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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진리교(일본어: オウム真理教 오무신리쿄)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 彰晃)
옴진리교(일본어: オウム真理教 오무신리쿄)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 彰晃)가 설립한 일본의 종교단체로, 1984년에 설립되었다. 줄여서 "옴" (aum, オウム)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9년 11월 4일에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1994년 6월 27일에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에서 마쓰모토 사린 사건을, 1995년 3월 20일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키는 등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저지를 정도의 악명높은 종교단체로 알려져 있다. 1995년 5월 16일에 아사하라가 야마나시 현 니시야쓰시로 군 가미쿠이시키 촌에서 체포되었다.
2000년 2월 4일 알레프(일본어: 宗教団体・アレフ)로 이름을 바꾸고 재편성했으며 2002년 1월 조유 후미히로가 종교단체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들은1984년 아사하라 쇼코는 이후에 옴진리교가 된 요가 도장 〈옴진리회〉를 시작했다. 이 즈음에 오컬트계 잡지인 〈무〉가 이 옴진리회를 일본의 요가단체로 취재하고 사진이 첨부된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가부좌를 튼 채로 도약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이 후에 이를 동교단이 말하는 공중 부양의 원형인 ‘달 돌리 싯디’라고 여겼다. 또 아사하라는 〈무〉 1985년 11월호에 사카이 가쓰토키의 예연서 〈신비의 일본〉에 근거하여 초능력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돌인 ‘히히이로카네’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투고했다.
1987년, 도쿄 도 시부야 구에서 도장을 〈옴신선회〉로 개칭했으며, 종교 단체 〈옴진리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뉴욕 지부도 설립하였으며, 1989년 8월 25일, 도쿄 도에 종교 법인으로 인증되었다.
아사하라는 티베트 망명 정부의 일본 대표인 페마 잘포(Pema Gyalpo)와 접촉하여 그의 도움으로 1987년 2월 24일 및 1988년 7월 6일에 인도에서 14대 달라이 라마와 회담하였다.
아사하라 측은 양자의 회담의 모습을 비디오 및 사진 촬영해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가 ‘일본에 진정한 불교를 넓혀달라’라는 말을 아사하라에게 했다는 것을 옴진리교의 홍보 및 선전 활동에 많이 활용했다.
페마 잘포는 그 후 곧 옴진리교와의 관계를 끊고 적극적으로 대립하여, 티벳 망명 정부에게도 향후에는 아사하라와의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종교 법인으로서 인가된 후 일본 전국 각지에 지부나 도장을 설치하고 러시아나 스리랑카 등 해외에도 지부를 두고 있었다.[2] 1989년 당시에는 약 만 명 정도의 신자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옴진리교는 기발한 선교 활동 등으로 일부에서 주목 받고 있었다.[1] 1989년 11월에 일어난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나 1994년 6월에 일어난 마쓰모토 사린 사건, 1995년 2월 28일에 일어난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등에서 용의 단체라고 주목받아 그 이후 경찰에게 감시되고 있었다. 1990년 5월, 구마모토 현 나미노 촌에 진출하지만 현지 주민의 격렬한 반대 운동에 직면한다. 또, 그 사건과 관련하여 국토 이용 계획법 위반 사건으로 강제 수사를 받는다. 이 사건은 옴진리교의 피해의식을 강화시켜 그 이후 일어난 사건의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검찰청 측의 주장에 의하면 1995년 3월에 경찰의 전국 옴진리교 시설의 일제 수사의 내부 정부를 입수한 옴진리교 간부는 경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도쿄 도에서 대사건을 일으키자는 일을 생각해내어, 1995년 3월 20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켰다고 여기고 있다.
이에 따라서, 사건 자체는 내란이 아니었다고 여기지만, 내란을 일으키기 위한 시간 벌기라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오히려 옴진리교의 사건 관여에 대한 확신이 깊어진 경시청은 1995년 3월 22일에 야마나시 현 가미쿠이시키 촌에 있는 옴진리교 본부 시설에 대한 강제 수사를 실시하였다. 시설에서는 사린 등의 화학무기 제조 설비, 생물무기 설비, 살포를 위한 군용 헬리콥터 등이 발견되어, 옴진리교의 특이한 실태가 밝혀졌다. 사건에 관여되었다고 지적받은 옴진리교의 간부층 신자가 잇달아 체포되었다. 도쿄 지검은 마쓰모토 치즈오 17건의 용의자로 기소했지만 그 안에 있는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메스칼린, 각성제, 마취제 등 약물 밀조(密造)에 관련된 4건에 관계된 재판의 신속화를 도모하기 위해 2000년 10월 5일, 기소를 철회하였다.
