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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1일(성령강림절 후 열두 번째 주일, 해방기념주일)
이사야 37:14~20
히스기야의 기도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이사야 36장부터 39장까지에는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 25세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29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히스기야는 산당을 제거하고, 주상을 깨트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며, 이것을 ‘느후스단’이라고 불렀습니다(왕하 18:3~4).
모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거할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모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놋으로 만든 뱀을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치 놋 뱀 그 자체가 자기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놋 뱀이 사람들의 타락한 종교심과 만나 우상숭배의 죄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고 놋 뱀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이것은 그저 놋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어긋난 것들을 원래의 의도와 본질에 맞춰 돌이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이런 히스기야를 가리켜 “여호와께 연합한 자”라고 불렀습니다(왕하 18:6). 여기서 ‘연합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들러붙다, 꼭 붙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들러붙어 있는 사람, 하나님을 꼭 붙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히스기야를 사랑하셨고, 그의 삶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히스기야였지만, 그에게도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나라는 앗수르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를 멀리하고 애굽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앗수르 왕 산헤립은 주전 701년에 유다를 공격해서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놀란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국에 있던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바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의 성전 문과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모두 벗겨 앗수르 왕에게 주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에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가 문제를 만났을 때, 처음부터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앗수르 왕 산헤립은 참 나쁜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히스기야에게 많은 돈을 받고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 정복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당시 중요한 요새였던 유다의 라기스를 점령하고, 신하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랍사게’라는 명칭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앗수르의 주요 관직을 의미합니다. 앗수르 왕의 명령을 받은 랍사게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 근처 세탁자의 큰길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랍사게와 유다 왕의 신하 세 명이 회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회담이지, 앗수르 왕이 보낸 랍사게는 유다에 선전 포고를 하기 위해 회담장에 나왔습니다. 랍사게는 유다가 의하던 애굽이 마치 잘린 갈대 지팡이와 같아서 그 지팡이에 몸을 기대면 손이 베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랍사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랍사게는 유다를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랍사게는 당시 국제적 통용어였던 아람어로 말하지 않고, 유다 백성들이 듣도록 일부러 히브리어로 말했습니다. 유다의 사신들이 히브리어로 말하지 말고 아람어로 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랍사게는 더 큰 소리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요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36:16~17).”
랍사게는 유다의 백성들이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랍사게는 만일 유다 백성들이 항복한다면 각각 자기의 포도, 자기의 무화과,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랍사게의 말에는, ‘유다 민족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가 빠져 있었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라는 외침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랍사게의 외침은 철저히 세상의 외침과 닮아있습니다. 세상의 외침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말고, 철저히 자신만의 안위를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관되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6:33). 성경은 그 길이 축복 된 길이요, 안전한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랍사게는 유다 백성들이 항복할 때, 그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겨질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랍사게는 유다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갈 유배지마저도 풍요로운 땅처럼 왜곡시켜 말했습니다. 이는 가짜 평안이요, 가짜 유토피아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을 한 장만 더 뒤로 넘겨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직접 서찰을 보내 위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너만 위해 살아가라”라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사랑과 거짓된 평안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한 청년이 극심한 생활고를 경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사님을 찾아가 취업만 된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일념으로 간절히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많은 이력서를 넣었음에도 아무런 회신 없이 몇 년 동안 취업이 안 되어 전전긍긍하다, 마침내 한 직장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박수를 쳐 주었고, 모두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며 그 청년에게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 청년은 일터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며 성실하게 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직장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그 청년의 마음에 감사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 생활도 예전에 비해 절박함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주일예배에 빠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더니, 나중에는 대놓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게 살았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 다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회사에 들어가 보니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 손해를 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들어 교회에 가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편해 보였는데, 연말에 자신을 이끌 주던 상사로부터 버림받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모든 책임을 지고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미래가 깜깜하고 마치 절벽 앞에 선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텅 빈 사무실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데 어떤 강한 팔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져 그때부터 다시 하나님 앞에 새벽 제단을 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하나님께 통회 자복했다고 합니다.
