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 남북한이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함에 따라 양국 국기가 유엔본부 앞에 나란히 게양되었다. 1991년 9월 17일 오후 3시20분, 미국 뉴욕시에 자리잡은 유엔본부에서 제46차 유엔총회가 열렸다. 의장으로 선출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쉬하비 유엔대사는 의안번호 제20호 신규회원국 가입안을 상정,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안을 총회가 채택하여 A/46/L.1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으로 가입하였음을 선포했다. 1949년 1월 19일 우리 정부가 가입신청을 낸 지 42년 만에 이루어진 유엔가입의 순간이었다. 이로써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유엔가입국이 됐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고착화라고 주장하며 단일의석 공동가입안 만을 고집해 온 북한이 중국과 쿠바를 포함한 국제적 지지가 확실치 않은데다 1990년 4월 제주도 한소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유엔보편성 원칙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자 기존의 주장을 포기하고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이루어졌다./조선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
←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식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제24회 올림픽 대회의 막이 올랐다. 10월 2일까지 16일 간 전세계 160개국에서 참가한 1만 3,304명의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었다. 대회의 기본 이념은 '화합과 전진'이었다. 올림픽 헌장을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범세계적 화합을 이루고 인류의 오랜 염원인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위해 함께 전진하는 전기로 삼으며, 한국의 전통문화 선양과 올림픽 운동에 활력소를 부여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들에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데 대회 개최의 의의를 두었다.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봉사, 최대의 절약 등을 대회의 목표로 삼고, 화합의 올림픽, 문화의 올림픽, 복지의 올림픽, 희망의 올림픽, 번영의 올림픽 등을 지향했다. 총 23개 정식종목(237개 세부종목)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야구·태권도·배드민턴·볼링 등은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다. 경기 결과 세계신기록 33개, 세계 타이 기록 5개, 올림픽 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 기록 42개 등 각종 신기록 307개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로 1위를 차지했으며, 그 뒤를 이어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2위, 미국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차지했다./브리태니커
[1939년] 권투선수 김기수(金基洙) 출생
← 한국 프로권투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었던 김기수씨. 1939. 9. 17 함남 북청~1997. 6. 10 서울. 유복자로 태어나 6·25전쟁 중 12세의 나이로 어머니와 형과 함께 월남했다. 여수 피난민수용소에서 구두닦이, 목판담배장수를 지내다가 권투선수로 입문했다. 여수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에서 개최된 전국학생선수권대회 라이트웰터급에서 우승, 당시 서울 성북고등학교 교장이던 고향 사람 이의석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선수로 활동을 했다. 1958년 제3회 도쿄[東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웰터급에 출전하여 이탈리아의 벤베누티에게 져 초반에 탈락한 후 프로로 전향했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아마추어 시절 자신이 졌던 벤베누티를 이기고 한국 최초로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 후 6개월 간격으로 미국의 스턴 해링턴과 프레디 리틀을 상대로 2차례의 방어전에 성공한 뒤 1968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산드로 마징기와의 적지 3차방어전에 실패, 1년 11개월의 세계 챔피언 생활을 끝맺었다. 1969년 5월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뒤 개인사업을 해왔다.
[1997년] 소설가 정한숙(鄭漢淑)씨 별세 1922 평북 영변~1997. 9. 17 서울. 소설가로서는 물론 국문학자·문예행정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정한숙은 1946년 월남해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 단편소설 〈흉가〉가 문예지 〈예술조선〉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했고, 전광용·정한모 등과 함께 〈주막〉·〈시탑 詩塔〉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6·25전쟁 전후 등단한 당대 '신세대 작가군'의 한 사람으로 평생 다양한 소설기법을 실험했고, 특히 1952~85년에는 한 해도 작품 발표를 거르지 않아 부지런한 작가의 전형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골고루 겪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피해 당사자인 실향민으로서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소설화하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두 160여 편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 15편이 중·장편일 만큼 다작이었다. 6·25전쟁으로 붕괴된 봉건사회의 갈등과 사랑을 그린 〈고가 古家〉(1956), 낙원을 찾으려는 인간의 꿈과 좌절을 그린 〈이어도〉(1960), 남북분단의 현실을 닭장에 비유해 쓴 우화소설 〈닭장관리〉(1963),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전황당인보기 田黃堂印譜記〉(1955)와 〈금어 金魚〉(1971), 전통의 향기와 함께 민족사의 비극이 어우러진 소설 〈금당벽화〉(1955)·〈이성계〉(1965)·〈논개〉(1971) 등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1954~88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1975년 한국소설가협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문예행정가로서의 탁월한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예술원 회장과 문예진흥원장, 국제 펜클럽(International PEN) 한국본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문화상, 3·1문학상,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소설집 〈황진이〉(1955)·〈끊어진 다리〉(1962)·〈조용한 아침〉(1976) 등과 시집 〈나무와 그늘 사이에서〉(1988)·〈잠든 숲속을 걸으며〉(1989) 등을 펴냈고 평론집 〈현대한국문학사〉(1982)와 〈현대한국소설론〉(1973) 등의 문학이론서를 남겼다.
