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舊韓末 王室에서 일했던 生存者들 ]
鄭志園
Ⅰ. 高宗皇帝의 典醫였다는 朴翁-끝없는 哀愁에 잠긴 中風患者 朴老人의 哀話-
고종황제의 전의(典醫)를 지냈다는 영감님이 「前 高宗皇帝 典醫 廣濟醫院 漢醫師 第 八十三號」라는 흥미 있고도 긴 간판을 내어 걸고 아직도 생존해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박창현(朴昌鉉)씨인데 그는 현재 인천시에서 5리쯤 떨어진 송림동(松林洞) 소재 후생주택에 자리잡고 한약국(漢藥局)을 개업하고 있다. 고종황제의 임종을 목격했다는 화제의 영감님은 올해 여든 셋으로 접어든 고령(高齡)이다. 인생의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면서 더욱 애절하게 젊은 시절의 옛 추억을 더듬어가며 몸부림치고 있을 이조 왕실의 낙오자를 찾아서 기자가 광제의원에 다 달았을 때는 무더운 여름 해가 서산에 기울고 인생의 황혼처럼 서쪽 하늘이 곱게 물들어 가는 무렵이었다. 기자를 맞이하는 박창현 옹은 얼핏 보기에도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었을 젊은 시절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넓직한 이마가 양옆으로 시원하게 벗겨지고 위엄을 풍기는 백발이 나붓기어서 어딘지 모르게 위함을 주는 인품의 소유자였다. 고종황제의 시의(侍醫)- 그러나 그것은 가슴속에 간직된 아름다운 꿈에 불과했으며 현실의 그는 반신불수(半身不隨)의 중풍환자였다. 그래도 박 옹은 입버릇처럼 ‘고종황제의 전의’였음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정치를 논하고 군사를 얘기할 땐 의젓이 도사리고 앉아 일종의 격식(格式)까지도 차리면서 지난날 황실계급의 한 사람이었다는 냄새를 피우지만 ‘구차스러워 보이는’ 살림살이가 눈을 자극해서 영감님의 위엄이 어울리지가 않았다. 한쪽 입이 뒤틀리고 한쪽 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중풍환자- 그래도 그의 약방을 찾아오는 다름 중풍환자가 있다면 서슴지 않고 약을 지어줄 것이라.....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황제의 전의도 별 수가 없군...” 하는 심술궂은 마음도 일어났지만 실례가 될까봐 행여 내색은 하지 않는 것이 기자의 심보였다. 그는 또 몹시 성미가 급한 것 같았다. 발작적인 신경질이 왜 생겼는지....그 연유를 생각하면 넉넉지 못한 살림들과 관련해서 생활고...몰락....등을 연상하고 그것 때문에 성미가 거칠어졌겠다 는 결론도 맺어진 듯 하다. 몰락... 일국의 황제의 건강을 도맡아 보살피던 전의가 이름 모를 촌구석에서 한 양국의 주인 영감이 되었다면 몰락도 그에서 더한 몰락이 또 어데 있으랴. 헌데 그것이 현실이었다. 반축을 되풀이해봤자 되살아날 수 없는 영원의 회상(回想)이지만 영감님의 눈동자가 때때로 초점(焦點)을 잃는 것은 그 옛날의 호화(豪華)를 그리워하는 때문일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공상을 넓히면 그 영감님의 마음처럼 기자의 마음까지 아련한 애상(哀傷)에 젖어 들어가지만 ‘쎈티’에 빠진다는 것은 벌써 시대적인 착각일는지도 모른다고 그 영감님에게 일깨워주고도 싶었다. 한쪽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기자에게 들려주는 박창현 옹의 애절한 이야기- 이하 영감님의 얘기를 따라서 고종황제의 임종(臨終)과 그 후 박창현 옹이 거쳐온 애로 역정을 엮어보기로 한다.
