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법 스님 신간 [그래도 불교]가 다음주 출간됩니다. 신간 머리말을 아래 소개 합니다. >
머리말
1.
2016년 12월 한국 종교 인구의 실태에 대한 통계청의 신뢰성 높은 조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 중 종교 인구 동향에 관한 내용입니다.
2005년~2015년 사이 불교 신자는 무려 300만 명이 감소했고, 천주교는 110만 명 감소, 개신교는 120만 명 증가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불과 10년 사이의 이런 변화는 예상을 넘어서는 결과였지만, 각 교단에서 조사 방법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원인 분석에 주목을 하는 것도 이례적이었습니다.
불교는 종단 지도부의 범계행위가 일반인에게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질 정도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에 신도의 감소는 예상을 했지만, 전체 신도의 20%에 달하는 300만 명이 ‘불교 그만’을 선언한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천주교는 2014년 탈권위주의로 세계적 존경을 받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시 전국민이 보여준 진정어린 호의적 감정으로 한창 고무되어 있었지만, 조사 결과는 의외로 110만 명 감소라는 불교 못지 않은 실망을 했었습니다.
유일하게 개신교는 120만 명 증가를 통해 1,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를 제치고,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종교로 부상하였습니다.
조사 발표가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현재의 상황은 불교와 천주교의 고민은 깊어지고, 개신교 역시 좋아만 할 수는 없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종교인이 50%를 넘지만 종교인이 갖는 문화적 성향이 어느 나라보다 높은 편이기에 10년 간의 이런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불교와 천주교는 신도의 고령화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데 비해 젊은 신도들은 전혀 늘 기색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신교의 속내는 10년 간 늘어난 120만 명의 상당수가 사이비나 이단임에도 신자라고 답을 한 결과이지, 실제로 교회의 출석 인원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3대 종교는 예외없이 교단과 승가, 성직자들이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에게조차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반성해야 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특정 종교가 갑자기 쇠퇴하거나, 엄청난 도약을 하는 것, 어느 쪽도 순수한 종교적 견지에서 보자면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강제한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각 교단은 ‘양질의 신앙’을 신도들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불량한 신앙’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종교시장’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2.
불교는 지난 10년 간 300만 명의 신도 감소라는 외적인 상처가 아니라 ‘정체성 유지’라는 내적인 상처부터 치료를 해야 하는 유례없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상처가 무엇인지는 종단의 몇 스님들 덕에 이미 세상에 다 알려져 언급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환골탈태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공동체로서의 승가 복원 즉, 명실공히 사부대중이 오직 불교의 바른 신행을 위해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형의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거의 현금 자산과 다름없는 유형의 재산과 문화재 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조계종단이기에 설령 그에 걸맞는 책임을 다했다 해도, 그것은 승가가 신도에게 설하는 인과응보에 부합하는 일이지 결코 내세울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승가를 지탱해주는 불자들이 마주쳐야 하는 세상은 더욱 험해지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일상적으로 보도되는 언어들은 ‘몰카’ ‘성추행’ ‘고독사’ ‘갑질’ ‘자살’ 등 인간의 본성에 회의를 갖게 할 수준의 대단히 ‘불편한’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더욱 미래에 대한 희망은 고사하고 당장의 생존을 위협받는 경제적 벼랑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승려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비록 일부라 하지만, 세속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판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행의 부족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인간으로서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집단임을 자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기업도 성장을 하고 이익이 나면 소비자 덕분이니, 이익의 환원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받기만 해 온 승단이 보시의 사회적 환원은 고사하고, 남은 재력을 몇 승려가 개인 소득처럼 유용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승가 모두의 수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승가의 일원인 나 역시 책임을 통감하며 꼭 실현되기를 바라는 두 가지 의견을 내 봅니다. 과거 산속의 대찰이 이제는 도심 한복판에 있게 된 시절 인연을 고맙게 받아드리며 보살행의 전진도량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경제·정보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지금이야말로 도심 속의 대찰들은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서, 경제와 정보의 재분배를 실천하는 지역 복지와 고령화 시대의 문화회관의 주역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를 위한 재원 마련은 신도들에게 특정 목적의 이타행을 성취하기 위한 ‘지정 보시제’를 유도한다면 신도들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특정 사찰을 지정해 특화된 경전 공부를 전문적으로 상시 강의하는 제도를 운용해, 불교의 심층 교육을 신도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A사찰에서는 초심자를 위한 불교 교리를, B사찰에서는 반야부 경전을, C사찰에서는 화엄경을, D사찰에서는 법화경을 상시 설하자는 것입니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 재차 초급반과 고급반으로 세분화 해 나가면, 신도들은 자신에 맞는 강좌를 설하는 절을 찾아가면 심층적 공부가 이루어지고, 강의를 맡게 되는 전문 학자의 양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승가도 신도들도 경전에 충실한 불교를 신행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3.
