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김홍원
길을 떠난다.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와 함께 정다움을 더해도 좋지만, 나 홀로 라면
더욱 좋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번잡스럽게 준비할 필요도
없고 시간과 목적지의 제약도 받지 않기로는, 혼자 떠나는 여행이 제
격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인생을 한편의 연극처럼, 비극의 배우처럼 느끼지 않
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생의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느낄 때면 나
는 가끔 여행을 떠난다. 여행 속에서 자기를 재발견하고 옹졸해 지려
는 인생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다.
언제부터인가 바다가 그리웠다. 침묵과 장엄함의 바다, 언제 불쑥 찾
아와도 넉넉함으로 포용하며 반겨주는 서해안의 광활한 갯벌과 바다가
보고 싶어 차에서 내렸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 모래 바닥엔 조개 줍는 인파들로 북적인다. 모
래 바닥에 송송 구멍난 곳을 찾아, 몇 삽 모래 층을 걷어내고 구멍 속
으로 소금을 뿌려 넣고 좀 기다리면, 새싹이 쏘옥 고개를 내밀 듯 맛
조개가 머리를 쳐들고 나온다. “잡았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맛조개
를 움켜잡고 아빠를 향해 소리친다. “잡고있어 놓치지 말고, 아빠가
잡아줄께" 하며, 달려가 삽으로 모래를 떠서 잡아낸다. 신이 난 아이
는 좋아라 탄성을 지르고 옆에 있는 엄마도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바
라보니, 그들의 단란한 가족 사랑을 느끼게 한다.
이젠 성인이 되어버린 우리 아이들의 어릴 때 모습이 떠올려 진다.
그 많은 시간들을, 나는 어쩌다 아이들과 함께 해변을 한 번 찾아가
보지 못한 채, 무엇에 그리도 쫓겨 분초를 다투며, 무엇을 위해 그렇
게도 허겁지겁 살아왔던가 하는 후회스러움이 가슴 가득히 밀려온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허망하고 이렇게 빠르게 스쳐 지나가듯 흘러가
버린 세월들인데,
사는 것이 무엇인가. 길을 가는 것이다. 길에는 수많은 길이 있지 않
는가? 지금 우리는 서로 다른 인생 길을 걷고 있다.
장안의 화재였던 일본영화 “철도원"의 주인공 오토(다카쿠다)는 한
량(輔)짜리 디젤 열차가 하루 세 차례만 다니는, 시골 간이역을 일평
생 지켜오며, 자식을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쓸쓸함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또다시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호로마이역"의
전등까지 다 끈 후 병원을 찾아서 사랑하는 이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내가 홈에서 깃발을 흔들지 않으면 누가 기차를 유도할 텐가”라고
말하는, 오로지 한길만을 걸어온 영점 남편인 오토의 외길 인생을 보
면서, 나의 길을 돌아본다.
삶의 길이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가야하고 걸어야 할 길이다. 그 길이
에 겨운 고달프고 가파른 길일지라도 중단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
는 것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다.
이제 와서, 셀 수 없이 많은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면 성공(成功)보다
는 실패(失敗)가, 기쁨과 만족보다는 불만과 후회 투성이 여정(旅程)
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를 외치던, 젊었을 적에는 기를
써서라도 남보다 승진을 좀더 빨리 하면 그것이 행복인 줄만 알았고,
명성 높은 회사에서 바퀴 달린 의자 위에 월급 둥지를 틀면 성공인 줄
만 알았다.
잠들지 않은 모든 시간은 일밖에 몰랐고, 냉엄하고 가혹한 생존경쟁
에서 이겨내는 것만이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고 내가 걸어야 할 길 인
줄로만 믿고, 한눈을 팔지 않고 묵묵히 걸어오지 않았던가.
험난한 한세상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으면서,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
고 앞만 보고 달려온 40여년,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어, 머리
엔 흰눈이 덮여버렸고 자식들은 뿔뿔이 떠나, 문득 뒤돌아보니, 썰렁
한 빈자리만 남아, 흘러간 세월들이 회한(悔恨)스러움만으로 다가온
다. 인생은 간단(間斷)없는 나그네길,
먼바다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진
다. 해풍에 실려오는 비를 맞으며 한가로이 날고있는 갈매기를 벗삼아
갯벌을 걸어본다. 맨발에 닿는 모래 촉감이 감미롭고, 꾸밈없는 순수
한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워 끝없이 걷고 싶어진다.
