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徐相墩:1851~1913)은 서울의 유력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강원도와 충청도로 피난하였고,
이후에도 탄압을 피해 경상북도 문경·상주 등지로 돌아다였다.
서상돈은 서철순의 맏아들로 상주에서 출생하여 약 10년동안 그 곳에서 자랐으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묘비에는 아오스딩으로 기록되어 있다.)
1859년 서상돈은 양친을 따라 상주에서 대구로 이주하였다. 대구에 정착한 서상돈은 지물상과 포목상을 시작하였고, 천주교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서양인과 서로 교제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모은 재산을 토지에 투자하여 3만석지기의 대지주가 되었고, 1902년에는 대구전보국사장 조중은과 더불어 양잠회사를 설립하여 칠곡 문수면에 뽕나무 2만 1천주를 심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1903년 서상돈은 내장원의 경상남북도 검세관이 되었다. 검세관은 내장원의 봉건적 조세수탈 구조에 기생하여
많은 부를 축절할 수 있던 자리로서, 일종의 조세수취 청부업자를 말한다. 검세관이 된 서상돈은 각 군에다 고용인을 보내 혹독하게 조세를 징수하고, 그 자금으로 미곡과 지물 등 각종 물품을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904년 그는 고용인들이 조세로 거두어들인 공전을 유용하여 그 상납을 지체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해임되고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검세관직에서 퇴임한 그는 창고업·대부업등에 종사하면서 실업계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대구의 갑부로 성장한 서상돈은 지역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활발하게 전개된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대구에서는 1906년 1월 국민 계몽을 위해 교과서와 외국서적을 간행하고 각지의 충효열행이 있는 사람을 모아 매월 3회씩 잡지를 발행할 것을 목적으로 대구광문사(일명달성광문사)가 만들어졌다. 서상돈은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재정적인 뒷받침을 맏았다. 그리고 그는 "민지(民智)를 개발하고 민권을 부식"하자는 취지로 계몽운동과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대구민의소의 설립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때에도 동일한 명칭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러일전쟁이후 일제가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하자, 경부철도를 중심으로 많은 일본상인이 진출하여 상권을 확대해 나갔다. 대구로 진출한 일본상인들은 1906년 8월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고, 동년 12월 일본인상업회의소를 설치하는 등 객주를 중심으로 한 한국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특히 화폐정리사업에서 서상돈에게 치부의 기회가 되었던 조세 청부, 곧 외획(外劃)을 금지시켰다.
대구의 상인들은 당연히 일본의 상권 침탈에 불만을 가지고 조직적인 대응을 하였다. 상인과 시민들은 대구시의소를 조직하여 대응하였다. 시의소는 뒤에 대구상무소(1908.9), 대구상업회의소로 발전하였다. 서상돈은 대구시의소의 초대 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일반인들로 부터는 장시를 대표하는 대구시장으로 불렸다.
한편 그는 일본인 야기와 공동사업으로 부식원을 설립하여 각종 수목을 재배하였으며, 일제가 화폐정리사업 이후 농촌금융을 장악하기 위해 설립한 대구농공은행에 1,090주를 출자하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상인들이 일본상인이나 일제의 권력과 연결되어 일제의 경제침탈을 부 축적의 기회로 이용한 일례라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차관공여를 통해 한국재정을 일본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고 한국상권을 장악하여 식민지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을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와 한국상권 장악은 우리 정부와 한국상인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상인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토착자본은 일본의 자본 침투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제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부산 동래에서 먼저 제창되었고, 대구에서 조직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어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는 광문사문회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열고, 회의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이었던 서상돈은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 환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운동은 상충상의(尙忠尙義)를 표방하면서 월남·이집트·화란 등의 나라와 같이 망하지 않기 위해 국채를 갚아야 하고, 이를 위해 금주와 금연으로 모금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경상북도대구군금연상채회를 설립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민의소를 만들어 이 운동을 일반 국민에게까지 확산하였다. 서상돈은 담보금을 납입한 사람들에게 영수증을 만들어 주고 은행적립금통장을 관리하는 재무직을 맡았다.
대구에서 조직적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자산가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유림과 전현직 하급관리, 부녀자를 비롯하여 노동자.인력거꾼.기생.백정 등 하층민까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그야말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직체계를 갖지 못하고,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서상돈은 1907년5월 전군수 정재학, 전참봉 소돈순, 전주사 윤필오 등과 더불어 6,700여 환의 자금을 마련하여 관찰사 이충구의 도움으로 대구군 동서 청사 자리를 얻어 협성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상인들은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권을 보호해야하고, 국권을 보호하는 것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있었다. 서상돈도 같은 생각에서 학교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상돈은 천주교 신자로서 주로 성직자 돕기와 수녀보호에 솔선수범하면서
천주교 대구교구의 발전과 전교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8년 준공된 한국식 십자형 성당의 건립과 이것이 소실된 후
1903년 축성한 대구대성당의 건립에 앞장섰다.
이것이 현재 계산성당의 원형이다.
또한 서상돈은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년 봄·가을로 양곡 수백석을 내어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 주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신도들을 입교시켰다. 그래서 그의 사랑채에는 항상 식객들이 수십명씩 모여들었으며, 그는 그들에게 용돈까지 주어가며 서로 만나 전교활동을 하였다.
카톨릭 신자로, 대구 상업계의 지도자로,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자로, 가난한 사람의 자부로 살아온 서상돈은 1913년 6월 30일 향년 63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음을 접한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며, 그를 모든 사람의 은인으로 추앙하였다.
첫댓글 매년 알로이시오형님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미카엘형님 성함이 가물구물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