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달려온 불자동차 소리가 내 엉덩이를 힘껏 걷어찬다. 입맛이 없어 저녁 걱정으로 뭉그적거리던 마음이 먼저 놀라 벌떡 일어난다. 얼른 밖을 보니 대문가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글 뭉글 피어오른다. 그러나 불자동차는 소리만 요란할 뿐 뒤에 구급차를 매단 채 요지부동이다. 여기까지 오려면 이면 도로 가에 대어져 있는 차들이 비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기는 점점 많이 나고 앞집 아줌마는 정신이 나간 듯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소식을 들은 아저씨가 달려와서 물수건으로 입을 막고는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 한다. 이러다 자칫하면 인명 피해도 있겠다 싶어 사람들이 한사코 말린다. 문명이 발달된 요즈음 불이 나도 이웃들이 도울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니 온 마을이 일어나 불을 껐던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여름밤이었다. "불이야, 불이야." 옆 밭 할아버지가 우리 원두막으로 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들이 없는 우리 집은 뒤에 남동생을 보라고 언니는 '대불이', 나는 '깜불이'로 아명을 불렀다. 산마루에 있는 개구리참외밭에서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원두막을 지키던 나와 언니는 우리를 부르는 줄 알고 "불이야" 소리가 반갑기만 했다. 밭 아래 오리나무 숲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귀신을 경계하느라 오는 잠도 쫓고 있던 참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소리가 먹혀들지 않은 줄 그제야 깨달은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야들아, 연기 나는 곳을 봐라. 너거 집에 불난 것이 틀림없다. 너 아부지도 밭에 안 왔제?"
그제야 나와 언니는 조금 전까지 꼬부랑 참외를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우던 감정은 어디 가고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고샅에서 이미 양철통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뛰어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집에 도착하니 집 주위는 온통 연기로 덮여 있었고 마당엔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여 있는 무리 속에 가족들의 얼굴이 다 들어 있어 일단 안심은 했다.
물을 담을 만한 크고 작은 그릇들은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동네의 쓸 만한 것들은 다 모였나 보았다.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들어 보니 퇴비가 있는 바깥마당에서 불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뜨뜻한 재를 쳐서 퇴비에 갖다 놓은 것이 강한 바람에 불씨가 살아나서 나뭇단으로 옮겨 붙었다고 했다. 언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녁에 엄마가 누른 국수를 마당에 있는 옹달솥에다 끓여 주었는데 그날따라 아궁이에 짚불을 때었기에 국수 꼬리를 구우려고 넣어 둔 것이 보이지 않아 삼태기로 재를 쳐내고 찾아낸 탓이다.
불은 심하게 부는 샛바람을 타고 돌담을 경계로 태산같이 쌓아 두었던 보리 짚단을 다 삼키고 차곡차곡 쟁여 둔 장작을 태우며 아래채로 건너가려는 중이었다. 아래채와 나뭇단 사이에 초가지붕으로 된 돼지우리가 있는데 큰 검은 돼지는 아닌 밤중 홍두깨에 마당에 쫓겨 나와 꿀꿀대고 있었다. 집안의 젊은 아저씨 몇 명은 그 지붕에 올라앉아 활활 타는 나뭇단 불은 쳐다보지도 않고 돌담에만 동네 사람들이 들어다 주는 물을 퍼붓느라 정신이 없었다. 돼지우리는 모를 내기 직전에 썰어야 할 무논 같았다. 우물물이 있는 집은 대문을 대낮처럼 활짝 열어 놓았고 장정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그릇에 담아 주면 아무나 닥치는 대로 갖다 날랐다. 손이 많아서 도랑물을 떠 오는 사람, 앞 들에 있는 둠벙 물을 떠 나르는 사람, 큰 드럼통에다 아예 강물을 실어 오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나도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부지런히 물을 날랐다.
그러길 얼마나 됐을까?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시커멓게 피어오르던 연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바깥마당의 태산 같던 나뭇단은 거의 다 사라진 뒤였다.