방파제에 걸터앉아 망연자실 시원하게 열린 바다를 바라본다.
상큼하게 맑은 바닷바람을 들여 마시고 있으려니, 공해에 찌든 온갖
시름들이 한꺼번에 씻기어 나가는 듯 후련함을 느낀다. 혼탁해진 머릿
속이 맑아지고 마음속에 울리는 단순하고 진지한 자연과 모처럼 진실
한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맛본다.
얼마를 지났을까. 밀물이 다시 밀려들어온다.
넓은 갯벌들이 차례로 메워져간다. 물은 이리저리 갈라져 들어오기도
하고, 반달 모양의 작은 섬을 만들기도 하더니 초승달로 변해져 가고,
어느덧 그마저도 깨끗하게 지우면서 밀려들어온다. 메워지는 갯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삶의 시간들로 상하고 지친
내 마음들도 한꺼번에 묻어지는 듯 그 모두를 말끔하게 지워 놓는다.
그 많은 세월들을 보내면서 우리 부부는, 서로 마음에 닿는 말 한마
디 나누지 못하고 따로따로 헤매었을까. 어느 때는 아주 작은 일로 인
해 언성을 높여 건너지 못할 강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던 사연들, 내
가 왜 모를까? 박봉생활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남들처럼 사치 한번
부리지 못하고 알뜰살뜰하게 살림 꾸려 가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말은 안 했지만 변변한 외출복 한 벌 사주지 못했던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다 못해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행복이란 바로 가까운데 있었는걸.
이제부터라도 그 금쪽같은 시간을 헛되이 하는 어리석음만은 말자고
전하고 싶다.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다스리고, 포용하며 덮어오는 밀물처럼, 넓은
마음으로 묻어주고 사랑하며, 석양 노을이 아름답듯이 삶의 깊은 이치
를 깨달아 가는 존경받는 “로맨스 그레이”로 욕심 없이 살아가고 싶
다.
아내가 옆에 있었으면 꼬옥 껴안아 주고 싶구나. 우리들의 뼈를 깎
는 아픔도, 남들처럼 호사 한 번 못한 한(恨)도 떳떳하게 살아온 대견
함으로 만족하자고.- 아침에 일어나 창가로 가서 먼동이 트는 것을 바
라보면서 지난 세월들이 부끄럽지 않고, 남편이 뜻한 일이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 하는 신념(信念)을 갖고 오로지 뒷바라지만 하여준 나날
들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아내와 함께 찾아와 바다가 주는 우리만의
참된 이야기를 길게 길게 나누고 싶구나.
우리에겐 걸어야 할 서로 다른 길이 있다.
선비로서 지켜야 할 사도(道)가 있고, 스승으로 지켜야 할 사도(師
道)가 있다. 부녀자로서 걸어야 할 부도(婦道)가 있는가하면, 예술인
이 지켜야 할 예도(藝道)도 있다.
이 많은 길 중에서 어느 길을 걷건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인생(人
生) 근본(根本)의 길이요, 승리(勝利)하는 길이요, 행복(幸福)해 지는
길이 아닐까?
2001/10집
첫댓글 우리에겐 걸어야 할 서로 다른 길이 있다.
선비로서 지켜야 할 사도(道)가 있고, 스승으로 지켜야 할 사도(師道)가 있다. 부녀자로서 걸어야 할 부도(婦道)가 있는가하면, 예술인이 지켜야 할 예도(藝道)도 있다.
이 많은 길 중에서 어느 길을 걷건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인생(人生) 근본(根本)의 길이요, 승리(勝利)하는 길이요, 행복(幸福)해 지는 길이 아닐까?
사는 것이 무엇인가, 길을 가는 것이다.
선생님 글보며 여러 생각들이 떠나지 않네요.
뒤돌아 보면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 가짐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에겐 걸어야 할 서로 다른 길이 있다.
선비로서 지켜야 할 사도(道)가 있고, 스승으로 지켜야 할 사도(師
道)가 있다. 부녀자로서 걸어야 할 부도(婦道)가 있는가하면, 예술인
이 지켜야 할 예도(藝道)도 있다.
이 많은 길 중에서 어느 길을 걷건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인생(人
生) 근본(根本)의 길이요, 승리(勝利)하는 길이요, 행복(幸福)해 지는
길이 아닐까?
혼자걷는 길보다는 둘이걷는길이 정도에 못 미친다해도 둘이 걷고 싶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