[1961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 사망
← 하마슐드 사무총장(가운데)의 생전 최후의 사진 1961년 9월 17일 전쟁으로 찢겨진 콩고에 평화를 안겨주려는 다그 하마슐드 유엔사무총장의 힘든 노력이 그가 북부 로디지아에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끝이 났다. 세 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12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사무총장과 함께 사망했다.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미국인 경호원은 북부 로디지아의 돌라 공항 근처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몇 차례의 폭발음을 들었다고 전했다. 비행기는 폭파되기 전 공항을 몇 차례 선회하고 있었다. 하마슐드는 카탕가의 모제 촘베를 만나러 가고 있던 중이었다. 촘베는 UN군이 자신의 군대를 격파하여 카탕가의 통치권이 콩고 정부에 넘어간 뒤 북로디지아로 도주했었다. 촘베는 하마슐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마슐드가 카탕가를 해방시킬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1월 3일에는 하마슐드의 뒤를 이어 미얀마의 우 탄트 대사를 만장일치로 UN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조선
[1978년]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
← 베긴 1978년 9월 17일 중동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정착을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협상을 가진 후 맺은 협정이었기 때문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명명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사실상 교전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를 탈취·점령한 후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1977년 11월 19~21일 사다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정부와 의회에서 연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싹텄다. 이후 1978년 9월 5일 미국·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양국이 수락하면서 협상 가능성이 커졌다. 12일 동안 지속된 협상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양국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기본사항과 중동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체적인 골격에 합의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기초로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양국간의 교전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으며,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되었다./브리태니커
[1917년] 윤이상(尹伊桑) 출생 "작곡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의 고통과 억압과 불의,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음악으로 발언한다." - 윤이상
1917년 9월 17일 태어남 / 1995년 11월 3일 죽음 윤이상은 음악을 통해 한반도 분단의 갈등을 화해시키고자 애쓴 민족음악인이며, 서양과 동양의 음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 세계적 음악인이다. 그는 17세 때 일본에 유학해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고, 8·15해방 후에는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했고, 1953년에는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56년에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으며 1965년에는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한국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귀국시켰고, 재판 결과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고 동료 음악가·교수 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국적을 취득했으며, 뮌헨 올림픽 대회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브리태니커
[2007년] 석굴암 해체·복원과정 찍은 유리원판 사진 공개
일제의 석굴암 훼손 실상 생생 / 성균관대박물관 19일 일반공개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무렵 경주 석굴암을 처음으로 해체·복원하는 과정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 12점과 1925년 불국사 다보탑 수리 장면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들이 공개됐다. 석굴암 관련 유리원판 사진 가운데 7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성균관대박물관이 17일 공개한 이들 사진은 일제 때 경주에서 동양헌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던 다나카라는 민간인과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하던 후지타 료오사쿠(1892~1960)가 촬영한 것으로, 일제가 우리의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훼손한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대식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석굴암 해체과정의 사진에는 석굴암 돔을 덮었던 흙, 기와, 석재와 내부의 환기구 모습 등이 담겨 있어 석굴암 구조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된다”며 “특히 일제시대 초기 석굴암 복원 과정에서 본존불을 제외한 모든 초석이 교체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이밖에 1925년 불국사 다보탑을 수리하는 모습과 다보탑 위에서 찍은 석가탑 사진도 최초로 공개됐다. 그동안 다보탑 수리에 관한 보고서가 없어 그 이전 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유리원판 사진은 그 실상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평가된다. 한편 성균관대박물관은 19일부터 석달 동안 특별전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석굴암·불국사·남산’을 열어 사진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1960년대 2차 수리과정부터 현재까지 석굴암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줄 예정이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는 1차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천불보탑과 금강역사의 팔뚝도 전시되며 경주 남산의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 60점도 공개된다. 송재소 박물관장(한문학)은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훼손한 실상을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최초로 공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한겨레 2007-09-17
