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길도의 끝 마을인 보옥마을 선착장에서 추자도 앞바다를 향해 어선이 출항하고 있다. 멀리 추자도가 아스라이 보이고, 그 가운데 큰 상선이 지나가고 있다.
완도에서 보길도로 가는 길은 두 곳이다. 하나는 해남군 땅끝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완도 화흥포항에서 여객선을 타는 것이다. 배는 1시간~1시간 20분이면 소안항과 노화항등을 거쳐 보길도 청별항에 도착한다.
이 일대는 노화도·보길도·횡간도·당사도 등의 섬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룬다. 크고 작은 섬들이 좁은 간격을 이루며 덕지덕지 자라잡고 있다. 그만큼 이 일대의 바닷물은 급하다. 바닷물은 바위와 부딪치며 힘을 얻는다.
남지나해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해류와 중국 동해에서 내려오는 해수띠가 추자도 주변을 중심으로 소안군도의섬을 때리고 있다. 1770년 12월 제주도에서 강진 남포로 오다가 난파당해 8일 동안 일본으로 표류했다가 다시 떠밀려 온 장한철 일행 29명은 보길도와 소안도 인근에 도착했으나 "이제 죽었구나"를 연발한다.
한 선원은 장한철에게 소리친다. "저 해로는 모두 난서(亂嶼)·험안(險岸)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은 날도 배가 부서져 빠집니다. 그곳의 바윗돌은 마치 칼날같고 파도가 몹시 험악합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바다를 뒤집고 성난파도는 하늘에 솟구치는데, 어떻게 죽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장한철 일행은 인근 청산도로 떠밀려가 8명만 살아남고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제주대학교 노홍길교수는 '제주해협의 해상과 기상'의 논문에서 추자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남서해안 해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적도해역에서 만들어진 흑조해류(黑潮海流)로부터 황해원류수와 중국대륙 연안이나 우리나라 남해안, 황해등에서 만들어진 중국대륙연안수, 한국남해연안수, 황해저층냉수등의 여러 가지 다른 수괴(水槐)가 분포해 있고 이들 수괴들은 분포범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게 아니라 계절이나 해(年) 또는 지역에 따라 그 분포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해역의 해황을 획일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 순수한 자연환경에 의지해 살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이 이 일대 바다에서 얼마나 힘든 삶을 영위했는지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말이다. 보길도는 추자도와 가장 가까운 유인도이다. 직선거리로 18㎞다.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 지난달 30일 오전 보길면 보옥마을. 이 마을은 보길도의 최남단 지역이다.
흐린 날씨였지만 남쪽으로 수평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맑은 날은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곳이다. 추자도는 바다 중간에 그림처럼 떠 있었다. 추자도와 가장 가까운 보옥마을은 추자도와 교류도 가장 많은 곳이었다. 목재가 땔감이던 시절, 추자도 사람들은 땔감을 찾아 보길도로 넘어왔다.
▲ 보길도 보옥마을 박윤태 옹.
산이 많은 보길도는 나무 천지였다. 이렇게 볼 때 추자도 사람들은 땔감은 주로 가까운 섬에서 구하고, 식량이나 기타 김발에 사용할 대나무등은 강진읍 남포로 나와 구해갔던 것으로 보인다.보옥마을의 최고 어르신인 박윤태옹(89)을 만났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박옹은 자신을 '추자도를 보고 자라고 추자도를 보며 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박옹에 따르면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풍선에 나무를 싣고 바다를 건너오는 추자도 사람들이 많았다. 나무 가격은 10전~15전. 지천에 널려 있는 나무가 보길도 사람들에게는 큰 재산이었다.
박옹은 "나무를 땔 때는 보옥리와 추자도가 한 가족처럼 지냈다"고 말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강진의 남포주민들과 추자도 사람들은 활발한 교류를 했다. 남포마을에는 추자도에서 시집온 사람들이 여럿이고, 추자도에 가면 강진 남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과거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섬과 육지의 교류는 오히려 지금보다 많았던 것이다. 지난달에 찾은 추자도는 '추자멸젓'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보옥리에서는 마른멸치를 만들고 있었다. 자잘한 멸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냈다. 그것을 대바구니에 말리면 마른 멸치가 됐다.
