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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 집성촌에서 주목받은 아이
전북 김제시는 금만평야 지역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나라 곡창지대이다. 일제 강점기엔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이 군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수탈의 주 타깃이 되었던 곳이다. 강호빈(姜淏彬) 선교사가 태어난 곳은 이곳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원조마을이었다. 2백 여 호에 8백 명 가까운 인구가 상주하는 적지 않은 원조마을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양지 바른 곳, 그래서 인심도 넉넉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1950년대 6.25 전쟁 직후의 대부분 농촌 마을이 그랬듯이 유교 사상이 마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진주 강씨(姜氏) 은열공파(殷㤠公派) 집성촌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질서가 두드러진 원조마을이어서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며 살기엔 적합하지 않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높아 근처 도시에 나가 공부한 사람들이 교사 및 공무원으로 지역에 봉사하기도 했다. 교회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진설명 : 고 강호빈 선교사가 초등학교 때 다녔던 조종교회. 지금은 부흥하여 성전도 새로 건축하고 성도들이 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강호빈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교회를 출석했다. 하계 수련회와 성탄절 때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간 것이 교회와의 첫 인연이었다. 유교 사상의 신봉자인 할머니를 비롯해 가족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그가 혼자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은 유교 사상뿐 아니라 미신의 영향도 적지 않아 여러 명의 무당들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 영역을 흐리게 했다. 그가 조종국민(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공부도 잘 했고 마음 씀씀이가 선했을 뿐 아니라 운동도 만능이어서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게 했다.
강호빈은 마을에서 영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런 만큼 엘리트 의식도 잠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라고 마을 어른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만 봐도 어떤 ‘떡잎’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강호빈은 이리 동중학교를 거쳐 전북의 명문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급할 때 그는 1년 재수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신앙생활은 휴지기에 들어간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관심영역이 정치 쪽이었다.
강호빈의 식구들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2남 2녀의 자녀들, 호빈에게 형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아버지는 호빈이 7 살 때 세상을 뜨셨으니 호빈이 일찍이 꼬마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성심이 시집을 갔을 때 과부 두 분(시할머니와 시어머니)과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가정임을 알아 차렸다.
시할머니는 젊어서 과부가 된 분으로 뼈대 있는 집안에서 강 씨 마을로 시집을 왔다. 조카들이 교육계에 종사해서 지역에서 평판이 좋았고, 장학사 교육장 등으로 근무한 동생들로 인해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에도 할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경우가 바른 분이어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고 한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도맡으시고 어머니는 안팎일의 남자 몫을 맡아 하셔야 했다.
결혼 뒤 첫 수요예배에 나갈 때 있었던 일
성심은 결혼을 한 뒤 첫 예배 참석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당일 저녁이었다. 믿음 좋은 성심에게 공예배 참석은 당연한 의무였다. 남편과 같이 수요 밤 예배에 참석하면 좋겠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어머니에게로 갔다. 호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가족 내 종교 전쟁을 선포하시는 것 같았다.
“며늘아기는 목사의 딸이니 간다고 해도 네(강호빈)가 그럴 수 있느냐? 네 아버지는 믿지 않던 분인데, 이럴 때 네가 아버지 편을 들어야지 처(妻) 편을 들어서야 쓰겠느냐?” 무슨 전조(前兆)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윗옷을 찢고 머리를 벽에 박으며 소란을 피웠다. 놀란 사람은 신부 성심이었다. 반대는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편 호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어머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집안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흔치 않게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성심은 생각했다. 어른 공경이 남다른 호빈이 험악한 분위기를 들먹이며 당신만 다녀오라고 할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해도 고마울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렇게 일을 수습하리라 생각했다. 호빈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언제 넘어도 한 번은 넘어야 할 산, 같이 교회 다녀옵시다!”
기쁨과 무서움이 교차했다. 언젠가 한 번은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달이 너무 일찍 벌어진 건 아닐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남편의 팔을 꼭 잡고 마을 예배당으로 향했다. 성심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든든한 남편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 남편의 마음을 강하게 붙들어 주신 주님께 올리는 감사함의 눈물이었다. 그날의 일은 성심의 마음에 오래도록 간직되었다.
호빈의 어머니도 한 때 교회에 열심히 나가신 적이 있다. 속병을 고칠 심산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목회자와 성도들을 섬기는 데에도 어머니는 솔선수범하고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면서 신앙을 단련했다. 홀로 교회에 다녔던 호빈에게는 어머니의 신앙생활이 삶에 큰 힘이 되었다. 따라서 학교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는 교회 학생회를 이끌어나가는 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예기치 않게 시험이 몰려왔다. 교회와 성도들을 정성껏 섬기던 어머니에게 실족할 상황이 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후련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성도들과의 금전 문제가 걸린 것 같았다. 즉, 급하다고 해서 빌려준 돈을 한 성도가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이다. 그 문제가 교회 전체에 알려지고 목사님도 중재를 하는 듯하면서 돈 빌린 자를 두둔하자 교회에 발을 끊은 것이다.
이 사건은 호빈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덩달아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한 가지에 마음을 두면 몰입하는 형이어서 그는 교회 대신 입시 공부에 매달렸다. 우직한 성격이고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정의감에 불탔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을 모두 내어 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정치가가 되고 싶었던 중고 시절
호빈이 이리 동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동중학교는 이리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이리고등학교를 진학하도록 학교에서는 권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에게는 강권하다시피 했다. 호빈은 당시 그 지역의 명문 남성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 학교에 진학할 충분한 성적도 되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이 남성고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년을 쉬기로 했다. 재수를 한 것이다. 권한 밖으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1년 후 그는 남성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교회 대신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였다. 정치인이 되어서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사회적 약자들과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빈은 내심 다짐했다. 고려대 정외과 수석을 하여 학비를 면제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골 학생이 서울로 유학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많은 경제적 출혈을 요구했다. 장학금이 아니면 대학 공부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1차 필기시험 합격은 되었지만 성적이 바라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 2차 면접 시험에 응하지 않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았다. 가정 형편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학교가 목포 국립해양대학이다. 국립이어서 학비가 거의 들지 않고 도(道)는 달리 하지만 동향 의식이 있는 것도 마음을 끌었다. 항해사가 되고 선장이 되는 것은 그의 굵은 성향과도 맞아 떨어졌다. 호빈은 학창생활을 열심히 했다. 두 가지를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하나는 여기에서 다시 신앙생활을 재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학생회장이 되어 기량을 한껏 발휘했다는 것이다.
