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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호동왕자의 어머니는 언제 대무신왕과 혼인한 겁니까..
聖君 仁宗大王 추천 0 조회 596 10.09.09 17:11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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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9.10 10:23

    첫댓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서기22년) 4월에 갈사왕이 항복해 왔다는 기사가 있죠.
    그러므로 호동이 죽인 대무신왕 15년(서기32년)은 호동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이른 10세에 해당합니다.
    호동의 나이가 10대 중후반으로 늘려보는 것은 문헌사학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잘못된 사항이죠.

  • 10.09.10 13:02

    삼국사기 기록상 갈사국이 고구려에 항복한 것은 대무신왕 때가 아니라 태조왕 16년(서기 68년) 8월입니다. 이 때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4월의 기사는 갈사국을 세웠다는 기사입니다.//
    낙랑공주와의 이야기가 발생할 무렵, 호동의 나이가 좀 문제의 소지가 많다는 점에는 동감합니다만 굳이 대무신왕 5년 이후에 호동이 출생했다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갈사왕은 부여왕 대소의 동생이었기에 갈사왕의 손녀라면 일찍이 부여에서 왕족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고구려-부여간 외교관계 측면에서 혼인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 10.09.11 11:55

    제가 남당유고에 심취하다 보니 삼국사기의 기록을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군요.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 5년에는 대소왕의 막내아우 갈사왕이 투항해 온 것이고, 대무신왕 15년 기사에는 호동의 어머니가 갈사왕의 손녀라고 되어 있어 다른 부분이 있더군요.
    남당유고에는 대소왕의 막내아우인 해소의 딸이 유리명왕에게 시집온 기사와 갈사왕 해소의 아들 산해(이분도 갈사왕)의 딸이 대무신왕에게 시집온 기사가 있습니다.
    남당유고의 이야기를 접어두고, 대무신왕의 나이와 호동의 나이만 집중해 보면, 호동의 나이 뿐만 아니라 대무신왕의 나이도 역시 적지 않는 문제점이 있지요.

  • 10.09.11 12:02

    대무신왕의 비가 호동을 참소하여 말하기를 호동이 자신을 겁탈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그냥 대무신왕의 비가 호동의 눈빛에서 그것을 느꼈다면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고, 만약 야간에 침소에 침입하였다면 그것은 죄줄만 하겠죠.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호동의 나이는 겨우 10대의 어린나이이므로, 대무신왕이 호동을 죄를 주기는 어렵죠. 호동의 죄가 드러난 것이 없고 순전히 대무신왕의 비의 주장일 뿐이니까요.
    만약에 대무신왕과 비와의 사이에서 당시에 동침한 일이 없었는데, 대무신왕의 비가 임신하였다면 그 일이 명확히 드러나서, 호동의 죄를 물을 만 하죠.

  • 10.09.11 12:23

    그런데 어디에도 이런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거니와 오히려 원비의 자식인 해우를 태자로 삼습니다. 당시 대무신왕의 나이 겨우29세인데 태자로 세우는 것이 너무 이릅니다.
    또한 원비가 무고하여 호동을 죽였다는 것을 대무신왕도 알고 있을 텐데요.
    어미가 포악하면 아들도 포악할 것이라 생각하여 태자로 세우지 않지요.
    결국 대무신왕의 선택은 동생인 민중에게 전위를 합니다.
    이것은 모본의 성품을 민중에게 더 지켜보라는 뜻이었죠.
    대무신왕이 민중에게 전위할 때 모본이 어렸다고 하는데 민중의 재위년은 5년이고 대무신왕이 죽은 해와는 4년 차이인데, 원년에 익을 태자로 삼죠.
    기년이 한 두군데 구멍이 난 것이 아닙니다.

  • 작성자 10.09.11 22:38

    웬만하면 태자는 왕이 30세가 되기 이전에 세웁니다..아주 어린 경우를 제외하고요..너무 이른 건 아닙니다..

  • 10.09.12 11:42

    성군 인종대왕님의 답변이 거꾸로 되신 듯 합니다.
    임금이 30세 이전에는 특별한 사정(예를 들면 국가의 위기사항, 임금의 병환)이 아니라면 태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 밖의 사정이라면 태자가 특별히 총명하거나 정사에 관심이 많고 임금이 정사에 실증이 난 경우도 있습니다. 모본은 성품이 흉폭했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나이로 보아서는 다른 아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만한 여유가 있었던 시간이죠.

  • 10.09.12 11:36

    대무신왕과 호동의 나이가 이상하게 된 것은 고추가 재사때문이죠.
    삼국사기에 의하면 재사는 유리명왕(A.D.18 졸)의 아들이고 그 아들이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이죠.
    태조왕(A.D.47 생)은 A.D.53년에 7세로 즉위하여 어머니가 섭정, 차대왕(A.D.71생)은 A.D.146년에 76세로 즉위, 신대왕(A.D.89생)은 A.D.165년에 77세로 즉위
    여기서 태조왕이 즉위(A.D.53.11)후에 신대왕이 태어난 시기는 A.D.89년까지 무려 35년여년의 세월이 있죠.
    태조왕은 아버지가 건장하게 35년을 더 살아계셨는데 7세의 어린 아들이 즉위, 더구나 어머니는 부여사람임.
    그리고 세분의 형제가 119세(태조왕), 차대왕(95세), 신대왕(91세)로 나란히 장수합니다.

  • 10.09.12 11:39

    고구려는 유리명왕-대무신왕과의 사이에, 모본왕-태조왕의 즉위사이의 기년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구려 초기사는 포기해야죠.

  • 10.10.12 16:44

    고구려 왕조 계보에서 태조왕 이전은 기년에 문제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네요
    하지만 꼭 아버지와 아들의 관게라고 하는 것보다는 일반적으로 족보를 얘기할 때 보이는 중시조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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