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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열왕 8,22-23.27-30
복 음 : 마르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랑 같이 여행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갈 때면 늘 혼자 떠나는 여행을 선택합니다.
또 밤에는 누구를 만나서 보내는 것보다는
제 방에서 조용히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혼자 여행을 떠나도, 또 홀로이 책을 읽고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하늘나라에 가신 뒤에 느끼게 된 감정입니다.
내 편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혼자 있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단지 나를 믿어주는 내 편이 있기에 혼자 있는 것도 괜찮은 것뿐이랍니다.
다른 이들과 수많은 관계 속에서, 즉 ‘우리’로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나’입니다. 상대방이 밉다고 혼자서 살기 시작하면,
‘나’는 더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주는 사랑이 나에게서 나올 때, 사람들 역시 나와 함께 하려 할 것입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주님으로부터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편과 자기 편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자세한 규율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사람들을 분리했습니다.
실상 그들이 말하는 ‘조상들의 전통’은 십계명이 아닌 인위적인 규율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손 씻는 예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교도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 갔다 오면
부정 탔다고 해서 몸을 예식으로 정결해야 했습니다.
위생절차가 아니라 손을 물에 담그거나 몸에 물을 뿌리는 종교예식일 뿐입니다.
내부적인 부정을 벗겨낼 수 있다며 외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 씻는 예식은 식사 전과 후, 때에 따라서는 식사 도중에도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관들이 종교적인 예절을 행하기 전에 했던 것인데,
이를 일반 백성에게도 예절적으로 행하도록 부과한 것이었습니다.
원래의 뜻은 무시하고 그냥 자기편과 아닌 편으로 나누면서
자기 편이 아니면 죄인으로 취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함께’가 아닌 ‘자기편’만 생각하는 그들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실 수 없었습니다.
외로움이 많은 세상입니다.
내 뜻과 다르다면서 단죄해버리는 못된 습관이 외로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더 깊이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나부터 그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 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 관습 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정신’과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상들의 전통과 하느님 말씀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성전을 지은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하늘이나 땅 어디에나 계시지만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함으로써,
성전이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과,
하느님께 대해서보다도 신앙 공동체를 위해서
더 필요한 곳임을 드러내었습니다(1열왕 8 23-30).
그러니까 성전 자체보다 그 안에서 기도하는 신앙 공동체의 믿음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더 중요하고, 또 성전 안에만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더 우선시함으로써
가치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로몬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느님을 섬겨온 조상들의 전통은
그런대로 명실상부하게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온 조상들의 전통을 앞세워
거꾸로 하느님 말씀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즉, 더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은 소홀히 하면서도
아주 사소한 자신들의 해석 규정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입니다(마르 7,5).
이러한 그네들의 위선을 평소에 자주 접하시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금과옥조처럼 지켜오던 조상 전통을
하느님 말씀으로 상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이 해석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서로 발을 씻어주는 섬김이며,
이를 공동체에서 실천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입니다.
사랑도 없고, 섬김도 미루고, 십자가도 피하면서 하느님을 믿겠다는 방식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런 편한 방식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은 다소 어려워 보이더라도
좁아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사도직 활동은
사제직, 예언자직 그리고 왕직으로 나누어집니다.
사제 직무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성체성사를 봉헌하며
자기희생의 삶으로 제사를 바침으로써 그분의 희생을 기념하는 일이고,
왕직은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예언자 직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일로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기 위해서
신앙과 이성이 모두 발휘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직무가 부활의 은총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은총이 이 땅에 기적처럼 비추었으니,
2백여 년 전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는
참으로 오묘한 섭리가 작동되었었습니다.
우선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파견되기 시작한 서양 선교사들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하여 한문을 배운 후에 그 지식으로
서양의 교리와 신학을 번역하되 유학의 논리와 사유를 존중하여
저술해 놓은 일을 그 첫째로 들 수 있습니다.
이를 보유론적 관점이라 합니다.
그런 한역서학서들이 무려 백5십 년 동안이나 조선에 유입되어
수많은 선비들이 읽었지만 대개 흥밋거리로 그친 데 비해서,
유독 이벽은 한역서학서들에서 천주교 교리와 그리스도 신앙을 발견하고
어려서부터 나름대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믿을 만한 지인들이 이 저술들을 공부한다고 하니
그 자리에 동석하여 마침내 실학 강학회를 천주학 강학회로,
다시 천주교 신앙공동체로 성격을 전환시켜,
세계 교회사상 처음으로 자생적인 천주교회를 탄생시킨 일을
그 둘째로 들 수 있습니다.
이벽은 천주교 교리만을 적어 놓은 ‘천주실의’를 넘어서서
신구약 성경의 맥까지 짚어서 해설한 ‘성교요지’를 지었고,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 진리를 전하려고
순한글 4·4조로 ‘천주공경가’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로, 이벽이 발휘한 선하고도 거룩한 영향력을 받은
정씨 삼형제의 활약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정약종은 이벽보다 한술 더 떠서 서양에서 알려준 하느님을
우리 조상들은 유학이 들어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믿어 왔음을 밝힘으로써
보유론적 관점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으로 한민족의 전통적인 종교 사상까지 식별한 것인데,
그러나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닌
잡신들을 불러들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귀신놀음은
우상숭배로 배격하여 교우들을 가르치는 ‘주교요지’를 지었습니다.