이 사건과 관계되었다고 여기는 최대 중요 용의자인 히라타 마코토, 기쿠치 나오코 , 다카하시 가쓰야 3명 모두 각각 2011년 12월 31일,2012년 6월 12일,6월 15일 경 체포되었다.
1995년 5월 16일에는 옴진리교 대표인 마쓰모토 지즈오가 가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의 옴진리교 시설에서 체포된다. 그 이후 무라오카 다쓰코 대표 대행이 되었지만, 1995년 10월 30일, 도쿄 지방 법원에 의해 해산 명령을 접수하였고, 같은 해 12월 19일의 도쿄 고등 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되자 즉시 항고하였다. 1996년 1월 30일에 최고재판소에서 특별 항고가 모두 기각되어 종교 법인으로서 해산되었다.
1996년 3월 28일, 도쿄 지방 법원이 파산법에 따라 옴진리교에 대해 파산 선고를 내린뒤, 같은 해 5월에 확정했다. 1996년 7월 11일 공공의 이익에 해치는 조직범죄를 행한 위험단체로서 파괴 활동 방지법의 적용을 요구하는 처분 청구가 공안 조사청에서 행해졌지만, 같은 법률로 인한 중복 처벌은 헌법 위반이라는 헌법 학자의 주장이 있으며 또, 단체 활동의 저하나 법을 어긴 자금원의 감소가 확인된 것들로 인해 처분 청구는 1997년 1월 31일, 공안 심사 위원회에 의해 기각되었다.
파괴 활동 방지법 처분 청구 기각 후, 옴진리교는 태도를 바꾸어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우리는 아직 옴진리교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등의 도발적인 포교 활동을 실시하거나 컴퓨터 판매를 통하여 자금 조달을 진행하였다. 한편,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옴진리교가 한 증거가 없다’는 말을 하는 등 일체의 반성도 하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도 응하지 않았다. 옴진리교의 이러한 자세는 사회의 강한 저항을 불러모아 나가노 현 기타사쿠 군 기타미마키 촌에서 벌어진 주민 운동을 계기로 옴진리교 반대 운동이 전국적인 고조를 보여 국회에서도 옴진리교 대책법으로 무차별 대량 살인 행위를 실시한 단체의 규제에 관한 법률 이른바 〈옴진리교 신법〉 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2000년 2월 4일, 옴진리교를 모체로서 바로 작년에 출소한 조유 후미히로를 대표로 한 〈종교 단체 알레프〉가 설립된다. 알레프는 2003년 또 한 번 〈종교단체 알레프〉라고 개칭했으며, 2008년 5월 20일에는 또 한번 〈알레프 (Aleph)〉라고 개칭한다. 〈알레프〉라고 개명한 이후에 같은 이름이 존재하지만 옴진리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업이 옴진리교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에 피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그만둔 신자와 현 알레프 신자에 대한 전입계의 접수 거부나 퇴거 권고· 취입학 거부 등 지방 자치 단체에 의한 위법 행위로서 사회 문제되고 있다. 주민표 불수리 재판은 모두 지자체 측이 지고 있다.
아사하라의 재판은 간부의 증언 만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이에 대해, 아사하라는 ‘제자들이 마음대로 행한 일이다’라는 주장을 일관하였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은 TBS 간부가 옴진리교 간부 하야카와 기요히데에게 옴진리교를 비판한 촬영물을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TBS는 이 사건에 대하여 빌미를 제공한 것에 대하여 사과했다.
2011년 11월 21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린가스 제조에 관여한 혐의로 1,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수의사 출신 교단 간부 엔도 세이치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2006년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비롯, 핵심 주모자 13명의 사형이 확정됐고 5명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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