[2000년]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끝내고 개관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200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중수복원을 마치고 새로 문을 열었다. 독립기념관과 중경 임시정부 구지(舊址) 진열관은 5월 청사 개보수를 위한 협의서를 체결하고 18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마쳤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5개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지 1034평방미터에 연건평이 1322평방미터(약 400평)이다. 한때 중경시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놓였던 임정 청사는 1991년 국내 학술조사단의 보고로 보존책이 적극 강구되어, 1994년 양국간에 복원협정서가 체결되고 1995년 8월11일 1차 복원식을 거행한 바 있다. 이번 복원기념식에는 당시 중경 현지에서 활동한 광복군 등 애국지사 30여명과 홍순영 주중한국대사, 중국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조선
[1940년] 광복군 창설 1940년 9월17일 새벽 6시. 임시정부 간부들과 한ㆍ중(韓ㆍ中) 양측 인사 200여명이 중국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김구 주석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직구성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임시정부도 21년 만에 무장군대를 갖게 됐다. 광복군이 첫 발을 내 디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33년 만에 맞는 감격이었다. 12명의 장교에 병력이라곤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부대원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년뒤 300명, 2년뒤 340명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광복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쳐 대일 선전포고(1941년)를 하고, 영국군에 파견돼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1943년)됐으며,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1945년)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이 없는 군대의 현실은 언제나 설움뿐이었다. 창설 2개월 만에 본부를 시안(西安), 2년 뒤에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야했고, 1941년 11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에 이르러서야 중국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곧 광복을 맞았다. /조선
[1978년] 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 1978년 9월 17일 중동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정착을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협상을 가진 후 맺은 협정이었기 때문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명명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사실상 교전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를 탈취·점령한 후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1977년 11월 19~21일 사다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정부와 의회에서 연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싹텄다. 이후 1978년 9월 5일 미국·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양국이 수락하면서 협상 가능성이 커졌다. 12일 동안 지속된 협상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양국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기본사항과 중동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체적인 골격에 합의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기초로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양국간의 교전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으며,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브리태니커
[1917년] 프랑스의 화가 드가(Degas, Edgar, 1834~1917) 사망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18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18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naver
[1795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음악 교육가 메르카단테(Mercadante, Saverio, 1795~1870) 출생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도니체티·로시니·벨리니로부터 베르디를 잇는 전환기적 인물이며 중요한 개혁가로 평가되고 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11세에 나폴리로 와서 1808년에는 이름·출생지·생년월일을 바꾸어 산세바스티아노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학생으로 있는 동안 3편의 발레음악을 포함한 다수의 기악 소품들을 작곡했다. 1819년 1월 4일 그의 첫번째 오페라가 초연되었으며, 그후 3년이 채 못 되어(정확하게 5편의 오페라를 발표한 후) 〈엘리사와 클라우디오 Elisa e Claudio〉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826년에는 또다른 대중적인 오페라 〈스페인의 여왕 카리테아 Caritea, regina di Spagna〉(〈카리테아 부인 Donna Caritea〉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를 작곡했다. 1827~30년 잠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단에서 활동했으며 1832년에 결혼해 1833~40년 노바라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일했다. 1835년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1837년에 공연된 오페라 〈맹세 Ⅰl giuramento〉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작품 전면에 마이어베어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후 계속 음악과 극의 보다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했으며 단순화된 성악 선율, 독창성, 사려깊고 진지한 작품을 지향했다. 1840년부터 죽을 때까지 나폴리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여러 곡의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음악·칸타타·찬미가를 작곡했으며 관현악 소품과 다양한 실내악곡도 남겼다. /브리태니커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본국 정부가 이것을 침범하려고 시도한 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의회에서 정한, 식민지 백성에 대한 과세(課稅)와 서방영토로의 진출 저지였다. 따라서 독립혁명 때는 본국인 중에도 많은 동조자가 있었고, 17세기 이래 영국과 항쟁하고 있던 프랑스도 식민지를 도왔으므로 마침내 식민지는 승리를 획득하였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783년에는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또 프랑스령(領)이었던 미시시피강(江) 동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였다. 1781년에 최초의 헌법으로서 연합규약(聯合規約)이 만들어져 13주는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또 외국에서도 미국을 독립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연방을 만들기 위하여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희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1552년] 유명한 교회법률가인 로마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 1552~1621) 출생
