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순 소설가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지적해 주신 문장, 낱말, 어려운 한자 등을 고쳤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한자 단어를 무척 많이 썼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5년 전에 썼던 글이기에 문장이 꺼끄러웠지요.
박민순 님이 지적한 문장 낱말 등을 고쳐서 아래처럼 다시 올립니다.
덕분에 <한국국보문학> 2025년 3호에는 수정본으로 올립니다.
소금바위와 어머니
최윤환
1972~1974년 당시 나는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 화망의 고향*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웅천국민학교 동창생 몇몇과 함께 방위병*으로 근무했다. 본적지가 해안지방인 동창생들은 고향 바다(노천리, 황교리, 소황리, 독산리, 관당리) 해변에서 야간 경계를 설 때 나는 면 소재지 대창리에 있는 예비군 중대본부의 기관요원으로 배치되어서 주간에 근무를 섰다.
중대본부 임무를 수행하려고 타 동네로, 때로는 이웃 면 소재지 먼 곳으로 자전거를 타고 출장 가는 날에는 으례껏 귀대시간이 길어졌으며, 자연스럽게 귀가시간도 늦어졌다. 이런 날에는 어머니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는 직접 신작로(新作路 무창포路)로 나서서 걷다 보면 구장터 대천리(大川里)에 거의 가까이 오셨다. 어머니가 서서 기다리시는 곳은 소금바위* 근처였다. 구장터로 들어가기 직전의 삼거리, 화락산(花落山) 아래 북쪽 모퉁이.
내가 귀가할 때에는 구장터를 벗어나 서쪽 편에 있는 구룡리, 죽청리, 관당리 무창포 방면으로 가는 작은 갈래길로 접어든다. 자전거에서 내린 뒤 자전거를 끌고서 경사가 있는 화락산 언덕길로 오르기란 젊은 나이에도 다소 힘이 버거운 곳이 시작된다.
호젓한 산길 입구,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멀리서도 왜소한 시골 아낙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 반가움이 일시에 일어났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왈칵 치밀곤 하였다. 먼 길(신작로)을 걸어 나와서 어둠 속에서 무한정 기다렸을 어머니의 마음씀씀이가 내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장성한 아들이 어련히 알아서 귀가할 터인데도 그새를 못 참아서 왜 먼 길을 나오셨느냐는 게 내 짜증이었다.
"왜 마중 나오셨어요?"
퉁명스럽게 묻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달리 할 말을 잊은 듯 우물쭈물하셨다.
"별일은 없었니?, 왜 늦었니?"
되묻고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셨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어두운 길, 자갈투성이인 언덕길, 산길(무창포路)을 오르고, 어머니는 뒤쳐져서 하루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시면서 함께 귀가하였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의 애지중지한 외아들이었다. 누나의 표현이라면 귀남이(貴男이)였다. 어머니는 자식 셋을 졸지에 잃었다. 똑똑하였다는 어린 딸(나한테는 큰누나)은 서너 살 때 얻어온 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죽었고, 큰아들은 서너 살 어렸을 적에 옴병(진드기에 감염)에 걸려서 졸지에 잃어버렸단다. 그 뒤에 곧바로 낳은 자식이 둘째 딸과 쌍둥이 아들이었단다.
쌍둥이 형은 바로 나. 국민학교 학생인 쌍둥이 형제는 1960년 봄 벚꽃 필 때에 도회지 대전으로 전학을 갔기에 어머니는 세 딸(누이)과 함께 고향집에서 살아야 했다.
쌍둥이 동생은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다가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내려왔고, 저녁 무렵에 울안 변소칸에 가다가 뱀한테 발등을 물렸고, 대천 시내 병원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다가 다음날에 죽었다(1969. 8. 10.). 집나이 스물두 살(만 20살)의 요사(夭死)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세 아들 가운데 '가장 못나고 둔한 것이 명(命)을 보존한다'라고 둘째 아들인 나를 보시면 한숨을 쉬며 한탄하셨다.
쌍둥이 막내아들이 어머니 가슴에 못 박은 지 3년도 채 안 되던 때(1972년 초여름)에 내가 고향에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내가 아침 일찌기 새장터로 나갔다가 늦게 귀가하는 저녁 무렵이면 어머니는 애간장을 태우셨다. 당시에 나는 혈기왕성하여 자전거를 끌고 온 천지사방 시골길을 달렸기에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좁디좁은 논두렁이에서도 무모하게 곡예를 하듯 자전거를 즐겨 탔으니 때로는 엎어지고, 수렁논에 빠지기를 숱하게 반복하였다. 매사에 이런 나를 어머니는 못미더워하셨다.
내 기억은 여기에서 멈춘다. 지금은 '무창포路' 지방도로 606 확장공사로 '소금바위' 일대가 없어졌으며, 여름철 비 내리는 날에 질퍽거렸던 자갈길과 겨울철 빙판길로 변했던 신작로 길은 이제는 시멘트 아스팔트 길로 깨끗하게 포장되었다.
