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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Ⅲ. 경제권 수호운동
3) 한국 어민의 항거운동
기술한 바와 같이 한일통상장정 제41관의 규정에 따라 일본인의 한해밀어가 합법화되고, 또 이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하여 일본인의 한해침어는 본격화되어 갔다. 그리고 그들의 침어양상도 반적·반어(半賊半漁)의 성격 내지 불법적인 난폭성을 띤 것이어서 자연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지극하게 되었고, 또 당장 생업의 위협을 받게 된 어민층은 본능적인 자기방어의 충격에서 침어자에 대한 항거운동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상장정 이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침어자로부터 어권을 수호하려는 한국 어민의 항거운동, 즉 어권수호운동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즉, 침어자의 내도를 관부(官府)에 애소하고 관부로 하여금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저지시키려는 애소항거(哀訴抗拒)형태, 침어자에 대한 집단폭행 또는 살상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폭력항거(暴力抗拒)형태, 근대적 어업회사의 창설을 통한 경쟁력의 강화로 침어자에 대항하려는 식산흥업(殖產興業) 형태, 침어자의 어업활동을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방해함으로써 자신의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조업방해(操業妨害)형태, 조직적인 무장집단(의병 등)에 가담하여 침어자를 구축하려는 무장항거(武裝抗拒) 형태 등이 그것이다.
(1) 애소항거운동
애소항거형태의 어권수호운동은 주로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는데, 그 경위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 연안은 양질의 전복과 해삼 등의 서식처여서 제주도민의 중요한 생업자원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본 바와 같이 한일 통상장정의 체결로 전라·경상·강원·함경 등 4도 연안에서 일본인의 한해침어가 합법화되자 일본인 침어자들은 제주도 연안에 출몰하여 잠수기 어업을 감행하게 되었고, 이에 생업의 위협을 받게 된 제주도민은 일제히 궐기하여 일본인의 제주침어를 저지해 줄 것을 관부에 애소하는 항거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종 21년(1884) 5월 대마도인 고옥이섭(古屋利渉:후루야)의 잠수기 어선 3척이 제주도에 나타나 조업을 개시하려 하자 제주도민은 일제히 일어나 일본인의 침어를 막아 줄 것을 제주목사에게 애소하였고, 이를 제주목사와 전라감사는 정부에 보고하면서 제주도는 외딴 섬으로 백성들이 어업에 의존하고 있으니, 통리아문으로 하여금 일본공사와 교섭케 하여 백성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제주목사는 도민의 애소에 따라 고옥(古屋)의 어업을 중지시켰으며, 정부측은 수차에 걸친 일본공사와의 교섭끝에 고종 21년 9월에 이르러 그것이 비록 시한부의 잠정조치이기는 했지만 일본인의 제주통어를 금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옥(古屋)은 인천주재 일본영사를 통하여, 고종 21년 8월에 이르러서는 지난 5월의 제주출어 경비조로 4,294원의 손해배상금을 한국정부에 요구하는 한편, 동년 10월에 잠수기 12대를 갖춘 어선단을 이끌고 다시 제주도 연안에 나타났다. 이에 제주목사는 통리아문의 지시가 없다 하고 조업을 다시 금지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쳐서 조업 금지를 당한 고옥은 그후 구한국정부에 대하여 도합 23,984원에 달하는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해 왔다. 이 배상문제로 결국 구 한국정부는 고종 23년(1886) 12월 6일에 이르러 고옥이섭 제주어채조합동(古屋利渉濟州漁採條合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일본인 어업자와 맺게 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고종 24년 3월부터 6개월간 고옥에게 제주도 연안어업을 허가하고, 향후에 어업세문제가 타결되면 고옥의 어선에 대하여는 5년간의 면세조치를 취할 것이며, 한국정부는 6,600원의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기화로 하여 고옥은 일본인의 제주통어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리아문의 어업특허장을 받아가지고 고종 24년(1887) 4월 30일 제주출어를 감행하게 되었으며, 이에 제주도민의 애소항거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고옥의 잠수기 어선단이 제주도에 나타나자 제주도민들은 날마다 제주목에 몰려와 고옥의 조업을 금지시켜 줄 것을 애소하였다. 즉 “본 도의 해변은 바로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읍니다. 6개월의 허가는 고사하고 1개월만 채어를 허가해도 살아갈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라고 제주목사에게 애소했으며, 이를 제주목사는 통리아문에 보고했으나 통리아문은 “지금쯤 일본어선이 도착했으리라 생각한다. 백성들을 효유하여 일본 어부의 조업을 방해하지 말도록 하고, 6개월간에 어찌 해도의 복을 다 채취해 갈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처음 본데 놀라 동요되어 떠드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이는 관장이 진정시키기에 달린 것이다”라고 오히려 통리아문은 강경하게 고옥의 어업을 방해하지 말도록 하라고 제주목사에게 지시하였다.
이처럼 제주목사에 대한 애소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제주도민은 그들 스스로가 어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와 어채를 맨손으로 저지시키려 했으나, 장검을 휴대한 고옥의 어부들이 상륙하여 모슬포민 1명(이만송)을 살해하고 가축을 약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도민들은 일제히 궐기하여 폭력으로 침어자들을 구축하려 했으나, 제주목사 및 고로 등의 설유로 방침을 바꾸어 폭력 대신 도민 15명을 상경케 하여 일본인의 제주침어를 금지시켜 줄 것을 통리아문에 직접 애소토록 하였다.
3년 후인 고종 27년(1890) 5월 17일에는 제주도의 배령리에서 일본인 어부가 상륙하여 행패를 부리는 것을 저지하던 주민 1명(양종신)을 장검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에도 제주도민 100여 명이 상경하여 일본인의 제주침어와 그들의 상륙결막(上陸結幕) 등 불법행위를 금지시켜 줄 것을 통리아문에 호소하였다. 그 후 제주도 금어(禁漁) 만기일(1891년 11월 30일)이 가까와지자 구한국정부는 고종 28년(1891) 3월에 순심관(巡審官) 이전(李琠)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도민을 효유케 하였는데, 도민들은 일본인의 제주침어를 영구히 금지시켜 줄 것을 주장하면서 일제히 일어나 순심관 이전을 구타하였다.