『나의 조부(祖父)께서는 이조판서를 지내셨고 나의 부친은 참판이었는데 참판이란 오늘날의 장관과 같은 것이요.』 우선 가문(家門) 자랑으로 말머리를 끄집어낸 박 옹은, 『박영효(朴泳孝)도 내 일가 벌이오』 하고 덧 부쳤다. 『고종황제께서는 감주(甘酒)를 몹시 좋아하셨습니다. 거의 매일 저녁 감주를 잡수시곤 하셨는데 그 감주 때문에 급기야는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지.....』 일본 놈에게 아부하던 매국노들의 간계(奸計)에 걸려서 독약을 마시던 일로 얘기가 옮아가자 박 노인은 눈앞에 그 당시의 참상을 그려보는 듯 잡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가 음력으로 아마 동짓달이었지. 어느 날 안국동에 있던 내 집에 볼일이 있어서 대궐을 비웠을 때의 일이었어....집에 있던 나에게 상감마마의 급변을 알리는 기별이 와서 나는 허겁지겁 대궐로 달려갔는데....』 여기서 박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다 달았을 때 황제께서는 벌써 숨을 걷우시고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무렵이었어. 응급치료를 해봤지만 이미 약효가 없을 때였어.』 『독약을 넣었어! 몹쓸 놈들이 상감께서 잡숫는 감주에다 독약을 넣었단 말이야....직접 독약을 넣은 것은 ‘백(白)상궁’이라는 늙은 년이었는데 물론 그 뒤에는 이완용이의 마수(魔手)가 뻗혀 있었지...』 『황제께서는 감주에 금 수저를 넣으시는 습관이 계셨는데 그날 따라 수저를 저어 보시지도 않으셨으니 참 기막힌 일이었어! 감주는 지밀나인(至密內人)이 황제께 받치는 것인데 그 날은 어찌된 일인지 ‘백 상궁’의 손으로 바쳤으니 모든 일이 전부 공교롭기만 했던 것이지. 』 『황제께서 토하신 토물(吐物)을 감정해보니깐 분명히 독약이 섞여있기에 이완용이에게 마구 대어들었더니 그 놈도 아무 말을 못하더군.....하지만 황제께선 이미 운명하셨으니 무슨 소용이 있었겠소? 』 두서 없이 하는 말이었으나 역적 이완용에 대한 증오(憎惡)의 감정이 아직도 괴롭다는 듯 박 노인의 표정은 격노(激怒)의 얼굴이었다. 『고종황제께서는 그 당시 간신들의 등쌀 때문에 왕위를 순종(純宗)에게 이양하시고 창덕궁을 벗어나서 덕수궁에 거처하시다가 그런 참변을 당하셨는데 그 때가 1919년 1월 22일이었소. 황제께서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시자 국민들이 분격해서 3. 1운동까지 일으키지 않았겠소? 황제께서는 옥체(玉體)가 매우 건강하셨더랬는데 ...』 원통하다는 듯이 고요히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박 노인-. 이렇게 해서 고종황제가 돌아가시자 국상을 치룬 바로 그 이튿날 고종황제의 전의였던 박 노인은 애통함을 참지 못하여 그 길로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봉천(奉天)을 향하여 망명생활로 떠났다. 이후 반평생을 남경, 북경, 상해 등 중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독립운동에 몸을 받찬 박 노인이었다. 그 당시 상해에 있던 우리나라 임시 정부의 주석 깁구(金九)씨 밑에서 한때는 외사국장(外事局長)을 지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박 노안은 어려서부터 재주꾼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총명한 사람이었다. 일찍 구한국시대에는(庚戌年, 한일 합방 전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으로 유학 가는 관비(官費) 유학생 8명 중에 뽑혀서 선별한 일도 있었다. 윤치성(尹致誠= 尹致昊씨의 동생)을 비롯해서 정숙서와 후일 독립군을 지휘한 노백린(盧伯麟) 장군 등과 더불어 일본 유학을 마친 박 노인은 앞 날이 촉망되는 젊은 인재이기도 하였다. 『그때 다른 분들은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갔지만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사관학교에 가면 부자 상절(相絶)을 하겠다는 정도의 엄한 반대를 받고 그만 귀국하였었소.』 박 노인은 이렇게 아득한 옛날을 더듬는다. 지금 박 노인의 슬하에는 단 하나의 아홉 살 난 손녀가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있다. 