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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와 글벗 원문보기 글쓴이: yanggo
김명원의 시인탐방 _ 정다운 교감(交感)의 시학자(詩學者), 이가림 시인
경칩이 지났으니 산천에 개구리 울음이 자욱하겠다. 그 소리에 풀들이 쑥쑥 올라오겠다. 이가림 시인은 그의 시에서 “어디쯤인
가 발짝 소리 울리며/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대 봄이여”라고 봄을 호명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지난겨울은 얼마나 처
연한 결빙의 절정이었던가. 긴 시간 첩첩이 겨울을 지내는 동안 폭설로 길이 막혔고, 혹한으로 동사의 소식이 전해졌으며, 이제
는 그렇게 기다리던 봄소식에 묻어 일본 대지진 피해가 겹치고 있다. 그러기에 이가림 시인은 봄을 부른 뒤 “한아름 껴안고 싶은
이 목메인 그리움/ 너무나 커다란 맨가슴이기에/ 이 언 살결로도 기댈 수 없구나/ 이 메마른 눈물 바칠 수 없구나”라고 노래했던
것일까. 봄을 봄답게 맞을 수 없는 암담함이 우리에게 봄의 목가 대신 비가를 부르도록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척박한 대지의 어느 귀퉁이에서는 민들레가 싹을 틔우고, 상처 받은 곳곳에 희망을 예견하는 봄빛이 공평하게 퍼부
어지고 있을 것이다. 따스한 것이 그리워 차 한 잔을 들고 창가로 가 선다. 맑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노란 햇살들이 미끄럼을
타며 신나게 뜀박질하고 있다. 저 천진난만한 자연의 몸놀림을 유리창으로 내다보고 있자니 자욱하던 마음이 설렌다. 연이어 내
가 서정의 시대에 즐겨 읽었던 이가림 시인의 시집『유리창에 이마를 대고』가 떠오른다. 나는 서가에서 시집을 찾아내고는 보
랏빛 빗줄기가 기하학적으로 그려진 표지의『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를 들춰본다. 서적을 구입하면 반드시 책의 말미에 구입 장
소와 이유를 적어 놓았던 습관대로 시집의 마지막 장에는 ‘1983년 3월 16일, 성모서림, 유리창으로 넘어 온 봄, 서툰 햇살에 눈부
셔하며’라고 적혀 있다. 얼마나 이 시집이 마음에 들었던지 구독 평으로 그려 넣은 복사꽃 다섯 개도 눈에 들어온다. 순간 마음이
핑그르르해진다. 삼십 년 전 봄에 이 시집을 구입했던 ‘성모서림’이 어디였을까. 이 시집을 다 읽고는 이가림 시인을 찬란히 기꺼
워했을 그 봄은 언제 내게서 져버렸을까.
프랑스 문학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수준 높게 번역하는 작업을 하신 낭만적인 불문학자로, 미술에의 상당한 조예로 미술과 문
학을 연계하는 명문을 연재하셨던 문인으로, 사물과의 긴밀한 교응을 통해 시가 내재하는 존재론적인 가능성을 넓게 열어두신
시인으로 살아오신 이가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십년 전 인천의 한 문학지 행사장에서였다. 가을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깃
세운 카멜 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계셨고, 커피를 사주셨고, 파리에서 만났던 예술가들의 면면을 들려주셨고, 그리하여 친밀의
농도가 마냥 깊어갔던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후 내가 시집을 출간한 ‘시학사’와의 인연으로《시와시학》주간으로 계신 ‘시와시
학’ 행사장에서 자주 뵙는 행운을 누렸다.