그리고 일본인의 제주금어기한이 만료된 고종 29년 4월에도 제주도민은 일본인의 침어로 도민이 실업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살인작폐가 극심하니 일본공사와 교섭하여 일본인의 제주출어와 상륙결막 등 불법행위를 막아달라고 애소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고 이때에는 이미 제주도 일원에 일본 어선이 충만하여 제주도의 어업은 일본인 침어자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고 있었다. 이처럼 제주도민은 그들의 불리한 지리적 여건으로 소극적인 애소항거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미 주권의 일부를 박탈당한 구한국정부의 외교적 역량과 일본인 침어자들의 난폭한 횡포하에서는 무력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애소항거형태의 어권수호운동은 제주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있으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 폭력항거운동
일본인 침어자가 늘어나고 그들의 무법적인 작폐가 우심해지자 그에 대한 한국 어민의 대응양상도 그것이 비록 우발적이며 산발적인 것이기는 했으나 폭력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었다. 특히 청일 전쟁 전후기를 통하여 일본인의 한해침어는 급증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의 작폐, 즉 살인·약탈·폭행·강간 등의 행위가 고조되어 갔다. 이에 민족의식이 자극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업의 위협을 받게 된 한국 어민 등은 침어자를 습격하여 살해하거나 혹은 집단폭행 등을 가함으로써 스스로의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폭력항거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 30년(1893) 5월에는 전라도 흥양군 거문진 황제도에서 어로 중이던 일본인 어민 3명이 주민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으며, 건양 원년(1896) 3월에는 강원도 울진군 죽변만에서 동 지역의 어민들이 어로 중이던 일본 어선을 습격하여 일본인 어부 15명을 살해하였고, 동년 3월 강원도 고성군 영진에서도 정박중인 일본 어선 2척을 동 지역의 어민 등 10여 명이 습격하여 일본인 어부 4명을 납치하여 그중 1명은 동 14일에 살해하고, 나머지 3명은 동 20일에 살해하였다. 또한 광무 6년 6월 12일에는 함경도 안변군 압융동에서도 마을에 나타나 음주중이던 2명의 일본인 어부를 동민들이 습격하여 그중 1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어민들은 침어자를 습격하여 집단폭행을 가하거나 혹은 집단난투극을 벌임으로써 일본인 침어자들에게 적지않은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고종 25년 7월 통영에서는 어민들이 일본 어선 3척을 습격하여 그 가운데 1척을 파괴하고 일본인 어부 8명에게 상해를 입혔으며, 고종 27년 2월에는 남해에 표도한 대마도 어민을 주민들이 구타하고 억류한 일이 있었고, 또 동년 6월에는 통영지방의 어민들이 두 명의 일본인 어부를 구타한 일이 있어 부산주재 일본영사는 그에 대한 배상금으로 68원 50전을 요구해 오기도 하였다. 또한 건양 원년(1896) 3월 23일에는 전라도 영암군 도포에서 어민 4~50명이 정박 중이던 일본 어선을 습격하여 일본인 어부 4명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다음 그들을 3일간이나 감금해 둔 일이 있어 일본공사는 범인을 체포하여 엄벌에 처해 주기를 요구해 왔다.
한편 각 지역의 연해민들은 일본인 침어자들의 행패, 특히 부녀자 희롱, 어장 침범 등에 격분하여 집단적인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광무 6년 9월 웅천군 모도에서는 부녀자를 희롱하는 일본인 어부들의 행패에 격분한 어민들이 집단적으로 일본인 어부들과 난투극을 벌임으로써 피아간에 6명의 부상자를 낸 일이 있었고, 광무 9년 6월에는 거제도 동남단 조구미만 해상에서 일본인 어부들의 어업방해에 격분한 이 지역 어민이 일본인 어부와 집단난투를 벌여 피아간에 14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또한 융희 3년(1909) 4월 17일에는 부산 서남방 낙감수리 해안에서 일본인 어부 10여 명이 동 지역 어민의 공동어장을 침범하게 되자 이를 구축하려는 동 지역 어민 200여 명과 일본인 침어자 11명 사이에 집단난투가 벌어졌는데, 중과부적으로 일본인 어부들은 도망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한국인 어부 5명이 부산경찰서에 연행되어 갔다.
(3) 식산흥업운동
일본인의 한해침어는 주로 그들의 반적반어(半賊半漁)행위 또는 각종의 불법행위 등을 통하여 한국 어민에게 직접적인 생업의 위협을 가했지만, 간접적으로는 한국어민보다 앞선 그들의 어업기술면에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자극을 주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의 어선·어법 등이 한국인의 그것보다 우수하여 낙후된 종래의 전근대적 어선·어법으로는 침어자에게 대항할 수 없었으며, 이에 일부의 어업관계자 등은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어업회사를 창설함으로써 침어자에 대항하고 그들을 구축하려는 식산흥업형태의 어권수호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동기에서 1880년대 말부터는 몇 개의 어업회사 내지 수산단체 등이 한국인에 의해서 설립·운영된 바 있는데, 그 사례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최초로 창설된 근대적 어업회사는 고종 25년 말(1888)에 설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해산회사(海產會社)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서일기(統署日記)』가 반증해 준다. 즉 고종 25년 10월에 해산회사 사원 허고(許▼(王+高))가 포경업으로부터 멸치어업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어업을 영위하기 위해 자본금을 모아 어업회사를 창설하고 동남 연해에서 새로운 어법(漁法)을 시험코자 하니 이를 허가해 달라고 통리아문에 신청했으며, 통리아문은 이를 허가하고 해산회사의 어업활동에 필요한 수용품 등을 지원해 주도록 4도 연해의 각 지방관에게 지시하였다. 그리고 해산회사측은 새로운 어구·어법을 도입하기 위해 동년 10월에는 사원 김지성(金智性)과 유경(劉坰)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어업기기를 구입해 오도록 하고, 이듬해인 고종 26년(1889) 7월에는 동 해산회사가 일본인 어부를 고용하고 일본 어구를 갖추어 동남 연해지역에 재차 시험 조업을 떠났으며, 이리하여 해산회사는 고종 27년 1월 일본어선 22척과 일본인 어부 256명을 고용하는 근대적 어업회사의 면모를 갖추고 어업을 영위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당시의 총세무사 서리 사납기(史納機)는 해산회사에서 고용하고 있는 22척의 어선은 결국 일본어선이므로 통어장정 제2조의 규정에 따라 소정의 어세를 납부케 해야 하며, 또 어획물을 타국에 수출할 경우에도 종가 5%의 수출세를 부과·징수해야 한다고 통리아문에 품의하였다.