-출처: 김상수, 「풀타임 크리스천」(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7월호), 195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이 주는 거짓 평안에 속아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너만 위해 살아가라”라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위협한다는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사야 37장 1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의 전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14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기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베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는 히스기야 왕의 깊은 슬픔과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뿐만 아니라, 왕을 따르던 신하들과 제사장들도 왕과 함께 굵은 베옷을 입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히스기야 왕은 신하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절)”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주변 사람들의 중보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간혹 나의 시급한 기도 제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교회에 알려 기도의 절실한 도움을 받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제목을 기꺼이 기도의 동역자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몇 해 전, 저는 길거리에서 전도하다가 이웃교회 한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우리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하고 있다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우리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갈마동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몇 개 교회들을 정해 놓고 집중적으로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중요하거나 시급한 우리의 기도 제목도 다른 분들에게 알려서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크게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아, 하나님은 ‘하호’라고 해도 알아들으시는 분이란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호랑이가 나타났어.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 호!’라고 외마디 소리만 질렀단다. 그런데 호랑이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그냥 사라졌다지 뭐냐?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은 기도도 들으신단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이야.”
이 아들이 신학생 때 한 수도원에 가서 산 기도를 했습니다. 그곳은 깊은 산속에 있어서 맘 놓고 소리 지르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깊은 밤에 어떤 남자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50대쯤 된 남자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시지요?”만 반복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아들이 ‘무슨 저런 기도가 있나?’ 생각했는데, 남자의 기도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 아시지요?”만 반복하는데, 가슴이 찡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저럴까? 유창한 기도가 다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황명환, 「깨어 기도할 수 없겠느냐」(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8월호), 63쪽에서 재인용.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되, 단순히 문제만 해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16~17절에서, 히스기야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히스기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고백은 참된 기도의 출발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리지도 못하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어떨지 상상해 봅시다.
“아버지, 나는 솔직히 아버지가 내 친아버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혹시 나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내가 용돈이 필요해서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당신에게 나의 용돈을 청구해요. 제발 나에게 이번 달 용돈을 주세요.”
만약 여러분이 자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아버지라고 믿지도 못하는 자녀에게 여러분은 매달 기쁜 마음으로 용돈과 그 외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리지 못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귀를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을 떠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일은 중요한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도의 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20절에서, 히스기야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 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히스기야는 오직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천하만국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응답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고, 기도의 끝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겨우 20대에 미국 땅의 3분의 2 크기에 해당하는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휘하 장수 중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청을 드린 적이 없는데 이제 청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 딸의 혼인 비용을 지원해 주십시오.”
“좋소. 장군은 오랫동안 나를 충성스럽게 섬겼으니 내 기꺼이 결혼식 비용을 지원해 주겠소. 내 재무 담당자에게 가서 말 하시오.”
며칠 뒤 재무 담당자가 심각한 얼굴로 알렉산더를 찾아왔습니다.
“폐하, 그 장군을 벌하셔야 마땅합니다. 폐하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결혼식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온 사람들을 다 초대했지 뭡니까? 폐하의 후하심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벌하셔야 마땅합니다.”
알렉산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요. 장군이 요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오.”
놀란 재무 담당자자 이유를 묻자,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장군이 두 가지 면에서 내 마음을 흡족하게 했기 때문이오. 첫째, 그는 내가 그 모든 비용을 대고도 남을 만큼 부유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둘째, 내가 그 모든 비용을 지원해 줄 만큼 후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나를 부유하고 후한 황제로 보고 있소. 그러니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오. 그는 나를 그만큼 대단하게 보고 있소.”
-출처: J. D. 그리어, 「기도 먼저」(두란노, 2021);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4월호), 220쪽에서 재인용.
여러분, 여러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알렉산더 대왕보다 훨씬 더 부유하고 후한 분이 아닙니까?
과연 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앗수르 진중에서 185,000명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앗수르 왕 산헤립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앗수르 산헤립 왕은 자신이 섬기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두 아들의 칼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32절).”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문제와 어려움을 어떤 자세로 대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라”라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가운데 기도하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리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