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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를 극복하는 길!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 특히 의식이 있다고 하는 신자들이 죄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보수적 크리스천들은 죄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회개와 거듭남을 강조한다.
이런 경향에 대해 진보적 크리스천들은 오늘의 중세 시대가 아닌데 어떻게 세속과 교회가 그렇게 구별될 수 있느냐면서 이전에 죄로 여기던 것들, 이를테면 술을 마시는 것이나 남녀관계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죄의 심각성이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과소평가하거나 그것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죄 문제는 바울의 시대보다 오늘이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심각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에는 죄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분명하게 드러났다면 오늘날은 죄가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병의 증상이 나타나면 무섭지 않다고 한다.
제일 무서운 것은 아무 증상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살인자가 누구인지 모를 때 우리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유영철은 잔인한 살인자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밝혀진 다음에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아직 범인이 누군지 모르니까 그 지역에서는 누구나 한적한 데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그가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가 가장 무서운 자이다.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은 죄가 가장 무서운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로마서 23절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죄의 본질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삯’(opsonion)이라는 말은 본래 노동자들의 임금을 가리킨다.
죄의 임금, 죄가 벌어들이는 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죄는 인격화되고 있다. 죄가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일이란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치 우리 몸속의 암세포와도 같은 것이 죄이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우리는 누구나 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꼭 누가 범죄형이어서 더 죄에 가까운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 3:9-10).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he hamartia)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5:12).
여기서 ‘죄’(he hamartia)가 단수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윤리적 의미의 죄의 “현상들”(sins)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원리로서 죄(sin)를 의미하는 것이다.
죄는 모든 인간들의 생명 속에 있는, 생명을 소멸시키는 마성적 힘이다. 죄는 어떤 윤리적 죄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동료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죄는 하나님,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무관심과 증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잘 그려지고 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게 된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서 나뭇잎으로 자기 몸을 가렸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하고, 하와는 뱀이 유혹해서 그랬다고, 다른 존재에게 핑계를 대고 책임전가를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사람의 사랑이 무관심으로 바뀌었을 때 이전의 관계는 깨어졌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높이기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웃을 사랑하던 마음은 미움으로 변하였다. 마침내 그 미움이 자기 속을 향하게 되니까 자기 자신마저 붕괴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고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원망하는 것이 우리 속에 죄를 키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큰 재난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맙소사!”,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런 말들을 한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사람들은 자기의 불행이나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윤리적 죄를 저질렀을 때도 항상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그렇게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뢰를 잃게 되므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이를테면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같은 자기 파괴 행위다.
두번째 단계는 그런 자기가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피하게 되고 은연중에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바울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롬 3:23).
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29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30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롬 1:28-31).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골 1:21).
유의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미워하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죄’(hamartia)라는 말은 본래 윤리 용어가 아니라 사격술 용어이다. 그것은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관심으로 바뀔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나 자신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과 인격의 장애는 대개 자신이 제대로 성장하거나 자기실현을 하지 못했다는 의식, 또는 자기 자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스티브 맥퀸 분)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는 심문관들에게 “나는 무죄입니다” 하고 항변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윽고 한 심문관이 “너는 유죄다” 하고 선고한 다음에 그의 죄목을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 그러자 주인공은 고개를 떨구며 “네, 유죄입니다” 하고 인정을 한다.
그렇다.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만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생을 충분하게 가능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죄이다.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던 사람이 주인에게 책망을 들었듯이, 우리가 우리의 잠재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면 죄의식과 불행한 의식이 생긴다.