본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최소 10년 전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법문을 정리한 것이고, 2부는 책 출간을 위해 올 여름에 새로 쓴 화엄경 십지품에 대한 해설입니다.
원고를 정리하며 가장 우선시 한 것은 가능하면 ‘교과서적’인 설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국불교는 각각 스님들에 따라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전제한 내용들의 편차가 너무 큰 편입니다. 심지어 가장 핵심 용어로 불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업과 윤회에 대한 정의도 천차만별입니다. 수행의 구체적 방법은 ‘표준’없이 거의 스님이 신도에게 말하기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교학적으로나, 실수행에서 스님들이 이끌어주는 것들이, 부처의 진정한 가르침인지 아니면 그 스님의 개인 견해인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국가의 승가가 경전에 근거한 불법을 펼치지 못하고,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개인의 불교관에 의지한다는 것은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한국불교의 무지와 오만을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실 한국불교는 교학적으로는 일본이나 미국, 유럽에 비해 거의 한 세대는 뒤쳐져있고, 실수행에 있어서도 일본이나 심지어 태국, 미얀마와 비교해도 실체적 정통성과 구체성에서 많이 뒤져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계불교학계와의 교류 역시 전무하니, 사실상 한국불교는 우물안 개구리이고, 한국의 선승들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골목대장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진행되는 불교 해설은 그 당위성을 위해서도 철저하게 경전의 출처를 밝히는 데 주력을 하였습니다. 특히 2부 화엄경 십지품과 십바라밀의 설명에는 독자들께서 십지품 본문의 내용을 통해 바로 이해가 가능하도록 보조적 설명을 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런 책의 구성으로 인해 혹 내용 중 유사한 주제나 언어의 중복이 거슬리더라도 양해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작금의 한국불교는 부처를 종조로 하는 종교단체라 이름하기조차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추한 모습을 보일지 가름조차 하기 힘이 듭니다.
부디, 별 것 아닌 내용이라 해도 이 책이 불자들에게 위안을 드리고, 신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큰 다행으로 여기도록 하겠습니다.
책의 내용이 시원찮으니 표지라도 그럴듯하게 꾸며야 한다는 핑계로, 개인전때 보고 내심 찜해두었던 작품을 요구하니 못이기는척 내주신 최수현 화백께 감사드립니다. 작품명 ‘목어와 소녀’인데, 볼때마다 ‘소녀는 과연 무슨 삼매에 들었을까’라는 생각이 잔잔한 웃음과 함께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표지 다음 사진의 불상은 제가 30여 년을 소장하고 있는 불상인데, 감정 결과는 대체적으로 삼국시대의 호신불로 ‘금동여래입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와 동시대에 조성된 매우 귀한 신라불상입니다만, 제가 진행하고 있는 세계 학술명저 번역불사비용 마련을 위해 1,300여 년을 기다린 불연(佛緣)이 맺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공개하는 것입니다.
동영상 법문을 워드 문서화 하는 고단한 작업을 해주신 김명희 불자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산만한 원고들을 편집과 윤문등으로 ‘보석단장’ 해주신 민족사 사기순 주간의 노고는 독자들이 알아챌 것입니다. 민족사 사장님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게 최소 수 년 이상을 적금든 듯이, 매달 일정액을 보시해주시는 불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8년 7월 고양시 용화사 무설설당에서 성 법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