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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21~26절/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라.
오늘 본문 21절에 ‘옛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 의 문제는 십계명 중의 여섯 번째 계명인데 마태복음 5장 20절에 있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지와 열심을 동원하여 참으로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저들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의가 더 나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차이점, 그들과 다름을 예로 든 것이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22절에 ‘분노를 품으면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제를 ‘살인이라는 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결부시켜 분노가 있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틀림이 없지만 이 둘을 단순 비교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율법을 대표하는 십계명에 보면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다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까지가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에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라고 가르칩니다. 십계명, 혹은 율법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가 계명을 이해하자면, 사람이란 그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묶여 있는 것은, ‘네 이웃이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약탈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으로 부터 채우고, 우리의 이웃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채우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필요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의 이웃은 오히려 사랑의 대상인데, 그 이유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하게 채워지기 때문이다’ 하고 예수님은 가르치는 것입니다.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필요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고 우리 이웃으로부터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해하려고 하거나 약탈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공급해 주시는 증거로 이해해라. 하나님이 나만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 내 이웃에게 주시는 것, 그 충만함과 넉넉함에 대하여 서로 감사하며. 격려하며, 위로하며 살아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잘못 이해했던 살인이라는 행위에 관한 것이 율법 전체의 목적이었다면, 분노는 ‘결핍에서 오는 비명이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인이라는 행위가 ‘내 필요를 이웃에게서 채워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없는 자의 결핍, 공포의 비명이라면, 분노 역시 내가 내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 없고, 내 이웃이 가진 어떤 것들을 빼앗아 채울 수 없는 한계와 절망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서두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노가 살인의 뿌리이므로 살인만 안하면 전부가 아니라,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면 결국 살인의 씨앗을 품고 있으니까? 잘못이다. 살인하지 말라가 분노를 품지 말라로 가는 것입니다. 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 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이러한 의가 덧입혀 지기 위해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살인을 하지 말라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분노하지 말라, 욕하지 말라 미련하다, 어리 섞다 말하지 말라` 는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하는 또 다른 명령으로만 요구된다면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와 마찬가지로 분노에서도 우리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살인이 하나님으로부터 필요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듯이, 분노도 스스로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진실에 대한 사실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우리의 분노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공포라는 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 어느 곳에서나 만납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도 우리 자녀가 열심이 공부하여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한다고 꼭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단지 최악의 경우는 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데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우리의 자녀를 대신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이 공부 안하거나 못하는데 대하여 퍼뜨리는 분노입니다. 그 분노 속에는 자신의 감정이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대로 놔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알기 때문에 더욱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부모가 자녀에게 훌륭해지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거짓말로 협박을 합니다. ‘너 그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이것이 예수를 믿는 부모의 입에서도 자주 나오는 비명이며, 분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존재와 삶에 있어서도 답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이웃의 결함이나 혹은 실수가 나와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쳐줄 방법이 없고 만회할 만한 실력도 갖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저지르는 실수라는 것이 우유를 엎는다든지 장난감을 부서 뜨인다든지 하는 정도는 우리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우리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를 분통 터뜨리게 만듭니다. 거기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으로서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라고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소유한 자만,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고 고쳐주고 넘어가 줄 수 있습니다.우리가 인간으로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얼핏 생각할 때는 능력일 것 같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와 이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졌어도 우리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제어할 수 없고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용서같이 필요한 것이 없고, 사랑해 주는 것같이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세상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꿀 힘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 라는 기독교 신앙의 선포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성경의 선포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분통을 터뜨리며,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세상이 인간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약간 비겁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오늘 23절에 나오는 예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종교라는 것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물을 드림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고 또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이러한 정성을 드린다면 반드시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로 회피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으로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23~24절에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부터 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밖에는 없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25절에서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용서를 구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고, 꾸중을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용서를 구해라’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있을 때 뿐.