그후 해산회사(海產會社)는 관리 등의 토색으로 그 발전이 저해되기도 했으며, 또 직원의 비리 등으로 일반 어민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주식을 증모하여 각 지역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주요지역에 어시장을 개설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어업의 근대화에 기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종 30년(1893) 4월에는 부산에 거주하는 홍덕수(洪德壽)가 일본인의 어선 3척을 고용하여 전라도 남해안 일대에서 근대적인 어업을 시도하였고, 건양 원년 1월에는 상인 김기룡(金基龍) 등이 농상공부의 허가를 얻어 근대적 어업회사의 창설을 시도했는데, 특히 창업자인 김기룡 등은 회사 설립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즉 많은 한국인이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데, 근래에 와서 일본인들이 정교한 기기를 가지고 어리를 탈취하고 있어 본국인이 실업상태에 있으므로 자금을 모아 일본의 어선과 어구를 구입하고 또 일본인을 고용하여 어업을 개발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의도한 어업회사가 창설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광무 10년(1906) 6월에는 해산협동회사(海產協同會社) 사원 최익환(崔翊煥)·박인식(朴仁植) 등이 어업 진흥을 위해 기계선과 새로운 어법의 도입으로 경상남북도 및 덕원항 등지에 회사를 설립하여 영업을 개시하겠다고 농상공부에 청원했으며, 동년 7월 20일에는 동사 사장 김익승(金益昇)이 어업 진흥과 수산물 유통의 편의를 위해 경상·전라 양도 연해의 요충지인 동래항 연안에 어시장을 개설하겠다는 것을 다시 농상공부에 신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농상공부가 허가하자 곧 통감부는 이로 인하여 일본인의 어업활동에 지장이 많으니 해산협동회사에 대한 허가를 즉시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따라서 해산협동회사는 설립과 더불어 통감부의 압력으로 구체적인 영업활동은 수행하지 못한 것 같다.
또한 광무 10년 9월에도 윤시병(尹始炳) 등이 15개조로 된 대한어업조합회장정(大韓漁業組合會章程)을 농상공부에 제출하고 회사 설립의 허가를 청원하였다. 이 장정의 내용을 보면 그 설립목적은 연안어업의 진흥에 있고, 회사형태는 자본금 5만환의 주식회사형태로 하며, 본사를 원산항에 두고 함경남북도의 연안어업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어로·어구 및 기타의 시설 확충, 어채법의 연구 및 실습 등을 위한 수산과의 설치, 수산물 유통의 원활화를 위한 어시장의 개설, 수산제조업 등을 수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함경남도 관찰사 정봉시(鄭鳳時)의 방해에 직면하여 그 설립과 활동이 정관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정봉시가 이 회사의 설립을 방해하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것도 통감부의 압력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4) 조업방해운동
침어자에 대한 한국 어민의 대응형태는 침어자의 어업활동을 방해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그리고 침어자의 어업활동을 방해하는 방법도 다양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어구(漁具)나 선구(船具) 등 생산수단을 은밀히 탈취 또는 유실케 함으로써 어업활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전라도 죽도에서는 주민들이 일본인의 어구와 금품을 강제로 탈취한 사례도 있었지만, 청일전쟁 이후에는 죽도와 연도 등지에서 그 주민들이 주로 야음을 이용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일본인의 어망을 절단·유실케 함으로써 침어자들의 조업을 방해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리고 세죽포와 욕지도 부근에서도, 주민 등이 야음을 틈타 일본인의 어구 및 선구(닻과 노 등) 등을 절취함으로써 침어자들의 조업을 중단케 한 사례가 종종 발생하였다.
한편 침어자들이 그들의 어업근거지에 구축해 놓은 우물을 파괴하거나 또는 사용불능케 함으로써 조업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의 각 도서(죽도·연도·완도·제주도·돌산도·진해연안 등)에서는 일본인 어부들이 어업근거지에다 식수용으로 파 놓은 우물을 주민들이 은밀한 방법으로 파괴하거나, 혹은 불결한 오물 등을 투입함으로써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여, 침어자들의 조업에 큰 지장을 주었다. 이에 목포주재 일본영사는 조선해 통어조합연합회(朝鮮海通漁組合聯合會) 측의 요청을 받고 한국의 지방관에게 이러한 조업방해가 없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연해민 등이 관원임을 사칭하거나 또는 관원을 가장하여 어업면허증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침어자들의 어선을 압류함으로써 조업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경상남도 장기군 구룡포 및 모포 등지에서는 주민 등이 스스로가 관원임을 자처하고 조업중인 일본 어선을 임검하기도 하고, 혹은 해관면장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침어자의 어선을 압류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침어자들은 근처의 지방관아에 몰려가서 항의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연해민들이 둔취하여 집단적인 시위형태로 일본인의 어업활동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함경도 경성군 양화, 명천군 황진, 길주군 유진, 이원군 군선·차호, 북청군 신포, 홍원군 마양도 이구미, 영흥군 송전만, 강원도 삼척군 불래동, 경상도 영해군 축산포 등지에서는 연해민들이 둔취(屯聚)하여 질병의 유행을 구실삼아 일본 어선의 입항과 기항 등을 투석으로 방해하기도 했고, 경상도 거제군 율포와 탑포 등지에서는 주민들이 둔취하여 천초를 채취하는 침어자들의 조업을 위협하기도 했으며, 사양도 외지동에서는 주민들이 일본인의 어막 주변을 집단적으로 배회하면서 간접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업근거지의 토지대여 등을 거절함으로써 조업을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한국 연안에서 어업활동을 하자면 거점을 확보하고 그 곳에 어막을 지어 놓고 휴식도 취하며 어획물을 건조하거나 저장해 둘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통어장정에는 어업근거지의 토지 확보문제에 관한 규정이 누락되어 일본인 침어자들은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는 광무 3년 5월에 이르러 통어구역의 주요 지점에 어업근거지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한국정부와 교섭했으나 한국측의 반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본인 침어자들은 하는 수 없이 개별적으로 한국인 지주와 사용계약을 맺고 근거지의 토지를 확보하거나 혹은 한국인의 토지를 무단 점거하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지주들이 단합하여 토지의 대여를 거절하거나 또는 지대를 대폭 인상함으로써 침어자의 조업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세죽포 등지에서는 주민이 단결하여 침어자들에게 토지대여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고, 경상남도 고성군 신동 일대에서는 주민이 단합하여 토지의 임대료를 대폭 인상함으로써 간접적인 방법으로 토지대여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밖에도 일본인의 어획물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침어자의 조업을 간접적으로 방해하는 사례가 있었다. 