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의 글]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었다”
나는 1956년도에 김해에 있던 공군기술학교 보급 교관으로 있었다. 교관실에는 나와 더불어 6명의 교관이 함께 근무히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함0배 중위가 있었다. 그는 나와 동
계급이었지만 나이는 나보다 4살이나 위였 다. 우리는 보급 교육자료를 얻기위해 부산 수영비행장(K-9) 까지 가야했다. 당시 공군의 인쇄시설이나 능력이 부족하여 미 고문단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K-9에는 긴급 이착륙 이외에는 평소 거의 폐쇄된 비행장으로 공군40보급창의 일부인 항공기재 보급대대가 위치해 있고 미 고문단이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그 곳 도서실에는 언제나 풍부한 보급업무에 필요한 각종양식과 보급교범 최신판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수시로 아니 매월 1회씩 이 부대를 방문해서 각종 교재와 최신의 정보를 얻어와 교육에 활용했다.
그 날도 1/4톤 짚차를 몰고 함 중위와 함께 K-9으로 갔다. 그런데 짚차가 너무 고물차라 핸들도 유격이 커서 운행이 자유롭지 못했고 브레이크나 기어 등 모든 부분에 이상이 있는 폐차 직전의 차였다. K-9에 도착하여 교재를 싣고 귀대 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 짚차를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운전병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가 몰았다. 당시 초급장교들은 짚차 운전을 배우려 기회만 있으면 운전해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나도 다른 동료들과 다름없이 그랬다. 운전대를 잡으니 정말 차량 상태가 불량하였다. 얼마나 나쁜 상태인지 K-9으로부터 민락동 사이에 좁다란 교량이 있었는데 핸들이 자유롭지 못해 5킬로 이하의 거북이 운전을 할 정도였다. 그래도 조심하여 광안리를 지나 대연동(U.N. 묘지 앞)을 지나 범일동 고개까지 왔다. 이 고개는 원래 높은 고개였는데 너무 높아 어느 해인가 상당한 높이를 절토해 지금은 많이 낮아진 셈이지만 그래도 범일동 대로까지 가려면 꾀 먼 거리였으며 경사도 상당히 급했다. 도로 개선 이전이었슴으로 이 고개에 도달하니 엄청 큰 경사였으며 포장된 왕복 2차선 이지만 양 옆으로 사람들이 오고가 자칫 핸들을 잘못 사용하면 인명 피해를 입힐까 걱정이 될 상황이었다.
나는 기어를 1단으로 넣고 아주 서서히 진행하고져 했는데 왠걸 순간 기어를 변경할 수도 없고 부레이크 마저 듣지 않았다. 차는 점점 가속되고 있는데 나는 경적을 울리고 운전수는 뒷자리에서 일어나 앞문 밖을 내다보며 보행인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뒤 돌아볼 뿐 비켜갈 체도 하지 안했다. 이제 마음이 급해졌다. 이젠 전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다. 차 속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다. 운전병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 기어변속이 안되더라도 1단으로 넣으려 압박하세요. 기어가 마찰되어 망가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앞을 보니 좌측으로 적기 방향으로 들어가는 교차지점에 육군 초소가 보였다. 초소 주위에는 모래주머니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헌병이 앞에 서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나는 더 생각할 여유 없이 그 초소의 좌측을 받고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운전병은 귀가 반이나 찢어졌고 함 중위는 앞유리에 받쳐 이마가 부었을 뿐이 고 나는 코위 눈썹끝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를 보니 산산조각으로 사방에 흩어져있고 귀한 교재들도 사방에 흩어져 버렸다. 초소는 모래주머니며 창문까지 깨지고 안으로 우그러져 있었다.
(그 후의 사고처리 경과는 생략하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육군의 응급차로 공군 40 보급창 의무실로 보내졌다. 그 곳에서 위생병의 간단한 치료를 받고 기술학교 헌병대 차량으로 귀교해 헌병대에서 간단한 사고경위 조사를 받은 다음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그 때 함 중위가 입을 떼었다. 이 중위, 당신은 정규사관이고 앞이 창창한데다 가정이 있지않은가. 이번 사고로 엄벌을 받을께 뻔한데 우리 이렇게 하자 하면서 자네가 운전했다고 하지 말고 내가 했다고 하자. 나는 깜짝 놀랬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친구를 위해 그 벌을 대신 받고져 하는가. 나는 펄적 뛰었다. 어짜피 진실은 만천하에 들어날 것이고 그런 무리수는 더 큰 문제로 파급될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일랑 하지말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런 위기에 처해있으면서 친구 대신 벌을 받겠다니 나는 너무나 친구의 말에 감복해서 눈물을 먹음을 정도였다. 함 중위의 우정을 오래도록 기억할께.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함 중위와의 우정을 돈독히 하기위해 살겠다는 심정을 다짐하고 있었다.