채권채무 관계가 얽혀 문제가 되자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내용은 앞에서 밝힌 바다. 호빈 자신도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지만 그것이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학교 기독동아리 CCC(한국대학생선교회)를 스스로 찾아가서 신앙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옳다고 하는 일은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그인지라 CCC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민족복음화와 해외선교가 그의 비전과 맞았다.
이 때 신앙 좋은 자매인 이성심을 만났다. 호빈은 성심의 신앙과 아름다운 용모에 마음이 끌렸고, 성심은 호빈의 호방한 성격과 역시 출중하고 남성다운 외모가 마음에 들어왔다. 믿음만 채워지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호빈이 성심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다. 성심은 호빈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마침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할 일이 생겼다.
어느 날 목포 지역에서 청년회 연합집회가 있었다. 성심이 집회 준비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행사 진행요원과 찬양을 할 대원이 급히 필요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호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가 청년 수십 명을 이끌고 와서 집회의 빈 구석을 말끔하게 채워주었다. 호빈에게는 가진 역량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고, 성심에게는 관심이 점증하는 기회가 되었다.
호빈이 목포해양대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범양상선에 취직이 되었다.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회사를 보란 듯이 입사한 것이다. 외항선의 항해사로 일을 했다. 선원의 생활은 좁은 공간에 격리되어 바다 위에서 몇 개월을 일만 하면서 지내야 했다. 사생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의 본능이랄 수 있는 이성적(異性的) 생리조차 제어하며 지내야 한다.
믿음의 자매 성심에게 청혼하다
호빈은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면서도 늘 성심을 생각했다. 그에게는 천사와 같은 인상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녀만 생각하면 힘이 솟아났다. 하나님께서 예쁜 자매를 통해 힘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선상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은 귀항을 하고 한 두 달이 전부였다. 귀항하는 배에서 성심에게 전보를 쳤다. 할 얘기가 있으니 꼭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성심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청혼의 얘기가 나올 것임이 분명하다.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호빈은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지만 그의 집 식구들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불신 가정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이런 마음이 일었다. 그 가정의 구원을 네게 맡기노라. 갑자기 호빈의 집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긍휼의 마음이 일었다. 불신 가정에 들어가 그들을 구원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다. 호빈과의 만남에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것저것 세상적으로 따지면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 농촌의 아들과 목사의 딸, 불신 가정과 믿음 좋은 가문. 성심은 6.25 전쟁 때 순교한 이판일 장로의 손녀이자 존경받는 목회자 이인재 목사의 딸이 아닌가.
호빈과 결혼하는 데 있어서 성심이 첫 번째 넘어야 할 산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역시 부모님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런 가정에 들어가면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것인데, 부모로서 그것을 어찌 보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 문제여서 성심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겨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불쌍한 가정을 한 명도 빠짐없이 책임지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뒤에 다 지켜졌다.
아버지의 반대가 더 심하셨다. 결혼식에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드디어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주례도 없이, 예물이나 혼수 등 아무런 채비도 없이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정말 두 사람만의 간단한 만남으로 성혼을 선포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런 것을 부모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 이인재 목사가 이리에서 목회하고 있는 후배 목사에게 연락해서 주례를 서게 했다.
이성심 사모의 가계(家系)
성심에게 할아버지가 되는 이판일 장로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까지 신앙을 지켜냈다. 6.25 전쟁으로 인한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판일 장로는 밀실에서 임자진리교회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다가 인민군들에게 발각되어 목포 정치보위소로 끌려갔다. 가족 13명과 함께 48명의 교인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이판일 장로의 장남 이인재는 당시 목포에 거주한 관계로 화를 면했다.
이인재 목사는 국군의 서울 수복 뒤, 1950년 10월 말 국군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그 때 아버지 이판일 장로를 비롯해 가족 13명이 순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군이 이인재에게 총을 주어 원수들을 죽여도 좋다고 했다. 아버지를 비롯해 일가 친척을 죽인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할 바를 여쭈었다. 말씀으로 감동을 주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뒤이어 아버지 이판일 장로의 음성도 들렸다. "내가 그들을 용서했으니 너도 그들을 용서하라" 그는 아버지의 농지 1쳔 평을 팔아서 그 지역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일가족을 죽인 원수들을 품어 가족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에 옮겼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것이 된다. 만일 이인재 목사가 원수들에게 보복을 했다면 임자진리교회의 부흥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가문의 딸 성심과 호빈의 만남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신혼의 단꿈도 잠깐, 강호빈 항해사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배에 또 올라야 했다. 성심은 서투른 농촌 생활을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몇 가지 다짐을 했다. 첫째,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을 먼저 완벽하게 처리하고 나서 자신의 일을 그 다음으로 한다. 둘째 지난 삶에 연연하지 않고 완전히 농촌의 부녀(婦女)로 생활한다. 어른들을 섬기며 농촌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성심은 옷도 일바지(일명 몸뻬) 차림,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농사에 일손을 보탰다. 허리에 통증이 오고 손이 부르트는 등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낮에는 농사 일, 밤에는 성경 읽기와 기도를 하며 독수공방(獨守空房)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바다에서 파도와 싸울 남편을 생각하면 성심은 그래도 편한 생활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성경과 찬송이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농촌으로 시집가서, 그것도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딸을 생각하면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성심의 부모였다. 부모님은 자원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간 딸을 마뜩잖게 여겼지만, 딸과 시댁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 어머니는 철야 기도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어머니의 철야기도는 이인재 목사 은퇴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성심도 부모님의 기도와 서로 통교(通交)할 수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선상생활을 하면서도 강호빈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안전한 항해를 위해 그리고 부모님과 가족을 위해, 무엇보다도 자신과 떨어져서 생활하는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예쁜 아내를 데려와서 생고생을 시킨다는 자책감에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선장을 사표내기 직전의 얘기지만, 강호빈 선교사가 직장 생활 18년에 아내와 함께 산 날 수는 3년이 채 안 되니 늘 신혼이라고 사람들이 놀려댔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든 선상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런 감사함이 통신과정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했다.
