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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곳곳을 훑었다. 올해로 3회를 맞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과연 음악영화제로서, 휴양영화제로서 어떤 꼴을 갖췄을까? 5박 6일간 제천에서 놀고 온 여행기를 공개한다.
8월 9일, 지난한 마감의 터널을 뚫고 부랴부랴 제천으로 향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이하 ‘JIMFF’) 취재는 기대와 우려가 반반이었다. 아시아 유일의 음악영화제, 휴양영화제라는 영화제의 컨셉에 따라 '일도 하고 휴가도 즐기고' 일석이조가 가능하겠다는 기대, 그래도 깊은 산속에서 과연 영화제가?라는 의문부호.
개막식 장소로 향하는 버스 차창에 얇은 물방울이 서린다. 하지만 간만에 두 눈이 시원해지는 녹음이 궂은 날씨에 대한 걱정을 단번에 가시게 한다. 개막식 장소인 청풍호반 야외무대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구불구불 2차선 도로 주변으론 벚나무가 도열해 있고, 시내에서 차로 30분을 달리면 시야가 확 트이는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개막식 직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축하공연과 게스트 소개, 집행위원장 개막선언 등 행사는 여느 영화제와 다르지 않다. 눈에 띄는 것은 국내외 영화인들이 대거 참석한 것. 임권택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을 비롯, 허진호, 민규동, 박흥식 감독, 한석규, 유지태, 윤계상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행사가 끝나고 감독과 배우 모두 음악가 출신인 개막작 <원스>가 상영됐다. 음악영화제의 출발로 썩 잘 어울리는 영화다.
폭우와 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씨의 변덕은 제천에서도 이어졌다. 야외공연이 많은 제천영화제의 특성상 관계자들은 날씨 걱정에 한숨이 늘었다. 하지만 행사가 가까워지면 신기하게 비가 그치거나 폭우가 보슬비로 바뀌었다. "하늘이 돕는 영화제”라는 농담이 여기저기서 회자됐다. 설령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도 축제의 열기를 누그러뜨리진 못했다. 매일 저녁 영화 상영 후 진행된 ‘원 썸머 나잇’에서 관객들은 비에 지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놀았다.
놓치기 아까운 JIMFF 4경
제천에선 상영시간표를 붙들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 네 군데 체크포인트만 알면 그 백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먼저, 문화의 거리. 시내에 자리한 주 상영관인 TTC 극장과 모든 행사가 집중된 문화의 거리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어서 두 군데에서만 죽치고 있어도 행사 대부분을 관람할 수 있다.
문화의 거리에 마련된 ‘JIMFF 스테이지’에서는 재즈를 테마로 한 ‘주제와 변주’ 섹션의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재즈밴드가 공연을 펼쳤다. <유러피안 재즈의 모든 것> <윌리엄 클랙스턴-사진 속의 재즈>의 줄리안 베네딕트 감독도 관객석 한편에서 재즈공연을 즐겼다. 문화의 거리는 아기자기한 행사를 치르는 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아늑했다. 영화제 기간 내내 ‘JIMFF 스테이지’에서는 탱고, 발리댄스 공연과 재즈 등의 행사가 진행됐다. 과일과 야채를 파는 할머니를 비롯한 중장년층 관객들은 생전 처음 보는 공연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고, 젊은이들은 축제의 여흥을 즐겼다.
올해 문화의 거리 내에 마련된 JIMFF 스테이지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행사는 무명 음악가를 선발해 음반을 제작해주는 ‘거리의 악사’ 콘테스트다. 40여 팀의 후보 중 단 5팀만이 무대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출연진들의 무대매너나 음악은 수준급이었다. 남미의 향기가 느껴지는 음악으로 영예의 1위를 차지한 ‘우주히피’는 부상인 기타를 받아 들고 유유자적 무대 저편으로 사라졌다. 물론 이날의 사회자로, 그리고 뒤를 이은 축하공연의 주인공인 ‘수퍼 키드’의 요란한 공연을 목 빠지게 기다린 팬들의 성원도 빼놓을 수 없지만.
