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에게 듣는 이라크戰 이후] ①조지프 나이 학장
“美, 압도적 군사력 과시… 테러 지원국들 다시 생각할 것”
▲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조지프 나이 학장은 14일“이라크 전쟁을 치른 미국이 또다시 ‘악의 축’으로 일컬어지는 시리아·이란·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최우석기자
미국은 전 세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고, 빠른 시일 안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힘과 중동(中東) 상황을 포함한 세계 질서는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조선일보는 이 문제들을 살펴보기 위한 세계적 석학들과의 연쇄 인터뷰 첫 번째로, 현재 방한 중인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조지프 나이(Nye·64) 학장을 14일 최우석(崔宇 ) 기자가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전쟁 결과가 향후 세계 질서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
“이라크 전쟁 이전에도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이 체제가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테러 사태는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 전쟁으로 미국의 군사력은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했고, 시리아나 이란처럼 테러를 지원해온 국가들은 테러를 지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고 판단된다.”
―전쟁을 놓고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심화됐다. 프랑스·독일·러시아 등이 장차 여러 국제 이슈에서 반미 연대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는가?
“미국·유럽 갈등은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부시 대통령과 시라크 대통령은 양국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미국과 유럽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백악관 주변에서 조언하고 있다. 6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선진국 모임인 G8회의에서 본격적인 관계 회복을 위한 작업에 돌입할 것으로 본다.”
―이라크 전쟁이 장차 게릴라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는가?
“베트남전 당시에는 중국이 월맹군에 막대한 자금과 무기, 식량 등을 제공해 전쟁이 장기화됐다. 그러나 이라크 잔당들에게 무기나 식량을 제공하는 국가는 현재로선 없다. 또 후세인 정권 자체가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잔당이 남는다고 해도 게릴라전을 수행할 만한 힘이 없다. 베트남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번 전쟁은 아랍국가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랍국들은 향후 생존을 위해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컨대, 시리아가 더 이상 테러를 지원하지 않는다거나, 일부 아랍 국가들이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정치 체제를 바꾸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미국의 중동 전략은 무엇인가?
“단기적으로는 어떠한 국가도 테러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중동 국가들이 정치·경제 개혁을 통해 보다 안정된 지역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석유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누가 이라크의 석유를 소유하든 별 문제가 안된다. 특히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도 유가 변동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다음 목표는 어디냐를 두고 말이 많다.
“그것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뜻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이 시리아·이란·북한을 상대로 군사공격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리아와 이란에 테러 지원을 중단하라는 정치적 압력은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또 현재 북한과 다자간 협상 체제 구축을 논의하고 있지만, 이 역시 정치적 압력에 속하는 부분이다.”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는 것인가?
“북한은 이라크와 달리 한국을 지척에 두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인질로 잡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처럼 북한 공격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은 한국이 입을 수 있는 막대한 피해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여론을 무시한 채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였다. 미국은 힘을 과시했지만, 미국에 대한 호감은 예전과 같지 않다.
“미국은 전 세계에 전쟁이라는 군사적 행동을 통해 물리적 힘을 뜻하는 하드 파워(hard power)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러나 정당성이나 호감(好感)을 뜻하는 소프트파워(soft power)를 희생시켜야 했다. 소프트파워란 물리적 힘을 동원하지 않고도 상대방이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 자체로 전쟁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겠지만, 광범위한 공감대 없이 전쟁을 강행함으로써 미국의 이미지가 추락했다. 결국 미국이 막대한 소프트파워를 희생한 것이다.”
―이라크가 유엔(UN)에 들어가면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회복되는가?
“그럴 경우 미국이 잃었던 소프트파워를 어느 정도 되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유엔이 미군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많이 있다. 행정·치안·선거 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미국이 얼마만큼의 유엔 참여를 허용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계속한다면,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점점 더 약화되는 현상이 빚어질 것이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행정부가 공공연히 표방해온 미국의 선제 공격(preemptive strike) 전략은 이번 이라크 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는가?
“선제 공격에 대한 부시 독트린은 이라크에만 적용된 것이다. 이라크는 독특한 케이스다. 이라크는 이미 유엔 결의사항을 위반했다. 대량살상무기를 자국민에게 사용한 정권이다. 이 독트린이 다른 나라에도 적용될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대해 적용할 가능성이 있는가?
“북한을 상대로 선제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 내가 미국 국방부에 근무할 당시, 영변 폭격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1만1000여문의 대포가 서울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계획을 철회했다. 당시 평화를 돈 주고 사는 게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북한은 휴전선 일대 1만1000여문의 대포가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억지(抑止·deter)할 수 있는 요인임을 알아야 한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아도 곡사포 때문에 미국이 공격하지 못한다는 점을 안다면 굳이 핵개발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유엔의 역할은?
“유엔 안보리가 북한 핵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유엔은 북한이 미국과 함께 다자간 협상을 벌여 비핵국가로 남도록 압박을 가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정부에 대해 조언한다면.
“한국 정부는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줘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북한으로서는 협상 테이블에 나와 앉을 이유가 없다. 북한으로서는 핵개발도 하고, 외부로부터 경제원조도 받는 게 최상이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이 두 가지 다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설득해야 한다. 북한에 당근을 제공할 땐 반드시 조건을 달아야 한다. 상호주의(reciprocity)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생각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도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북한과 협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신(新)보수주의자들이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1993년 핵활동 중지 등을 규정한 제네바 협약을 맺어놓고도 속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무런 경제 지원없이 북한을 그냥 내버려두면 어차피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식으로 김정일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10여년 전에도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북한 정권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또다시 10년이 흘러갈지 모른다. 문제는 그 안에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는 것이다. 결국, 좋든 싫든 협상을 통해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해주되 핵개발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개발을 포기하고 외부의 경제지원을 받아 주민 생활을 향상시킨 다음 개방의 길로 들어서면 세상은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다.”
―한국 햇볕 정책에 대한 평가는?
“햇볕 정책의 기본 원칙에는 동감한다. 그러나 상호주의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으면 햇볕정책은 실패한다.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면 한국은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최근 주한미군의 후방 재배치 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용산의 8군사령부 이전은 10여년 전부터 논의됐던 사안이다. 그러나 2사단 후방 배치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결정한 것인데, 북한 핵 문제를 논의하는 지금 2사단을 후방 배치하는 것은 타이밍상 좋지 않다.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도 있고, 북한이 원하는 바를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결정에 대한 미국의 반향은?
“노 대통령의 파병 결정은 미국 보수파들에게 안도감을 줬다. 노 대통령이 진보진영을 대표했기 때문에 미국 보수파는 노 대통령 취임 전 상당히 걱정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파병 결정으로 노 대통령이 실용주의적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됐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조지프 나이(Joseph Nye·64) 학장은 초기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로 재직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수립했던 민주당계 학자이다.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 일본과 정치·경제·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대신 중국을 포용하는 ‘나이 이니셔티브’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58년 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줄곧 하버드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국무부와 국방부 등 행정부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현장 경험을 쌓았다. 최근 국내에서도 발간된 ‘제국의 패러독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