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존을 천국에서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는 영원한 옥좌에 너무나 가까이 있을 테고, 우린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는 거의 보이지 않을 것이다.”
("I fear not, for he will be so near the eternal throne and we at such a distance, we shall hardly get sight of him.")1)
- 초기 감리교 운동 내에서 칼뱅주의 감리교 운동을 이끌었던 조지 휫필드, 어떤 이가 존 웨슬리를 천국에서 볼 수 있을지를 묻자 한 답.

<조지 휫필드의 초상화, 존 러셀 작, 출처 : 위키피디아 영문판>
존 웨슬리의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이며 라이벌이었던 조지 휫필드의 이 말에는 중의성이 엿보인다. 한편으로는 일생에 걸쳐 우정을 나누었던 한 친구에 대한 사랑의 의미였을 것이고, 삶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구현한 대(大)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 주류 개신교(특히 청교도) 신학 및 교의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친구이자 동지였던 조지 휫필드로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당시 존 웨슬리 신부의 신념과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필자의 전 텍스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웨슬리의 삶과 가르침을 2차원적인 스펙트럼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가 이른바 ‘복음주의’ 운동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웨슬리안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 내에서 이어져 온 (칼뱅주의/개혁주의에 기반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특히 국내에 잘 알려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톰 라이트,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성공회 작가들을 중심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이는 그의 신학적 기반이 고교회파 성공회에서 출발했던 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웨슬리안 신학에 내재된 사회정치적 실천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성이야말로 이른바 ‘후기 현대(Postmodern)’를 거친 오늘날 우리가 웨슬리 신부의 삶과 신학을 재조명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추구해나가는 신비를 임의적인 (때로는 자의적이기까지 한) 기준만으로 규정짓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그러한 태도로 (비그리스도교 이웃종교인들은 고사하고) 다른 전통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각자가 서로에 대해 가진 편견을 내려놓고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웨슬리의 방황, 구원과 성화를 향한 추구는 이러한 현대적 의문과 맥이 닿아있다.
앞으로 필자는 4부에 걸쳐 웨슬리 신부의 삶의 궤적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2천년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주제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바로 자유의지이다. 이 복잡한 신학적 문제를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은 필자가 굳이 다루려는 이유는, 개신교 성직자 존 웨슬리를 가장 궁지에 몰아넣었던 주제임과 동시에, 이와 관련한 논쟁이 단순히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신학의 테두리를 넘어서 인문사회학, 심리학, 윤리학에 걸쳐 있다.
(다음 회에 계속)
1)https://en.wikipedia.org/wiki/John_Wesley#Advocacy_of_Arminianism 참조, 번역은 필자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