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2장 제물론(齊物論) 6절
[본문]
{6절}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말로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본시부터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새새끼가 우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일까, 차이가 없는 것일까?
도는 어디에 숨겨져 있다가 진실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말은 어디에 가려져 있다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가? 도는 어디에 간들 존재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말은 어디에서 쓰인들 안되는 일이 있는가? 도는 조그만 성취에 숨겨지게 되며, 말은 화려함에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존재하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옳다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그르다고 한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려면 곧 밝은 지혜로써 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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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장자는 2장(제물론) 6절에서 자신의 언어관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말, 소리, 생각 등의 관계를 살펴보고, 도(道), 말(言), 시비(是非)를 가릴 지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장자는 6절 첫째 단락에서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말로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본시부터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 물음에는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로 시작된다. 말이 소리가 아닌 이유로, ‘말이란 것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소리가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소리 중에는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시냇물이 졸졸 내려가는 소리,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시계가 똑딱 그리는 소리, 새새끼가 우는 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어서 장자는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이 일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서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지 본시부터 존재하지 않는지’를 묻고 있다. 말은 일정해야 말로 인정이 되지만, 생각은 일정하지 않아도 생각으로 인정이 된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말인데, 생각이 일정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말도 일정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일정하지 않은 생각따라 말을 하면 횡설수설(橫說竪說)이 된다.
횡설수설은 말이라고 해야 하는가, 말이라고 할 수 없는가 라고 장자는 묻고 있다. “그것[말]은 새새끼가 우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새새끼가 우는 소리]과 차이가 있는 것일까, 차이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새새끼가 우는 소리를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는 횡설수설을 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새새끼가 우는 소리와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장자는 다시 묻는다.
“도는 어디에 숨겨져 있다가 진실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말은 어디에 가려져 있다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가?” 6절의 둘째 단락에서 장자는 도(道)에 맞는 일과 맞지 않는 일을 어떻게 구별하며, 맞는 말과 맞지 않는 말을 어떻게 구별하는가를 묻는다. 이어서 장자는 “도는 어디에 간들 존재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말은 어디에서 쓰인들 안되는 일이 있는가?” 도(道)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말도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서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도는 조그만 성취에 숨겨지게 되며, 말은 화려함에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도(道)는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도(道)에 맞는 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조그만 성취를 이루고 나면, 도(道)에 맞지 않는데도 도(道)에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말도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쓰이고 있지만, 맞는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말을 화려하게 하면, 맞지 않는 말인데도 맞는 말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존재하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옳다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그르다고 한다.” 장자가 살던 선진(先秦)시대에는 유가(儒家)와 묵가(墨家) 사이의 논쟁(論爭)이 심하게 전개되었다. 유가는 공자(孔子, BC 551년~479년)에 의해 수립되었고, 묵가는 묵자(墨子, BC 479년경~381년)에 의해 수립되었다.
유가는 사랑(인 ; 仁)을 베풀 때 가까운 사이부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고, 묵가는 사랑(겸애 ; 兼愛)을 차별 없이 모두 똑 같이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유가는 예를 돕는 음악을 중시했고, 묵가는 사치라면서 거부했다. 묵가는 수예(手藝)와 같은 기술을 중시(重視)했고, 유가는 천시(賤視)했다. 묵가는 실용성을 지닌 장인정신(匠人情神)을 중시했고, 유가는 기기음교(奇技淫巧)라면서 매도했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려면 곧 밝은 지혜로써 해야만 할 것이다.” 장자는 유가와 묵가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의 주장이 그르다고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말들을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만약에 도(道)에 입각한 밝은 지혜를 지니지 못한다면, 둘 다 화려한 말잔치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도(道)에 입각한 밝은 지혜’는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말은 생각을 나타낸 것인데 그 생각이 일정하지 않으면, 횡설수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에서는 현대에 와서 말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이러니(irony)하게도 언어에 대한 깊은 신뢰를 한 언어분석철학 또는 논리실증주의에서 그 한계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언어분석철학의 중심에 있었던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은 그의 초기 작품인 『논리철학 논고』(論理哲學論考,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그림이론’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언어가 사실을 제대로 그려내는 그림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언어분석을 잘하여 그림을 제대로만 그린다면, 우리가 한 말은시공간 관계 없이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후기 작품인 『철학탐구』(哲學探究,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게임이론’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시공간 관계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고 보았다. 그 대신 게임마다 규칙이 다르고, 그 규칙에 따라 정당한 행위와 반칙을 가려내듯이 사람들이 언어를 상대적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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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1장]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그 대상의 오묘한 실재(實在, reality)를 보고,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그 대상의 분명한 현상(現象, appearance)을 본다.
이 실재와 현상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며 이름이 없고 있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양자는 만물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 궁극적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우리가 ‘도(道)라고 생각한 도(道)’는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항상의 도(道)’가 아니다. 만약에 우리의 생각이 일정하다면, 우리가 생각한 도는 항상의 도이다. 지금의 우리는 도를 A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래의 우리들은 도를 B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지금은 그것(道)를 도(道)라고 이름 붙이지만, 미래에는 그것(道)을 ‘뙁’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것은 임시적이며 지엽적이다. 즉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상(現象, apperance)에 불과하다. 현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실재(實在, reality)가 있다는 것이 전제(前提, premise)된다. 실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자신의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고 현상으로만 드러난다.
“진리란 현상에만 적용되는 규정이다. 실재는 바로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리란 현상의 실재에의 순응이다.” 실재는 그 자체이면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참이냐 거짓이냐를 물을 수 없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이 참인가 거짓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 참이되기 위해서는 그 현상이 실재에 순응해야 한다.
실재는 모호하고, 현상은 분명하다. 이름을 붙여 그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이다. 실재는 모호하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다. 노자나 장자에 있어서 궁극적 실재는 도(道)이다. 그래서 도를 알기 위해서는 더욱 모호한 곳으로 가야한다. 모호한 도는 사물의 같음부분이며, 분명한 현상은 차이부분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도에 입각한 밝은 지혜는 차이를 드러내서 분명해지는 언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같음부분을 쫓아 ‘대동소이(大同小異)함’을 밝히는 쪽으로 가야한다.
대동소이함을 좇아가다보면 보다 큰 세계에 도달하여 도에 입각한 밝은 지혜를 얻게 된다. 이렇게 밝은 지혜를 얻은 상태에서는 시비(是非)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장자는 2장 제물론의 6절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어지는 강의 예고〉
▪563회(2023.11.28.) : 장자해설 (15회, 제물론), 이태호(통청원장/『노자가 묻는다』 저자 ▪564회(2023.12. 5.)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1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565회(2023.12.12.)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2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566회(2023.12.19.) : 초연결사회에 상호연결성, 나채근(영문학 박사/한국어교육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