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조계종 원로의원 금성당 도견 대종사의 영결식이 7월16일 오전 11시 해인총림 해인사에서 엄수됐다.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된 영결식에는 원로의장 밀운 스님을 비롯해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원명 스님 등 종단 원로 스님,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교구본사 주지 등 사부대중 1000여 명이 참석해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오전 11시 다섯 번의 타종을 시작으로 진행된 영결식은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조계종 어산어장 동주 스님의 영결 법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원명 스님이 대독한 법어를 통해 “도견 스님은 가야총림에 수십성상을 용맹정진하시어 후학들의 지도에 여생을 바치신 대종사”라며 스님의 원적을 애도했다. 원로의장 밀운 스님은 영결사에서 “대종사의 출가 열정은 지월 은사 스님을 만나 연을 맺은 후 한국불교의 법등을 밝히는 심지로 타올랐다”며 “빈 손 빈 몸으로 거리낌 없이 가시길 바란다. 비록 그 빈자리가 크지만 슬픔과 애절함을 삭여 종단 중흥의 채찍으로 삼을 것”이라고 전했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추도사에서 “당대의 선지식과 수차례 결사에 참여한 결연의 서원과 종단의 대소사에 원력을 더하신 모습은 이사무애의 경지를 보여주신 것”이라며 “지난 70년의 성상 동안 평생 수좌로 해인사를 떠나지 않으신 각별함은 숙연함을 더하게 한다”고 추도했다. 중앙종회의장 향적 스님도 조사에서 “후학들에게 머뭄과 나아감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고 항상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가르쳤던 교화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면서 생전 대종사의 가르침을 회고했다.
도견 대종사 문도회 대표 종진 스님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 바로 서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잘못을 저지르면 아낌없이 채찍주시고 조금이라도 바르게 생활하면 격려를 아끼지 말아 달라. 은사 스님께 누가 됨없이 잘살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다.
영결식 직후 도견 대종사의 법체는 영결식장에서 4km 떨어진 해인사 연화대로 이운됐다. 곧 이어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거화됐고, 동참대중은 도견 스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나무아미타불”을 염했다. 불길이 솟고 하얀 연기가 가야산을 휘감자 곳곳에서 대중들은 뜨거운 땀 속에 눈물을 감추며 스님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그 염불성을 따라 연화대의 하얀 연기는 소리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도견 대종사는 어려서부터 모친을 따라 절에 다니면서 출가의 발심을 품었고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지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월정사 강원을 졸업하고 한암 스님의 회상에서 참선수행을 시작, 1965년 범어사에서 광덕, 일타 스님과 함께 동산 스님 회상에서 결사를 단행하면서 공양 시간을 잊은 채 정진에 몰입하기도 했다. 또 1970년부터 3년간 송광사 구산 스님 회상에서 3년 결사를 성만하는 등 제방 각지에서 정진을 거듭했다. 종단이 어려울 때는 행정에도 뛰어들어 정상화를 견인했다. 2, 5, 6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한 스님은 1980년에는 종회의장도 맡았다. 스님은 1980년 해인사 주지를 지낸 후 금성사와 관음암을 창건했고 대흥사 주지 및 조실을 역임할 때에도 절을 보호하는 ‘보사(補寺)’ 정신을 후학들에게 강조했다. 이후 조계종 원로의원, 명예원로의원을 지내며 해인사 수좌의 소임을 다한 스님은 2013년 7월12일 새벽 1시 30분 해인사 극락전에서 법랍 70세, 세수 89세로 원적에 들었다.
한편 도견 대종사의 49재는 7월18일 초재부터 6재까지 대구 금성사, 막재는 8월29일 합천 해인사에서 엄수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