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을 장식했던 서린호텔,
그리고
청계천 출발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동아일보 사옥 쪽으로 나와
청계천 입구에 접어들면 왼편에 베니건스 간판이 보이는 고층 건물이 눈에 띕니다.
‘청계 11(일레븐)’ 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신문사 ‘머니투데이’를 비롯해 여러 회사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는 오피스빌딩입니다.
이 건물에서 시작해 청계천로를 따라 모전교를 지나 광교까지
왼쪽으로는 서린(瑞麟)동이 오른쪽으로는 다(茶)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도1(검정선 내부가 서린동 회색선 내부가 다동)
‘서린동’하면 서울 도심에서 직장 생활을 한 40-50대들에게 무교동과 함께
먹자골목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이 동네에는 낙지집과 대구탕집 따위의 음식점들이
밥때가 되면 쏟아져나오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성업중입니다.
이
동네는 1960,70년대 강북이 서울의 강자일 때가 최전성기였습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80년대 이후엔
시내의 그저 그런 오피스타운의 하나로 전락한 이 동네에
30년 이상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으면서
주변의 영고성쇠를 말없이 증언있는 건물이 앞서 소개한 청계 11 빌딩입니다.
사진1>청계11 빌딩. 2008.12.17 이진성
서울시 중구 서린동 149번지. 지금은 부근의 엇비슷한 높이의 건물들 사이에서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오피스빌딩이지만
1992년까지만 해도 ‘서린호텔’이라는 이름을 단 유서깊은
숙박시설이었습니다.
옛적 사진을 보실까요?
사진2>지금의 씨티은행 부근에서 바라본 서린호텔 김한용사진연구소
옛
신문을 뒤져보니현재와 같은 건물은 1973년 9월 1일 호텔로 문을 열었습니다.
대지 510평, 건평 4299평에 70미터 높이 20층 건물이니
당시 초고층 빌딩으로 대접받을 만 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 호텔은 1968년 4월 관광호텔로 등록한 뒤 영업하던
4층 건물을
1972년 말에 증축해 재개장한 것이랍니다.
객실은 65실에서 228실로 늘었고요.(매일경제 1973년 8월 31일자)
사진3>사진2의
확대 김한용사진연구소
서린호텔는 1968년
호텔이 되기 이전부터 여관으로 잘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우선 문필가 이병주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해 5월’을 보면
서린호텔의
전신인 서린여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병주 하면 40대에
늦깎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일가를 이룬,
그를 기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한국의 발자크’……
가 될 뻔한 작가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인데요,
‘그 해 5월’은 5.16 쿠데타가 나던 1961년 5월이 배경입니다.
소설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그 무렵만 해도 서린여관은 한국적인 정서와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외벽을 겸한 행랑풍 건물의 중간에 있는 대문에 들어서면 좁다란 뜰이 있고
뜰 한가운데 회랑을 두른 건물, 그리고 그 둘레에 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
요컨대 서린여관은 그만한 풍류를 새겨놓고 있었다는 얘기다.”
구상 시인 추모문집인 ‘홀로와 더불어’에도 서린여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서린호텔은 광화문 근처 무교동 초입, 지금은 ?±沮냇嗤?
소방서(인용자 주-블로그에서 다룬 바로 그 경성소방서입니다)에서
얼마 멀지 않은 모교 다리 옆에 있었다. 한옥으로 지었으나
커피숍만은 서양식 건물로 1970년대는 꽤 호와로운 찻집이었다.”
서울 도심의
여느 호텔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숙박’이라는 본연의 용도 외에도 각종 정치적,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돼 왔습니다. 그
자취를 조금 살펴볼까요?
-빛바랜 사진 속 이야기가 됐지만 1986년 7월 8일 서린호텔에서는
DJ-YS 두 사람이 조찬 간담회에 참석해
개헌안과 구속자 석방 문제를 논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재경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씨가 쓴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엔
강 씨가 실무자 시절
서린호텔에 방 잡아놓고 금융실명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밤새며 만들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정형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도 서린호텔과 뗄 수 없는 기억이 있죠.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살해당했는데요,
오마이뉴스 2002년 10월 13일자에 따르면 바로 그날 밤 치안본부의 요청으로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가 소집되는데 장소가 서린호텔이었습니다.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이던 정형근
씨도 참석하는데 이 자리에서
그 유명한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발표문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진4>사진2의 확대. 호텔 현판과 마크 김한용사진연구소
사진을 확대해 보다보면 원본 크기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재미난
사실도 확인됩니다
서린호텔의 영문 표기는 ‘Seoulin Hotel’입니다. 직역하면 ‘서울 안 호텔’인데
그래서인지 김포공항에 내린 외국인들이 이 이름을 쉽게 기억하고
즐겨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름짓기가
지금 봐도 센스있지 않습니까?
사진5>사진2의 중앙 부분 확대
김한용사진연구소
확대한 사진 한장 더 볼까요?
‘혼식분식’이라는 옥상 전광판이
눈에 확 들어오는 감리회관 건물로
지난 1986년 서울 도심 재개발로
헐리게 됩니다
이자리엔 지금 동화면세점 빌딩으로
잘 알려진 광화문빌딩이 들어서 있죠.
사진 속 건물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총력저축의 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타이핑과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무 인력의 필요성을 반영하듯
타자학원과 외국어학원이 입점해
있었네요.
이제 이 사진들이 언제 촬영됐는지 한번 추적해
볼까요?
사진6>사진2와 같은 시기 촬영 김한용사진연구소
지금의 다동 한국관광공사 자리쯤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 아랫부분은 무교동과 다동, 윗쪽은 서린동인데
사이을 가로지르는 청계천로는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입니다
이 동네를 왕복4차선의 20미터 도로가 50미터로 확
넓어지는 시기,
언제쯤이었나 묵은 신문을 찾아봤더니 1976년쯤이더군요.
‘헐리는 밤의 환락가’라는 제목의
1976년 3월 9일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합니다.
"서울시의
도심 재개발 사업에 따라 (…)광교-중부소방서 앞까지의
노폭확장공사를 위해 주변건물의 철거작업이 지난2월부터
시작되면서
무교동은 어수선해졌다.무교동 일대에는 230여
개의 유흥업소들이 밀집,
밤의 낭만을 구가해 왔는데 이번에 헐리게 되는
업소는 모두 64개(…)
서린동이라고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시차는 좀 있었지만 재개발의 손길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사진 우상단 서린호텔에서 회집까지의 건물들은
1984년 도심 재개발 계획에 따라 하나 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SK에너지와 SK 서린빌딩, 한국개발리스 건물들이
잇달아 들어서게 됩니다.
특히 맨 위 지도에 표시된 SK 서린빌딩 자리엔
원래
1960년대 젊은이들의 통기타 문화를 이끌던 음악감상실
‘세시봉’이 들어서 있던 스타다스트호텔이 있었습니다.
사진7 이진성
그리고 지금은?
청계천이 흐르고 왕복 4차선의 도로가 놓여 있죠
사진2와 비슷한 자리에서 지금의 청계11 빌딩을 찍어봤습니다.(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