호빈이 주도하여 선상 주일예배를 드리다
그가 1등 항해사가 되고 나서 일을 벌이고 말았다. 동료 선원들은 강호빈 선교사가 ‘사건을 쳤다’고 농담 삼아 말하는 그 일이다. 매주일 강호빈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기까지 강호빈이 기도하면서 쌓은 공력(功力)이 적지 않았다. 그는 동료 선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베풀고 섬겼다. 20 여 명의 억센 선원들이 전원 예배에 참석했다고 하니 그의 섬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료의 아내들이 더 좋아했다.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 사람들의 과격성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외국 항구에 도착할 때 주어지는 며칠 동안에도 그들은 지구의 종말이 내일이라도 되는 양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강호빈과 함께 생활하고 나서 더욱이 선상 예배를 드리고 난 이후 이들의 삶에 변화가 온 것이다. 즐기는 대신 항구에 도착해서 강호빈을 따라 근처 예배당을 찾아 기도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외항선을 타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적도제(赤道祭)와 180도제라는 것 말이다. 적도를 통과하는 때에 맞추어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적도제다. 돼지머리를 가운데 두고 나물, 생선, 과일 등을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용왕에게 제사를 지냄으로 안전한 항해를 비는 의식이다. 또 선원들에게는 항해의 고달픔을 잊게 하고 새로운 기(氣)를 충전하는 기회로 삼는다. 회사에서 내규로 정해 놓을 정도로 오랜 인습으로 자라잡고 있었다. 태평양 중간쯤을 지날 때 지내는 180도제도 마찬가지다.
강호빈이 선장이 되고 나서 이것들을 없앴다. 이 제사 대신 선원 단합을 도모하는 선내 오락회를 개최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려오는 인습을 없앤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강호빈이 선장으로 일하는 그 배의 선원들은 이의 없이 강호빈의 결정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고 선원들을 섬겼는지는 당사자들과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호빈은 적도제와 180도제에 쓰일 경비를 나누어 선원들에게 똑같이 분배해 주었다. 또 항구에 도착했을 때 선장에게 주어지는 거래처의 중개 수수료(커미션)도 혼자 갖지 않고 나누어 썼다. 전례 없던 선의에 감동을 받은 선원들이 강호빈 선장의 일이라면 적극 돕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도 은혜가 더해갔다. 강호빈은 주일 선상 예배를 위해 토요일 하루를 오롯이 준비에 집중했다. 그는 연구하며 준비해서 주일 예배에 나아가 정성을 다 해 인도했다.
사진설명 : '팬 그레이스 선박교회' 주보. 그가 배를 내리기 직전의 주보인 것 같다. 등사한 것에 직접 써 넣은 글씨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가 남긴 유품 중에 배 위에서 드렸던 주일 예배 주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배 이름이 곧 교회명이 되었다. 팬그레이스 호에서 드린 예배 주보에는 팬그레이스호 선박교회로 되어 있다. 이런 선박교회가 11개나 되었다고 한다. 선상교회 주보는 필경해서 등사기로 민 것이 대부분이고 간혹 등사 잉크가 떨어졌을 때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들기도 했다. 정성 들여 만든 주보에서 하나님과 선원들을 사랑하는 강 선교사의 마음이 느껴진다.
항해사와 선장으로 일한 바다 생활은 힘든 과정이었지만 기쁨도 없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다. 뭍에 두고 온 아내 성심으로부터도 끊이지 않고 격려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아내는 남편 사역의 멘토였다. 신앙에 꼭 필요한 책들을 사서 보내오고 선원들을 위해 성경책 등 물자의 지원도 아까지 않았다. 호빈은 선박 위 생활을 생명 공동체로 생각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곧 구원의 방주다. 어디보다 강한 유대를 필요로 했다. 이런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PAN GRACE(恩惠號)」라는 선내 신문을 제작해서 선원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에게도 배포했다. 사랑의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선내 신문이었다. 이런 유의 신문은 그가 만든 것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직장에서 인정받은 강 선장
강호빈은 만 18년 동안 외항선을 탔다. 선장이 된 후 그의 삶은 상류층에 속할 정도여서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장기간 집을 떠나 있는 관계로 가족 공동체에서 이탈되어 있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떠나 있는 강호빈이나 남아 있는 아내 이성심과 강시온 강리나 두 자녀는 이것을 신앙의 힘으로 잘 극복했다. 회사에서도 강호빈 선장을 신뢰해 인수선 선장을 맡기는 등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
인수선은 배를 구입해 처음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신형이기 때문에 아무나 운전을 할 수 없는 배다. 최고의 베테랑 선장에게 맡겨지는 인수선 인도를 강호빈이 도맡았다. 책임제 선장은 항운업계에서는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선장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운항할 권한이 주어진다. 강호빈이 범양상선 최초로 책임제 선장을 맡아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말씀 위에 바로 서서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받을 수 있었던 상급이었으리라.
