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남인세력의 명문가 (1) ...무실 류씨
안동시 임동면 무실, 박실, 한들, 마재, 고래골, 그리고 예안 삼산 마을 일대에 세거하는 전주 류씨를 안동 일대에서는 ‘무실 류씨’ 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성인 풍산 류씨와는 전혀 다른 집안으로 낙남세력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의성 김씨, 고성 이씨, 재령 이씨 한양 조씨 등 안동 동쪽지방에서 사제․통혼관계를 통하여 영남 남인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다. 무실 류씨는 짧은 기간에 영남 7대 명문 (진성 이씨, 풍산 류씨, 의성 김씨, 전주 류씨, 재령 이씨, 여강 이씨, 인동 장씨)의 반열에 등장하게 된다.
전주 류씨 무실 마을 입향조는 柳城(1533-1560)이다. 류성은 임하면 내앞 의성 김씨 청계 金璡의 사위가 되어 영주 迂川에서 처향따라 무실에 정착하였으나 25세에 요절한다. 부인 의성김씨 또한 3년후 부군을 따라 단식하여 자결하니 고아가 된 어린 두 아들 복기․복립 형제는 외가에서 양육되어 진다.
임란을 맞아 기봉 류복기(1555-1617)는 외내 마을 근시제 金垓와 함께 창의하여 팔공산회맹과 화왕산성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묵계 류복립(1558-1593)은 종조부 윤덕의 사손으로 입후되었으나, 외숙인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자결하게 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안동 일대에 계거하는 전주 류씨는 모두 기봉 류복기의 후예들이다. 풍전 등화 같던 손세는 기봉 당대에 6子-16孫子로 번성하면서 과환과 학행이 이어지게 되는데 무실 류씨들의 성취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기봉과 그의 장자 도헌 류우잠(1575-1635)이다. 도헌 류우잠은 창석 이준, 경당 장흥효, 표은 김시온 등 당시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형제간 효우를 돈독히 하고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되니, 후손들은 그 성취를 ‘岐陶遺業’ 즉 岐峰과 陶軒의 遺業이라고 부른다.
全州 柳氏 (水谷派) 上系圖
柳濕-克剛 -克恕-汀 -濱 -敬孫-之盛-崇祖-應台-炯-瀾-仁榮-元立 涵-仁茂-亨立 -義孫-季潼-軾-潤德-墀-復立 -潤福 -潤弼 -潤善-城-復起 (무실 류씨) -復立 - 女 沈孝生 復起-友潛-橚-振輝-奉時-升鉉-道源-範休-鼎文-致好 (박실) -洛休-少文-致潤-章鎬 -觀鉉-通源-星休-晦文-致明-止鎬 -挺輝-昌時-信迪-長源-川休 -增輝 -益輝-相時-錫龜-正源-震休 (삼산 거주) -日休-器文-致馨-定鎭 -萬休-徽文 - 직 -학-東輝-敬時 -得潛 -知潛 -守潛 -宜潛 -希潛-榰
기봉의 후손에서 문과 10명, 사마 37명, 문집을 낸 인물이 112명으로 이들이 저술한 문적이 모두 151종 551권을 남겼으니, 이것은 퇴계 학문의 淵叢을 이루게 되었고, 조선 후기 도학과 예학의 대가가 배출되고 행실로 덕망있고 학문으로 이름있는 선비가 대를 이어 쏟아졌으니 ‘기도유업’ 이란 말이 생길만도 하다.
기봉의 손자 乖涯(괴애) 柳榰(류지, 1626-1701)는 경주부윤을, 증손 공공재 류정휘(1625-1695)는 목사를 지냈고, 함벽당 류경시(1666-1737)는 청백리로서 장령을, 용와 류승현(1680-1746), 양파 류관현(1692-1764) 형제는 각각 공조참의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모두 청백리로 이름이 있다. 예안 삼산 마을 출신으로 영조때 대사간을 지낸 삼산 류정원은 慈仁縣監과 通川郡守 재직시의 치적은 丁若鏞의 『牧民心書』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모범적인 관직생활을 한 인물이다. 퇴계학문의 적전을 이은 정재 류치명(1777-1861)은 병조참판을 지냈다.
학행으로는 도헌 류우잠(1575-1635), 그의 아들 백졸암 류직(1602-1662), 호곡 류범휴(1744-1823), 대야 류건휴(1768-1838), 호고와 류휘문(1773-1832), 수정재 류정문(1782-1839) 등이 사림에서 추앙을 받았고, 예학을 집대성 ‘상변통고’를 저술한 동암 류장원(1724-1796)은 대표적인 예학자이다.
무실 류씨들은 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등 모두 5명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입향조 이래 3대의 시제를 지내는 절차와 음복모습은 명문가 다운 저력을 보여준다.
한말 의병장 류시연을 비롯 파리장서운동의 주역 서파 柳必永, 서파의 아들 동산 柳寅植(1865-1928)은 협동학교를 주도한 선각자이며, 상해임정 국무령을 지낸 旦洲 柳林, 6.10만세운동 학생대표 류면희 등은 독립투사로 활동하였으며, 단주의 아들로 5.16을 주도한 류원식, 현세 인물로 류혁인 전 공보처장관, 여류시인 류안진 전서울대교수, 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류성걸도 이 집안이 배출한 인물이다.