사용하지 않은 사랑니가 금세 썩듯이, 하나님 주신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속에서 병이 자라게 되고 그것은 그 사람을 조금씩 파괴시킨다. 하나님과의 소외를 극복하고 내가 하나님 주신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음을 한껏 느끼는 것이 활기찬 생(fully alive)을 사는 비결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
아담과 하와의 핑계 댐과 책임전가는 다른 사람과의 소외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죄에 빠진 다음에 “저 여자가” 먹으라고 했다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고 하와는 뱀을 향하여 똑같은 손가락질을 했다. 거기에서 온갖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나오는 것이고 나아가 괴롭힘과 폭력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관계 속에 살도록 지음 받았다. 이 사랑이 무관심과 미워함과 책임회피로 바뀔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사귐을 거부하고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죄의 결과이며, 그것은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준다. 죄의 열매는 분명하다. 외로움, 좌절, 무의미함, 정죄, 고통, 절망,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어놓았고 고통을 당하도록 장치를 해 놓았다. 불 속에는 뜨거움이라는 장치가 있어서 우리가 난로에 손이 닿으면 즉시 떼게 되어 더 이상 다치지 않듯이, 죄 속에는 고통이라는 장치가 있어서 우리는 죄에 빠지면 고통을 느끼게 되고,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올 때 그것을 무시하지 말고, 내 속에 죄가 일으키는 증상임을 알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 사랑하고 하나가 되었던 아름다운 관계가 무슨 일이 계기가 되어 무관심과 미움으로 바뀌게 된 것이 있지 않은지 보고, 그것을 찾아서 본래의 사랑하고 함께 사귀고 친교하며 기뻐했던 관계로 회복하면 고통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를 가져온다. 죄에 빠진 인간은 먼저 벌거벗은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흔히 사춘기 때에 우리는 이런 감정을 가장 강하게 느끼지만 평생토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사는 사람이 있다. 자기 얼굴도 키도 몸무게도 늘 싫고 자기가 싫어서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나무라고 열등감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늘 착하게 살아온 초등학교 교사가 있다. 그는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배가 고파서 고구마 맛탕을 훔쳐먹은 일이다. 친구들이 여럿이 맛있게 먹는데 자기도 먹고 싶기는 한데 돈은 없어서 한번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고, 나중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자 더더욱 그 일이 그를 괴롭혔다. 그것이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열등의식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문제는 더 꼬이고 잘 풀리지 않았다. 튀는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자기 과시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주위 사람들의 집중을 받고는 하였다. 모임에선 이야기를 주도해야 직성이 풀렸고, 회의시간엔 돌출발언을 자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임이나 회의가 끝나고 집에 오면 꼭 후회를 하였다. 그래서 인간관계도 원활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가 가르치는 반에서 분실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아이들을 앉혀놓고 유도성 발언으로 자신이 맛탕 얘기를 해주며 선생님처럼 평생 동안 후회하지 말고 이 자리에서 다 털어버리자고 하며 솔직하게 잘못을 쓰게 하였다.
그런데 4학년 아이들이었는데 90% 이상이 연필, 지우개, 볼펜, 카터칼 등 누구나 남의 것을 몰래 가져간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부유한 집 아이들인 반장 부반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려다 오히려 자신이 치료를 받았다. 맛탕을 훔친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라기보다는, 아직 자기통제 기능이 발달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 때문도 가난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렇게 자기 얘기를 아이들 앞에서 털어놓고 나니 후련하기도 하고 그 일이 객관화되면서 내가 왜 그런 일을 가지고 그렇게 나 자신을 괴롭혔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늘 원망하던 자기 부모와 화해하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 부모는 그 어려운 시절에 오히려 오늘의 부모들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고 이해하게 되면서 눈물이 나고 고맙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어린시절의 가난을 누구에게나 말해도 부끄럽지 않았고, 일부러 존재를 드러내려는 과시적인 발언도 줄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를 속박하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자신이다. 아무도 섭섭해하지 않는데 우리 자신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처럼 남편과 해외여행 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어머니가 심장발작으로 돌아가셨는데 평생 어머니를 간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서 병을 앓았다.
나중에 의사가 그 얘기를 듣고서 그 여인에게 당신 딸이 그런 일로 여행간다고 하면 보내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물론 가라고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 후에 그 여인은 뭔가 깨달음이 있었다. 자기는 은연중에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보다 덜 자비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딸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자, 금세 한숨을 쉬며 마음이 편해지고 앓던 병도 좋아졌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로 부모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품고 살아간다.
부모가 살아계시다면 분명히 용서를 해주셨을 텐데 부모가 돌아가셨으니까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한으로 품고 있으니까 그것이 속에서 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부모가 그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잘못했다는 의식, 소외감이 죄가 되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할 수 있다. 훔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여행가서 부모를 못 돌보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때 그랬다면 뭔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꾸만 과거를 후회하며 돌이키는 것은 늘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외시키고 나아가 하나님의 관계까지도 서먹하게 만들어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죄가 일으키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게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기까지 하시면서 산 우리 자신인데 우리가 자신을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지난 주 설교에서도 우린 우리 자신이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임을 알고 신적인 존재로서 자부심을 갖자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일찍 죽는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착한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몸에 엔돌핀이 많이 생기고 건강하고 오래오래 사는 것이 정상이다.
다만 우리는 유교적 정서가 짙어서 뭐든지 자기 탓으로 돌리거나 자기를 비하하고 책망하는 타입을 착하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학대하고 파괴하는데 건강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병이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착한 것이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자기를 사랑하는 데는 거울을 보고 말하는 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나 자신을 향해서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말해 주어라.
“너는 멋있다. 너는 참 아름답다. 너는 참 사랑스럽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네게 좋은 기대를 거신다. 하나님은 너를 통해서 일하려고 하신다. 네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런 소외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데서 파생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교독문 시편 139편은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 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 139:7-8).
아들이 화를 내고 문을 닫고 집을 나가도 여전히 그가 내 아들인 것과 같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구원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의 끝 구절은 이런 논의의 요약이자 결론이 된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23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은사: charisma)이다. 그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시니 우리가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의 종이 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요 복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바울의 선언을 경청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화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며,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출처 : 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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