그러나 배를 탄지 17년 되던 해에 유난히 사고가 많이 났다. 어떤 사고는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던 적도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호빈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지켜주셨다. 그것을 몸소 체휼(體恤)했다. 이런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일에 저를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주를 섬기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정태적인 신앙에 그는 자족하지 않았다. 보다 역동적인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다. 몇 년 전부터 기도해 온 내용이기도 하다.
그가 최고의 것들을 누릴 때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 일을 좀 더 자세히 밝혀야 할 것 같다. 남편 강호빈이 뉴질랜드로 출항한 뒤였다. 뉴질랜드 항로는 선장 및 선원들이 선호하는 항로다. 큰 파도가 적을 뿐 아니라 적재 화물도 대부분 하적(荷積)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남편 호빈이 출항하고 난 며칠 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력하게 들려왔다. “배에서 내려라!” 성심은 그 음성이 선장의 일을 그만 두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기도에 깊이 몰입할 때 하나님께서 가끔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 환상은 현실이 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배를 내릴 때가 아니었다.
상황이 그랬다. 한 달 만 더 근무를 해도 월급과 연금과 진급 등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 두라시니! 성심은 기도하며 전전긍긍 속앓이를 해야 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차마 이 말은 꺼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함께 기도하는 남편이지만 신앙의 흐름이 1백 % 일치할 수는 없다. 그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배에서 어렵게 연결한 전화였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선상 전화는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여보, 나 일 저질렀어!"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단하다
남편이 전화로 대뜸 말했다. “여보, 나 오늘 일 저질렀어!” 무슨 사고를 당했거니 생각하고 숨을 고르며 물었다. “무슨 일 일어난 거예요?” 남편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그날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성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사하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강호빈이 사표를 낸 것도 그 역시 하나님 음성을 들은 뒤의 결정이었다. 성심이 들은 그 음성을 남편도 똑같이 들은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회사를 그만 두고 1년 동안 선교지를 놓고 기도했다. 또 두 사람이 동일한 응답을 받았다. 연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빈은 외항선을 타고 그 나라 바이아블랑카(Bahia Blanca) 항구에 정박해 머문 적밖에 없는 나라였다. 남미 아르헨티나로 갈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 가라시는 곳이면 어디든 순종할 마음이었으니 미지의 땅 아르헨티나로 가는 것도 기쁨이었다. 아브라함이 떠올랐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선교지가 남미 아르헨티나로 정해지고 나서 예기치 않은 제안이 들어왔다. 둘로스(Doulos)호 선교사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둘로스(Doulos)호는 비영리 국제구호단체인 ‘Good Books for All’이 운영하는 세계적인 순회 선교 여객선이다. 지난 날 한 때 이 여객선의 선장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만약 그가 선교사 제의를 받아들여서 일정 기간 사역을 한다면 언젠가는 그 배의 선장도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그 배의 선장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지역 선교사로 갈 것을 하나님과 약속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지의 땅 아르헨티나로 선교지가 결정된 기쁨의 이면에 고국을 떠나는 애상(哀想)도 솔직히 없지 않았다. 부부가 동일한 마음이었다. 그때 호빈이 말했다. “여보, 아르헨티나로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민족의 성산 백두산이나 한 번 보고 떠납시다.” 2주 정도의 일정으로 중국 연길을 거쳐 백두산 여행길에 올랐다. 1995년 7월 여름이었다. 오랜 가뭄 뒤에 온 폭우로 연길 전체가 파괴되어 엉망진창이었다. 물난리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파괴된 현장의 그 흉물스러움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또 보게 하신 걸까? 마지막 주시는 단련이라고 여기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눈물로 범벅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네 몸은 누구의 것이냐?” 성심이 대답했다. “주님의 것이지요.” “내 말에 순종하겠느냐?” “예, 주님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중국 연변으로 오겠다는 우회적 표현이었다.
전혀 예정에 없던 대답이 튀어 나온 것이다. 아르헨티나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도 후 남편이 말했다. 자신에게도 중국의 황폐한 땅으로 와서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겠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강호빈 이성심 부부는 중요한 결단이 필요할 때 늘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동일한 음성을 주셨다. 중국에 헌신하게 된 것은 이렇게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아시아로 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고 급히 마게도냐로 방향을 틀게 하신 사건이 떠올랐다(행 16:6-10). 그들은 급거 귀국해서 중국으로의 이주 준비에 들어갔다. 그동안 사용하며 누렸던 물건들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살던 집도 가전제품들도 중요한 생필품들도…. 옷 몇 벌과 책 그리고 수저 몇 벌이 전부였다. 영적 전장(戰場)으로 나가는 믿음의 군사들에겐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될 것이었다.
선교지를 중국 연변으로 정하다
강호빈이 중국 연변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학교 사역이었다. 1995년 연변에 해양전문대학을 세우고 강호빈이 중국인 동사장(董事長)과 함께 학교를 경영했다. 그는 항해과 교수와 학생처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학교의 재정과 학생 수급, 졸업과 동시에 취직까지 알선하는 최고 경영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학생들에게 따로 제자교육을 시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했다. 크리스찬 직장인을 배출하는 것을 호빈은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연변 해양전문대학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부원 교육생으로 210명, 사관 교육생으로 80명(1996년의 경우)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학생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과 공부를 하고 금요일 오후에 외출을 했다. 외출을 해서 가는 곳이 바로 강호빈 선교사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먹이고 입히며 주일 밤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 진한 신앙 공동체 생활이었다. 초대교회 신앙공동체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을 챙기는 데엔 이성심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정성과 사랑을 다 해 학생들을 거두었다.
