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25년 2월 7일. 금요일.
어제에 이어 오늘 오후에도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쉼터로 나갔다.
눈이 허옇게 쌓인 곳도 있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는 질퍽거리는 물기가 잔뜩이라서
나는 물기가 적은 곳으로 발길을 옮기며 석촌호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돌았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가락이 무척이나 시려워서 손가락을 조물락거리고, 서로 맞부딛치고, 팔을 위로 쳐들어서 후이후이 내두르면서 걸어야 했다. 추우니까 잔뜩 굽혀진 허리는 통증이 더 심해서 걷는 것조차도 벅차서 욕이 터질 것 같다.
그래도 억지로 참으면서 걸어서 움적거려야 했다. 걷기운동은 늙은이 운동이 되기에.
나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털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입마개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장갑을 꼈고, 양말을 신었고, 물기가 스며들지 않는 운동화를 신고도 추워서 덜덜거린다.
1636년 겨울철의 병자호란을 떠올리곤 한다.
석촌호수 중간 도로변에 있는 삼전도비 비각을 슬쩍 올려다보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석촌호수 산책로 한 바퀴를 겨우 돌았다.
손가락이 시려워서 아프기도 하고, 은근히 지쳤다.
귀가하여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로 들어섰고, 내 방으로 들어온 뒤 나는 요 위에 누워서 눈 감았다.
아내가 "저녁밥 자시세요"고 깨우는 바람에 나는 낮잠을 끝냈다.
너무나도 지쳐서 눈이 저절로 감기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잡소리가 마구 들렸다.
추운 겨울이 어서 지나갔으면 싶다.
2.
이렇게 추운 날에 석촌호수를 돌면서 '그때 그 당시'를 떠올린다.
석촌호수 중간 쯤 되는 도로변 공터에는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다.
병자년 1936년 음12월 8일 ~ 정축년 1월 30일(양력 1637년 1월 3일 ~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조 압록강을 넘어서
경기도 남한산성을 급습, 침략한 청나라(청 숭덕원년)와의 전투.
년간 가장 추운 한겨울에 치열한 전쟁을 치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
당시의 겨울옷은 어떠했을까? 당시의 신발은 무엇일까? 당시의 장갑은 무엇일까? 당시에 먹고 마실 수 있는 전투식량은 있었을까? 어디에서 잠자고, 쉴까? 부상당하고 다치면 어디에서 치료받을까? 죽은 시체는 어떻게 장사 지내?
정말로 비참하고 처절한 고통과 억울함, 죽음만이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검색한다.
후금에서 이름을 바꾼 청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발발 참조).
후금이 정묘호란의 강화 조약 내용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이 이를 거부했고, 청 태종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확실히 무릎 꿇리기 위해 재침략을 결정했다. 압록강을 건넌 선봉대는 의주 방어를 맡은 김자점1) 이 임무를 소홀히 한 틈을 타 맹렬히 남하해 한성에 육박했다. 그러자 인조는 김상헌 ・ 최명길 등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의병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청나라 20만 대군이 에워싼 남한산성에 지원군이 접근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인조는 1637년 1월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항복 의식을 치렀다.
침략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끌고 가고, 이들과 함께 척화파2) 대신 홍익한 ・ 윤집 ・ 오달제와 수만 명의 백성을 잡아 갔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됐다.
삼전도비 정면 모습. 삼전도비의 원명은 대청황제공덕비.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17년(1639)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거짓 표현을 써
한강변 삼밭나루터에 세워졌던 치욕을 간직하고 있다.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을 받아 낸 청 태종이 삼전도(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사적 제 101호
석촌호수 중간 지점 산책로 위 도로변 한 구석에 위치한 비각 속의 삼전도비(三田渡碑)
* 원래 위치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로 인조가 항복의 예를 올렸던 수항단이 세워졌던 자리로 기록돼 있다.
이는 현 롯데월드 바로 밑 석촌호수 서호의 북동쪽 부분 물 속으로, 그 자리에 다시 비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최초 위치에서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문화재청의 조건부 승인이 이뤄졌다.
이전한 삼전도비. 나무 뒷편 바로 아래는 석촌호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비석.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만주어로 '대청국의 성스러운 한의 공덕비(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ᡵᡩᡝᠮᡠᡳ ᠪᡝᡳ)',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청나라 황제가 청태종 홍타이지이므로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라고도 한다.
인조 15년(1637), 청나라는 조선을 기습 공격하며, 결국 조선 왕 인조가 포위당해 전쟁은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자세한 전개는 병자호란 문서 참조.
1637년 양력 2월 24일,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조선 왕 인조는 청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로 항복(삼전도의 굴욕)한 뒤에야 가까스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후 청나라는 병자호란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마부대를 보내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경기도 광주부 중대면 송파리,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자리인 삼전도(三田渡)에 이 비석을 세웠다.
환향녀(還鄕女) :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정절을 잃은 후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을 이르던 말
아쉽게도 현실은 '화냥년'이라고 불렀다.
정유재란이나 병자호란 때 적들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가리켜 화낭과 비슷한 발음의 환향녀(還鄕女)로 빗대 쓴 듯하다. 이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오랑캐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하여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결혼한 여성의 경우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인조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환향녀(還鄕女)란 이유로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씨조선 3대 '쪼다'왕
1)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
2)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
3)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 빌미를 제공한 고종(제27대 순조의 아비)
* 조선조 한국정치사(전쟁사 등)를 깊게 공부하다보면 정말로 짜증이 난다.
치욕의 삼전도 나루터
서울 송파구 잠실 삼전도 위치
잠실은 섬이었으며, 석촌호수가 한강 삼전나루와 송파나루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나마 송파구의 유래가 된 송파나루는 알지만 송파나루의 원조 삼전나루는 알지 못한다.
삼전도는 부끄러운 과거사의 장소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왜 삼전나루터 푯돌과 삼전도비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할까?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의 2008년 고증 결과 삼전도비의 원위치는 지금 자리에서 30여m 아래 서호 물 속인 것으로 조사돼,
불가피하게 비석을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진과 자료는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것이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인다.
2025. 2. 7.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