침어자들은 그들의 어획물을 자국 출매선(出賣船)에 판매하여 일본으로 직송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그들의 어업근거지에서 건조·가공하여 본국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또한 한국인 출매선이나 빙장선(水藏船) 등에 판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인 출매선은 종종 단합하여 일본인의 어획물을 구매하지 않는, 이른바 불매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침어자들에게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5) 무장항거운동
국권말살기인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제의 대한어업침략정책이 제국주의적 본색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일본자본주의 전개과정에서 배출된 낙오자를 한국에로 추방하려는 이른바 이주어촌(移住漁村) 건설기여서, 한국의 연안일대는 일본인 낙오자들로 충만되어 갔다. 이에 생업의 터전을 박탈당한 한국 어민들은 의병으로 변신하여 종래의 소극적이며 산발적인 어권수호운동의 형태를 지양하고, 적극적이며 조직적인 무장항거운동의 형태를 띠게 됨으로써 침어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따라서 구한말에는 동·서·남 3면의 해안은 일본인 침어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병활동의 무대가 되었고, 3해의 연안 어민들은 의병에 직접 가담하거나 혹은 그들의 활동을 방조하면서 침어자를 몰아내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여기서 일본인 침어자를 대상으로 한 의병활동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융희 2년(1908) 5월 2일에는 황해도 장연군 몽금포 앞바다에서 출어중이던 일본 어선 1척이 의병에 의해 습격을 받았는데, 이들 의병은 황해도 연안 일대의 민가에 산재·잠복하여 주로 일본 어선과 상선만을 습격하는 의병부대였다. 그리고 동년 8월 7~8일에는 우도에서 10여 명의 의병이 일본 어선 1척을 습격하여 일본인 어부 1명을 총살하고 잠적했는데, 이들은 주로 연평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활약한 의병부대였다. 연평도 일대는 일본인 침어자들의 집중해역이어서 자연 의병선의 출몰도 빈번했으며, 주민들이 일본 헌병경찰대의 수사에 비협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병을 은닉해 주는 형편이어서, 의병운동은 비교적 순조롭게 전개된 것 같다. 그래서 일본측은 자국의 어선 보호를 위해 군함까지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융희 2년 8월 4일에는 함경북도 경흥군 서면 서수라 및 상어포의 일본인 어장을 의병이 습격하여 동 어장의 일본인 어부 다수를 살해하였다. 즉 융희 2년 8월 4일 새벽 약 30명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일본인 어업자가 경영하는 대성조(大成組) 어장의 서수라(西水羅) 및 상어포(霜魚浦) 어막을 동시에 급습하여 일본인을 무차별 사살하고 어막을 불살랐는데, 이로 인하여 일본인 23명(서수라 15명, 상어포 8명) 중 15명이 살해되고 2명이 총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의병단은 대성조의 어선에다 주민 전원을 탑승시킨 다음 두만강 방면으로 잠적했는데, 이들은 두만강 연안의 러시아령에 근거를 두고 활약한 의병부대였던 것 같다.
남해안 일대는 일본인 침어자가 많았던 곳이어서 의병선에 의한 일본 어선의 피습도 빈번하였다. 특히 전라남도 강진군 돌산군 및 완도군 일대의 각 도서지방은 의병활동의 중심무대가 되고 있었다. 융희 3년(1909) 4월 2일에는 양식총과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약 30명의 의병부대가 강진군 백도면 사초리에 나타나 그 곳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어선 1척을 습격하여 일본인 6명 중 2명을 총살하고 2명에게 총상을 입힌 다음 해남 대둔사 방면으로 잠적했으며, 동년 4월 5일에는 장모씨가 인솔하는 약 35명의 의병부대가 돌산군 삼산면 죽도 연안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어선을 습격하여 일본인 어부 1명을 총살하였고, 동년 4월 7일에도 동군 삼산면 선죽도에 청·적·백색의 한복을 착용한 37명의 의병부대가 선편으로 나타나 정박중이던 일본 어선 1척을 습격하여 승조원 3명 중 1명을 총살하고 선내금품과 어망 등을 거두어 가지고 잠적하였다. 또한 동년 4월 14일에도 완도군 평일도 연안에서 어로중이던 일본 어선 1척을 약 14명의 의병부대가 출현하여 습격하였고, 23일에는 이 의병부대가 다시 나타나 주민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당부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잠적하였다. 즉 “우리 단체는 3척의 선박으로 활동하는 의병부대인데 한 척의 배에 15~16명에서 20여 명까지 탑승하고 흥양, 돌산, 해남, 완도군 등의 여러 섬을 밀항하면서 일본인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동포에게는 추호도 피해를 끼치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고 우리의 동정을 일본인에게는 밀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융희 3년 5월 20일에는 약 50명의 의병부대가 전남완도군 내면 죽청리 연안에 정박중이던 일본 어선 1척을 습격하여 일본인 4명 중 1명을 총살하고 퇴거했으며, 같은 해 5월 23일에는 약 30명의 의병부대가 완도군 신지도 월복동에 출현하여 일본인의 존재 여부만을 조사하고 잠적하였다. 이밖에도 동년 6월 5일에 일본인 어업자가 어막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 완도군 조약도에 왔다가 17~18명의 의병부대에게 습격을 받은 바 있었고, 또 융희 3년 6월 12일에도 일본 어선 1척이 식수를 얻기 위해 완도군 청송도에 기항했다가 위의 의병부대에게 피습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남해안 일대의 도서지방을 중심무대로 하여 한말의 의병운동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우리 연안에서 일본인 침어자를 몰아내는데 있었음을 선명하게 표방하고 있었다.