무실 류씨는 우리 선김과는 많은 통혼관계가 있었다. 특히 수몰전 삼산 마을 무실 류씨들은 안동이나 예안으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앞 마을앞을 통과하여야 했기 때문에 지리적 위치도 통혼에 영향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안동지방에서 무실댁, 박실댁, 한들댁, 삼산댁, 동달댁 같은 택호들은 대부분이 무실 류씨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전라도 전주를 관향으로 하는 전주 류씨 일파가 안동 일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임란이후부터라고 볼때 그 짧은 기간에 그렇게 번성하게 된 저력은 무엇일까?
전주 류씨 시조 柳濕은 증 봉정대부 사헌부장령 완산백으로 5자(극강, 극서, 극수, 극제, 극거) 1서(심효생)가 문과에 급제하여 영달하게 되는데, 그의 터전과 묘소는 모두 전주에 있고 그 부인 전주 최씨에게는 三韓國大夫人이란 직첩이 내려졌다. 전라도에 살았어야할 전주 류씨가 영남에 입향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3세 柳濱의 둘째 아들로 세종조 예조참판을 지낸 4세 柳義孫이 있었다. 류의손의 증손자 柳潤善(1500-1557)이 서울 묵사동에 세거하다, 영주군수로 재직중이던 형 柳潤德을 따라 영주로 낙남하여 영주 거주 반남 박씨 司直 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영주 汚川에 우거했고, 그 아들 柳城이 안동 내앞 거주 청계 김진의 사위가 됨으로써 그때부터 무실 사람이 된 것이다. 즉 무실 류씨는 내앞 의성 김씨들의 외손이 되어 인근 무실에 정착하게 되고 그 후손들이 박실, 한들, 마재 고래골, 동달, 삼산 등으로 이거해 나감으로써 형성된 동족부락이다..
이에 훨씬 앞서 전주 류씨는 묘소 때문에 안동과 영주에 각각 연고가 있었다. 즉 녹전면 범바위 마을에 있는 2세 柳克恕의 묘와 문수면 승문리에 있는 3세 柳濱의 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속칭 ‘범바위’ 마을에 있는 보문각 직제학 柳克恕의 묘는 안동지방에서 보기 드문 여말선초의 형식인 下方上圓墳으로 석단으로 治葬되어 있다. 이 묘터에 얽힌 내력은 다음과 같다.
류극서의 아들 영흥부사 류빈은 태종 이방원과 동방급제하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터를 구하기 위하여 산중을 돌아다니던 중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한다. 산중 무인지경에서 호랑이를 만나니 진퇴유곡이라 큰 맘먹고 호랑이에게 다가서며 “ 나는 아버지 묘지를 구하러 다니는 길인데, 길을 비키던지 잡아먹던지 택일하라”하고 소리치니 호랑이는 답답하다는 듯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어서 이를 이상히 여겨 호랑이 입속을 들여다 보니 비녀가 목에 걸려 있지 않은가? 손을 들이밀어 비녀를 빼어주니 호랑이는 꼬리를 치며 감사하다는 뜻으로 그를 등에 태워 하룻만에 이곳 안동 녹전 죽송동까지 와서 범바위 산소를 잡았다는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전라도에 있어야 할 묘소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안동시 녹전면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믿을 수 밖에.....
한편 범바위 묘터를 잡고, 태종의 등극에 많은 공을 세운 3세 영흥부사 柳濱은 졸후에 왕명으로 능이 만들어졌으니,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있는 ‘鍾陵’은 바로 그 영흥대도호부사 류빈의 묘이다.
류빈의 아들 4세 류의손은 세종때 집현전 직제학으로 봉직하다 만년에 전주로 낙향하여 유배지 제주도에서 졸하였고, 5세 류계동, 6세 류식까지는 서울에 거주하다 7세 류윤선이 영주로 낙남함으로써 7세 류윤선의 묘는 3세 류빈의 묘 근처 문수면 승문리에 있다. 전주 류씨가 안동에서 번성하고 현달하게 된 것이 혹여 2세조, 3세조, 7세조의 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안동 임동면, 예안면 일대에는 무실종택, 기양서당, 의성김씨정려각, 괴애정, 화림정, 만령초당, 근암정, 양파구려, 삼가정, 삼산종택, 호고와, 만우정, 근암고택, 수애당 등 무실 류씨들의 고택 정자 등 문화유적이 즐비하였으나, 임하댐 건설로 수몰이 되자 일부 고지대로 이건하기도 하였지만,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로 집단 이주하여 문화마을 ‘水柳寓鄕’ 을 가꾸며 수몰 후에도 문중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무실 류씨는 조선 후기 250년간 핍박받던 영남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서 영남 남인이 모두 그렇듯이 판서급 이상 이렇다할 큰 벼슬살이는 못했지만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벌족임에 틀림이 없다.