제천의 주요한 상징으로 떠오른 청풍호는 빼놓지 않고 들려야 할 명소다. 8월 10일부터 13일까지 매일 저녁 벌어진 ‘원 썸머 나잇’은 제천영화제의 주요 행사였다. 특히 올해는 영국밴드 비거스와 해체 후 10년 만에 함께 공연한 유앤미블루, 특유의 폭발적인 무대매너를 자랑하는 이승환의 공연이 기대를 모았다. ‘원 썸머 나잇’은 매회 평균 2,000석 이상의 좌석을 메운 관객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첫 날의 첫 공연은 비거스. 저 멀리 영국에서 날아 온 낯선 밴드의 흥겨운 리듬에 취한 건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관객은 흡사 트롯 가수의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리듬감 있는 박수로 비거스의 음악에 화답했다. 공연을 마친 비거스는 이어지는 정원영, 한상원 밴드의 공연을 즐기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11일 토요일에 마련된 할라맨, 이승환의 폭발적인 무대와 12일의 유앤미블루, 조규찬의 원숙한 목소리까지 팬들은 한결같은 열기로 환호했다. 13일 마지막 힙합공연에선 흥겨운 비트에 거의 자동적으로 온몸이 흔들거리는 경험을 하게 됐다. ‘판 벌렸다, 놀아보자’고 작정한 관객들은 머리가 하늘까지 닿을세라 방방 뛰었다. 약속된 곡만 끝내고 사라지는 밴드에 야속한 ‘앵콜’이 이어지기도, 제 흥에 취한 밴드가 예정에도 없던 곡으로 앵콜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승환의 공연에 우르르 몰려온 팬클럽 무리들은 공연에 맞춰 그친 비를 원망해서인지 온 공연장에 물을 뿌려대며 광란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8월 11일 토요일 자정엔 ‘제천 라이브 초이스 : 장르 초이스’로 열린 ‘썸머 모던 락 페스티벌’이 열렸다. 청풍호반 수상아트홀에서 열린 ‘썸머 모던 락 페스티벌’은 장소가 주는 호젓함이 공연의 매력을 배가시킨 경우다. 서울 홍대의 ‘라이브 클럽 빵’이 주최하는 공연이 올해는 제천으로 장소를 옮겼다. 자정부터 열린 공연,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와 가수들이 출연하는 공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까 하던 걱정은 기우였다. 청풍호반무대의 규모나 화려함과는 다른 소박한 무대와 관객들은 또 다른 느낌을 줬다. 수천 명의 관객이 소리치고 뛰는 호반무대와 달리 감미로운 음색의 포크송과 관객의 호응을 강요하지 않는 밴드의 음악은 아주 편안하고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연장의 한편에서는 새벽까지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의 출출함을 달래줄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 맥주를 판매하는 가판이 마련됐다. 음악과 호수, 맥주의 조합은 기대 이상의 황홀함을 선사했다. 수상아트홀은 청풍호의 물과 바람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장소로 제격이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물소리와 음악소리는 JIMFF 4경에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JIMFF의 수많은 행사 중 가장 빨리 매진되고 경쟁이 치열한 공연은? 좌석과 스탠딩석까지 4,000여 장의 티켓이 매진됐다는 이승환의 ‘스타 나잇’도 아니요, 바비킴, MC 스나이퍼의 ‘힙합 나잇’도 아니다. 바로 ‘제천 라이브 초이스 2 : 아티스트 초이스’로 마련된 한벽루의 국악공연이다. 제천문화재단지 내에 자리한 보물 528호 한벽루에서 벌어지는 야외 국악공연의 좌석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청풍호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자리한 정자에 앉아 즐기는 국악공연이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4~50명이 적당한 간격으로 앉을 만큼의 아늑한 정자에서 별도의 음향기기 없이 즐기는 국악공연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첫 번째 순서로 청배연희단의 설장구가 시작됐다. 고난도의 연주 테크닉을 요하는 설장구는 작고 섬세한 가락과 폭발하는 듯한 폭주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리듬이 특징이다. 이어진 신들린 사물놀이 공연에 작은 정자가 들썩인다. 폭풍 같은 사물놀이가 끝나자 시원한 바람이 정자의 후끈한 공기를 식혀줬다. 뒤이어 바람을 가르는 이아람의 대금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기침도 조심스런 고요 속에 흐르는 ‘청송곡’에 지그시 눈이 감겼다.