사진설명 : 직업과 신앙 교육을 병행한 연변 해양전문대학 건물 앞에서 촬영한 강호빈 선교사 모습
그가 학교 사역에서 한 일은 ①학생들을 어엿한 직업인(선원)으로 만들어 취직시키는 것 ②제자훈련을 시켜 신실한 신앙인으로 양육하는 것 ③자원해서 사역의 후원자가 되게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강호빈 선교사 부부의 철저한 섬김에서 비롯되었다. 강 선교사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다 내 주며 베풀었다. 호빈은 13세기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늘 마음에 담고 있으면서 닮으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강 선교사가 아끼는 옷이 하나 있었다. 고급 무스탕 옷이었다. 연길에서 만난 한 학생이 그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성심 선교사가 그 모습을 보았다. 남편이 학생에게 잠시 빌려 준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잘 어울린다고 칭찬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강 교수님이 자기 입으라고 주신 거라며 몹시 좋아했다. 강호빈은 이렇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더 필요한 사람에게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들고 다니는 가방은 큼지막했다. 우람한 체격에 어울리는 가방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 가방을 주위에선 산타클로스 가방이라고 불렀다. 항상 선물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가방에 선물을 가득 담아 나갔다. 그러나 돌아올 땐 빈 가방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선물을 골라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미처 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 기회에 꼭 약속을 지켰다.
그는 두만강 근처에 석건교회(石建敎會)를 비롯해 28 개의 교회를 세웠다. 전도가 어려운 공산국가에서 이만큼의 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강호빈 선교사를 통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지중해 연안에 여러 교회를 세우셨듯이…. 그는 늘 하나님께서 하셨다며 겸손해 했다. 강 선교사는 건축 때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교회 개척엔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주민의 숫자와 교회 부흥의 전망을 고려해서 거기에 맞게 예배당을 건축했다.
처음은 처소교회로 시작했다. 연변 해양전문대학을 다니면서 제자교육을 받은 학생들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의 집이 교회가 되었다. 초대교회 때 바울의 교회 설립이 모델이 되었다.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한 빌립보교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출발한 에베소교회 등과 같이… .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것은 여러 모로 효율적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석건교회 등 처소교회 28개 개척
가정의 처소교회로 시작하기로 계획하면 먼저 그 마을 유지들을 섬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촌장 등 마을 유지들을 정성을 다 해 섬기니까 그들이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부조금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했다. 혼례 때엔 이성심 사모가 신부 화장에서부터 웨딩드레스, 사진 촬영까지 손수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전도로 연결되어 교회 부흥의 토대가 된다. 강호빈 이성심 부부 선교사는 처소교회를 돌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사진설명 : 강호빈 이성심 선교사의 주민 섬김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그것을 채워주었다. 섬김을 받는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강호빈 선교사의 전도 전략을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1)연변 해양전문대학 학생들의 제자화 2)제자들의 집을 예배처소로 삼음 3)그 제자들을 교회 지도자로 세움 4)마을 유지를 먼저 섬겨 마음 문을 열게 함 5)성결교의 사중복음 신학이 뒷받침 됨. 이런 전략 하에 그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체계적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중국의 제자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강 선교사는 정직하고 섬세할 뿐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복음 전하는 사람의 덕목을 두루 갖춘 게 된다.
강호빈 선교사는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선상 생활 중에 드린 예배의 주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중국 선교 18년 동안 꼼꼼히 기록해 놓은 일지는 바로 그의 선교 역사가 된다. 재정의 수입 지출 뿐 아니라 하루의 일정, 만난 사람과 본인의 소회(所懷),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 등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붓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액자로 만들어 후원하는 교회 및 개인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성경 말씀을 담은 액자는 두고두고 새길 수 있는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
사진설명 : 강호빈 선교사는 붓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직접 쓴 성경 말씀을 액자에 담아 후원하는 교회와 개인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강호빈 선교사 소천 뒤 그를 통해 도움을 받던 한 교회가 선교비를 받지 못했다고 한국의 후원교회에 알렸다. 후원교회에서는 분명히 지출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인이 된 강 선교사가 전달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샀다. 정직을 생명으로 알고 선교 사역을 감당해온 강 선교사가 그럴 리가 없다며 이성심 사모가 일지를 꼼꼼히 체크했다. 지출되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금액뿐 아니라 날짜와 시간, 장소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 기록을 보여주며 따지니까 자신이 잠깐 착각해서 안 받은 걸로 생각했다며 이성심 사모에게 사과하고 후원교회에도 알려서 오해를 풀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일지를 살펴보았다. 글씨체가 너무 정갈해서 마치 인쇄를 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의 섬세함이 일지를 통해 빛을 발하며 산 자들과의 연결고리가 된다고나 할까. 그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돈을 지출할 때도 이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무뚝뚝했지만 한없이 따뜻했던 사람
강 선교사는 입이 무겁기로 소문이 나 있다. 신학교 다닐 때 동학들이 그런 그에게 크레믈린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가깝게 지낸 지인들조차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입이 무거웠다. 강 선교사의 선교 사역을 공감하고 기도로 함께 한 이상욱 목사(인천 목민교회)의 간증에서 강 선교사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몇몇 지인들과 함께 중국 연변으로 가서 강호빈의 선교 사역을 직접 돌아볼 기회를 가졌었다.
사역을 주제로 토론할 때 서로 격한 감정을 토해내기도 하고 마음의 대립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감정의 앙금이 채 풀리지도 않았는데, 귀국할 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강호빈 선교사가 백두산 꿀과 송이버섯을 차에 실어 주더라는 것이다.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그에게서 따뜻한 일면을 확인하는 것 같아 울컥했다는 간증을 했다. 선물할 꿀과 송이버섯을 구하려고 밤에 먼 길 다녀오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했다. 강호빈은 간사함이 없고 계산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어서 한 번 연(緣)을 맺으면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계산하지 않는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중국 선교사로 가서도 한동안 전적으로 자비량 선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이 바닥났지만 후원자를 연결할 줄 몰라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만큼 좀 넉넉한 곳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줄을 몰랐다.