류숭조(柳崇祖 1452(문종 2) ~ 1512(중종 7, 임신)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석헌(石軒). 시호는 문목(文穆).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의 증손. 지성(之盛)의 자. 세조 때 진사가 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 사유(師儒)에 뽑혔다. 이어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고 1501년(연산군 7)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서 공안상정청(貢案詳定廳)의 낭청(郎廳)이 되었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때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원주(原州)에 장배(杖配)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경연청시강관(經筵廳侍講官)․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특진하였고, 대사성(大司成)․공조참의(工曹參議)․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도학정치의 실현을 시도한 최초의 학자로 성균관(成均館)에 재직한 18년 동안 성리학에 전념했다. 역서(易書)․예기(禮記)․천문(天文)․역상(曆像)에도 두루 통달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으며, 경사(經史)에도 정통하여 경서를 언해(諺解)하였다. 저서에 『진일재집(眞一齋集)』『대학강목잠(大學綱目箴)』『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칠서언해(七書諺解)』등이 있다. ■참고문헌 : 中宗實錄․國朝榜目
류복립(柳復立) 1558(명종 13, 무오) ~1593선조 26, 계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 부제학(副提學) 윤덕(潤德)의 손자. 전주유씨(全州柳氏) 수곡(水谷) 입향조(入鄕祖) 성(城)의 자로 종숙 지(墀)에게 출계(出系). 외숙(外叔) 김성일(金誠一)에게 수학하고, 음보(蔭補)로 종부시주부(宗溥寺主簿)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외숙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성일의 막하에서 진주성(晋州城) 싸움에 참가했다. 1593년 4월 김성일이 병사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황진(黃進) 등과 함께 성을 지키다 왜적에게 성이 함락당하자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岐下水柳(柳熙杰)
류지(柳榰) 1626(인조 4, 병인) -~ 1701(숙종 27, 신사)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중오(重吾). 호는 괴애(乖厓). 복기(復起)의 손자. 증참판(增參判) 희잠(希潛)의 자. 종형 직(㮨)에게 수학했으며, 1646(인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상주교수(尙州敎授)에 임용되었으며,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刑曹)․예조(禮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결성형감(結城縣監)을 역임했다. 이후 10년간 향리에 있다가 1671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복직하여 단성현감(丹城縣監)․울진군수(蔚珍郡守)․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재직하며 척신(戚臣)을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외직으로 밀양부사(密陽府使)․능주목사(陵州牧使)․길주목사(吉州牧使) 등을 지냈는데 길주를 떠날 때는 고을민들이 백 리 밖까지 나와서 전송했다.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재직하다가 당쟁이 심해져서 벼슬에서 물러나 임동(臨東) 고천(高川)에서 정사(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정언으로 있을 때는 언관(言官)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저서로 『괴애집(乖厓集)』이 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岐下水柳(柳熙杰)
류직(柳稷) 1602년(선조 35, 임인) ~ 1662(현종 3, 임인)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정견(廷堅). 호는 백졸암(百拙庵). 복기(復起)의 손자. 우잠(友潛)의 자.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를 즐기며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연구에 힘썼다. 1635년에 일어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주장에 영남 800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서울까지 올라가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그의 유적(儒籍)을 삭제하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이후 그는 향리에 서재를 지어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을 걸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 양성에 심력을 바쳐, 문하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후일 부황(付黃)이 해제되었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원근의 선비들과 인근의 수령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고 공경하였으며, 저서에 『백졸암문집(百拙庵文集)이 있다. 보충 : 전주유씨보(全州柳氏譜)에는 이름의 한자가 ‘직(㮨)’으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 仁祖․孝宗實錄․岐下水柳(柳熙杰)
류정휘(柳挺輝) 1625(인조 3, 을축) ~ 1695(숙종 21, 을해)
조선 후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중겸(仲謙). 호는 공공재(空空齋). 복기(復起)의 증손. 숙(橚)의 자. 종형 직(㮨)에게 수학했으며, 1652년(효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중감(殿中監)을 거쳐 청하(淸河)․옥구(沃溝)․단성(丹城)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이어 기장현감(機張縣監)이 되고 숙종(肅宗) 즉위 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고부군수(古阜郡守)․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역임한 후 여주목사(驪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청렴결백했으며 치도(治道)를 행하여 업적을 쌓았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嶺南人物考․岐下水柳(柳熙杰)