인천 근교에 한약방 간판을 내건 것은 지금으로부터 다섯 달 전, 그러나 박 노인에게 찾아오는 한자는 하루에 한 사람을 헤아릴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반신불수인 의사에게 찾아올 환자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환자가 와보았댔자 맥이나 짚고 진단이나 할 뿐이지 약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이 박 노인의 약방이었으니 ‘고종황제 전의’란 매력적인 간판도 요즘 세상엔 무색한 것 같아서 어쩐지 서글프기만 했다. 박 노인은 왜 반신불수가 되었을까? 『6. 25 때 저명인사와 함께 북으로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오기는 했는데 혹심한 빨갱이 놈들의 고문을 받아서 반신불수가 되었다.』 고 박 노인은 설명했다. 6. 25 때 두 아들과 식구를 모두 잃어버리고 손녀 하나만이 남았다는 박 노인의 인생은 기구하다고만 설명해서는 그 애처로움의 절반도 설명이 안될 만큼 모질고 억센 풍파를 겪어 나온 것 같았다. 눈앞에 얼신 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오늘일지 내일일지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수명을 분명히 의식하기 때문에 어린 손녀의 교육과 양육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초조와 불안이 교차(交叉)한다는 박 노인의 탄식은 그 누가 귀담아 들어 주어야할 것인지- 『내야 곧 죽을 몸...저기까지 닦아온 죽음이 그림자가 내 눈에 뚜렷하지만 저 어린 손녀를 생각하면 내가 어찌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겠소. 나는 늙고 또 병신된 aa이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폐인이 다 되어서 말할 기력조차도 차리기 어렵다는 박 노인의 인생 독백(獨白)은 듣는 사람의 가슴속을 날카롭게 꿰뚫지만 그저 그런 대로 박 노인과 함께 한숨지을 수밖에 없는 기자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Ⅱ. 대원군을 모셨다는 雲峴宮에 남아있는 노처녀 상궁 秘話
운현궁-. 운현궁은 대원군의 청운(靑雲)의 꿈이 곱게 도사리고 있었던 곳이다. 운현궁의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송정(松亭= 지금 운현궁 예식장 앞에 바라보이는 老松).....수백 년 묵은 노송을 에워싼 송정은 한 많은 옛 꿈을 간직하고 풍운의 시련을 말없이 전해준다. 이 송정을 바라보면서 말 없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파파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사뭇 보기 사나운 몰골을 한 파파 할머니는 등허리와 배(腹) 가죽이 한데 붙어 혹심한 생활고로 인하여 지나치게 여위었기 때문에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흘러간 풍운의 역사 속에서 유서 깊은 운현궁의 역대 상궁- 다시 말하면 대원군을 비롯하여 그 직계(直系)인 흥친왕(興親王), 영선군(永宣君), 이우공(李鍝公),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작으만치 5대의 생존사(生存史)를 몸소 보아온 역대의 상궁이었다. 그는 조선왕조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 보배와 같은 상궁이기도 하다. 지금 그는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열 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지난날의 사연을 다시 한 번 전해 들으려는 듯 송정을 바라보고 있다. 양손을 합장도 해보면서 손가락을 폈다 오무렸다 할 적마다 파란 힘줄이 금새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어오른다. 눈 깃을 곱게 펼 때마다 신령님 같은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백발의 할머니의 넋은 이미 저승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난히도 흰모시 고의 적삼에다 엷은 미명 치마를 두르고 서있는 할머니의 한 손에는 약간 기름때가 묻은 한 자 가량 될까 하는 칫수의 단장(短丈)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올해 여든 넷- 육십 갑자(六十甲子)를 치더라도 계유생(癸酉生)이 한 바퀴 돌고 환갑, 진갑이 지난지도 벌써 스물 네 해가 지난 셈이다. 