시골 아낙이었던 어머니는 이제는 하도 늙어서 그 포장된 길조차 걸어 나올 힘이 없는 세월이 되었다. 28년 전인 1972년 소금바위 옆에서 기다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여기에서 멈춘다. 어머니가 저너머 영겁(永劫)의 세계로 훌쩍 날아갈까 봐 마음 졸이는 내가 상상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차라리 시간(時間)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쓰면서 내 젊은 날의 옛 시절을 조용히 회상한다.
* 고향 : 忠淸南道 保寧郡 熊川面 九龍里 花望. 조선조 영조왕 시절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나오는 가거지(可居地)의 한 곳인 보령 남포 화계(花溪)는 지금의 화망마을(花望). 擇里志 (1751년 저술) '可居地 '에는 '여러 대를 이어 사는 부유한 집들이 많다'라고 기록
* 방위병 : 1960~70년대 보령군 해안지방은 북한 무장간첩 상습 침투지역이었기에 이 지역 출신 일부는 군에 입대하지
않고는 방위병으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았음. 나는 웅천면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군복무를 대체했음
* 소금바위 : 보령군 웅천면 두룡리 736-3번지 일대의 화락산 북쪽 하단 아래에 낸 신작로(新作路) 가생이에 있었음. 몇 차례 도로확장, 포장공사로 지금은 소금바위가 멸실되었음
* 보령군은 1986년에 보령시로 승격, 웅천면은 1995년 3월에 웅천읍으로 승격
* 신작로(新作路) : 일제강점기 1931년경에 개통한 '무창포路' 즉 지방도로 606 일부 구간을 일컬음
2000. 9. 18. 월요일.
* 어머니(이천동 李賤童) : 보령군 남포면 월전리(龍머리) 출신. 기미년 섣달그믐생(양력 1920. 2. 19. ~ 2015. 2. 25.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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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글을 어제서야 발췌해서 글 다듬기를 시작하니 오탈자가 많을 겁니다.
어색하고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거듭 부탁을 드립니다.
더 다듬어야 합니다!!
2025. 2. 9. 일요일. 최윤환 올림.
첫댓글 어머니의 그 따스한 사랑(관심)이 그리워 눈물집니다.
46세에 막내(7남 4녀)인 저를 낳으시고 39년 전, 저 하늘의 별이 되신 우리 엄마!
설날이 되기 15일 전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제사상에 올릴 술 담그랴, 어린 자식들 먹일 식혜 만들랴,
명절날 입힐 꼬가옷 만들랴,
방앗간에 가서 흰 가래떡 해서 이고 오랴, 보름 시루떡 해서 집안 곳곳에 놓고 악귀를 쫗고,
이웃사촌들과 나누어 먹고,
추운 날씨에 언 손을 녹여가며 밤낮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시던 어머니,
어머니의 그 모습 눈에 선합니다.
최 선생님이 사시던 그 쪽에는 소금바위가 있었군요.
제 고향(충남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 한신마을)에는 산을 한참 오르면 오줌바위가 있었고
장에 간 어머니를 길 가의 큰 바위에 걸터앉아 기다리던 곳이 있는데 그곳을 '돌팍재'라 불렀죠.
'어머니의 잔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에서 '잔영(殘影 희미하게 남은 그림자나 모습)' 대신
우리말인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로 고치면 어떨까요?
'저녁경'은 '저녁무렵'에로
'무진장(無盡藏 다함이 없이 많이) 걷다 보면'은 '많이 걷다 보면' 또는 '한참 걷다 보면'으로
'소로(小路)'는 '작은 길'로
'하루의 이야기를 조랑조랑(작은 열매 따위가 많이 매달려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들려주시면서'는
'하루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시면서'로
'영민하였다'는 한자 '英敏'을 넣어주시던지 아니면 우리말 '똑똑하였다'는 으로
'자탄(咨歎 슬프게 여겨 한숨을 쉬며 한탄하다)하셨다'는 '스스로 한탄하셨다'로
'혈기 방자하여'는 '혈기왕성하여'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의견이니 한 번 읽고 참고하시면 됩니다.
박민순 문학가님
오랜 만입니다.
박 선생님도 충남 보령시 대천 등을 잘 아시겠지요. 추억도 서려 있을 고장이니까요.
박민순 님 덕분에 위 원안을 일부 고쳤습니다.
제가 예전에는 한자말을 많이 썼고, 우리말도 다소 어색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습니다.
저는 생활일기를 빠르게 다다닥 하면서 쓰고, 일부를 골라서 문학지에 올리지요.
글쓰기는 쉬워도 글 다듬고, 고치려면 수십번도 더 작업합니다.
위 글 덜 다듬다가 올렸더니만 박민순 님이 정확하게 지적해주셨군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위 글 더 다듬어서 <한국국보문학> 2025년 3월호에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