류경시(柳敬時) 1666(현종 7. 병오) ~ 1737(영조 13, 정사) 亻政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흠약(欽若). 호는 함벽당(涵碧堂). 복기(復起)의 현손. 동휘(東輝)의 자. 이유장(李惟樟)․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복위를 계기로 실시된 별시(別試)에 유학(幼學)으로 급제하였다. 관은 셩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황해도사(黃海都事)를 역임하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는 병서를 연구하여 관군의 장수들에게 진법(陳法)을 가르쳤고, 173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김정(金亻政)․김시발(金時發)의 옥사를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국휼(國恤)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사직(司直) 이재(李縡)의 탄핵을 받았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 입록되었다. 풍산(豊山) 낙연서원(洛淵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함벽당집(涵碧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岐下水柳(柳熙杰)
류승현(柳升鉉) 1680(숙종 6, 경신) ~ 1746(영조 22, 병인)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 복기(復起)의 후손. 봉시(奉時)의 장자.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정랑(正郞)을 역임하다가 표연히 임동(臨東) 박곡(朴谷)으로 낙향해서 수년 동안 서책을 벗삼아 지냈다. 1729년(영조 5)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복직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종성부사(鐘城府使)․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했다. 1745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어 흉년의 극심함을 보고 상관에게 달려가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고 돌아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저서로 용와집(慵窩集)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
류관현(柳觀鉉) 1692(숙종 18, 임신) ~ 1764(영조 40, 갑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 복기(復起)의 후손. 봉시(奉時)의 자. 형 승현(升鉉)에게 수학하였으며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형 승현이 외직에 나갔다가 작고하자 벼슬을 버리고 하향하였다. 1753년 경성판관(京城判官)에 등용되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등을 역임하고 벼슬을 물러났다. 이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에 빠진 남정(男丁)들로부터 받는 세금과 무세(巫稅)로 바치는 포(布)를 감면해주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흉년에는 1,000여 석의 양곡을 풀어 기민(饑民)을 구제하였다. 유관현이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베푼 치적이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실려있으며, 저서로는 『양파집(陽坡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 安東鄕校誌․岐下水柳(柳熙杰)
류도원(柳道源) 1721(경종 1, 신축) ~ 1791(정종 15, 신해)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숙문(叔文). 호는 노애(蘆涯). 복기(復起)의 후손. 형조참의(刑曹參議) 관현(觀鉉)의 자로 승현(升鉉)에게 출계. 1711년(숙종 37)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주석학(注釋學)에 뛰어났다. 만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을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하고 물러났다.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고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저서로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考證)』『동헌집록(東獻輯錄)』『일경록(日警錄)』이 있고, 문집에 『노애집(蘆涯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岐下水柳(柳熙杰)
동 남인세력의 명문가 (1) ...무실 류씨
안동시 임동면 무실, 박실, 한들, 마재, 고래골, 그리고 예안 삼산 마을 일대에 세거하는 전주 류씨를 안동 일대에서는 ‘무실 류씨’ 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성인 풍산 류씨와는 전혀 다른 집안으로 낙남세력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의성 김씨, 고성 이씨, 재령 이씨 한양 조씨 등 안동 동쪽지방에서 사제․통혼관계를 통하여 영남 남인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다. 무실 류씨는 짧은 기간에 영남 7대 명문 (진성 이씨, 풍산 류씨, 의성 김씨, 전주 류씨, 재령 이씨, 여강 이씨, 인동 장씨)의 반열에 등장하게 된다.
전주 류씨 무실 마을 입향조는 柳城(1533-1560)이다. 류성은 임하면 내앞 의성 김씨 청계 金璡의 사위가 되어 영주 迂川에서 처향따라 무실에 정착하였으나 25세에 요절한다. 부인 의성김씨 또한 3년후 부군을 따라 단식하여 자결하니 고아가 된 어린 두 아들 복기․복립 형제는 외가에서 양육되어 진다.
임란을 맞아 기봉 류복기(1555-1617)는 외내 마을 근시제 金垓와 함께 창의하여 팔공산회맹과 화왕산성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묵계 류복립(1558-1593)은 종조부 윤덕의 사손으로 입후되었으나, 외숙인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자결하게 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안동 일대에 계거하는 전주 류씨는 모두 기봉 류복기의 후예들이다. 풍전 등화 같던 손세는 기봉 당대에 6子-16孫子로 번성하면서 과환과 학행이 이어지게 되는데 무실 류씨들의 성취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기봉과 그의 장자 도헌 류우잠(1575-1635)이다. 도헌 류우잠은 창석 이준, 경당 장흥효, 표은 김시온 등 당시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형제간 효우를 돈독히 하고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되니, 후손들은 그 성취를 ‘岐陶遺業’ 즉 岐峰과 陶軒의 遺業이라고 부른다.
全州 柳氏 (水谷派) 上系圖
柳濕-克剛 -克恕-汀 -濱 -敬孫-之盛-崇祖-應台-炯-瀾-仁榮-元立 涵-仁茂-亨立 -義孫-季潼-軾-潤德-墀-復立 -潤福 -潤弼 -潤善-城-復起 (무실 류씨) -復立 - 女 沈孝生 復起-友潛-橚-振輝-奉時-升鉉-道源-範休-鼎文-致好 (박실) -洛休-少文-致潤-章鎬 -觀鉉-通源-星休-晦文-致明-止鎬 -挺輝-昌時-信迪-長源-川休 -增輝 -益輝-相時-錫龜-正源-震休 (삼산 거주) -日休-器文-致馨-定鎭 -萬休-徽文 - 직 -학-東輝-敬時 -得潛 -知潛 -守潛 -宜潛 -希潛-榰
기봉의 후손에서 문과 10명, 사마 37명, 문집을 낸 인물이 112명으로 이들이 저술한 문적이 모두 151종 551권을 남겼으니, 이것은 퇴계 학문의 淵叢을 이루게 되었고, 조선 후기 도학과 예학의 대가가 배출되고 행실로 덕망있고 학문으로 이름있는 선비가 대를 이어 쏟아졌으니 ‘기도유업’ 이란 말이 생길만도 하다.