4. 광업권 수호운동
1) 열강의 광업권 침탈과 정부측 대응정책
1880년을 전후하여 한국은 일본과 서양제국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력과 자본을 배경으로 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처할 만한 확고한 기반을 갖추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 반면 열강은 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각기 그들의 입장과 국제역학관계에 따라 한국의 경제적 이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면서 철도·전선·삼림·어업 그리고 광업 등의 중요한 이권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광업이권은 그러한 이권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특히 관심의 대상은 금광이권에 집중되었다. 그 까닭은 첫째로 한국에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둘째로 금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무역의 결제수단과 화폐발행의 준비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 열강은 다른 이권보다는 광업이권 문제를 물러싸고 오랜 시일에 걸쳐 끈질기게 한국정부에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880년대 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대부분 일정지역의 광업 채굴권을 획득하였다. 즉 1895년 미국에게 평안북도 운산(雲山)금광 채굴권을 양여한 것을 효시로, 1897년에는 독일에게 광산 채굴권을(광지는 1898년 강원도 당현금광으로 확정), 1898년에는 영국에게 광산 채굴권을(광지는 1900년 평안남도 은산금광으로 확정), 1900년에는 일본에게 직산(稷山)금광 채굴권을, 1901년에는 프랑스에게 광산 채굴권을(광지는 1907년 평안북도 창성금광으로 확정), 1905년에는 이태리에게 광산 채굴권을(광지는 1907년 평안북도 厚昌광산으로 확정) 넘겨주게 되었다. 열강은 한국과 광산 특허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우만 광지를 선정하고 계약문을 작성하였을 뿐, 다른 열강은 모두 우선 특허권만 확보하고 뒤에 광지를 선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의 경우 오랫동안 치밀하게 한국광산을 조사하여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열강은 정확한 자료를 미처 갖추지 못한데 기인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열강의 광산 이권침탈을 저지하려는 우리측 대응도 다양한 각도에서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외국의 근대식 기술만을 도입하고 우리정부가 주체적으로 광산을 개발하려는 시도와 유망한 광산은 궁내부 소속으로 하여 열강의 손길에서 보호하려던 정책 등이었다. 이와 함께 독립협회를 비롯한 지식인·시민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이권양여 반대운동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였다. 또한 민족자본을 동원하여 합자회사를 설립하고 자체적인 광산개발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열강의 광산 이권침탈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현지 광부들이 기존 광업권을 고수하려는 저항을 격렬하게 일으키기도 하였다. 현지에서의 항쟁은 기존 광업권 수호를 위해 무력충돌도 불사하였으며 토지배상, 삼림벌채문제, 기타 사회문제 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는 국권상실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맞이하였으나, 열강의 경제적 침탈과정에서 비록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광업부문에서도 국권을 수호하려는 민족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 광업실태와 광업정책의 변천
원래 한국은 금이 많이 산출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는 금이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을 뿐 국가 경제적인 면에서 채굴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조선전기에는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관계로 금의 수요가 증대하여 국가에서는 채굴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에서 조공품으로 금을 과중하게 요구하게 됨에 따라, 유치한 채광기술로 그 요구를 충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외교교섭을 통해 면제를 받게됨과 동시에 채굴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관리들의 광업에 대한 인식은 유교사상에 젖어 있어, 농사에 지장을 줄뿐 아니라 금·은은 사치품이기 때문에 채굴을 억제해야 된다는 농본주의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전기까지 광공업은 부진한 상태였고, 민간에서 몰래 채굴하는 이른바 사채(私採;潛採)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광물의 사회적 수요는 물론 광산의 경영형태도 크게 변화하였다. 17세기에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주로 유황(硫黃)광산과 구리·철 등의 광산이 개발되었으며, 이는 군영문(軍營門)에서 파견한 감관(監官)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당시 감관제 아래에서 운영된 유황점(硫黃店)이나 연(鉛)·철점(鐵店)은 모두 부역노동(賦役勞動)에 기초한 관영(官營)의 형태였다.
18세기에는 국내외의 무역거래상 화폐가치가 높았던 은을 얻기 위하여 은광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은광의 ‘설점수세권(設店收稅權)’은 호조(戶曹)에 전속되어 있었다. 호조는 은 산지에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호조의 경비로써 점소(店所)를 설치한 뒤, 민간인에게 은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별장제(別將制)하에서의 은점(銀店) 경영은 호조의 경비로 설치된 점소에서 부상대고(富商大賈)인 별장이 경영하는 이른바 반관반민의 형태였다.
이와 더불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는 대청(對淸) 무역에서 상품가치가 높은 금을 채취하기 위한 사금(砂金) 광업과 함께, 병기와 동전(銅錢)을 주조하기 위한 동광의 개발도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는 별장수세제(別將收稅制)가 혁파되고 영읍수령(營邑守令)이 수세하는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가 실시됨에 따라 물주제(物主制)가 발달하여 일반화되었다.
대부분 경외의 사상인(私商人)인 물주는 광업에 자금만 투입하고 점소(店所)는 그가 믿을만한 자를 혈주(穴主)나 덕대(德大)로 삼아 운영하였다. 민간자본의 투자에 의한 물주제하에서 사금광업은 크게 발달하여 19세기에 들어와서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채광기술은 여전히 재래식 방법에 의존하는 실정이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개항 이후 여러 부문에 걸쳐 근대화정책이 진행되면서, 광산계에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첫째 부국자강과 근대화를 위해 광산개발의 시급함을 강조하는 인식이 고조되었고, 둘째 그에 따른 근대적 광업정책의 수립, 세째 광산이권에 대한 열강의 침탈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지식인과 현지민들의 항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우선 국가의 기본 광업정책의 변천을 살펴보면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 이용당상(理用堂上) 김병덕(金炳德)의 상소가 그 계기가 되었다. 즉,
외도(外道)의 금은채광(金銀採鑛)은 비록 조정(朝廷)에서 금하고 있으나 만일에 혹 채굴을 허가할 경우에는 이미 탁지수세(度支收稅)한 예(例)가 있습니다. 관서(關西)의 수개 읍과 영남(嶺南)의 수개 읍에 산출처가 있다고 하온즉 본 아문(本衙門)에 붙여 참작 관장토록 함이 좋을듯합니다.
라고 하여 기존 금점(金店)의 기정사실화를 건의하여 왕이 따르고 있다. 종래 경품설점제(經稟設店制)에 기초하여 소수의 원정수세점(原定收稅店)만을 인정해 왔던 소극적이고 저지적인 광업정책을 완화하여 국가가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후 각 관아 혹은 민간인이 합법적으로 개점하고 채광하는 것이 가능한 이른바 사자개채제(私自開採制)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1880년대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근대식 광업개발에 대한 논의가 고조되면서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광업개발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는 외국인의 광산탐사와 함께 채광까지도 빈번하였던 만큼 외국인의 무단 채광을 금하는 한편, 정부는 광무(鑛務)를 담당할 부서를 설치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지방의 광산사무는 내무아문(內務衙門) 주관 아래 각 감영(監營)에서 관장하였는데, 개광사업이 활발해지고 광무가 번창해짐에 따라 1887년 드디어 광무국을 설치하여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광무국이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면서 사채(私採), 세납건체(稅納愆滯), 외국인의 채광 등으로 어수선하던 광무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에 이르면 점점 개채(開採)하는 광산이 증가하여, 그에 따른 폐단과 담당관리의 부족현상을 초래하였다. 처음에 정부의 의도는 전국광산을 개발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자는데 있었지만, 막상 채광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자 그에 따라 야기되는 폐단도 많았다.