단기 4206년 생. 그러니까 고종 10년 되던 해 그는 대대로 독실한 글방 선생을 지내던 청빈한 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여든 네 살....좀처럼 보기 드문 수명을 자랑하는 그 할머니는 아직도 꼬장꼬장한 기품이 엿보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각 까지도 운현궁의 상궁으로 있는 이 할머니는 머리 땋고 자라던 열 한 살 때의 남달리 조숙하던 처녀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가슴이 막 부풀어오려던 무렵에서부터 시작된 궁중생활이 꿈결처럼 흘러서 어언 73년째라는 기나긴 세월, 그러니까 전 생애를 운현궁에 받치고 있었던 셈이었다. 달콤한 가정을 차릴 꿈도 이럭저럭 놓쳐버리고 그만 생 처녀로서 시집도 가보지 못한 그녀의 괴로움이 얼마나 컸던 것일까? 이렇게 운현궁에서 여든 네 살의 생 처녀로 늙은 노 상궁의 이름은 임송재(林松在)라고 했다. 그 당시의 임 상궁이라 하면 본 대궐 안에서도 예쁘기로 이름난 존재여서 한 때는 남부럽지 않은 영화(榮華)도 누렸지만, 지금은 그지없는 애수(哀愁)만이 깃들어 있을 뿐 의지할 곳조차 없는 무의무탁(無依無托)한 신세의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비탄의 눈물 속에서 그 날 그 날을 겨우 연명하는 고독하기 짝이 없는 상궁, 너무도 고령(高齡)의 파파 할머니를 돌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왕에 시집이나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젠 늙고 병들어서 아무 쓸데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선대(先代)에 무슨 죄가 있었는지, 죽지 않고 이렇게 오래 사니, 귀도 먹고 눈도 멀고 그저 노상 누워만 있죠.』 기력을 다하여 말하는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기력은 좋아 보였다. 하얀 이빨, 그 치아만은 성한 것이 많았다. 『여관(女官) 생활 7여 년 동안.....』 하고 몹시 예절 바른 태도로 말을 꺼낸다. 궁내에서 곱게 자란 그는 곱게 늙은 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친 우수(憂愁)가 그득하여 “휴-” 하고 긴긴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하여 상궁으로 늙었을까. 자못 수수께끼와 같은 흥미 속에 잠긴 이 문제를 풀기 전에 어찌하여 그는 상궁이 되었느냐를 풀기 위해 젊은 기자는 작으마한 상궁의 방에서 무더운 여름 날 땀방울만 흘리고 있었다. 귀가 먼 듯한 파파 할머니 상궁에게서 여러 가지로 알아본 결과의 얘기로 차차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가 풀려나올 것만 같았다. 과연 처녀로서 늙은 상궁인가? 왜 시집을 못 갔을까? 점점 흥미를 자아내게 하는 그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잠시 이야기의 실마리를 대원군 시대로 옮겨보자. 천하를 호령하는 대원군이 거연(遽然)히 국태공(國太公)의 자리에 앉게 되어 만기(萬機)의 정권을 잡게된 이 역사적인 순간은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철종(哲宗) 14년 계해년(癸亥年)이었다. 철종의 하세(下世)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조선왕조 제 26대 왕대(王代)를 이은 분, 유명한 고종황제이었다. 따라서 대원군의 위세가 점점 기염을 더해 가는 무렵 임 상궁은 열 한 살의 귀염둥이로서 남달리 예쁘게 생긴 얼굴을 한 처녀이었다, 대대로 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난 이 규수의 오라버니는 대원군의 집에서 쳐 얹혀 지내는 청지기로 있었다. 