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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봉림‧인평‧용성 대군 등 4남이 있었다. 인렬왕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5년 12월 산후증으로 승하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가 부왕 인조로부터 독살을 당한 직후인 인조 23년(1645) 4월, 세자에 책봉되었다. 인조 2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인조 27년 부왕이 승하하자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봉림대군(1619~1659)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할 때부터 원대한 북벌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형 소현세자가 독살되고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그 꿈을 실현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문제는 국력이었다. 병력을 늘리고 군비를 확충하자면 부국이 우선이었다. 마침 광해임금 때부터 추진해오던 대동법※이 뿌리를 내려 재정 확충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지만, 재위 10년 동안 해마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면서 전국적으로 모든 곡식의 수확량이 크게 줄어 국고가 바닥나기 일쑤였다. 뜻은 웅대했으되 기회가 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 대동법 ; 지방 특산물로 세금을 바치게 하던 제도가 양반과 지주들의 농간으로 세수가 줄어들자, 세금을 토지 1결당 12斗의 쌀로 통일하여 특산물 가격 조작을 예방한 조세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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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는 동안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현실에 이를 갈았다. 어떻게 해서든 백성들이 다시는 이러한 고통과 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라가 먼저 부강해져야 했다. 효종은 즉위하자 국고를 확충하여 신무기를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어영군과 금군의 수를 늘리고 훈련을 강화하여 강군을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변방의 오랑캐 여진족도 후금을 세워 명나라를 정복한 터, 조선이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마침 어영대장 이완이 주상의 뜻을 받들어 적극 강병책을 추진했다.
간신 송시열의 교묘한 훼방은 재위기간 내내 북벌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내치를 책임진 송시열은 북벌정책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사리사욕 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효종이 승하한 뒤에는 이른바 예송논쟁을 일으켜 효종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데도 앞장선 수구꼴통이었다. 예송논쟁이란 효종이 차남이므로 계모인 자의대비가 장남의 예에 준한 기간 동안 상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조선조 당파싸움 가운데 가장 소모적인 정변이었다. 송시열은 조선의 김기춘이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으니, 차라리 정치를 접고 후학 양성에 매진했더라면 저도 좋고 나라에도 좋을 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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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0년(1659) 4월, 효종은 귀밑에 종기가 났다. 마침 세자(현종)도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궐에까지 들려왔다. 심신이 피폐한 가운데도 효종은 연일 기우제를 지내느라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효종은 종기를 돌볼 틈도 없이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적폐를 단속하는 등 민생을 보살피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까지 입은 데다, 아끼던 동생 인평대군이 요절하여 큰 충격을 받으면서 건강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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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의관 신가귀가 악화된 종기를 살피더니 침으로 다스려야 된다고 주청했다. 시침을 했지만 종기는 더욱 번져 온 머리를 뒤덮었다. 5월 4일, 신가귀는 침으로 종기 부위를 째서 고름을 짜내야 한다고 아뢰었다. 효종은 그를 믿고 머리를 내맡겼다. 마침내 신가귀가 시침을 하여 고름을 짜냈는데, 실수로 혈락(血絡)을 터뜨려 피가 멈추지 않았다. 온갖 지혈처방을 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효종은 결국 실혈사(失血死)하면서 북벌의 꿈도 허망하게 사라졌다. 송시열의 사주를 받고 신가귀가 일부러 혈락을 잘랐다는 쑥덕공론도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부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현종은 의관 신가귀를 즉각 참수했다.
첫댓글 송시열이가 그런 인물이었구나...
참 많이도 배운다.
갈수록 점입가경일세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