정약용은 장기간 유배를 당하게 된 기회를 선용하여,
이벽으로부터 배운 천주학의 관점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유학 경전을 모조리 재해석해 내었으니
그것이 5백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입니다.
그 결과 주자학을 유교로 교조화시켜서 사상을 통제해 온
조선 사회의 시대적이고 사상적인 모순을 낱낱이 해석해내었습니다.
외딴섬으로 유배 간 정약전은 이 아우들보다 한술 더 떴으니,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이기(理氣) 논쟁에 매몰되어 있던 유림들이나
몰이성적인 사문난적 논쟁을 빌미로 권력투쟁에 골몰하던 기성 사대부들과 달리,
임금도 양반도 필요 없이 백성이 주인으로 행세하는 나라를 꿈꾸며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생활상과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기록하는
해양어류도감을 편찬해 내었는데, 이것이 ‘자산어보’입니다.
이상이 고리타분했던 유다교 지식인들과 달리,
조상들의 전통과 시대의 징표를 용감하게 해석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말씀을 전한 선각자들의 발자취입니다.
천주교회 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지만,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그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고
평화적인 노력으로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기적적인 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처럼 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게임 중에 ‘도미노 게임’도 있습니다.
하나의 판을 건드리면 그 판이 다른 판에 영향을 주면서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과학에서는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 ‘나비효과’가 있습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나비가 날개를 흔드는 것이
한국의 태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사회도, 국가도, 태양계도, 은하계도, 우주도
어쩌면 끝말잇기처럼, 도미노 게임처럼,
나비효과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선한 행동은 세상을 그만큼 선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나쁜 생각, 나쁜 말, 나쁜 행동은 세상을 그만큼 추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선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행하지 말라.’고 명심보감은 이야기합니다.
과테말라에서 8년간 선교하던 후배 신부님이 필라델피아로 왔습니다.
한국으로 휴가 가기 전에 잠시 들렸습니다.
제가 예전에 30일 피정을 함께 했던 신부님이라서
뉴욕에서 잠시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워싱턴DC에 있는 한인성당으로 갔습니다.
그곳 신부님이 멀리 과테말라에서 온 후배신부님을 초대했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갔습니다.
왕복으로 10시간 걸리는 길이었지만 모처럼 신부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마치 옆집에 다녀오듯이 갔다 왔습니다.
한 신부님은 후배를 위해서 노트북을 사주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선교에 필요할 것이라고 후원금을 주었습니다.
저도 약간의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을 지내면서 올 겨울에 과테말라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후배가 사는 모습도 보고,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미리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생각보다 저렴했습니다.
좋은 마음이 모이니 교구 신부님들과 여행 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원숭이들을 상대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나무 위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바나나를 놓았습니다.
원숭이들은 나무에 올라가서 바나나를 집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나나를 집으려는 순간 지붕에서 물이 내려왔습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원숭이들은 이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한 마리를 우리에서 빼고 새로운 원숭이를 우리에 넣었습니다.
새로 온 원숭이는 당연히 나무 위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4마리의 원숭이가 새로 온 원숭이를 말렸습니다.
올라가면 물벼락을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원숭이는 4마리의 원숭이가 바나나를 못 먹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싸움이 일어났지만 새로 온 원숭이는
4마리의 원숭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고, 맞았습니다.
그렇게 원숭이들이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이제 물벼락을 맞았던 원숭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원숭이 우리에는 하나의 규칙이 생겼습니다.
새로 오는 원숭이에게 달려가서 때리는 것입니다.
새로 온 원숭이는 원인도 모르고 맞았습니다.
나무 위에 바나나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붕에서 물이 나올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어쩌면 우리에 있던 원숭이들과 같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이 생긴 이유와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이 지켜왔으니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였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면 율법과 계명도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장애인, 환자, 가난한 이, 고아와 과부에게는
예외의 규정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신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법과 원칙을 넘어서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희생하는 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과 원칙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법과 원칙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말과 행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우리네 삶에서 보다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한 고통이 이루 말로 다 표현 못 할 상황이지만,
그로 인해 전국민적 위생 관념이 대폭 개선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게으른 편이라 손을 잘 씻지 않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틈만 나면 손을 뽀득뽀득 잘 씻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다인들은 참으로 시대를 앞서 살았습니다.
의료 수준이 열악하던 시절, 틈만 나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절,
잘 씻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일찌기 파악했던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 교육시 가장 먼저 잘 씻는 예절부터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유다인들의 이러한 위생 관념은 그들의 율법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고,
정결예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식사 전후, 외출 전후뿐만 아니라, 기도나 예식 전에도 손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정결례는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점점 확대되어,
인간이 사용하는 잔이나 그릇 등 생활용품에도 적용되었고,
나중에는 아주 엄격하게 적용되어, 이를 어길 시 강경한 질타와 처벌이 뒤따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규정들이 늘어났는지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래서 몸이 많이 더러워지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약 6.4Km)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웃기는 것은,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 앞에 예수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것입니다.