그 규수는 대원군의 눈에 들어 오라버니의 알선으로 대원군을 모시는 시녀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대원군으로부터 귀염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렇게 임 상궁의 두 남매는 일찍 부모를 여윈 불우한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약 행운을 갖게 된 것인데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위었고 열 살을 맞아 도한 아버지마저 잃게된 외로운 고아였었다. 임 상궁은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에게도 눈에 들게 되어 그가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운현궁의 상궁들 가운데에서도 제일 귀여움을 받는 귀한 존재였다. 『대원위(大院位)께서 나를 어떻게나 귀여워 해주셨든지, 또한 그 분은 그때에 예순이 넘으신 연세이셨는데도 퍽 건강 하셨습니다.』 임 상궁이 혹 감기나 들면 그 나이 어린 얼굴 볼에 붉은 앵두 같은 열기가 띄워진 것을 보시곤 대원위께서 손수 약을 내리게 하는 명을 내리시면서 인 상궁의 상기된 얼굴을 두루 만져주면서 안쓰러워하셨다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저주에 찬 자학(自虐)의 말도 해주었는데, 『내 팔자가 여관으로 늙으라고 다식판(茶食板) 박듯이 박혔음인지 지금 이렇게 배가 고프니 죽기 전까지 배나 곯지 않았으면 좋겠소. 지금 쌀값도 비싸고 이런 세상에....참!』 저주에 찬 말씨였다. 그는 지금 운현궁의 박비(朴妃= 박찬주 여사. 즉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에게서 매달 3천 환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굶주리고 있는 품이 역력하였다. 지난날엔 그처럼 배불리 호화스러운 생활을 해왔었건만 그러나 지난 과거의 부귀영화도 한마당 뜬구름과 다를 바 없다면서 흐느꼈다. 『그 전에는 어디 배를 고를 일이 있었겠소? 그냥 맞 있는 것만 먹었는데 언제나 대원위의 퇴설(退設)한 음식을 받아먹었던 관계로 고량진미(膏粱珍味)는 모두 내 혼자 차지해서 배 두드려가며 먹었다오. 』 그런데 순간 두어 줄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그저 시집이나 갈걸, 공연히 철없이 중간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니 후회가 납디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소? 』 애처로운 표정이 여든이란 나이를 훨씬 넘긴 파파 할머니의 얼굴에 역연하게 떠올랐다. 그는 이럭저럭 시집을 가지 못한 것보다도 오늘 날 이처럼 자신의 슬하에 아무도 없이 외롭게 지내는 팔자가 더더욱 눈물겹다고 했다. 운현궁의 역대 노 상궁으로서 호화롭던 그 옛날은 다 지나가고 지금은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아가려니까 그저 부질없는 옛날의 추억만이 버릇처럼 되풀이하여 생각이 떠오르곤 해서 슬프다고 했다. 그는 지금 운현궁에선 보물과 같은 존재이면서도 천대와 온갖 멸시를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는 옛적의 상궁일 뿐이라고 푸념했다. 이제 그의 몸은 지나치게 늙었기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옆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나이 젊은 조(趙) 상궁은 배불리 지내고 있지만 5대를 겪어온 임 상궁에게는 굶주림만이 있을 뿐이었다. 뒤를 이어 들려준 얘기 가운데에서는 ‘대원위’니 ‘이준(李埈)’ 공이니 하는 궁중의 내력들이 정중하게 받들어 나왔다. 『모든 것이 촉처감창(觸處感愴)해질 뿐이죠』 하고 한 문구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저 요즘 세상 만사가 눈에 보이는 대로 눈물이 나올 뿐이라우 』 이라면서 말끝은 맺었다. 왕년의 부귀영화가 어디로 갔는가? 운현궁의 노 상궁은 그저 옛 추억만 더듬고 있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외로운 할머니.....그는 지금 눈물과 비통 속에 짐겨서 운현궁 한 옆에 쭈그리고 누워있는 몸이다. 저 세상 갈 날이 몇 일이나 남았을까? 그곳엔 그를 반겨 맞을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을는지_......
