.7~6.13 : 화천-백암산(어민선)으로 진격, 6.13~8.30 :수리봉-재안산에서 어민선 방어, 8.30~11.18 : 백암산-등대리-여문리(금성천 노메드선)-949(미조리선)고지로 진격(*'51.10.30일 교암산지역을 미 제24사단에게 인계하고 11.5일금성천동쪽 북한강변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 지역 인수 11.17일 949고지 진출전)., '52.1.9: 용호동-949고지에서 미조리선 방어(*'52.1.9일 미 제9군단에서 육본직할로 전환, 작전지역을 국군 제3사단에게 인계후 '52.1.12~3.20까지 양구이동 12주간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52.3.23~3.29 :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교암산-봉화산 지역으로 이동, 미 제40사단 우측진지 인수, '52.3.30~'53.3.4 : 575 / A.B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53.3.5~7.9일 금성돌출부 계속방어, '53.7.10~7.14 : 교암산으로부터 금성천 남안으로 지연전, '53.7.15 : 제11사단이 사단 진지를 초월하여 반격후 군단예비로 전환
사단은 제2군단으로 좌익으로서 좌로는 미 제9군단 예하의 미 제40사단, 우로는 수도사단과 연결을 유지하고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575고지를 포함한 전초진지 보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12군 예하 제31사단 일부와 제35사단 일부였다. 병력은 6,000명 수준이고 제32포병사단 제406포뵹연대의 직접지원을 받고 있었다.
575고지는 주저항선인 765-690고지 선에서 북으로 돌출된 요충으로서 율사리-쌍령등 일대를 감제하여 적의 수색활동을 제어하고 정확한 포격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52. 4월16일 적의 교란사격이 시작되었다. 2개 중대의 적이 침투를 개시했다. 국6-7연대장은 제27포병대대, 미 제300포병대대, 81mm박격포, 4.2" 박격포로 맞서며 일시적 진내진입을 허용했지만 적의 진출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살했지만 아군도 소대장 2명을 포함하여 24명의 전사자와 74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적은 이후에도 몇 차례 역습을 시도하여 진지정면까지 접근하였으나 그때마다 격퇴되었다.
(3) 662고지 전투
*627 금강천
*무명산
*439 북한강 천리
*679
*674
어운리 *572 *550 무명고지 *662 수색중대/23
10중대/23
북한강 *748
*629 *949 *973
22연대 23연대 2대대 1대대 23연 18연 18-3대대
662고지 전투는 국군 제3사단이 중동부전선 949고지 전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한 전초진지 쟁탈전이다. 이 전투는 1952년 초에 중동부전선 949고지 전방에서 제3사단이 클램 업 작전개념에 따라 작전 중에 중공군과 치른 전초진지 전투다
[국군 제3사단 전투경력]
'50.11.17~11.30 : 제22연대가 혜산진.제23연대가 나남진출, '50.12.1 :국군 제1군단의 철수명령에 철수개시, '50.12.10~12.9 : 백암 및 나남-길주-성진-흥남으로 철수, '50.12.10~12.12 : 제22연대가 구룡포로, 제23연대가 부산으로 해상철수, '50.12.15 : 제18연대가 사단에 배속되고 제26연대는 수도사단으로 예속변경( 사단은 제2군단으로 배속), '50.12.21~12.31 : 홍천 북방 소양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10사단, 제2사단의 유격군 소탕, '51.1.5 : 제2군단에서 제3군단으로 배속 변경, '51.1.7~1.10 : 평창-영월-제천-영주-춘양으로 철수, '51.1.14~1.19 : 남대리(소백산맥)에서 북한군 진격저지, '51.2.4~2.10 : 춘양-영월-평창-횡성으로 진격, '51.2.11~2.13 : 공산군 2월 공세로 횡성에서 철수, '51.2.14~2.15 : 제천을 거쳐 주포리로 이동(국군 제2군단에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전환), '51.2.23~3.6 : 강림-안흥-봉화산으로 진격(3.6에 제3군단으로 배속변경), '51.3.10~4.21 : 평창-하진부리-유천리(아이다호선)-광천리-서림리(카이로선)-한계령-인제로 진격, '51.4.24~4.26 : 한석산-경봉지구 방어(중공군 춘계 1차공세), '51.5.16~5.22 : 현리전투. 5.22일 제3군단 해체로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 '51.23~7.8 : 북평-강릉-야양-간성-거진으로 이동, '51.9.13 : 양양이동, '51.9.24~10.18 :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51.10.19 : 양구 임당리로 이동,. 제5사단의 작전지역(가칠봉)인수(미 제10군으로 배속), '51.10.27~1031 : 가칠봉 전방 1052고지및 1211고지 공격, '51.11.23 : 양구이동, '51.11.27~'52.1.7 :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52.1.7~1.11 : 양구에서 제9군단지역 이동(제6사단 금성천지역 인수), '52.3.18 : 미 제9군단에서 신편 백 야전사령부로 배속변경, '52.4.5 : 백야전사령부가 국군 제2군단으로 승격, '52.4.9 : 석장리-932-949-739고지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배치, '52.9.28~10.3 : 748(피의고지)고지와 572고지(독수리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53.1.1~4.12 : 필승.텍사스. 오봉능선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53.4.13~4.19 : 작전지역을 제5사단에 넘기고 화천 상리로 이동(미제8군예비), '53.6.3 : 화천상리에서 경기 연천 동송으로 이동, '53.6.10~6.15 : 제22연대 제5사단 증원위해 제5사단 배속, '53.6.15 : 제22연대 복귀/제5사.8사 작전지역 일부 인수(금성천 등대리) , '53.6.25~7.3 : 529고지전투(관망산), '53.7.13~7.15 : 금성천(여문리)부근전투 , '53.7.29 : 화천에서 김화 동막동으로 이동(미 제8군예비)
국군 제3사단(백남권 준장)은 '52. 1. 12일부터 국군 제6사단의 작전임무를 인수, 미 제9군단의 우익으로 게리선상의 949고지를 중심으로 북한강으로부터 석장리간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방어하고 있었다.