기봉의 손자 乖涯(괴애) 柳榰(류지, 1626-1701)는 경주부윤을, 증손 공공재 류정휘(1625-1695)는 목사를 지냈고, 함벽당 류경시(1666-1737)는 청백리로서 장령을, 용와 류승현(1680-1746), 양파 류관현(1692-1764) 형제는 각각 공조참의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모두 청백리로 이름이 있다. 예안 삼산 마을 출신으로 영조때 대사간을 지낸 삼산 류정원은 慈仁縣監과 通川郡守 재직시의 치적은 丁若鏞의 『牧民心書』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모범적인 관직생활을 한 인물이다. 퇴계학문의 적전을 이은 정재 류치명(1777-1861)은 병조참판을 지냈다.
학행으로는 도헌 류우잠(1575-1635), 그의 아들 백졸암 류직(1602-1662), 호곡 류범휴(1744-1823), 대야 류건휴(1768-1838), 호고와 류휘문(1773-1832), 수정재 류정문(1782-1839) 등이 사림에서 추앙을 받았고, 예학을 집대성 ‘상변통고’를 저술한 동암 류장원(1724-1796)은 대표적인 예학자이다.
무실 류씨들은 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등 모두 5명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입향조 이래 3대의 시제를 지내는 절차와 음복모습은 명문가 다운 저력을 보여준다.
한말 의병장 류시연을 비롯 파리장서운동의 주역 서파 柳必永, 서파의 아들 동산 柳寅植(1865-1928)은 협동학교를 주도한 선각자이며, 상해임정 국무령을 지낸 旦洲 柳林, 6.10만세운동 학생대표 류면희 등은 독립투사로 활동하였으며, 단주의 아들로 5.16을 주도한 류원식, 현세 인물로 류혁인 전 공보처장관, 여류시인 류안진 전서울대교수, 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류성걸도 이 집안이 배출한 인물이다.
무실 류씨는 우리 선김과는 많은 통혼관계가 있었다. 특히 수몰전 삼산 마을 무실 류씨들은 안동이나 예안으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앞 마을앞을 통과하여야 했기 때문에 지리적 위치도 통혼에 영향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안동지방에서 무실댁, 박실댁, 한들댁, 삼산댁, 동달댁 같은 택호들은 대부분이 무실 류씨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전라도 전주를 관향으로 하는 전주 류씨 일파가 안동 일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임란이후부터라고 볼때 그 짧은 기간에 그렇게 번성하게 된 저력은 무엇일까?
전주 류씨 시조 柳濕은 증 봉정대부 사헌부장령 완산백으로 5자(극강, 극서, 극수, 극제, 극거) 1서(심효생)가 문과에 급제하여 영달하게 되는데, 그의 터전과 묘소는 모두 전주에 있고 그 부인 전주 최씨에게는 三韓國大夫人이란 직첩이 내려졌다. 전라도에 살았어야할 전주 류씨가 영남에 입향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3세 柳濱의 둘째 아들로 세종조 예조참판을 지낸 4세 柳義孫이 있었다. 류의손의 증손자 柳潤善(1500-1557)이 서울 묵사동에 세거하다, 영주군수로 재직중이던 형 柳潤德을 따라 영주로 낙남하여 영주 거주 반남 박씨 司直 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영주 汚川에 우거했고, 그 아들 柳城이 안동 내앞 거주 청계 김진의 사위가 됨으로써 그때부터 무실 사람이 된 것이다. 즉 무실 류씨는 내앞 의성 김씨들의 외손이 되어 인근 무실에 정착하게 되고 그 후손들이 박실, 한들, 마재 고래골, 동달, 삼산 등으로 이거해 나감으로써 형성된 동족부락이다..
이에 훨씬 앞서 전주 류씨는 묘소 때문에 안동과 영주에 각각 연고가 있었다. 즉 녹전면 범바위 마을에 있는 2세 柳克恕의 묘와 문수면 승문리에 있는 3세 柳濱의 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속칭 ‘범바위’ 마을에 있는 보문각 직제학 柳克恕의 묘는 안동지방에서 보기 드문 여말선초의 형식인 下方上圓墳으로 석단으로 治葬되어 있다. 이 묘터에 얽힌 내력은 다음과 같다.