Ⅲ. 英親王을 업어 길렀다는 창덕궁의 노 侍衛長의 表情
찬란했던 조선왕조 오백 년 왕궁의 옛 꿈이 짙은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대궐의 수식 수위장(守衛長)으로 있는 백발 고령의 노인. 금년 73세로 접어든 이 노인은 한일합병이라는 풍운의 역사적인 전주곡(前奏曲)이 이 땅에 휘몰아칠 무렵. 이 당시의 황태자이면서 어린 왕세자의 시위(侍衛), 즉 영친왕을 업고 다니면서 세자의 재롱을 보고 호위하는 임무를 지닌 그가 지금 볼모의 몸으로 일본 땅에 가있는 영친왕- 명색은 왕세자의 동경 유학이라지만 그가 조선을 떠나기 전까지 영친왕의 호위병으로서 소임을 다한 이 노인은 지금까지 그 당시를 상기하면서 덧없이 흘러간 옛날을 아련하게 떠올리며 기자에게 영친왕에 대한 추억담을 일러주었다. 대한제국의 몰락을 고하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기 직전. 풍운의 역사가 휘몰아쳐 청국을 비롯하여 일본, 러시아 등이 영토 확장의 꿈을 이루려는 야욕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 나라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져 가던 무렵으로 이야기의 실마리는 되돌아간다. 일본의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야욕에 그 당시 매국(賣國)하기에 앞장섰던 이완용을 비롯한 간신 배들과 합심하여 기어코 조선왕조 오백 년의 종묘사직에 종지부를 찍은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해서 나라의 명이 땅에 떨어지고 왕궁에는 또 하나의 물의(物議)가 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왕세자 은(垠)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는 막중한 일이었다. 궁내, 궁외를 토아여 비등(飛騰)하던 물의를 일으킨 왕세자의 유학문제는 그때의 조정 간신 배들 사이에서도 왈가왈부(曰可曰否)의 설전(舌戰)들이 오고 갔으나 어린 왕세자는 일본의 위압으로 유학의 도정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垠)- 그는 순종(純宗)의 배다른 아우로서 고종의 후비(后妃) 엄비(嚴妃)의 소생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은은 왕세자의 덕기(德氣)를 대성(大成)하기에 목적을 두고 일본 유학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의 강압으로 동경 유학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33년 전- 갑자년 섣달 초 닷 세 날 이른 아침 만주환(滿洲丸)에 몸을 담은 영친왕은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 동경을 바라고 고국을 등진 채 떠나갔다. 때에 그 나이는 13세. 그렇게 어린 나이의 왕세자의 몸으로 이를 배웅하고 있는 이 시위장의 가슴은 너무 슬프도록 통곡하고 울부짖었다 이 노인은 구한국시절 광무 2년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단기 4231년. 구한국 조선군 시위 제3대대 4중대의 상등병 나팔수(喇叭手) 유순근(劉順根)의 이름을 가진 이였다. 비록 지금은 백발이 희끗희끗한 나이 많은 노인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젊은 시절의 그는 역사(力士)로서 과시했던 그 때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 때 칠성도(七星刀)를 쥐고 좌우로 흔들던 뽐내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역시 장사의 기질을 타고 난 자신을 매우 자랑삼아 기자 앞에 말하는 폼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낱 말없는 창덕궁 직이의 수위장으로 늙어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노인은 잠시 있다가 장롱에서 꺼내어 온 다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기자 앞에 펼쳐놓았다. 노인의 자필 이력서였다. 창호지 두 폭이나 됨직한 종이에 자신의 이력을 적어놓은 이력서였던 것이다. 이력서를 받아들고 읽어 내려가던 기자의 눈은 순간 둥그래졌다. 몇 해 전, 아니 재작년까지도 수도 경찰의 경감이라는 무궁화별을 부쳤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던가? 기자는 뚫어지게 그 영감님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노인의 얼굴은 굵고 작은 주름살이 마구 그어져 있는 형국의 얼굴에 유순함직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착한 모습의 노인의 얼굴이었다. 이제 나이는 일흔 세 살-. 갑신년 4231년 생. 그는 매동관립학교(梅洞官立學校)를 졸업했다고 이력서에 적혀있다. 