직간접적으로 강 선교사의 북중 국경 탈북자 사역 소문을 듣고 후원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후원자들이 중국 현지를 방문하고 강 선교사의 선교 사역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나서 선교비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훈훈한 이야기이다. 그가 소천(召天)할 때까지 후원이 지속되었다는 말을 듣고 같은 목회자로서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하나님의 일에서의 정직은 신앙의 본질과 직결된다.
강호빈을 중국 선교사라고 하기도 하고 북한 인권운동가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또 탈북자 구호운동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선교사라고 하는 것은 북한 접경 지역인 중국 땅에서 선교 사역을 한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북한 인권운동가와 탈북자 구호운동가는 같은 말이다. 1995년에서 1998년까지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대기근의 시기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북한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것이다. 양식을 구해 돌아가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국경이 접한 중국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강호빈 선교사가 그들을 돌보는 일을 한 것이다. 홍수로 피폐해진 중국 땅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갔으나 이젠 같은 동포인 북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탈북자들의 보호자가 되어
중국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회가 석건교회다. 이 교회를 강 선교사가 설립했다. 양식을 구하러 온 탈북자들에게 신앙의 모판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교회다. 강 선교사는 선교비만 들어오면 이들에게 공급할 물품을 구입했다. 쌀은 기본이고 옷, 신발과 양말 및 생필품을 준비해 두었다가 탈북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다. 입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탈북자들이 줄을 이었다.
사진설명 : 탈북자들에게 믿음의 모판 역할을 한 석건교회. 이 교회는 북한과 가장 근접해 있는 교회로 강호빈 선교사가 설립했다.
돈 200원(우리 돈으로 2만원 상당)을 가방에 넣어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 노동자 한 달 수입이 300원 정도였다고 하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강 선교사는 짧은 동거기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했다. 북한에 돌아가서 또는 중국에서 생활할 때에도 말씀과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초미니 성경책을 전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도 몰래 볼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성경이다.
탈북자들을 돌보며 그들의 애환을 담은 시 한 편이 전한다. 강 선교사가 남긴 유일한 시이다. 아마튜어 내음이 물씬 풍겨나지만 탈북자를 사랑한 그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시라고 여겨져 여기에 소개한다.
십자가 앞, 두만강 뱃사공
- 탈북자를 생각하며
나룻배는 모래톱에 얹혀 외로이
손 때 묻은 노(櫓) 세월과 벗해
십자가(十字架)로 화하다
굽이굽이 두만강 돌고 돌다
사람… 나라… 나누고 구별하고
먼 하늘 바라보는 뱃사공 부르다
세월 흘러 반백년
이제 눈물마저 메말라 배 삯을 뿌리치고 간
풍요의 땅 강남(韓國), 일이 좋더이다
부릅뜬 감시의 눈, 두만강에 읍소(泣訴)하나
살려 달라 살려 달라, 억울함은 안은 주검
십자가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저긴데…
대신 아낙들, 먹이 찾아 물살 가르나
물밑 고기조차 보이지 않고, 산에 환영(幻影)으로 아롱지다
조국을 등지고 선 이방 땅
뭇 남성이 모두 내 남편? 살기 위해 섬기다.
두더지 같은 생활, 운 좋게 배 채우나
생각은 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두고 온 조국 산하, 짝사랑 하며
멀리 십자가 바라보며 눈물 흘리다.
나룻배는 모래톱에 얹혀 외로이
손 때 묻은 노(櫓), 세월과 벗해
십자가(十字架)로 화하다(2001. 11. 18)
강 선교사의 후의를 입은 북한 사람들이 돌아가서 보낸 감사 편지가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돌아간 탈북자로 남OO이란 사람이 있다. 대기근 때 두만강을 건너 강 선교사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돌아가서도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의 은혜에 늘 감사했다고 한다. 멀게 만 느껴지는 북한인데, 다음과 같은 기도문 형식의 편지에서 신앙의 동재애와 친근감이 인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여 복음이 날마다 저의 마음 속에, 심장 속에 차고 넘치어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참된 신앙인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05년 11월 23일(星期, 음력 7월 7일)함경북도 청진시 수남구역 남OO”
좇고 쫓기는 긴박한 생활의 연속, 독침사건을 이겨내다
이런 감사 편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힘든 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즈음 그는 중국 공안 및 북한 정찰총국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북한 선교는 보안과 안전의 측면에서 일반적인 선교활동과는 다른 굉장히 특수한 사역에 속한다. 강도의 피습이나 사고를 위장한 테러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 자행되는 경우도 많다. 북한 당국 또한 조중 접경지역에 대한 감시와 정보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북한 보위부의 많은 요원들이 중국에 상주하면서 탈북자 색출, 송환 및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호빈 선교사는 늘 쫓기는 삶을 살아야 했다. 007가방엔 여권과 돈 그리고 카메라만 넣고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다. 탈북민 돕는 사역을 하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소중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구령에 대한 갈급함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천성(天城)에 맞춰져 있었다.
2011년 8월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그가 정체불명의 사람으로부터 독침을 맞은 것이다. 연길 시내에서 조선족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약속한 장소 앞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그를 껴안으며 주사바늘로 찔렀다. 마침 지나가던 주민이 그 상황을 보고 120(중국 응급환자 신고번호)에 신고를 해 주었다. 만나기로 한 그 조선족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상황의 위험성을 간파한 120 구급대원이 연변대학부속병원(약칭 연변병원)으로 엠블런스를 몰았다. 검출된 독극물은 브롬화네오스티그민(neostigmine bromide)이었다. 청산가리보다 다섯 배나 더 강한 독극물이라고 한다. 북한 정찰국의 소행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은 그들이 애용하는 독극물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독침을 맞고 호흡의 곤란을 느낀 강 선교사는 운전석에 앉아 몸을 기댔다. 정신이 혼몽한 가운데에서도 차창을 열어 바깥 공기가 들어와야 더 오래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있는 힘을 다 해 차창을 내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도착하지마자 의사는 호흡 곤란을 해소하기 위해 플라스틱 관을 기관(숨통)에 삽입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이성심 사모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아니, 가장 필요한 게 기도였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이었다. “너는 나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구나”(하나님). “아니, 믿습니다”(이성심 사모). “나의 전능성을 믿으면서 호흡을 관에 의지하려 하느냐”(하나님).