류극서의 아들 영흥부사 류빈은 태종 이방원과 동방급제하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터를 구하기 위하여 산중을 돌아다니던 중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한다. 산중 무인지경에서 호랑이를 만나니 진퇴유곡이라 큰 맘먹고 호랑이에게 다가서며 “ 나는 아버지 묘지를 구하러 다니는 길인데, 길을 비키던지 잡아먹던지 택일하라”하고 소리치니 호랑이는 답답하다는 듯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어서 이를 이상히 여겨 호랑이 입속을 들여다 보니 비녀가 목에 걸려 있지 않은가? 손을 들이밀어 비녀를 빼어주니 호랑이는 꼬리를 치며 감사하다는 뜻으로 그를 등에 태워 하룻만에 이곳 안동 녹전 죽송동까지 와서 범바위 산소를 잡았다는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전라도에 있어야 할 묘소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안동시 녹전면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믿을 수 밖에.....
한편 범바위 묘터를 잡고, 태종의 등극에 많은 공을 세운 3세 영흥부사 柳濱은 졸후에 왕명으로 능이 만들어졌으니,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있는 ‘鍾陵’은 바로 그 영흥대도호부사 류빈의 묘이다.
류빈의 아들 4세 류의손은 세종때 집현전 직제학으로 봉직하다 만년에 전주로 낙향하여 유배지 제주도에서 졸하였고, 5세 류계동, 6세 류식까지는 서울에 거주하다 7세 류윤선이 영주로 낙남함으로써 7세 류윤선의 묘는 3세 류빈의 묘 근처 문수면 승문리에 있다. 전주 류씨가 안동에서 번성하고 현달하게 된 것이 혹여 2세조, 3세조, 7세조의 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안동 임동면, 예안면 일대에는 무실종택, 기양서당, 의성김씨정려각, 괴애정, 화림정, 만령초당, 근암정, 양파구려, 삼가정, 삼산종택, 호고와, 만우정, 근암고택, 수애당 등 무실 류씨들의 고택 정자 등 문화유적이 즐비하였으나, 임하댐 건설로 수몰이 되자 일부 고지대로 이건하기도 하였지만,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로 집단 이주하여 문화마을 ‘水柳寓鄕’ 을 가꾸며 수몰 후에도 문중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무실 류씨는 조선 후기 250년간 핍박받던 영남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서 영남 남인이 모두 그렇듯이 판서급 이상 이렇다할 큰 벼슬살이는 못했지만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벌족임에 틀림이 없다.
류숭조(柳崇祖 1452(문종 2) ~ 1512(중종 7, 임신)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석헌(石軒). 시호는 문목(文穆).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의 증손. 지성(之盛)의 자. 세조 때 진사가 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 사유(師儒)에 뽑혔다. 이어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고 1501년(연산군 7)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서 공안상정청(貢案詳定廳)의 낭청(郎廳)이 되었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때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원주(原州)에 장배(杖配)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경연청시강관(經筵廳侍講官)․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특진하였고, 대사성(大司成)․공조참의(工曹參議)․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도학정치의 실현을 시도한 최초의 학자로 성균관(成均館)에 재직한 18년 동안 성리학에 전념했다. 역서(易書)․예기(禮記)․천문(天文)․역상(曆像)에도 두루 통달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으며, 경사(經史)에도 정통하여 경서를 언해(諺解)하였다. 저서에 『진일재집(眞一齋集)』『대학강목잠(大學綱目箴)』『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칠서언해(七書諺解)』등이 있다. ■참고문헌 : 中宗實錄․國朝榜目
류복립(柳復立) 1558(명종 13, 무오) ~1593선조 26, 계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 부제학(副提學) 윤덕(潤德)의 손자. 전주유씨(全州柳氏) 수곡(水谷) 입향조(入鄕祖) 성(城)의 자로 종숙 지(墀)에게 출계(出系). 외숙(外叔) 김성일(金誠一)에게 수학하고, 음보(蔭補)로 종부시주부(宗溥寺主簿)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외숙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성일의 막하에서 진주성(晋州城) 싸움에 참가했다. 1593년 4월 김성일이 병사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황진(黃進) 등과 함께 성을 지키다 왜적에게 성이 함락당하자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岐下水柳(柳熙杰)
류지(柳榰) 1626(인조 4, 병인) -~ 1701(숙종 27, 신사)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중오(重吾). 호는 괴애(乖厓). 복기(復起)의 손자. 증참판(增參判) 희잠(希潛)의 자. 종형 직(㮨)에게 수학했으며, 1646(인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상주교수(尙州敎授)에 임용되었으며,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刑曹)․예조(禮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결성형감(結城縣監)을 역임했다. 이후 10년간 향리에 있다가 1671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복직하여 단성현감(丹城縣監)․울진군수(蔚珍郡守)․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재직하며 척신(戚臣)을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외직으로 밀양부사(密陽府使)․능주목사(陵州牧使)․길주목사(吉州牧使) 등을 지냈는데 길주를 떠날 때는 고을민들이 백 리 밖까지 나와서 전송했다.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재직하다가 당쟁이 심해져서 벼슬에서 물러나 임동(臨東) 고천(高川)에서 정사(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정언으로 있을 때는 언관(言官)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저서로 『괴애집(乖厓集)』이 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岐下水柳(柳熙杰)
류직(柳稷) 1602년(선조 35, 임인) ~ 1662(현종 3, 임인)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정견(廷堅). 호는 백졸암(百拙庵). 복기(復起)의 손자. 우잠(友潛)의 자.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를 즐기며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연구에 힘썼다. 1635년에 일어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주장에 영남 800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서울까지 올라가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그의 유적(儒籍)을 삭제하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이후 그는 향리에 서재를 지어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을 걸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 양성에 심력을 바쳐, 문하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후일 부황(付黃)이 해제되었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원근의 선비들과 인근의 수령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고 공경하였으며, 저서에 『백졸암문집(百拙庵文集)이 있다. 보충 : 전주유씨보(全州柳氏譜)에는 이름의 한자가 ‘직(㮨)’으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 仁祖․孝宗實錄․岐下水柳(柳熙杰)