우선 맹목적이고 무계획적인 광업채굴로 인해 전답을 빼앗긴 농민들의 호소가 전국 각지에서 잇달았다. 특히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도)은 토지가 비옥하여 미곡이 많이 산출되는데 일시적인 이득을 위해 만년무궁(萬年無窮)한 옥토를 못쓰게 만든다 하여 삼남지방에 산재한 금광의 폐지를 주장하는 건의가 빈번하였다. 또한 광무국이 설치되었어도 전국광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1894년 갑오개혁 때 농상아문(農商衙門)을 신설하여 광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광무국은 공무아문(工務衙門)에 소속되어 각종 광물(鑛物)의 측량·시험·수집·보존 등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1895년 3월 전반적인 관제개혁을 실시할 때에 농상아문(農商衙門)과 공무아문(工務衙門)을 통합하여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개편하였다. 따라서 농상공부 관제(官制) 속에 광산국(鑛山局)이 소속되었다. 그리하여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는 1895년 5월 사금개채조례(砂金開採條例)를 발포(發布)하였다. 모두 47조로 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농상공부(農商工部)가 특정 광지의 사금개채(砂金開採)를 공인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규정이다(2~5조). 이때 개채(開採) 허가 여부는 농상공부 광산국장(鑛山局長)이 조사 결정하고 따로 농상공부에서 첨파(添派)한 영파원(另派員)이 동행하여 개채(開採)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둘째, 영파원(另派員)과 현지 지방관과의 관계 및 영파원(另派員)에 대한 농상공부의 통제책이 규정되고 있다(6~11조). 사금지(砂金地) 관장이라는 이권을 놓고 예상되는 영파원(另派員)과 지방관의 대립·마찰은 농상공부에서 조정하고, 또 농상공부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수시로 각광사무(各鑛事務)를 검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째, 영파원(另派員)과 세감(稅監)의 광세납부(鑛稅納付)에 관한 규정이다(12~22조). 영파원은 농상공부에 매월 말 세액을 송정(送呈)하는데, 광세의 수납을 위해 광구마다 1인의 세감(稅監)을 보증추가(保證推駕)하게 되어 있었다. 세감은 소관 덕대(德大)휘하의 각 광부별로 광세를 수납하고, 영파원(另派員)은 소관 세감(稅監) 휘하의 덕대별로 세금을 수납하는데, 이 때 각기 영수표인지(領受票印紙)를 발급하게 되어 있었다.
네째, 현지 주민에 대한 광군(鑛軍)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들이 규정되었다(23~39조). 광세(鑛稅) 납부시 광표(鑛票)의 발행을 통해 채광 종사자를 엄격히 단속하게 되어 있었다.
다섯째, 덕대(德大)·세감(稅監)·영파원(另派員)의 세금횡령에 대한 대책이 규정되어 있었다(40~42조). 이 경우 덕대는 그 보증인이, 세감은 영파원이 책임을 지며, 영파원(另派員)은 농상공부에서 책상(責廣)하고 임명을 취소하도록 하였다.
여섯째, 사금 채취에 따르는 전답(田畓)·가사(家舍)·분묘(墳墓)의 보호대책이 규정되었다(43~44조). 각기 그 5십보 이내에는 침범할 수 없음을 원칙으로 하되, 다만 가사·분묘의 경우 그 주인이 이장(移葬) 또는 이주(移住)를 희망할 경우에 한하여 덕대(德大)가 우가(優價)로 매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농상공부가 사금 개채(開採)에 관한 업무를 관할하되 그 중점은 광세 징수에 있었고, 부수적으로 사금 개채로 인한 현지주민의 피해를 방지하는데 일정한 배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금개채조례가 발포된 후, 어느 정도 광업행정의 체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광업을 국가산업의 한 독립된 분야로 발전시키려는 적극적인 광업시책과는 여전히 거리가 먼 전근대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즉 광업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부차적인 산업으로 규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2) 외국인 광산 기술자의 고빙(雇聘)문제와 광무학교(鑛務學校)의 설립
정부가 개광(開鑛)에 적극적으로 주력하게 되면서, 행정(行政)뿐 아니라 광무를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자금문제·기술문제 등의 근본적인 방법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문제를 가지고 관리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다. 즉 어떤이들은 외국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연한을 정해 세금을 징수하자는 의견을 내세웠고, 또 어떤이들은 한국인의 자본으로 외국의 근대식 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나 결국은 절충안으로서 외국인 광산기술자를 초빙하되 운영은 한국인 스스로 담당하자는 의견으로 기울어져, 1888년 광무국에 미국인 광산기술자를 고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외국인 광사(鑛師) 초빙건에 대해서는 광무국 설치 이후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훨씬 이전부터 열강의 관심거리였다. 즉 광산 이권을 획득하려고 야심을 품고 있던 열강들은 자국의 외교관·군인·상인·지질학자를 파견하여 한국광산을 탐사하고, 또 광산기술자의 파견을 제의해 오기도 하였다. 특히 독일의 경우는 구체적인 계약조건까지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독일인 광사의 초빙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韓國政府)는 미국에 호감을 갖고 있는데다가 외교고문 데니의 권유에 의해 독일측 주장을 간단히 거절하고 미국인 광사를 고빙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고종은 미국주재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도미하는 박정양(朴定陽)과 그와 동행하는 참찬관(參贊官) 알렌(H.N. Allen : 安連)에게 운산금광을 담보로 200만불의 차관교섭과 아울러 광사 초빙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당시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 알렌과 서기관(書記官) 이하영(李夏榮)의 주선으로 1888년 12월 미국인 피어스(Aillerd Ide Pierce)를 1년 계약으로 광무국(鑛務局)의 광산감독으로 고용하게 되었다. 연봉 5천원의 조건이었고 그와 함께 광기(鑛機) 한 구(具)도 미국에서 구입하였다. 피어스는 내한 즉시 평안북도 운산금광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1년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미국으로부터 근대식 광산 기구와 5명의 광사(鑛師)가 재차 고빙되어 운산금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러한 광사 초빙은 실질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1년도 채 못되어 해고되어 그들이 귀국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렇게 된 주요한 원인은 개항 이후 열강의 한국광산에 대한 침투에 자극을 받아 한국정부 스스로가 개광사업을 벌여야 된다는 인식이 높아졌고, 한편 근대광법을 도입한다는 의도에서 외국인 광사를 초빙하였지만 재래식의 경영조직과 근본적인 광무개혁의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1895년 이후 농상공부(農商工部)가 설치되면서 일본인 광산기사 서화전구학(西和田久學:니시와다 히사마나)을 비롯하여 일본인 광산기술자들이 광산국에 고용되는 수효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에서는 일본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전국광산 중 유망성이 높은 곳으로 알려진 광산들을 농상공부 관할에서 궁내부(宮內府)로 이속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광산기사로 프랑스인을 초빙하였다. 1900년 광산국 안에 광무학교(鑛務學校)를 설립하여 우리 스스로 근대식 기술을 습득한 기술자를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1896년 이후 독립협회에서 실업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광업부문에서 근대식 채광기술을 교육하여 전문적인 기술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황성신문』에도 광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설이 자주 실리고 있다. 또한 광무 관리를 채용하는데도 전문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요청에 의해 1900년 9월 4일 다음과 같은 광무학교관제가 발표되었다.