이성심 사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사에게 관을 빼달라고 강청했다. 담당 의사는 자신의 처방 법에 따르지 않는다며 역정을 냈다. 잠언 3장 5절 말씀이 계속 마음을 때렸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여기서 ‘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즉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이국의 병원에서 이성심 사모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담당의사에게 재차 강력하게 요구했다. 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에 사인(sign)을 하라고 했다. 그런 뒤 관을 빼 주었다. 믿음의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요구요 행동이다. 곧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관을 빼자 강 선교사는 독극물을 다 토해냈다. 음식물 찌꺼기와 함께 노란 독극물을 계속 뱉어냈다. 그러고 한참 뒤 의식이 돌아왔다. 믿음의 승리에 성심은 감사 기도를 드렸다.
죽음을 초탈한 사람
강 선교사는 건강이 급속히 회복되었다. 귀국할 일이 생겼다. 그는 사선을 넘은 일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주위에서는 중국 사역을 중단할 것을 권했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휴지기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목숨이 먼저라는 말들도 덧붙였다. 죽음의 위험을 달고 사는 그에게 당분간이라도 안전한 곳에서 쉼의 시간을 가지라고 권면했다. 이성심 사모도 걱정이 되어 남편인 강호빈 선교사에게 말했다.
“중국 가면 죽어서 돌아올 것 같은데, 그래도 갈 거예요?”(이성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독침 맞고 정신을 잃기 전 상태가 그립기조차 합니다. 아주 평안했으니까요. 천국의 삶이 그런 거 아닌가 싶소.”
죽음을 초탈해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그는 독침을 맞고 깨어났을 때 천국에 와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순교자가 될 수 없다. 순교적 삶을 사는 사람만이 순교할 수가 있다. 어떻게 사느냐 보다도 어떻게 죽느냐를 놓고 늘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다. 강호빈은 소천하기 3년 전부터 정말 그런 삶을 살았다. 옛사람과는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삶!
강호빈은 드러나는 풍모가 매섭고 강직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따뜻함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특히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발견하면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한다. 여느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하게 대할 때가 많았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던 외항선 선장 출신에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내와 두 자녀에게는 무뚝뚝한 원칙주의자로 늘 비쳤다.
사진설명 : 강호빈 선교사 가족. 오른쪽부터 고 강호빈 선교사, 아내 이성심 선교사, 딸 강리나, 아들 강시온
순교하기 3년 전, 그러니까 2009년 무렵부터 강호빈은 세상을 초월한 듯한 사람으로 변했다. 가족들에게도 너무 자상한 가장으로 바뀌어 아이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너네 아빠 맞어?”(이성심). “엄마, 아빠가 이상해지셨어요. 왜 저러시는 거지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바울이 저와 같았을까. 송이 꿀과도 같은 가족애에 모두 행복해 했다.
이즈음부터 강호빈 선교사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다. 오직 하나님이었다. 하늘나라를 동경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하늘나라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귀중한 물품에 대해 아내가 부러움을 비칠 때면 “여보, 그것 하늘나라에는 필요 없는 거예요.”라고 했고, 물질에 대한 애착을 순간적으로 보이면 “여보, 그것 아무리 좋아도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어.” 사울이 바울 된 뒤와 같이 강호빈 선교사도 전적으로 공인의 삶을 사는 듯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처럼 강 선교사의 3년도 사적 생활을 극도로 절제하는 삶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많이 닮고 싶어 했다. 목숨까지 내 놓으면서도 고통을 기쁨으로 감당한 바울을 늘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바울이 고백한 성경 구절을 좋아했다. 개척한 교회를 방문할 때 늘 다음 구절을 암송했다. 그는 연변 해양전문대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의 목회를 돕기 위해 그들의 제단에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리라”(빌 2:17-18)
강호빈 선교사는 그들을 위해 기쁨으로 달렸고, 수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다. 이런 각오였기 때문에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변 선교사역에서 강호빈 선교사가 겪은 대표적인 고난이 소위 ‘독침사건’이다. 그는 그때 자신의 생명은 잃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다시 주신 것은 남은 사역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이라고 확신했다.
독침 사건 후 귀국해 두 달을 머물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 그의 출국을 가까운 지인들은 안타깝고 슬픈 눈으로 보았지만 그는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예전처럼 다시 열정적으로 선교사역에 임했다. 감사한 것은 양육해서 세운 제자들이 각지의 예배 처소에서 자기 역할들을 잘 감당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두만강 변에 개척한 28 개의 교회를 일일이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각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지원하는 선교비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끔히 정리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였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은 슬픔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가 천국 갈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죽기 전 신변을 정리하는 것. 중국 공안 당국과 북한의 정찰총국이 은밀하게 그의 생명을 조여 오는 기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순교 현장, 58세를 일기로 소천하다
2012년 5월 27일 주일이었다. 용정에 있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연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원래는 2차선 도로였는데 공사로 인해 한쪽 차선이 막혀 있었다. 한 차선에서 마주 오던 버스와 충돌하는 사고가 난 것이다. 안타깝게도 강호빈 선교사는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차량 충돌 사고는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었다. 중국 공안 당국이 사고의 경위를 지금까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특히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중국 공안 당국이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이 있다. 시신을 담보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장례를 빨리 치러야 하지 않나, 시신을 내어 줄 테니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식이다. 강 선교사의 경우도 그랬다. 시신을 인도 받을 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시신 없는 장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진설명 : 강호빈 선교사의 죽음을 보도한 당시 한국일보. 2011년 독침사건과 2012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기사화하고 있다.