류정휘(柳挺輝) 1625(인조 3, 을축) ~ 1695(숙종 21, 을해)
조선 후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중겸(仲謙). 호는 공공재(空空齋). 복기(復起)의 증손. 숙(橚)의 자. 종형 직(㮨)에게 수학했으며, 1652년(효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중감(殿中監)을 거쳐 청하(淸河)․옥구(沃溝)․단성(丹城)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이어 기장현감(機張縣監)이 되고 숙종(肅宗) 즉위 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고부군수(古阜郡守)․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역임한 후 여주목사(驪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청렴결백했으며 치도(治道)를 행하여 업적을 쌓았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嶺南人物考․岐下水柳(柳熙杰)
류경시(柳敬時) 1666(현종 7. 병오) ~ 1737(영조 13, 정사) 亻政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흠약(欽若). 호는 함벽당(涵碧堂). 복기(復起)의 현손. 동휘(東輝)의 자. 이유장(李惟樟)․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복위를 계기로 실시된 별시(別試)에 유학(幼學)으로 급제하였다. 관은 셩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황해도사(黃海都事)를 역임하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는 병서를 연구하여 관군의 장수들에게 진법(陳法)을 가르쳤고, 173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김정(金亻政)․김시발(金時發)의 옥사를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국휼(國恤)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사직(司直) 이재(李縡)의 탄핵을 받았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 입록되었다. 풍산(豊山) 낙연서원(洛淵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함벽당집(涵碧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岐下水柳(柳熙杰)
류승현(柳升鉉) 1680(숙종 6, 경신) ~ 1746(영조 22, 병인)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 복기(復起)의 후손. 봉시(奉時)의 장자.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정랑(正郞)을 역임하다가 표연히 임동(臨東) 박곡(朴谷)으로 낙향해서 수년 동안 서책을 벗삼아 지냈다. 1729년(영조 5)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복직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종성부사(鐘城府使)․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했다. 1745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어 흉년의 극심함을 보고 상관에게 달려가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고 돌아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저서로 용와집(慵窩集)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
류관현(柳觀鉉) 1692(숙종 18, 임신) ~ 1764(영조 40, 갑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 복기(復起)의 후손. 봉시(奉時)의 자. 형 승현(升鉉)에게 수학하였으며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형 승현이 외직에 나갔다가 작고하자 벼슬을 버리고 하향하였다. 1753년 경성판관(京城判官)에 등용되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등을 역임하고 벼슬을 물러났다. 이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에 빠진 남정(男丁)들로부터 받는 세금과 무세(巫稅)로 바치는 포(布)를 감면해주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흉년에는 1,000여 석의 양곡을 풀어 기민(饑民)을 구제하였다. 유관현이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베푼 치적이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실려있으며, 저서로는 『양파집(陽坡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 安東鄕校誌․岐下水柳(柳熙杰)
류도원(柳道源) 1721(경종 1, 신축) ~ 1791(정종 15, 신해)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숙문(叔文). 호는 노애(蘆涯). 복기(復起)의 후손. 형조참의(刑曹參議) 관현(觀鉉)의 자로 승현(升鉉)에게 출계. 1711년(숙종 37)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주석학(注釋學)에 뛰어났다. 만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을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하고 물러났다.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고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저서로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考證)』『동헌집록(東獻輯錄)』『일경록(日警錄)』이 있고, 문집에 『노애집(蘆涯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岐下水柳(柳熙杰)
류정원(柳正源) 1703(숙종 29, 계미) ~ 1761(영조 37, 신사)
조선 후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복기(復起)의 후손. 전주유씨(全州柳氏) 예안(禮安) 입향조(入鄕祖) 석구(錫龜)의 자로 예안(禮安) 삼산(三山)에서 태어났다.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73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0여 년을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749년(영조 25)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어어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었다. 175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수찬(修撰) 등을 역임하고 1761년(영조 37)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외직으로 자인현감(慈仁縣監)과 통천군수(通川郡守) 재직시의 치적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그의 박학다식함을 알고 왕세자를 가르치라고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제수했을 정도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天文)․지지(地志)․음양(陰陽)․복서(卜筮)․주수(籌數)를 비롯하여 병률(兵律)․도학(道學)에도 정통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에 밝아 『역해참고(易解參攷)』10권과 『하락지요(河洛指要)』1편을 지었는데 당시 문학하는 선비로서 비견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는 평을 받았다. 문집에 『삼산문집(三山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岐下水柳(柳熙杰)
류정문(柳鼎文) 1782(정조 6, 임인) ~ 1839(헌종 5, 기해)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이중(耳中). 호는 수정재(壽靜齋). 복기(復起)의 후손. 범휴(範休)의 자. 조부 도원(道源)과 종조부 장원(長源)에게 수학하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사사했다. 1838년(순조 4)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저서에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수정재집(壽靜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純祖實錄․岐下水柳(柳熙杰)