여름밤이어서인지 사람들은 멍석과 평상, 마루 등에 모여 앉아서 그만하기 다행인 진화 얘기로 날을 새웠다. 아버지는 고마움의 표시로 장에 가 팔려고 따 놓은 참외와 청 밑에 숨겨 놓은 농주를 단지채 꺼내 놓았고, 엄마는 큰 가마솥에다 갱죽을 한 솥 끓여서 대접을 했다. 힘을 쓴 뒤여서인지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특히 죽은 두 그릇을 받는 사람이 많았다. 언니와 나는 죽을 쑤기 위해서 필요한 시루의 콩나물, 텃밭의 애호박, 창고에 있는 국수 등을 부지런히 날랐다. 엄마와 아버지는 불을 낸 장본인이 '불이' 들이라면서도 우리를 꾸중하시지는 않았다. 불낸 사람을 꾸중하면 정신이 돌아 버린다는 전언의 덕인 것 같다.
드디어 집집의 수탉들이 목청을 뽑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들고 온 물통을 찾아서 엉덩이를 들기 시작했다. 큰 과수원 집 일꾼이 자기 집 뒷간 통이 없다며 엄마와 내가 있는 부엌으로 왔다. 부뚜막엔 낯선 새 양철통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라며 들고 갔다. 그를 본 마루에 있던 젊은 아주머니가 갑자기 왝왝하며 욕지기를 하자 엄마도 속이 불편한 인상을 했다. 죽을 끓일 때 그 통에다 물을 길어다가 솥에 부은 모양이었다. 얼른 양철통 속을 들여다보니 깨끗한 밖의 외모와는 달리 가장자리에 인분을 너덜너덜 달고 있었다. 나도 토하려고 거름통으로 달려갔는데 어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찌 죽 맛이 환상적이었다며 토하는 시늉만 했지 태연했다. 그 후 동네에서는 불을 끄고는 똥갱죽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한참 동안 회자되었다.
갱죽은 경상도에서 주로 먹을 것을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쑤어 먹는 죽이다. 특히 보릿고개 때는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달랬다니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다. 물에 불린 쌀이나 보리쌀에 멸치를 우려낸 물을 붓고 거기다가 여러 가지 거섶과 고구마, 수제비, 국수, 겨울철에는 골무떡 썬 것도 넣어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풀어 간을 해 끓인다. 위생적인 것을 빼면 꿀꿀이죽과 비슷하니 전깃불도 없던 밤이라 더 몰랐을 것이다. 식구가 많고 가난한 사람들은 곡식의 양이 적어서 국물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멀겋게 끓였지만 그마저도 자식들 때문에 양껏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도 산비탈에 있는 윗동네에서는 움직이면 배가 꺼진다고 누워 있다가 불이 났다는 마을 고자의 외침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자들이 많았다. 멸치국물 속으로 들어가서 갱죽이 되어 기아란 불을 꺼 인간의 목숨을 살리는 음식 재료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일처럼 나서 주는 거룩한 마음이 고맙기만 했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저변에는 접하는 음식이나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집에 우환이라도 생기면 다투어 문병을 하고 그예 초상이 나면 장례 전까지는 어떤 집도 빨래를 하지 않고 하나같이 무색옷을 입었다. 그렇게 애도에 동참하는 동네 풍속은 어쩌면 그 당시의 동네는 또 다른 하나의 가정이며 갱죽을 끓이는 가마솥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 사람들은 사정에 따라서 갱죽의 재료나 양념으로 죽의 일원처럼 됐으니 그때 쌀, 콩나물, 국수 역할을 한 인상 깊은 얼굴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려 본다.
겨우 불자동차가 들어가자 불은 금방 꺼졌다. 그러나 부엌에 있는 가전제품과 싱크대, 천장이 못 쓸 정도로 그을려 있고 바닥은 온통 물 천지다.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라 앞집 아줌마에게 위로를 하니 오징어튀김을 하다가 팬의 기름이 끓어 넘쳐 떨어진 벽지에 붙더니 불로 변하더라고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그리고 처음 불길이 솟을 때 쌀독의 쌀을 퍼부을까 하다가 아까워서 그만두었는데 가래로 막을 것을 삽으로도 막지 못할 짓을 했다며 후회를 했다. 쌀 얘기를 들으니 또다시 그때의 죽이 생각이 난다. 나도 이제 그때 먹었던 갱죽을 먹고도 토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나 보다. 저녁은 정말로 갱죽을 끓여 먹어야겠다. 된장으로 간을 하면 그때의 죽이 재현되려나, 어쨌든 오늘은 된장 덩이를 넣어야 잘 넘어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