꽃샘추위가 다시 시작 된 3월 중순, 선생님께서 최근에 상재하신 시집『바람개비 별』출간 기념 모임이 있다는 초청장을 받고
는 이 김에 선생님을 지면에 모시기로 한다. 전화를 드리자 며칠 전에 뉴욕에서 귀국하셔서 아직 시차가 극복되지 않으셨다며
기꺼이 만남에 응해 주신다. 산수유 빛 햇살이 노곤한 오후, 선생님께서 가끔 들르신다는 혜화동 로터리의 ‘엘빈’이라는 찻집에
서 선생님과 마주 앉는다. 선생님께서는 대사가 거의 없는, 연륜 깊은 프랑스 흑백 영화처럼 그윽하시고, 나는 그 영화를 집요하
게 관람하는 관객처럼 고요히 흥분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로맨티스트
■ 김명원: 선생님,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멋스러우신 모습이세요. 찻집이 환해지는 걸요. 누가 뵈도 예술가이신 풍모가 빛나십
니다. 뉴욕으로부터 귀국하신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뉴욕에는 무슨 일로 머무셨던 것인지요?
□ 이가림: 김자원 작가가 회장으로 있는 미동부한국문인협회 초청으로 지난 달 25일 뉴욕의 플러싱 금강산에서 열린 ‘프랑스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 강연을 했습니다. 저는 그 특강에서 ‘한국 현대시에 끼친 프랑스 시의 영향’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서, 요즘 한국시단의 흐름과 갈래, 그리고 그 전망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혀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보스톤의 ‘하버드
페컬티 클럽’ 초청 모임, 커네티컷의 핫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 하우스’ 방문, 링컨 센터 오페라 하우스의 ‘라보엠’ 관람 등을 하
면서, 한 달 여간 그런대로 소득이 있는 여행을 했어요.
그런데 100세에 작고한 프랑스 출신 미국 여성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보려고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에 갔다
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게 좀 아쉽군요. 부르주아의 수많은 조각 작품 중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하나가 거대한 거미를 형상
화한 ‘마망Maman(엄마)’인데요. 거미의 형상이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이지만 알을 품은 암컷의 모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거
미가 상징하는 다산성과 양육 이후의 앙상한 육체를 통해 어머니의 강인함과 연약함을 함께 보여 주는 감동적인 조각이지요.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그녀의 대표작 ‘마망’이 당연히 전시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성 작가로는 1982
년에 처음 회고전을 가졌던 세계적인 미술관 ‘모마’에는 그 작품이 설치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마망’은 서울의 ‘리움’ 미술관을
비롯해서 세계 13개국에 전시되어 있는데, 미국에는 보스톤에 있다고 하더군요.
딸이 맨해튼에 살고 있고, 동생 가족이 헌팅턴에 마련한 집도 있고 해서, 저로서는 이번 미국 여행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습니
다. 국내에서 2, 3년쯤 지내다보면 역마살 때문인지 궁둥이가 근질근질해집니다. 이번 뉴욕에서의 체류는 나로서는 특별 휴가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여행은 역시 피곤한 것인가 봐요.『밤 끝으로의 여행』의 작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가 “여행, 그것은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활동시킨다.”라고 했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명원: 따님이 뉴욕에 사시니, 일단 숙식이 해결되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재미있는 여행담은 나중에 더 듣고 싶고요. 선생
님, 우선 궁금한 것부터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시집이나 단행본들을 보면, 출생지가 ‘만주’로 표기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전
북 정읍’으로 표기 되어 있기도 한데요. 출생지에 대해 혼선이 있는 이유가 있는지요?
□ 이가림: 조선 정조 4년에 박지원이 지은 책으로『열하일기』를 잘 알고 있지요? 중국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 열하熱河까
지 갔을 때의 기행문인 이 책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곳에 저의 아버님은 신혼살림을 차리셨어요. 당시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
절에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머나 먼 땅까지 가셨던 것이죠.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 서대문 아현동에서 일 년
쯤 사시다가 다시금 전주 이씨 효령대군 후손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사는 전북 정읍으로 귀향하셨던 것이고요.