류치명(柳致明) 1777(정조 1, 정유) ~ 1861(철종 12, 신유)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형조참의(刑曹參議) 관현(觀鉉)의 증손. 진사 회문(晦文)의 자로 임동(臨東) 수곡(水谷)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종증조부 장원(長源)에게 수학하고 다시 남한조(南漢朝)에게서 학업을 닦았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1815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151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등을 거쳐 1827년 호남장시도사(湖南掌試都事)로 나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1831년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고 이듬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어 교리(校理)․수찬(修撰])을 4,5차례 지냈다. 1835년(현종 원년) 부승지(副承旨)에 올랐으며,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을 지내고 초산군수(楚山郡守)에 부임했다. 그때 황해․평안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만(萬)여금을 풀어 구휼하였으며 강석(講席)을 베풀어 선비들을 교학하여 좋은 치적을 남겼다. 1853년(철종 4)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의금부부총관(義禁府副摠管)․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러 1855년(철종 6)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를 추존하도록 소청하다가 대사간(大司諫)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평안도 상원(祥原)에 유배 도중 변경되어 전라도 신안군(新安郡)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 그해 11월 석방되어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문인들이 뇌암(雷巖)에 세운 만우정(晩愚亭 : 臨河面 思義洞 所在)에서 학자들을 지도하여, 사후에 상여의 줄을 잡은 선비가 900명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독서쇄어(讀書瑣語)』『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외에 50여 권이 있다. ■참고문헌 : 純祖․憲宗․哲宗實錄․岐下水柳(柳熙杰)
[출처] 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 (1) ...무실 류씨 |작성자 풀향
류정원(柳正源) 1703(숙종 29, 계미) ~ 1761(영조 37, 신사)
조선 후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복기(復起)의 후손. 전주유씨(全州柳氏) 예안(禮安) 입향조(入鄕祖) 석구(錫龜)의 자로 예안(禮安) 삼산(三山)에서 태어났다.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73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0여 년을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749년(영조 25)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어어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었다. 175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수찬(修撰) 등을 역임하고 1761년(영조 37)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외직으로 자인현감(慈仁縣監)과 통천군수(通川郡守) 재직시의 치적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그의 박학다식함을 알고 왕세자를 가르치라고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제수했을 정도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天文)․지지(地志)․음양(陰陽)․복서(卜筮)․주수(籌數)를 비롯하여 병률(兵律)․도학(道學)에도 정통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에 밝아 『역해참고(易解參攷)』10권과 『하락지요(河洛指要)』1편을 지었는데 당시 문학하는 선비로서 비견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는 평을 받았다. 문집에 『삼산문집(三山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岐下水柳(柳熙杰)
류정문(柳鼎文) 1782(정조 6, 임인) ~ 1839(헌종 5, 기해)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이중(耳中). 호는 수정재(壽靜齋). 복기(復起)의 후손. 범휴(範休)의 자. 조부 도원(道源)과 종조부 장원(長源)에게 수학하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사사했다. 1838년(순조 4)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저서에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수정재집(壽靜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純祖實錄․岐下水柳(柳熙杰)
류치명(柳致明) 1777(정조 1, 정유) ~ 1861(철종 12, 신유)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형조참의(刑曹參議) 관현(觀鉉)의 증손. 진사 회문(晦文)의 자로 임동(臨東) 수곡(水谷)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종증조부 장원(長源)에게 수학하고 다시 남한조(南漢朝)에게서 학업을 닦았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1815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151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등을 거쳐 1827년 호남장시도사(湖南掌試都事)로 나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1831년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고 이듬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어 교리(校理)․수찬(修撰])을 4,5차례 지냈다. 1835년(현종 원년) 부승지(副承旨)에 올랐으며,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을 지내고 초산군수(楚山郡守)에 부임했다. 그때 황해․평안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만(萬)여금을 풀어 구휼하였으며 강석(講席)을 베풀어 선비들을 교학하여 좋은 치적을 남겼다. 1853년(철종 4)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의금부부총관(義禁府副摠管)․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러 1855년(철종 6)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를 추존하도록 소청하다가 대사간(大司諫)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평안도 상원(祥原)에 유배 도중 변경되어 전라도 신안군(新安郡)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 그해 11월 석방되어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문인들이 뇌암(雷巖)에 세운 만우정(晩愚亭 : 臨河面 思義洞 所在)에서 학자들을 지도하여, 사후에 상여의 줄을 잡은 선비가 900명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독서쇄어(讀書瑣語)』『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외에 50여 권이 있다. ■참고문헌 : 純祖․憲宗․哲宗實錄․岐下水柳(柳熙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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