단기 4286년에는 경감으로 승진되었고 그 해 9월 전국에 공무원 감원의 선풍에 밀려 경감직에서 물러 나온 일이. 그의 공직으로서의 마지막이었음을 알게 하였다. 과거 일본군의 군조(軍曹)를 몇 달 동안 해본 이력도 적혀있는가 하면 경기도 경찰부에서 나팔수 교관으로 근속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다. 『그게 해방이 되던 내 진갑 때이던가, 예순 둘의 나이를 먹었을 적에 수도청장이었던 장택상(張澤相) 어른께서 나를 호출을 했습디다. 』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인사 차 찾아갔다가 그 날로 경찰청 보안과에서 근무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계급장은 경위를 달아주면서 이런 특채를 인연으로 경찰청 근무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 이어서 그 이듬해 12월엔 ‘임무 충실 표창장’도 배수(拜受)하였다면서 고이 지니고 있던 상장을 내보여주었다. 8. 15 해방 전에는 종로의 우미관(優美舘)에서 기도 감독을 했고 또 그 전에는 양정고보(養正高普)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기도 했다 그리고 경방단장을 지냈다는 것과 기자의 노인에 대한 물음에 혹시 친일행각을 지낸바 있었던가를 물었을 때 그는 별로 어색한 표정도 짓지 않고 씩 웃으며, 『그게 전부요. 특별지원병 훈련소의 교관생활을 12년 간 한 것은 친일은 아닐 거요.』 그렇게 솔직히 털어놓는 모습은 당당했다. 이제 영친왕과 이 노인과에 얽힌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 이야기를 말해달라고 청했다. 유 노인은 다시 빙그레 웃으면서 『아, 그렇지...정작 들려줄 얘긴 하지 않고.... 그래서 세자께서는 어린 나이에도 나팔 소리를 듣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소. 나는 가끔씩 세자를 등에 업고 한 손으로 나팔을 불며 덕수궁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그 분을 기쁘게 해줬소. 』 영친왕의 네 살 적부터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모셔왔다는 유 노인은 먼 그 옛날을 차근차근 하나씩 되돌아본다. 『뭐, 별로 이렇다할 일은 한 일은 없었지만 그저 어린 세자전하를 업고 다니면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린 것이 제 소임의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가 바로 어제와 같았었는데 세자 전하께서 열 세 살 나던 해에 일본을 가시던 바로 그 날 남자 전복을 입으시고 연두색의 태자 신에다가 분홍색 두루마기를 입고 그 어여쁘신 얼굴에 은빛 초립(草笠)을 쓰시고 이등박문을 따라 일본으로 떠나시던 그 애처로웠던 그 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 『그때에 어린 세자께서만 떠나셨나요? 』 『아닙니다. 배리(陪吏)들도 서넛이 세자 전하를 모시고 일본으로 갔습죠. 배리는 양반들의 자제 분들이었는데 함께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그들의 나이가 세자 전하와 비슷한 어린 나이들로서 일본에서의 세자 전하 측근에서 글동무, 친구로서 지냈을 것입니다. 』 유 노인은 지금 창덕궁 궁궐 안의 한낱 수위장으로서 대궐 문 안의 한 옆 방 한 칸을 얻어 기거하고 있다. 『지금도 영친왕께서 입으셨던 옷 한 벌을 제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옷은 제 손으로 벗겨드리고 입혀드렸던 그 옷 한 벌을 소중하게 진열하여 보관하고 있죠. 』 『일본으로 유학가신 이후 영치왕을 만나보신 일은 없었던가요?』 『예, 영친왕께서는 그 여론이 많던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하신 후 소생녀가 죽은 후 그 딸아이의 시신을 지금 청량리 밖 엄비 마마의 능 옆에 모셨을 적에 한 차례 조선엘 오셨었는데 그때에 잠깐 먼발치에서 숨어 뵈었습니다. 』 그때에 영친왕은 자기를 잘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정말 감개가 무량했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내 명이 길어 살고는 있습니다만, 세자 전하를 업어 모시고 지나던 그 때가 참말로 꿈결과 같아요. 』 하면서 말끝을 맺고 말았다. 왕실을 그리워하는 사람, 애틋한 옛 추억은 한없이 즐겁지만 부질없는 공상에서 깨어날 때 더욱 쓸쓸한 현실에 몸부림치고 울고도 싶었으리라. 그러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남은 여생을 그래도 추억을 반축하는 그들의 인생에겐 ‘추억’ 그것만이 유일의 ‘낙(樂)’인 것만 같은 아련한 생각이 명멸(明滅)하진 않을 것이다. = <實話> 1956년 9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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