이 시대의 출중한 목회자 강호빈 선교사는 그리던 하늘나라를 이렇게 갔다. 그는 순교적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처가 쪽으로 조부가 되는 이판일 장로의 순교 정신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선교사역에서 이판일 장로의 순교신앙이 큰 힘이 된다고 자주 말했다. 또 장인 이인재 목사의 성실하고 청빈한 목회가 그에게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작은 목회를 작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물량주의 숫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교계 상황에서 그는 특별한 목회자에 속한다.
강호빈 선교사의 장인 이인재 목사는 6.25 때 순교한 이판일 장로의 아들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일가 13명을 포함해 임자진리교회 성도 48명이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인재 목사는 폭도들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그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해 진정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했다. 이런 원수 사랑의 정신이 임자진리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했다. 이인재 목사는 2008년 11월 미국 유니언재단에서 주관한 ‘제1회 원수사랑상’을 받기도 했다.
강호빈 선교사는 신앙 열정도 뛰어났지만 신학 연구도 열심이었다. 장로교 합신 쪽 신학교를 다니면서 M. Div. 과정을 공부했다. 외항선을 타면서 주경야독하며 어려운 신학 공부를 마쳤다. 1995년 중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연변대학에서 교육심리학을 공부하며 연구의 열정을 이어갔다. 그가 1999년 서울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에서 다시 신학을 공부한 것은 이판일 장로와 이인재 목사 등 선조들의 성결 신앙을 이어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국 연변에서 탈북자 사역을 하면서 성결교의 사중복음이 큰 힘이 되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강호빈의 가계는 대대로 유가(儒家)의 전통을 이어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성심이 강호빈과 결혼함으로 서서히 복음으로 물이 들어 지금은 전 가족이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고 있다. 그뿐 아니라 강호빈의 고향인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마을 100 여 호 중 한 집 빼놓고 모두 교회에 나가는 복음의 마을이 되었다. 강호빈 선교사의 아가페 사랑에 영향 받은 바 크다는 전언이다.
순교인가 순직인가?
지금 강 선교사의 신앙 유지는 아내 이성심 선교사가 이어받아 하고 있다. 1남 1녀의 두 자녀도 주 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서 아버지가 남긴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다. 아들 시온(38)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기독교 기업에서 국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대통령상까지 받은 재원(才媛) 리나(36)는 지금 아프리카 오지 감비아에서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소속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소천한 강호빈 선교사에 대해 순교 여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순교자라는 명칭은 사후 산 자들이 부여하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순교자’ 칭호는 ‘신앙에 대한 증오(odium fidei)’의 특수 상황 속에서 “고통스런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한 사람에 한해서 주어졌다. 폭력에 의한 죽음과도 밀접하게 관계된다. 강호빈 선교사의 죽음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총회 순교자특별위원회에서도 순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한 사실’이 있어야 하며, ‘죽음이 기독교 복음증거와 연결될 것’, ‘기독교 증오 세력에 의해 초래된 것’, ‘기독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용한 것’ 등의 충족 조건들을 들고 있다. 1년을 사이로 하고 독침사건과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고려할 때 순교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고 당일 강호빈은 용정의 한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갈 6:7). 세상에서는 거두는 내용물이 물질이고 명예고 사회적 지위가 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런 게 아니다. 천국 상급으로 쌓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 하나님만 당신의 책에 계상(計上)하실 뿐이다. 따라서 하려고만 하면 할 일이 무궁무진하고 하지 않으려 하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강호빈 선교사는 척박한 풍토인 중국 연변 두만강 근처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선교 사역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몸이 아파도 나갔다. 이것이 세상일이었다면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겼다. ‘강호빈 선교사 천국 환송예배’라고 했지만 58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람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르기가 그지없다.
그때 총회장 박현모 목사는 “이판일 장로의 순교정신 계승자로서 강호빈 목사의 순교적 헌신의 삶이 성결교회의 신앙정신으로 간직되길 바란다”고 했고, 장례예배에 설교를 맡은 부총회장 조일래 목사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늘 문이 열린 것처럼, 강호빈 목사의 순교로 말미암아 중국에 복음이 확장되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또한 믿는다”는 요지의 말씀을 전했다. 그렇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 줄 믿고 기도한다.
강호빈 선교사는 스스로의 일생을 네 토막으로 나눈 적이 있다. 이른바 자신 삶의 시대구분인 셈이다. ①20년-성장 기간 ②20년-육신을 위한 기간 ③20년-헌신의 기간 ④나머지-여분의 기간. 성장 기간 20년은 그의 유소년 시절 예수 영접한 결단의 시기였고, 육신을 위한 기간 20년은 항해사와 선장으로 배를 타면서 선상교회에서 활동한 시기에 해당한다. 헌신의 기간 20년은 중국 연변에서의 사역이 될 텐데, 이 기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여분의 기간에 또 다른 위대한 일들을 펼쳤을 강 선교사는 그 문을 들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58년의 짧은 생애, 그는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할 일들을 잘 감당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중국 연변에서의 탈북자를 돕는 일은 큰 위험이 따르는 사역이었다. 중국 당국의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복음화 율이 급상승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밀알의 역할을 잘 해낸 강호빈 선교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애송했던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시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
* 이 글은 강호빈 선교사의 아내 이성심 선교사와 강 선교사의 남동생인 강해인 집사 등 가족 그리고 가까이 지냈던 동료 목회자들의 증언과 강 선교사가 남긴 기록에 근거해 작성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