제1조 광무학교는 광업에 필요한 실학을 교육하는 곳으로 정함.
제2조 광무학교의 수업연한은 3개년으로 정함.
제3조 광무학교의 학과 및 정도와 기타 규칙은 학부대신이 정함.
제4조 광무학교에 다음과 같은 직원을 둠.
학교장 1인 주임(奏任)
감독 1인
교관 4인 주임(奏任)
부교관 1인 판임(判任)
서기 1인 판임(判任)
제5조 교장은 교무를 통할하며 소속 직원을 통솔할 것.
제6조 감독은 교장과 사무를 협의하여 교내업무를 감독하고 소속 직원을 통솔할 것.
제7조 교관은 교장과 감독의 명을 받아서 생도의 교수를 전담하며 또한 생도를 통솔하고 광무실지 견습에 관한 사무를 관장할 것.
제8조 부교관은 상관의 명을 받아 교관의 사무를 보조할 것.
제9조 서기는 상관의 명을 받아 교관의 사무를 보조할 것.
제10조 감독과 교관은 혹 외국인을 고빙하여 충당할 것.
제11조 실지 견습을 위하여 본국 소관 개광 각처 중에 분교를 설치함도 가함.
제12조 본 령은 반포 일자로부터 시행할 것.
원래 광무학교(鑛務學校)는 농상공부 광산국에 속하였으며 교장에는 농상공부 광산국장 현상건(玄尙健)이 겸임 하였다. 감독과 교관은 외국인을 고빙한다는 규칙에 의해 프랑스 광산기술자 트레믈레(M. Tremoulet : 據來物理)를 감독으로 기빌예(M. Cuvillier:貴寶禮)를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이들 외에도 여러 명의 프랑스 광산기사들이 광무학교 교사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은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2년 1월부터는 광무학교 교사를 신축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농상공부의 광산국이 폐지되고, 궁내부(宮內府)에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되면서 광무학교도 궁내부에 소속되었다. 그런데 광무국의 명칭은 1902년 2월 궁내부 관제가 개정되면서 광학국(鑛學局)으로 바뀌었다. 그후 같은 해 9월 본격적으로 생도(生徒)를 모집하게 되었다.
1904년 1월에는 광학국(鑛學局)이 다시 농상공부로 부속되었고, 1906년 11월 16일에는 예정대로 광산학도 졸업식이 거행되어, 졸업생 전원이 기수(技手)로 서임(叙任) 되었다.
(3)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과 궁내부(宮內府) 광산지정
개항 이후 열강들은 한국의 미개발된 지하자원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1880년대 이후 한국광산을 특허받아 직접 채광하려는 교섭을 추진하였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각국 외교관들은 한국의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많은 경제적 정보를 얻어내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열강은 외교관뿐 아니라 지질학자·광산기술자·군인·상인들을 파견하여 한국광산을 세밀히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열강들은 1890년대 후반에 전국의 유망한 광산을 얻어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을 시기적으로 구분하면 1880년대는 열강의 한국광산 탐사(探査)시기, 1890년대는 광산이권 획득(獲得)시기, 1900년대는 본격적인 채광(採鑛)시기, 1905년 이후는 각 열강의 합자(合資)시기로 나눌 수 있다.
열강이 차지한 광산이권 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미국이 채굴권을 얻은 평안북도 운산(雲山)금광이었다. 미국은 다른 열강보다 한국정부로부터 신임을 얻어 수월하게 이권교섭을 전개하였다. 우선 1880년 후반기에 알렌을 통해 이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1895년에는 정식으로 한국정부와 운산금광 채굴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한국정부가 외국인에게 넘겨준 최초의 광산이권이었다. 이를 기화로 각 열강은 최혜국조관에 의해 이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운산광약 내용이 본보기가 되어 열강도 그것을 토대로 채굴계약을 맺었다.
한국측이 미국에게 운산금광을 넘겨줄 때는 미국으로 하여금 경제적 관심을 갖게 함과 아울러, 국제적 갈등 속에서 정치적으로 한국에 대한 원조를 구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정부는 미국이 열강의 침략을 저지해 주리라는 기대하에서 이권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시종일관 미국은 정치적 불개입의 입장을 견지하고 경제적 이권만을 얻는데 관심을 보였다.
독일은 1880년대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 : 穆麟德)가 한국의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統理交渉通商事務衙門)의 협판(協辦)으로 임명되면서 한국광산 이권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때에 독일인 지질학자 곳체(Carl Christian Gottsche : 居最)가 광산기술자를 대동하고 내한하여 한국 전역을 답사하고 광산의 유망성 여부를 조사하였다. 또한 독일 영사관에서는 한국정부에게 독일인 광산기술자의 고빙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후 1895년에 이르러 미국이 평안북도 운산(雲山)금광 이권을 획득하게 되자 독일도 세창양행(世昌洋行)을 통해서 적극적인 이권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97년 3월 광지(鑛地)를 정하기도 전에 한국정부와 광산 특허계약을 체결하였다. 독일은 처음에 평안남도 은산(殷山)금광을 지목하였으나, 궁내부 소속이란 이유를 내세우는 한국정부의 완강한 반대로 은산(殷山)금광을 포기하고 대신 1898년 7월 강원도 금성(金城)·당현(堂峴)금광의 채굴권을 얻을 수 있었다. 금광을 얻기까지 주한 독일영사 클린(Clien : 口麟)이 한국 외부대신에게 불미스러운 언동까지 자행함으로써 독립협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영국은 1883년 한국과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자 곧 이권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1880년 열강 중에서 최초로 한국에 근대식 채광기계와 광산기술자를 파견하여 경기도 영평(永平) 사금광의 채굴을 시도하였다. 또한 청일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은산(殷山)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고, 1905년에는 일본의 세력을 배경으로 수안(遂安)금광의 특허권(特許權)도 얻어 내었다.
