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의 손길 보내고 싶었던 북한의 첫 사랑 탈북하여 편지를 보내보았다. 워낙 폐쇄되고 공포 속의 북한이기에 아무 소식이 없다. 이민복(대북풍선단장)
<땅 속의 종자가 문제인가요. 맘 속에 종자가 문제이지요.> 탈북하여 모스크바에서 북한에 보낸 편지이다. 편지 받을 분은 북한 주체농업 제강을 쓴 계형기 박사이다. 주체사상을 만든 이는 황장엽이라면 주체농법은 계형기인 것이다. 이 분은 나의 장인이 될 뻔한 분이기도 하다. 북한의 농업과학원 본원은 평양시 룡성구역 청계동에 있다. 북쪽 평성시로 가는 대로 왼쪽에 있으며 바로 오른쪽에는 국방과학원이 있다. 군국주의 북한에서 농업은 군사만큼 중요한 표징이다. <쌀은 곧 공산주의!>, <자동보총(AK47)+쌀=전쟁승리!>라고 김일성은 교시할 정도였다. 이렇게 중요한 농업은 <주체농법>이란 교과서대로 전국에서 일치하게 농사한다. 이 <주체 농법> 작성자 분에게 모스크바에서 보낸 편지 내용의 뜻은 이렇다. 북한 식량난 문제는 종자나 기후 탓이 아니라 맘 속의 종자 즉 내 것이 아닌 공산 농업 체계에 있다는 것이다. 계형기 박사 역시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리라 본다. 개인농 하는 중국의 성과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편지 보낸 그때는 1994년으로서 대량 아사 초시기였다. 한편 계형기 박사는 깜짝 놀라기도 하였을 것이다. 자신 맏딸을 좋아했던 놈이 사라졌는데 갑자기 모스크바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본명 아닌 가명으로 보냈지만 글씨체와 느낌으로 누군지 알 것이다. 옛적 사상대로 반동 놈의 새끼라고 욕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난 놈(선견지명)이라고 속으로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저의 연구소에 직접 방문하였던 한국 농촌경제 연구원 북한팀장 김운근 박사의 증언으로 확실시된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 정책 일환으로 남북 교류시(2000년 초반) <슈퍼 옥수수> 김순권 박사와 함께 갔었다고 한다. 마중 나온 연구소 직원에게 무엄하게도 <여기 이민복 씨가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리낌없이 있었다고 답하더라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반역자 놈이라고 격양되어 욕하던가 아니면 모르쇠하였을 것이다. 이런 북한 엘리트층의 심정을 잘 헤아리기에 그들이 말 못하는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듯 대북 전단 내용을 적어 보낸다. 또 대북 전단에는 북한에서 쓰던 나의 이름과 고향, 직장명, 탈북 동기와 경위, 남한 손전화기(핸드폰) 번호와 이메일을 그대로 적어 보낸다. 비록 남북으로 헤어져 있지만 신뢰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옥 안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으니 어서 빨리 밖에서 문 열쇠를 까주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소망은 엘리트일수록 높다고 확신한다. * 농업의 황장엽, 계형기 박사와 얽힌 사연 앞서 말했지만 이분의 맏딸 계정혜와 첫사랑했던 나였기에 장인이 될 뻔한 분이다. 계정혜는 YTN2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의 윤지연 아나운서와 신통히도 닮았다. 얼굴뿐 아니라 체형도 환생하듯 그렇게도 닮았다. 계형기와 그 딸은 나와 한 직장인 농업 과학원 강냉이 연구소에 있었다. 계형기 박사는 6연구실(재배실)에 그 딸 계정혜는 7연구실(실험실)에 나는 8연구실(내병성 육종)에 있었던 것이다. 계정혜는 직장의 김 부자 생일인 4·15와 2·16 축전(예술행사)를 도맡아 하였다. 그녀의 뛰어난 예능과 미모로 인하여 2·8 영화 촬영소에서 배우감으로 데려가려 하였으나 성분에 걸려 못 갔다. 부모가 옛 부자집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뭇 총각들이 연애를 걸 엄두도 못낼 정도의 계정혜였지만 나는 감히 도전하여 쟁취하였다. 나 역시 만만치 않은 <인기> 즉 가장 일찍 연구사로 되었고 청년비서(사로청위원장) 경력과 군(郡) 씨름에서 1등, 기술 혁신을 33개나 한 <유명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목 한 번 못 잡아보고 저절로 물러나고 말았다. 사랑이 한창 무르익을 때 저의 부친의 <간첩 혐의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애인이었으며 그를 위해 희생적으로 물러난 것이다. 그녀 역시 그것이 애달팠는지 나의 집 밖까지 찾아왔으나 응하지 않았다. 못 살아도 만나나 줄 걸 하는 아쉬움과 아픔이 평생으로 남는다. 차후 운명이 달라져 각각 다른 배우자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신기한 일치가 있었다. 당시 나는 연구소를 떠나 먼 북방 현지 연구 사업을 하여 그녀의 정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의 결혼식 날 사진사에게 점심 먹고 가라고 하니 그럴 시간 없이 다음 결혼식 사진을 찍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계정혜 결혼식이라는 것이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질투난 것처럼 경쟁하듯 같은 날 결혼식한 것이다. (갑자기 갑순이와 갑돌이 노래가 상기된다) 탈북하여 좀 도와줄 일이 없을까 편지를 보내보았다. 연락이 되면 여기 돈 10만 원만 보내도 100개월 월급이 된다. 돈보다도 소식만 알아도 큰 힘이 되고 사람 사는 멋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워낙 폐쇄되고 공포 속의 북한이기에 아무런 소식이 없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추억 속에 돕고 싶은 심정은 자연스럽게 나를 통일 운동에 끌어가고 있는 주 요인의 하나이다. 기묘한 인연처럼 내가 보낸 삐라를 보고 소식 알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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