그러니 태어나기는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정읍으로 이전하여 저를 호적에 올렸기 때문에 출생지가 정읍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제 시「어떤 안부」에는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의 외갓집 이야기가 나오지요. 바로 다 저의 가계에 관련된 시적 배경들이에요. 아
마도 제 기질에 만주 태생인 성향이 있었는지 어릴 적 애칭이 ‘때국놈(대국놈)’이었습니다. 느긋한 성품에 호락호락하지 않는 태
도 때문에 그런 애칭으로 불린 것 같아요.
정읍에서 살다가 전주로 이사한 후에 전주중앙초등학교, 전주서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실제적인 고향은 전주인
셈이고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 대학에 진학하실 때만해도 불문학 전공자가 희귀했던 시절이었을 텐데요. 불문학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
가 있었나요?
□ 이가림: 제가 다닌 전주고등학교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그런 중에 독일어에 매료되어 독문과를 갈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미대를 갈까 하고 망설이던 때였지요. 그런데 전주여자고등학교에 불어 과목이 신설되면
서 불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친구들 다섯 명과 함께 그 불어선생님께 개인 교습을 받게 되었어요. 영문학은 그 시절에 흔했고,
국문학은 국어를 해독할 수 있으니 독학도 가능할 듯싶었고요. 그래서 불어를 개인 교습 받았던 친구 다섯 명 모두가 불문과를
진학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담임선생님과 대학 진학을 상담하는 과정에서 ‘불문과’를 지망하겠다고 하였더니, 담임선생님께서
‘불문과’는 ‘불교문학과’의 준말이 아니냐 하시면서, 저에게 인생을 일찌감치 깨달은 그런 심오한 면이 있었느냐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던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 김명원: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심오한’ 불문과를 다니셨을 때(웃음), 어떤 대학생이셨나요?
□ 이가림: 대학교 1학년 때는 술 마시는 것이 본업이었지요. 만취해서 친구와 어깨동무를 한 채 샹송을 부르며 호기롭게 명륜
동에서 명동까지 활보를 하고, 남산 꼭대기에 올라 행진가와 같던 프랑스국가 ‘마르세예즈’를 불렀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아
마도 고성방가의 수준이었을 텐데 그 때 즐겨 불렀던 노래 중 ‘고엽’, ‘라 메르’, ‘로망스’ 같은 샹송이 생각나네요. 그 즈음 겉멋이
들어 이화여대 불문과 학생들과 몇 개월 간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공부한답시고 보들레르의『악의 꽃』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
며 보들레르의 시를 낭송하던 치기어린 불문학도의 시절, 아련하기만 합니다.
■ 김명원: 저도 그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면 선생님께서 읊어주시는『악의 꽃』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봄바람 소리와도 같은
불어로 선생님께서 낭송해 주셨다면 심각하게 황홀해서 아팠을까요.『악의 꽃』은 제게 깊은 아름다운 상처를 낸 시집이거든요.
그토록 보들레르에 경도 되어 있던 선생님께서 시를 쓰시게 된 계기는 언제인가요?
□ 이가림: 대학교 2학년이 되자 대학 생활이 실망스러워지더군요. 그 당시의 대학 분위기나 환경이 다 그랬어요. 그래서 휴학
을 하고 입대를 결심했지요. 초반부에는 강원도 전방 부대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카츄샤에 배속, 말미엔 의정부에서 군 생활
을 마쳤는데요. 병장이 되자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내무반에 쪼그리고 앉아 시를 쓰기 시작하였지요. 말하자면 시마에 홀린 것
인데, 그러던 중 외출 나와서 각 일간신문에 고지된 신춘문예 광고를 보자 열정이 솟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을 5편정도 만들어서
투고하게 되었지요. 1966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는데,《동아일보》에서 당선 통지가 날아들었어요. 그 때의 감격이란! 내 운명
의 지침을 시인의 길로 바꿔놓은 일대 계기가 마련된 것이지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이전에 1964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서도「돌의 언어」로 가작
입선하셨지요.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던 셈이네요.《동아일보》심사평에 “읽는 이의 마음을 이끌고 무
리 없이 술술 써내려가는 솜씨와 기이한 재주를 피우지 않으면서 참신한 언어를 구사하는 점은 우수하였다”고 평한 심사위원이
셨던 조지훈, 김현승 선생님과는 안면이 있으셨나요?
