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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kgh_iLSCYo?si=mi99NlQ2rvd52mnf
Bach - Goldberg Variations - Glenn Gould (21 June 1954)
글렌 굴드 (Glenn Gould, 1932-1982)
혼자 있다고 꼭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 를 의미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삼고 있다. 반면 내가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되어 있을 때,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가’ 다름아닌 나 자신 일 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거기,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Glenn Gould-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지휘를 하다가 춤을 추기도 하였고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콜롬비아 마스터웍스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55년 6월 콜롬비아 마스터웍스의 스튜디오에 레코딩 작업을 위해 나타난 글렌 굴드에 대한 일화입니다. 이때 녹음한 것이 전설이 된 명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이 녹음 해프닝으로 굴드의 악명높은 기행은 세상에 회자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연주를 듣고 어느 비평가는 '미친놈의 연주' 라고 했다고 하죠. 지금 흐르는 곡은 베토벤의 월광 3악장인데요, 이 악의에 찬 평가가 언뜻 이해될 법한 거의 미친듯한 빠르기의 연주입니다.
천재적 재능이라는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글렌 굴드는 많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아낌없는 극찬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지극히 주관적이고 해괴한 기행과 한정된 레파토리 때문에 피아노를 잘 치기는 하지만 연주자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악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두 동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글렌 굴드처럼 자유로운 표현을 구사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라는 것이죠.
굴드의 음반을 들으면 피아노 소리 뒤로 허밍이 들립니다. 음악에 취해 저절로 흐르는 허밍입니다. 이 허밍때문에 녹음기술자들에게 있어선 최악의 연주자였던 글렌 굴드의 기행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어처구니 없다못해 귀엽기까지 합니다.
1955년 뉴욕 데뷔연주를 성황리에 마친 후, 그는 정신분석학자와 신경전문의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강박증과 노이로제가 1958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완벽한 암기력과 테크닉의 소유자였다던 그는 연주 중 미스터치를 하거나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라는 핑계를 대고 연주회를 취소해버리는 일이 잦아집니다. 한번은 함부르크에서 쉬고 있던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어요. 앞으로도,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좀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여권 직업란에는 '콘서트 피아니스트' 라고 기재하고 다녔다니 이쯤 되면 웃음이 터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
또한 그는 상당히 특이한 연주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무로 만든 낮은 의자에 앉아, 턱을 쳐들면 건반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에서 피아노를 쳤고, 청중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았다는 평입니다. 녹음이나 연주를 하려면 반드시 대동해야하는 생수 두통과 약병, 아라비아의 여인네처럼 온몸을 감싼 옷차림, 연주 중의 기괴한 표정과 몸을 수선스럽게 흔들어대며 늘어놓는 끊임없는 허밍, 호로비츠 못지 않게 '불량한' 연주자세 등등...... 이외에도 일상에서의 기행 -강박증과 노이로제가 동반된- 도 녹녹치가 않습니다. 연주를 하는 동안 객석에서 들려오는 청중들의 아주 작은 소리도 참지 못했으며 음악에 조예깊은 일반인은 연주자들을 괴롭힌다고만 생각했다 합니다. 연주여행으로 인해 묵어야 했던 유럽 호텔들의 낮은 실내온도가 고통스러웠던 탓인지, 에어컨이 가동되는 식당에는 절대 가려 들지 않았고,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마저도 기겁을 하고 피해다니게 됩니다.
이 심각한 대인기피증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하려면 전화를 통해야만 했는데 통화 중에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자, 감기가 옮는다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것이죠. 그의 대인기피증은 날로 심해져 타인과의 악수조차도 피하게 되었고 악수를 원하는 상대에겐 '올해는 악수를 안하는 해로 정했다' 는 이상한 이유를 들어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비행기 사고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 타기를 극도로 기피했다고 하는데요, 간간히 비행기를 탈 때엔 이스라엘 항공사의 비행기만을 이용했습니다. 그 이유란 것이 지극히 단순합니다. 보유한 비행기 대 수가 적은 회사이므로 그만큼 정비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답니다. 이후엔 그마저도 타지 않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캐나다의 유명한 작가인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아홉살 무렵에 굴드의 이웃집에 살게 되면서 그를 만납니다. 그는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고합니다.
"어린아이인데도 글렌은 고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조건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굴드는 카라얀과도 각별한 우정을 주고 받았습니다. 서로의 예술에 대한 지지자가 된 것이죠. 카라얀의 괴팍한 성미와 굴드의 기행을 엮어보면 거의 환상적인 듀엣이었으리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사이에선 이런 일화도 전해집니다.
뉴욕 필과 토론토 순회공연 중이던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합니다. 그는 번스타인에게 제안합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말이죠.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아파트를 떠납니다. 모피외투와 털목도리 안에 얼굴을 파묻고 창문을 모두 닫은 굴드는 히터를 올린 다음 라디오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습니다. 번스트인은 라디오 소음과 땀에 진이 빠져버렸고, 굴드에게 이런 일을 자주 벌이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굴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everyday!"
그는 전성기를 맞았던 1964년(32세) "고통일 뿐인 속임수" 라는 이유로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하고 이후, 단 한 차례도 공개된 장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종류의 약을 즐겨 복용했던 약물중독자였고 애인을 구하는 광고를 내려고 한 적도 있었으며, 독신으로 50년의 생을 살다 간 전설적인 북미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굴드의 생애를 여러자료를 인용참조하면서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겠습니다.