한 수도원에 들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들고양이지만 색깔도 연한 갈색에다 물결무늬까지 아주 잘 나왔고,
더구나 꽤나 붙임성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과 자연스레 친해진 고양이는
마치 집고양이처럼 편안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수사님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주제는 고양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였습니다.
결과는 한 식구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한식구로 받아들여진 고양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식탁 위에도 올라오지를 않나? 기도 시간에도 성당에 들어와
다른 수사님들을 따라 꾸벅꾸벅 졸지를 않나?
할 수 없이 수사님들은 제2차 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번에도 주제는 고양이였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다들 그간 고양이 한 마리로 인해
겪었던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장시간에 걸쳐 열띤 논쟁이 거듭되었고,
마침내 꽤 두툼한 볼륨의 고양이 관련 규칙서가 마련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꽤나 웃기는 예화입니다만,
사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 예식 규정들도 다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 예식 규정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패라다임을 한 마디로 산산조각 내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복음 7장 6절, 8절)
우리네 삶에서 보다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늘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좋으신 우리 주님, 사랑스런 동료 인간,
불멸의 사랑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과 영혼과 의지도 정결하게 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가르침은 ‘마음’까지 이르지 못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따르는 율법 때문에 예수님께 질책을 당합니다.
그들이 먼저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은 없으면서 겉으로만 율법을 지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란 그 율법을 주신 이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들은 돈이 있어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 말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마치 코끼리인 줄 모르고 각자가 원하는 부분을 만지는 소경과 같습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자신을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으니 그 율법은 자기 이익을 위해 쓰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주신 분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오는 피를 받지 않으면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자주 병원에 입원하고
잠을 자도 15분마다 깨기도 하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았습니다.
위장도 일을 하지 않아 계속 마르는 상태입니다.
그녀는 초 민감함의 소유자로 소위 번아웃이 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시작된 동기는 2014년이었습니다.
아마 세월호 사건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아이들이 마치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일에도 의미가 없고 음악 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진다며 두려움을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증상이 있게 된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너무나 좋은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굉장히 폭력적인 분이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본인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것입니다.
대학 때도 통금 시간이 8시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목공소에서 각종 크기의 매를 맞추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윤아 씨는 이런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
굉장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안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식동물은 소리에 매우 민감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에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민감해지고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 분노와 두려움을 내뱉는 음악이었는데,
2014년 이후 그런 것까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자녀가 잘되도록 매를 들고 가르쳐도
그 가르침에는 피가 섞이기보다 아이들의 피를 내는 폭력이 있기에
그 가르침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쓸데없는 가르침을 넘어 피해를 주는 가르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증오는 나의 힘’이라는 노래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맙고 고마운 내 아버지, 당신을 죽도록 이토록 증오한 덕에 난 아직 살아있고….”
누군가의 가르침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때 따라주고 싶은 것입니다.
범법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먼저 자신이 사는 세상에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에 감사하면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안에 피가 섞여야 그 피가 그 사람의 자아를 죽이고
그 율법이 그를 이끌게 만듭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아이는
그 부모의 가르침을 절대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따르는 척하지만 결국 자기를 망칩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게 해줄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당신을 더 사랑하도록 하신 것인데,
이것을 원치 않고 하느님을 실제로는 미워하면서도
그저 그 율법을 자기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법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를 규정하는 법과 생각을 규정하는 법,
그리고 마음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육체를 규정하는 법은 무력을 쓰면 가능하고,
생각을 규정하는 법은 논리가 맞으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규정하는 법은 ‘피’가 필요합니다.
이 피가 없으면서 마음을 바꾸려 하면 안 됩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로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을 하였습니다.
이 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어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왜 아이들은 십일조는 지키면서 실제로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율법을 준 박보영 목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박 목사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전에 JTBC ‘유자식 상팔자’에서
‘부모님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은?’이라는 질문에
‘반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춘기 아이가 있었습니다.
분명 아이는 자기만 100%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버릇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야단을 맞는 건데 엄마가 잘못했다는 건 잘못 생각하는 거지.
엄마랑 너랑 싸우는 관계가 아닌 거야.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 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관계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엄마를 무시하는 거야, 네가!”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는 엄마에게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가르침과 함께 피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맙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피가 모자라는구나!”라고 생각해야지,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로는 안 됩니다.
율법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율법을 주는 이가 ‘고마워서’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피’가 빠진 말은 그저 폭언이 되고 잔소리가 될 뿐입니다.
부모는 나의 가르침에 항상 나의 피가 섞여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사춘기가 넘으면 이 일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클래어 크로켓 수녀님은 어렸을 때 방탕한 삶으로 빠졌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입 맞추다가 그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그분의 계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사랑의 불화살로 당신 심장이 찔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매일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