□ 이가림: 시상식 날 뵈러 갔는데, 조지훈 선생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셔서 참석하지 못하셨고, 김현승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고
는 “자네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우리말을 기막히게 잘 구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네.”라고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투고한
신춘문예의 응모 주소가 ‘샌프란시스코’로 되어 있었거든요. 카츄샤의 주소는 모두 미국식 암호로 되어 있는데 제 부대 주소가
그랬지요. 선생님께서는 이어 제 시가 차가운 지성적 모더니즘 시풍을 지향하면서 장중한 비가의 감동을 전해주는 가락과 능란
한 언어구사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그 당시 제 군부대의 부대장이 웨스트 포인트 출신의 흑인 장교였는데, 부하 중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 있다고 하자 미군 장교들이 타는 세단 차를 내어주면서 시상식 날 동행까지 했어요. 신춘문예 풍경치고는 이색적인 장면
이어서 동아방송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저만 주로 인터뷰를 했답니다.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아홉 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 바띠스트 ·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 안 추운 빙벽 밑에서
검은 목탄으로 데생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영원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갈색 머리 흑인여자의 서러운 이빨같이
서걱이는 먼 겨울 밤바다 살갗은
유리의 달에 부딪쳐 바스러지고
죽음보다 고적한 외투 속의
내 사랑은
두 주일이나 그냥 있는 젖빛 엽서
나목 끝에 마지막 한 장 가랑잎새로 지는 것을
쓸쓸히 웃으며 있네.
지난 쌩 · 마르뗑의 여름 밤주막에서
빨갛게 등불을 켜 달고
여린 별빛들이 우리 잔등에 떨어져 와 닿는,
들끓는 소주를 독하게 마시며 울었지.
쟝 · 바띠스트 · 클라망스
그대 건강한 의사가 되겠다고 여름내
엄청난 야망은 살아
자기 안의 한 무더기 폭약에 방화도 했지만
참혹하게 파손되어간 내실이었음을,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눈물 글썽이게 하는
그대 슬픈 소식을 건네 들었지.
지금은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에 젖어
마른 갯벌 바닥으로 배회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맨발의, 괴로운 밤게(蟹)가 되어서 돌아오는
조금씩 미쳐가며 나는 무서운 취안醉眼인 채
황폐한 자갈밭을 건너
흐린 가스등 그늘이 우울한 시장가에서
눈은 내리고
하얀 수의 입은 천사처럼 잠시 죽어봤으면 생각하다가
포효의 거대한 불꽃으로나 멸망하기를 소망하다가,
아아 자꾸만 목이 메이고 싶어지는
내 고단한 목관의 노래는 떨려
오뇌의 회리바람에 은빛 음계들이 머리칼마다
흩날리며 있네.
그 드빗시 찻집 유리 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은
젖은 눈이 성에 낀 창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盞 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 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결 소리여,
이 침전하는 장송의 파도가에 앉아서 단 한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어안魚眼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 보네.
-「빙하기 -쟝 · 바띠스트 · 클라망스에게」전문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에서 윤리적 릴리시즘으로
■ 김명원: 선생님의 시와 시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6권의 시집을 상재하셨는데요. 최
근에 출간하신『바람개비 별』은 2000년에 출간하신 다섯 번째 시집인『내 마음의 협궤열차』이후 10년만이고요. 40여년의 시
작 활동 내역에 비하면 참으로 과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가림: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순전히 제 게으름 탓이지요. 김시인이 말한 대로 다섯 번째 시집인『내 마음
의 협궤열차』와 여섯 번째 시집인『바람개비 별』사이에 는 10년의 터울이 존재하니 참 드문드문 시집을 낸 형국이네요. 그러
나 시의 세계는 물량으로 승부를 내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시나 시집이라는 것은 뭔가 골똘한 상상력이 축적
되어서 발효의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생산해 내는 작업이거든요. 그러니 완성도가 높은 시를 쓰려는 시적 전략
이 필요하므로 성과물의 양으로 판가름해서는 안 되겠지요. 오히려 24시간을 온통 시에 바치는 시인이 못 되고, 시에 모든 정력
을 쏟아 부으면서 온몸으로 투신하는 시인으로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성이 앞섭니다.