글렌굴드는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모피 중개상이었고, 남편보다 아홉살 연상이었던 어머니 플로라는 꽤 솜씨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소프라노 가수였다고 전해집니다.
"저 애는 내과 의사나 피아니스트가 될거야. 둘 중에 하나 말이야"
아이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가락과 팔에 그의 부모가 주의를 돌리자 주치의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발견한 또 다른 이상한 점은 아이가 울기보다는 허밍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죠. 아픔/기쁨에 대한 비상한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계속된 유산 끝에 마흔이 넘어 어렵게 얻은 아들을 음악가로 키우고 싶어 했고, 피아노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자마자 피아노 교습을 시작합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는 세 살이 되던 해에 이미 악보를 읽고 절대음감을 감지하는 재능을 보였으며,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합니다. 열 살 때엔 토론토의 로열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피아노는 알베르토 게레로에게서, 오르간은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서, 음악이론은 레오 스미스에게서 배웁니다.
열두 살때, 참가해 우승을 거머쥔 키바니스 뮤직 페스티벌은 그가 참가한 유일한 경연대회가 됩니다. 이후, 그는 젊은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참가하여 서로 경쟁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어떤 종류의 경쟁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요, 이는 평생을 통해 절대적인 평화주의자였다는 그의 성향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1945년에는 로열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습니다. 열 네살 되던 1946년에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서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웁니다.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과 로잘린 투렉,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해집니다.
1946년, 그는 로열 콘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합니다. 이듬해엔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포니와 연주하였는데요, 어떤 비평가는 이 연주에 대해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성공리에 마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마스터웍스 시리즈에 참여하게 되는데요, 굴드는 메이저 음반사에서 출반하는 자신의 첫 레코딩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택합니다. 당시, 이 곡은 지루하고 변화없는 음악으로 인식되면서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바흐를 탐닉했던 굴드는 자신의 내면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곡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택했고, 이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스물세살의 굴드를 단숨에 정상급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이후, 연주일정이 늘어납니다. 1957년에는 러시아(당시 소련)에서 2주간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첫 유럽 순회연주를 가지게 되는데요, 그는 냉전시대의 소련에서 연주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리드미컬하고 시적인 감흥이 넘치는 바흐연주는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습니다. 그의 개성적인(?)무대 매너마저도 청중들에게는 천재다움 ^^;; 으로 비쳐졌다고 하죠.
그의 음악에는 살아 숨쉬는 듯 한 생명력이 있었고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기괴함과 참신함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템포가 매우 빠르거나, 매우 느린 여러가지 해석이 있으며 스타카토, 레가토가 자주 강조됩니다. 과장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악보를 무시한 파격적 해석으로 유명하고 바흐를 제외한 몇몇 곡에서 음악적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던 경우도 있습니다. 굴드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곡은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바흐가 붙인 곡명은 '2단 건반이 딸린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갖가지 변주였다고 합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러시아의 카이저링크 백작은 어느날,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골드베르크에게 수면음악의 작곡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불과 14살의 어린 아이였던 골드베르크는 수면음악이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먼저 곯아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해 스승 프리드만이 바흐를 추천합니다. 바흐는 짧은 시간 안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했는데요, 악보를 받은 백작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변주곡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바흐는 이 곡을 작곡한 것을 계기로 변주곡 양식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고 1개의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을 작곡하기에 이릅니다. (이상 푸른 솔 자료 인용)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쳄발로, 하프시코드 연주가 일반적이었던 이곡을 굴드는 처음으로 피아노로 연주했던 것이죠 . '골드베르크' 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평균율' 이 주는 지루함을 의식할 수 없게 해석한 굴드였습니다. 그는 연주회장과 결별함으로서 청중 앞에 서는데에 사용될 노력을 절약했으며 남아도는 열정 전부를 레코드 제작에 투자합니다. 당시 굴드는 소위 '짜집기' 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연주의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 '짜집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굴드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집니다. 공식연주회에서 이토록 빨리 은퇴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그의 많은 다른 관심사들을 실현하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의 본업이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작가로서의 활동, 방송활동, 작곡, 지휘, 그리고 기술적인 갖가지 시도들에 대해 피아노에 대한 것만큼의 열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다.
1981년에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습니다. 아래의 곡은 81년도 녹음입니다. 몰입해서 들으면 귀신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전설적인 명반이죠. 굴드는 두번째 녹음에서 각 변주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보다 큰 틀 안에서 각개체의 파동과 화성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동일한 개체군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남긴 셈입니다. 그의 데뷔 레코딩 곡이기도 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녹음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하는데요, 이 천재는 죽음마저도 자신이 벌인 해프닝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자주 ‘가짜 통증’ 의 호소를 남발한 나머지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 이 왔을 때, 의사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펌)
"The purpose of art is not the release of a momentary ejection of adrenaline
but rather the gradual, lifelong construction of a state of wonder and serenity."
-Glenn Gould-
글쓴이 : 베토벨라
https://youtu.be/51dXnVmnrgU?si=4TU0UMGU2_qikhz9
Bach - Partitas Nos. 1,2,3,4,5,6 BWV 825-830 / REMASTERED (Century's recording: Glenn Gou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