← 교황 바오로 5세 본명은 Camillo Borghese. 유명한 교회법률가로서 교황 클레멘스 8세 때 스페인 주재 교황대사를 지냈고, 1596년 클레멘스에게 추기경 임명을 받았다. 1603년 로마의 교황대리가 되었고, 1605년 5월 16일 나폴리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성직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교황 레오 11세의 계승자로 선출되었다. 교황이 되어 맨 처음 취한 행동들 가운데 하나는 '프리빌레기움 포리', 즉 형사사건에서 성직자들이 세속법정이 아닌 교회법정에서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나폴리의 고집스런 장관을 파문한 일이었다. 1606년에는 유명한 신학자 파올로 사르피로부터 교황의 간섭에 맞서도록 격려를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 간에 사법권 및 교회의 면책특권을 놓고서 분쟁이 벌어졌다. 1606년 5월 베네치아에 대해 성무금지령을 내리자 사르피의 주도로 더욱 거센 저항이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악화되었다. 베네치아가 로마와 결별하고 이탈리아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자 주변 국가들이 개입했다. 파울루스는 무력에 호소하기로 결심했으나, 1607년 4월 21일 주로 프랑스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파울루스는 성무금지령을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사르피를 파문했고, 그해 10월 사르피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사르피는 암살을 부추긴 혐의로 교황청을 고소했고, 파울루스는 이 혐의를 부인했다. 파울루스는 이 사건을 통해 성무금지령의 효과가 소멸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뒤 교황청은 주권 국가에 대해서 이 명령을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그 이전 1606년 9월 22일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에 대해서 왕 제임스 1세가 부과하는 새로운 충성서약을 하지 말도록 공포한 바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와 분쟁을 벌이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든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를 유지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투르크인에 대해 또 한 차례 십자군원정을 고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루터교와 가톨릭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초의 항구적인 법적 근거가 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이 공식적으로 파기되는 것을 특히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1618년 독일 가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반목이 30년전쟁으로 발전된 분쟁을 일으켰을 때 파울루스는 가톨릭 세력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교리문제들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교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선교, 특히 라틴아메리카 선교를 장려했고, 재속(在俗) 사제들의 수도회인 성 필리포 네리의 오라토리오회(1613 승인)를 포함한 많은 수의 새로운 수도회들과 형제회들을 승인했다. 교황 문서들을 보관하기 위해 바티칸 문서보관소들을 세웠다. 1612년 로마의 전례서들 가운데 하나인 〈로마 전례서 Rituale Romanum〉의 새로운 개정판을 승인하고 1614년 6월 17일에 공포했다. 그러나 족벌주의를 시행했고, 자기 가문에 지나친 재산을 쌓았다. 특히 조카 마르칸토니오 보르세스를 좋아해 비바로의 공작이 되게 해주었다. 과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더욱 중요한 목적에 써야 할 자금을 낭비하기도 했지만 예술과 건축의 주요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지은 건축물 중에는 로마 산타마리아마조레 대성당의 부속 예배당이 있으며, 죽은 뒤 이곳에 묻혔다. /브리태니커
그밖에 2002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1998 김대거 원불교 3대 종법사 열반 1994 재미 원로시인 박남수씨 별세 1992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평양).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 3개분야 부속합의서 공식발효 1989 노태우 대통령, 서울평화상 제정 발표 1988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 1987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창립 1983 미스아메리카 최초로 흑인여성 선발 1982 레바논 민병대, 서(西)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800명 대량학살 1982 국무회의, 인구 및 각종 산업시설 배치 등을 조정하기 위한 수도권정비계획법안의결 1980 계엄보통군법회의, 내란음모혐의로 김대중에 사형선고 1980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출범 1980 미국-중국, 4개협정 조인. 관계 전면 정상화 1980 독재자 소모사 피살 1980 최초로 어린이가 이해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 사망 1978 한국-아프가니스탄, 단교 1971 통혁당 조직 및 사회혼란사건 발표 1968 박정희대통령, 한국-호주 정상회담 1963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 발생 1963 111개국 유엔총회 18차회의 개막 1963 말레이시아연방정부, 인도네시아-필리핀과 단교 성명 1959 태풍 사라호 참사(사망-실종 924명, 수재민 98만5천명) 1957 태국에 군사쿠데타 사리트장군 정권 장악 1953 미국 국방성, 핵탄두 낙하예상 70개지구 발표 1951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5개국위원회 설치를 결의 1947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정식 상정 1946 수도경찰청 발족(청장 장택상) 1945 조선프로문학동맹 결성 1939 소련군 폴란드 진주 1935 필리핀, 케손 초대대통령에 당선 1922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 실시. 4명 합격 1919 강우규 의사 피체 1862 미국 메릴랜드주 안티탬크리크서 남북전쟁중 최대 혈전 1857 우주 비행이론 선구자 치올코프스키 출생 1826 독일의 수학자 리만 출생 14 제2대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