다음날 함 중위 및 운전병과 함께 감찰관실로 호출되어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2주일 후에 징계위원회가 개최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고 감찰관실을 나왔다. 그 후 징계위원회 위원장이 당시 기지대장인 한0대 중령 (후에 준장으로 진급) 이라는 것을 알았고 위원들은 인사부장 군수부장을 비롯해서 7~8명으로 기억한다.
모든 위원들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수송대에 진열해 놓은 사고차량의 상태를 살펴보고 회의실로 돌아와 감찰관 사회로 징계위원회를 개최했다. 회의가 정점에 다다르자 죄목과 처벌 수준을 논의할 때 두가지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군기문란, 규정위반, 군장비의 훼손 등의 죄로 엄벌에 처해야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죄목이 합당하여 소정의 처벌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중위는 평소 근무 태도가 지극히 양호하며 타의 모범이 되는 장교로서 정기사관이며 앞길이 창창하고 앞으로 군 발전에 크게 기대되는 장교(이상 병참교육대장 청원) 일뿐만 아니라 사고차량은 수송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차량임을 감안하여 반성문을 작성하는 선에서 마무리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주장이었다.
한 동안 휴식후에 거수로 결정하기로 하고 회의를 재개했다.
내 기억으로는 둘째안이 1표 차이로 채택되고 회의를 종결했다. 이 사실이 있은 후 누구보다 기뻐했고 따뜻이 위로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함 중위였다. 회의 중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는 동안 온 몸에 힘이 빠져 혼이 났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정말 감복했다.
함 중위는 사법고시를 4차례나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인생을 버리기 직전 주위 사람들의 충고로 재기한 노력파 인물이었다. 어느날 사과상자에 가득찬 법율서적을 보여주면서, 이 중위는 정규사관으로 나와 조종을 했어야지 보급이 뭐야, 그러면서 인생 방향을 바꿔보라. 내가 경험이 많고 그러니 앞일을 지도해 줄께 사법고시 한 번 응시해 보지 않겠어. 앞으로 2년만 열심히 이 책들을 공부해봐. 사법고시에 합격이 안되더라도 얼마나 많은 지식 특히 법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 이 지식은 이 중위의 앞날에 엄청난 보물이 될거야. 혹시 또 알아 고시에 합격된다면 그 것은 인생의 대 성공이지. 당신 머리도 좋은 것 같으니 한 번 시도해 봐. 내가 도와 줄께. 결국 없던 일로 치부하고 말았지만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렇듯 함 중위는 나의 현 상황을 벗어나 미래까지도 걱정해 주는 친구였다.
나는 교관이 될 것으로 지목되어 도미를 했는데 그로 인해 많은 코스의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한국어 로된 교재가 없어 미국 에서 받아온 교육내용을 코스 마다 번역하는 번역사업이 한창이었 다. 나는 그 번역사업으로 번역비를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함 중위도 이에 참여했는데 영어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어떤 코스원본은 분량이 많아 두 사람이 공동으로 번역하는 때가 있었는데 번역비를 받으면 함 중위는 1/3만 갖고 2/3는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극구 사양하고 반씩 갖자고 했지만 그는 막무간 이었다. 자기에게 지급되는 수입을 줄이면서 친구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함 중위의 희생으로 배푸는 우정에 감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는 그럴 때 마다 자네는 가정이 있잖아. 그게 전부였다.
이런 우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요. 관포지교 (管鮑之交) 라고 해야 하나요. 또는 수어지교 (水魚之交) 라고 해야 되나요. 또는 간담상조 (肝膽相照)란 뜻이 이에 해당 되나요. 이 모두를 합해도 부족한 함 중위의 우정은 늘 내 마음 속에 각인되어있다. 친구가 갖추어야할 덕목은 인정, 신뢰, 정직, 경청, 소통, 존중, 격려 라는데 함 중위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참 친구임에 트림 없다. 함 중위 고맙고 존경합니다. 참고로, 함 중위는 그 후 소령으로 전역하여 항공대학 교수로 있었던 사람이다. ㅡ 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