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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백범 김구선생 묘역 전경 |
서울 효창공원(사적 330호)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이곳은 본래 조선 제22대 정조의 큰 아들로 5세에 죽은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던 자리이다. 그 후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宜嬪) 성씨(成氏), 순조의 후궁인 숙의(淑儀) 박씨(朴氏), 숙의 박씨의 소생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안장되었다. 일제가 1924년 6월에 효창원의 일부를 효창공원으로 개발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무덤을 모두 서삼릉(西三陵, 고양시) 경내로 옮김에 따라 효창원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
▲ 임정 요인의 묘역을 지나서 뒷편에 위치한 원효대사상 |
▲ 김구선생 묘역 뒷편을 지나며 사진 한 컷 |
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 조국 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의사(義士)의 유해와 안중근(安重根)의사의 가묘(假墓)를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에 국민장(國民葬)으로 안장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의장과 주석을 지낸 이동녕(李東寧)과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을 지낸 차이석(車利錫)의 유해와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하고 귀국 후 서거한 조성환(曺成煥)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자 국민장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부근 일대가 선열묘역(先烈墓域)으로 변하였다. |
▲ 효창공원을 우측으로 한 바퀴 거의 돌아나오면 김구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김구선생 묘역 입구 전경 |
김구(金九, 1876.7.11~1949.6.26) 선생은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 김구선생 묘역에 올라서 내려다 본 삼의사의 사당인 의열사(좌측 사진)와 김구선생 묘역 계단(우측 사진) |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
▲ 백범 김구선생 묘역 |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
▲ 김구선생 묘역내 장명등과 묘비 방향에서 바라 본 묘역 |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
▲ 김구선생 묘지 봉분과 묘비 |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
▲ 좌측면에서 바라 본 김구선생 묘역 |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
▲ 측면에서 바라 본 김구선생 묘역 |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하였다. |
▲ 김구선생 묘역내 장명등과 망주석 |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 발췌 - |
▲ 백범 김구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사진 우측 건물이 백범 기념관입니다. |
좌청룡 우백호 얼싸안고 땅기운이 응결된 도심 속 명당
21세 때 일본군 육군 중위 스치다(土田) 밀정을 의살(義殺)한 후 사형이 확정돼 형집행 직전 광무황제의 '전화 특사'로 살아 났다. 전화가 아니었으면 백범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백범은 서울 효창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누워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장래를 근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한평생 소원이었던 통일조국을 못 이루고 아직도 갈라져 있는 이 강토를 내려보며 영혼은 얼마나 안타까워 할까.
정 선생은 "서울 등 도심에서 사신사나 용맥을 살필 때는 마음속으로 모든 건물들을 허물어 버려야 된다"면서 "전후좌우를 가로막은 건물들이 비록 충사로는 작용할지언정 지기(地氣)마저 끊지는 못한다"고 안심시킨다. 도심지에도 제대로만 찾으면 명당은 있다는 얘기다.
사실 효창공원의 내력을 알고 나면 누구나 보통 자리가 아님을 금세 알게 된다.
이봉창 의사 동상을 바라보며 의열사를 끼고 돌면 삼의사 묘역이다. 문효세자가 묻혔던 자리다. 나경을 펼쳐 드니 임좌(북에서 서쪽으로 15도 기운 방향) 병향(남에서 동쪽으로 15도 기운 방향)으로 거의 정남향에 가깝다. 과연 명당길지다. 백범 묘의 능선이 우백호로 감싸고 좌측의 임정요인 묘역이 좌청룡으로 포용하여 국세가 더욱 안정된 느낌이다. 안산은 한강대교 중간의 노들섬이다. 무심코 참배만 하러 다니다가 풍수학인으로 접근해 높다란 건물들을 마음속으로 철거해 보니 이런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다만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지 못해 가묘로 남아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
효창공원 백범 김구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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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효창공원 좌측에 백범 김구선생 묘역, 중앙에 삼의사 묘역, 우측에 임정요인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소재지 : 서울 용산구 효창동/청파동2가 일원 공덕역/효창공원앞역/남영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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