두 곳의 차이가 분명했다. 보옥리 주민 김임철(73)씨는 "추자는 멸로 젓갈을 담고 보길도는 마른멸치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요즘에는 액젓이 유행해서 보길도에서도 액젓을 담근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보옥리와 추자도 사이 바다가 18㎞ 정도에 불과하지만 추자도에서 잡히는 멸과 보길도 인근에서 잡히는 멸의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박윤태 옹은 "추자 멸이 훨씬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산물을 팔기로 말하면 경쟁지역인 추자도를 극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멸젖장수 경력이 50년이 넘은 강진읍 남포리 한기례 할머니(78)는 추자멸젖이 맛있는 이유에 대해 "추자멸은 물속에서 똥을 싼다고 한다.
멸이 한참 설칠때 추자도에서 물속을 들여다 보면 멸치가 싸놓은 똥들이 붉으스럼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한다. 물속에서 똥을 싸버리고 새 수초를 먹은 멸을 막 잡아 올려 젖동우에 담그면 말그대로 맛 좋은 추자멸젖이 된다"고 했다.
정말 똥을 싸서 맛있는지, 아니면 수많은 해류가 교차하면서 형성된 풍부한 먹이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추자멸에 대한 칭찬은 육지와 섬을 넘나든다.
▲ 보옥리 마을에서 주민들이 마른멸치를 만들고 있다.
보길도와 추자도 뱃길이 쉬웠을 리는 없다. 박옹은 "멀쩡한 하늘을 보고 나무를 실고 배에 올랐던 사람들이 중간에서 갑자기 바람을 만나 실패(매가 침몰해 죽은 것. 한자로는 치패(致敗)란 표현이 있다. 아마도 치패를 어민들이 실패로 이야기 한 듯 하다)한 적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보옥마을은 34가구가 사는 비교적 큰 어촌마을이다.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이 곳의 개발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마을앞 보죽산 주변에서는 커다란 방파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곳이 완공되면 제주로 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방파제 너머로 멀리 바다위에 커다란 상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곳은 부산과 인천, 일본과 중국등을 이어주는 가장 가까운 항로다. 보길도는 인근 소안도와 함께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과거 바람에 의지해 풍선을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보길도나 소안도에 잠시 쉬면서 좋은 바람을 기다렸다. 옛말로 후풍처(候風處)란 곳이다.
지금은 청별항이 보길도의 주 항이 됐지만 예전에는 청별항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황혼포구가 거대한 포구였다. 지금 활성화돼 있는 완도~제주 직항은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난 것이다.
그 이전에 풍선을 타고 다닌 사람들은 강진의 남포나 백도(신전면의 옛 이름), 해남 화산면의 관동리 관두포, 해남 북평면의 이진(이곳은 조선시대때 영암의 땅이었다) 등에서 출발해 중간에 보길도나 소안도등을 거쳐갔다. 이를테면 중간 기착지다.
물론 날씨가 좋으면 당일에 제주에 도착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보길도나 소안도에서 하루 이틀 묵어 갈 때가 많았다. 보길도를 유명하게 한 고산 윤선도 유적도 고산이 인조 15년(1637년) 2월 제주도로 들어가다 이곳의 경치에 푹 빠져 자리를 잡은 곳이고, 보길도 백도리에 남아있는 우암 송시열 글씨 또한 제주 유배지로 떠나던 우암선생이 이곳의 절경에 반해 그의 한스러운 마음을 시로 남겨놓은 곳이다.
보길도 청별항에서 동쪽으로 길게 드리워진 섬길을 따라가면 길의 끝머리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 송시열 선생은 절규한다. '여듯샛 늙은 몸이 멀고 찬 푸른 바다 한 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 이길래...<중략>... 남녘 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늙은 나이에 유배길에 오른 것도 원통할 터인데, 파도마저 험난한 남쪽 바다를 앞에두고 팔순이 넘은 노인은 얼마나 많은 회한이 교차했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1689년 유배길에 강진에서 배를 타려고 했으나 바람이 불어 몇 일을 쉬어가야 했다.
송시열 선생은 이때 백련사에 잠시 머물면서 대중들에게 강론을 한다. 그것을 기념해 세운게 지금 강진읍 교촌리에 있는 남강서원이다. 아마도 송시열 선생은 강진에서 순풍을 기다려 배에 올랐으나 다시 풍랑을 만나 보길도로 피신했나 보다.
‘남녘 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라는 싯귀에 그의 답답한 마음이 베어 있다. 요즘은 보길도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도 좋지만 보길도 곳곳에 남아 있는 유배와 표류유적이 커다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돌고 도는 것 같다. 송시열 선생의 한시가 새겨진 백도리 건너편 섬이 소안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