제23연대는 사단 중앙연대로써 949고지-739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제3대대 9, 10중대로 사단 전투지대에서 가장 중요한 접근로상의 무명고지(550)와 662고지에 전초진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정면의 적은 중공 제12군 제35사단 제104연대와 제68군 제203사단 제607, 609연대로써 자패리-북한강 돌출부-679-674-송정-암리를 연하는 선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3-23연대는 적을 유인하여 타격을 주고 포로를 획득하기 위해 2월 10일 04:00시 제9중대는 완전철수를 가장하면서 연대 수색중대 및 제10중대에 662-무명고지의 전초진지를 인계하였다.
침묵을 지키던 적이 드디어 2월 15일 01:50분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662고지의 수색중대 전초기지를, 적을 유인 격멸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오히려 전초기지가 다음날 새벽 피탈되고 말았다.
2월 16일 09:30분, 고지탈환을 위해 제3-9중대가 투입되어 백병전을 전개한 끝에 17:05분에 드디어 탈환하고 제23연대는 고지 주변에 3중의 철주망과 500여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때 '51. 11~'52. 4월까지의 지상전에는 약간의 기습작전이 전개 되었으나, 쌍방이 점령하고 있는 방어진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4) 호도 전투
호도 전투
호도
월사리 반도 진풍면
호도전투는 국군 해병이 해안봉쇄를 위해 실시한 도서 방어 전투였다. 이 전투는 해병 도서부대 제7대대가 서해안 호도에서 1952.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북한군 제6군단 예하 중대의 공격을 격퇴한 전투다.
북한군은 1952년 초, 아군의 대규모 상륙작전과 해안기습 활동에 대비하여 서해안 경비를 강화하였고 특히 석도와 인접한 장연.은율.송화.용강일대 해안지역에 사단 규모를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석도 대안인 서포리 반도, 월사리 반도에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점차 공세적 방어를 취하려 했다.
해병은 독립 제41, 제42중대에 이어 양도를 선점한 제43중대의 3개 도사 작전부대를 모체로 1952년 1월 15일 도서부대를 편선한다. 이 독립 제42. 제43중대를 제8대대로, 석도에 진주한 독립 제41중대를 제7대대로 각기 현지에서 증편하고 제9대대와 부대본부 및 직할 근무지원 중대를 신규 편성한다.
진해 신병훈련소에서 제9대대 편성을 완료하자, 제7, 제8대대를 제외한 이들 1,250명은 도서이동명령으로 '52.1.15일 이동을 개시하였다.
호도는 은율 앞바다 황해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섬으로 2개의 고지대로 형성딘 무인도였다. 도서에 식수가 전무하여 용수는 전략 석도로부터 공급되었고 대안의 월사리 반도와는 450M 거리에 있었다.
적은 '52.1.30일을 기하여 연일 포격을 실시하고, 2월 3일에는 상륙을 기도하는 적선이 출현하여 함포지원으로 격퇴한다.
적은 '52. 3월 25일, 호도에 30발의 포격에 이어 160여 명이 4척의 목선에 분승하여 호도를 기습하기 시작한다. 일부 병력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도 하였다. 적은 주로 밤에 기습하고 아군은 낮에 적을 기습하는 과저잉 반복되는 과정에 아군 항공기의 지원하에 적을 물리친다. 하지만 호도가 지리적으로 불리하여 전원 석도로 4월초에 철수시킨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39명이 발생하였고, 적 6명 사살에 포로 2명을 획득하였다.
(5) 전초기지 유해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결과
전초기지는 지금 모두가 북한군지역으로 출입이 곤란하다. 다만 참전용사 일부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두매리지역은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 그 지역을 육안 관찰은 해보았다. 이 전초기지는 다음 휴전임박해서 또 격전의 현장이 되며 아군이 확보한 곳은 없다.
가. 사천강부근 전초진지 부근 : 나즈막한 산에 북한지역이 바로 눈에 잡히는 곳이다. 비록 비무장지대 안이라 해도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은 포탄 탄흔이 온통 갈려 있기에 어느 곳이 개인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일부 우리의 매복호가 있음) 분명 전투 유품은 널려 있다.
나. 두매리고지 부근 : 100m내외의 낮은 산들이다. 바라보이는 철모고지 등이 나무 하나 없이 맨몸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1사단의 기록은 이곳에서 129명이 전사하고 2명이 실종이라고 한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
전초진지 전투간 기록을 잠깐 비교하면, 제7사단의 X-머스 고지('51.12.25-'52.2.13)전투는 전사 31명. 실종 218명, 제1사단의 두매리고지전투('51.12.28-'52.1.8)은 129명 전사. 2명 실종, 제6사단의 575고지전투('52.4.16-6.14)는 58명 전사, 제3사단의 662고지 전투('52.2)는 미수집 유해 31명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