영국이 은산(殷山)금광을 차지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물의를 자아냈다. 원래 1898년 9월 영국이 광산 채굴계약을 체결할 당시는 독일의 경우처럼 광지를 선택하지 않은 채, 특허권만 확보하였다. 그런데 영국은 한국정부가 독일에게 넘기기를 거부하였던 평안남도 은산(殷山)금광을 집요하게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채금(採金)하고 있던 한국인 광부들과 무력충돌까지 야기시켰다. 결국 한국정부는 영국의 강압적인 태도에 굴복하여 1900년 3월 은산금광을 영국에게 허여하게 되었다.
일본은 열강의 이권침탈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집요한 공세를 취한 국가였다. 처음부터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야심을 가지고 그들의 외교관·군인·지질학자를 동원하여 한국의 지질 광산조사를 빈번히 실시하였다. 그 결과 한국광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또 한국광산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일본의 사업가들에게 한국 광산개발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광산이권 획득부문에서는 1905년까지 기대했던 것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초기에 얻어낸 창원(昌原)금광 채굴권도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으며, 1895년 이후 열강에게 광업권이 특허되는 시기에 있어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1900년에 이르러서야 충청남도 직산(稷山)금광 채굴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금융·철도·무역부문에서 획득한 일본의 이권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부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광업이란 투기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기치 못할 위험부담을 가지고 막대한 자본을 투자할 만큼 아직 일본의 경제는 성숙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이권 교섭은 주로 궁정외교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한국 왕실이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경계를 하였던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약탈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금을 매입하였다.
이와 같이 1895년 이후 열강의 한국광산 이권에 대한 침탈이 적극화되자 정부에서도 이를 제지하는 광무행정을 단행하였다. 때마침 1896년 궁내부 각광감리(各鑛監理)에 임명된 이용익(李容翊)은 종래 궁내부에 소속되어 왔던 2, 3개소 광산의 경영을 관장하면서, 농상공부의 소관까지 포함하여 전국 각지의 광산에 대하여 세금미납을 엄중히 징수하여 황실소유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농상공부에 소속된 광산은 한때 이중납세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1898년 1월 12일 국내 철도·광산의 외국인 합동을 허가하지 않는 방침을 공포(公布)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6월 23일에는 국내 주요광산을 궁내부의 소유로 결정하는 조치를 내렸다. 즉 43개소의 광산이 황실 직영하에 운영하게 되었다. 그 광구명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안성(安城 : 금), 통진(通津 : 석탄)
충청남도/직산(稷山 : 금), 공주(公州 : 은), 문의(文義 : 금)
충청북도/청주(淸州 : 금·철), 충주(忠州 : 금)
전라북도/금구(金溝 : 금), 남원(南原 : 금·철), 전주(全州 : 금)
경상북도/성주(星州 : 금·철), 청송(靑松 : 금), 의성(義城 : 금), 경주(慶州 : 수은·석탄·철)
경상남도/울산(蔚山 : 석탄·철), 창원(昌原 : 금·동·철), 진주(晋州 : 금·석탄)
황해도/송화(松禾 : 금), 장연(長淵 : 금), 재령(載寧 : 철), 수안(遂安 : 금·철)
평안남도/개천(价川 : 철), 평양(平壤 : 금·석탄), 순안(順安 : 금),
영원(寧遠 : 옥), 은산(殷山 : 금)
평안북도/영변(寧邊 : 금·철), 선천(宣川 : 금), 의주(義州 : 금), 후창(厚昌 : 동·금)
강원도/금성(金城 : 금·은), 춘천(春川 : 금), 홍천(洪川 : 금·철), 삼척(三涉 : 석탄)
함경남도/단천(端川 : 금·은·동·철·옥), 장진(長津 : 금·은), 갑산(甲山 : 금·은·동), 영흥(永興 : 금·은·철·석탄), 문천(文川 : 철·석탄), 고원(高原 : 금·철·석탄)
함경북도/경성(鏡城 : 철·석탄·옥), 길주(吉州 : 석탄·철·옥), 부령(富寧 : 금·동·석탄)
곧이어 1899년 2월에는 서북 3도 즉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농상공부 소관 광산을 또다시 궁내부로 이속(移屬)하였다.
이와 함께 궁내부 광산은 외국인에게 채광을 허가할 수 없다는 조항을 명시하였다. 또한 1899년 8월 29일 포달(布達) 제50호로 궁내부 관제를 개정하였는데, 궁내부 재정담당 부서인 내장사(內藏司)를 내장원(內藏院)으로 개칭하고 업무를 확대하여 광무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1901년 6월에도 종래 농상공부에 소속되었던 8개소의 광산이 궁내부 소속으로 추가되었다.
경기도/양성(陽城 : 금)
충청남도/천안(天安 : 금), 전의(全義 : 금)
충청북도/음성(陰城 : 금)
황해도/백천(白川 : 금)
평안남도/순안(順安 : 금)
평안북도/창성(昌城 : 금)
강원도/철원(鐵原 : 철)
이중에서 황해도 백천(白川)·평안남도 순안(順安)·평안북도 창성(昌城)은 이미 1899년에 발표하였던 서북 3도 광산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궁내부 소속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51개소의 광산이 궁내부 관할로 소속되었다. 궁내부는 각 도에 감리(監理)를 임명하여 도내의 광업을 관리케 하였으며 각 광산에는 별장을 파견하여 광세의 징수를 담당케 하였다. 그러므로 종래의 국고에 수입되었던 광세의 대부분이 이후부터는 궁내부로 귀속되어 왕실수입을 증가시켰다. 한편 열강들은 궁내부 소속 광산이 매장량이 풍부한 유망한 광산임을 탐지하고 이권의 균등을 내세우며 특허권을 요구할 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궁내부 광산을 지적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한국정부에서 완강히 거부하고 또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설정한 것이지만 결국은 외교적인 압력으로 수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독일·일본·프랑스·이태리의 광산 이권 획득과정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