`입니다. 답이 없는 사람은 용서를 구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 신앙의 다른 점을 오늘 말씀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성경 전체에서 얼마나 반복하여 아주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이유? 아마도 우리의 옛 본성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을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과 두려움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할까요?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외에는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요한일서 4장 7~8절에서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개념이 뭐냐고 물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사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세상에 없는 개념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실체이십니다.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만드시며, 사랑을 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소위 구원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누리고, 소유하며 받고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두려움 속에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가치 있게 느끼는 것만으로 그 영혼이 만족할 수없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생활하면서 언제나 거듭해서 경험하고 확인하는 것이 두렵고 떨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22절에서 보는 ‘분내는 자, 그리하여 누구를 멸시하여, 자존심을 위로하는 차원에 서 있는 것으로는 답이 되지 못한다.’ 는 예수님의 지적에 스스로를 비추어 봐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는 다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인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며 천국 간다는 말로 신앙고백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의 내용에 범위와 깊이를 자주 오해를 합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 이외에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 사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말씀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와 삶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아무런 실력이 없는 사실에 대하여, 가진 것이 없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공포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답이 없고 세상에 있는 무엇으로도 영혼의 필요를 채울 수가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세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할 수는 있어도, 세상은 우리를 돕지 못하고 해치지도 못합니다. 세상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된 이후에만 그 답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면 세상이 공격하고 시험하는 모든 것에 세상이 원하는 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격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에 불과하고 우리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여러분 산에 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아는 길이 나오면 말하지 않습니까? 살았다. 어떤 난관에 봉착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살았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과 존재의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살았다.’ 라는 것을 예수로 말미암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 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가지는 중요한 내용입니다.골로새서 3장 12~14절에 가시면 성경은 오늘 우리가 보는 살인하지 않는 것과 분노라는 것을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있어야 살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노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는 우리가 가진 자라는 것을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넉넉히 받을 수 있는 자가 되었으므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라입니다. 이건 가진 자만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가진 자와 다른 것입니다. 권세와 명예와 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분노를 터뜨리는 일 중에, 예를 들면 나라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릴 때가 있습니다. ‘좀 더 멋있는 나라, 좀 더 훌륭한 정치를 해라’ 라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라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좀 더 책임 있어라, 좀 더 진지해라, 좀 더 도덕성을 지켜라’ 이런 분노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전부 그렇게 함으로써 말하자면 남들보고 나 살기 편하게 하라 이것입니다. 이것은 살인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살인하지 말라가 내 필요를 상대방에서 빼앗아오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누구보고 정직해라, 책임 다하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내 필요와 내 안전을 누구에겐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에 어떤 윤리에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세상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세상이 가지는 어떤 강제권도 어떤 명분도 사람을 고쳐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그의 생애에 만나는 모든 사람의 필요에 응하십니다. 죄지은 자를 용서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병을 고치십니다. 위로하시고 죄인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십니다.
유일하게 한 부류, 바리새인에 대해서만은 진노하시고 저주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삶의 자세와 책임에 대해서 더 앞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이 인간이 필요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분통을 터뜨릴 때마다 ‘너만 잘하면 내가 편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문제를 해결하겠다.’ 라고 고함을 지르는 순간이라고 아셔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5~17절에서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가장 중요한 공통된 단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스도의 말씀, 주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의, 그들의 의와 비교할 수없는 다른 차원의 의는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다른 점입니다.그리고 반복해서 감사가 나옵니다. 15절도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절도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것은 무엇을 은혜로 얻는 자들의 반응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신자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죽은 다음의 보험 정도가 아니며, 종교라는 영역 내에서만 통용되는 무슨 그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떤 곳이며 인생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가를 아는데, 모든 것을 넉넉히 감수하여 눈으로 보이게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결된 자로써 살게 된 정체성, 우리 기독교 신앙적인 용어로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신앙고백의 특별함, 그 복된 것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신자 된 인생을 살아, 이기시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웃으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