음악영화제? 영화음악제?
JIMFF는 제천영화제, 제천국제영화제, 제천국제영화음악제까지 축하인사를 위해 공연무대에 오른 게스트에 따라 그 이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비단 3회째를 맞이한 영화제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JIMFF가 아시아와 국내 최초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아직 그 사례를 찾기 쉽지 않은 형태의 새로운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방문한 대부분의 게스트들도 주저 없이 JIMFF의 성격을 독특함으로 꼽았다. 제천영화음악아카데미의 강연을 위해 제천을 찾은 이케베 신이치로 음악감독은 “수많은 영화제를 다녀봤지만 영화음악가 자격으로 영화제에 초청된 것은 처음”이라며 “음악인들이 중심이 되는 영화제가 무척 독특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초청된 게스트들도 하나같이 JIMFF의 정체성에 색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JIMFF는 성격 규정에 대한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영화제 관계자 또한 “초기 이것이 음악영화제냐, 영화음악제냐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조성우 집행위원장은 “세계적으로 영화음악제라는 것이 별로 없고, 우리가 벤치마킹할 만큼 확고한 컨셉을 잡은 영화제도 없다”고 말한다. 지금의 JIMFF는 ‘음악영화’축제 혹은 ‘영화음악’축제라는 모호한 개념보다 ‘음악 + 영화’축제라는 것이 정확해 보인다. ‘음악영화’라는 장르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영화음악이 영화제의 중심도 아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만난 관객들은 JIMFF를 통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나 미지의 감독을 찾는 대신, 흥겨운 축제의 여흥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가족 단위 관객이 눈에 많이 띈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구에서 왔다는 한 가족은 “2회 때부터 제천을 찾았다. 한벽루의 국악공연도 훌륭하고, 다양한 행사가 여기저기 펼쳐지니 가족과 함께 즐기기 그만”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을 “영화제 마니아”라고 소개한 또 다른 관객은 “다른 영화제와 달리 활기찬 공연이 많아 축제 분위기를 즐기기 좋다”며 제천을 찾는 이유를 들었다. 관객들의 이런 반응은 JIMFF가 관객들에게 자리매김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휴양영화제'라는 컨셉에 있어서는 다소 미흡한 지점이 눈에 띈다. 청풍호 주변은 자연경관을 빼면 시내와 호수 주변의 휴양시설이 다소 부족하다. JIMFF의 조직위원장을 맞고 있는 엄태영 제천 시장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제천이라는 도시의 이미지 개선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며 “휴양영화제에 걸맞은 관광인프라를 구축 중”이라 말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라는 축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영화다. 단순히 공연과 음악의 기계적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두 장르의 예술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더욱 빛이 난다. 국제영화제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영화가 지속적으로 프로그래밍돼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프로그래밍 면에서 보자면 3회를 맞이하는 JIMFF의 상영작들은 나날이 음악영화제라는 틀에 걸맞게 진화 중이다. 특히 일렉트로닉 음악의 거장인 독일의 음악가 마누엘 궤칭의 음악에 맞춰 F.W.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유령의 성>을 상영한 '시네마 콘서트'와 재즈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채워진 ‘주제와 변주’는 음악영화제로서의 정체성에 더없이 어울리는 프로그램이라 할 만하다. 재즈평론가 황덕호 씨는 “주제와 변주에 상영되는 재즈영화들은 영화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재즈 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만족을 표했다.
관객 규모나 영화제의 운영 면에서 3회를 맞이한 JIMFF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이 예산과 규모로만 확대돼서는 곤란하다. JIMFF의 안미라 사무국장은 “국제음악영화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턱대고 영화제의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작은 도시의 영화제로서 그 규모에 걸맞게 예산이나 행사에서 알뜰한 운영을 지향하겠다는 말이다. 조심스레 국제경쟁영화제로의 확장을 예고하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영화제의 발전상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내년에도 제천을 주목하게 하는 이유다.
사진 백지연, 김주영, 김진희
조형주 기자
첫댓글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음악영화제~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