세계시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보들레르나 말라르메나 랭보 또는 도연명이 남긴 시는 양적으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보
들레르 같은 경우는 총 129편(제2판)이 수록돼 있는 시집『악의 꽃』한 권으로 세계시문학사를 재패했지요. 그러니 제 시집이
적은 이유도 시가 한 편 한 편 구조적으로 완벽해야 하고 미학적으로 빈틈이 없는 것을 담아내야 한다는 저의 기질적인 성향을
바탕에 두고 있어서라고 보면, 그런대로 이유 있는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김명원: 선생님의 초기 시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면서 주로 ‘낭만적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였으나, 이후에는 그
것을 시대와 사회의 보편적 현실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 받는데요. 역사의 모순과 삶의 불행을 예리하게 드러내며 미학적
구조를 손상시키지 않아서 ‘윤리적 릴리시즘’으로 규명되고요.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 「빙하기」, 「어떤 안부」, 「황토에 내리
는 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오랑캐꽃」, 「석류」, 「바지락 줍는 사람들」, 「내 마음의 협궤열차」, 「2만 5천 볼트의 사랑」,
「귀가, 내 가장 먼 여행」, 「바람개비 별」, 「투병통신」 등은 언어의 정묘한 사용과 이미지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이미지의 생성
과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결과물들로 보여집니다. 드리고 싶은 질문은 선생님께서 추구해 오신 시적 주제나 형식의 변환이 궁
금하다는 것인데요. 선생님께서 네 번째 시집『순간의 거울』을 내시면서, “이제는 자잘하고 고달픈 사람의 일뿐만 아니라 우주
적 교감의 경이로움에 눈을 떠, 생명의 뜻을 캐낼 줄 아는 쟁기꾼으로서의 시인이 되고 싶다.”고 후기에 쓰셨는데, 이 시집 이후
부터 새로운 시관이 성립되었던 것인지요?
□ 이가림: 사실 시집을 한 권 한 권 낼 때마다, 거창한 오케스트라의 전개처럼 한 악장 한 악장 역동적이고 단계적인 변환이 있
어야 하지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시도해야 합니다. 시집을 새롭게 내면서 자기 표절이나 매너리즘에 빠지면 시인으로서 죽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저 역시 이러한 상승하는 생성과 승화를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테마나 주제
에 대해 상당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깊이 있는 시학을 보여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고『순간의 거울』후기에, 우주적 교감의 경이로움에 눈을 떠 생명의 뜻을 캐낼 줄 아는 쟁기꾼으로서의 시인이 되고 싶다
고 쓴 것은 이제까지 걸어온 저의 시적 도정 전체를 다 부정하고 새 길을 찾아 나서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고요. 이른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특히 보들레르가 말한 ‘상응correspondance의 시학’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아들여, 거기에 바탕을 둔
우주관 또는 자연관으로 세상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절대세계, 피안, 무한, 불가시의 영역에 있을 법한 비전 같은 것을 꿈꾸는 이상주의적 탐구의 태도보다는 보다 구체적
인 생명 현상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입장에 서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었죠. 가령「순간의 거울 · 8 -항아리」같은 작품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누가 밤새 길어다 부었는가
뒷뜨락 항아리에 가득 고인
저 찰랑이는 옥(玉)빛 눈물의 은하수
-「순간의 거울 · 8 -항아리」전문
순전히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낭만주의적 기법으로 그럴싸하게 표출한 단순한 서정시의 ‘아름다움’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
고, ‘항아리’라는 사물에 대한 일종의 ‘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우주적 상상력에 의한 깊은 인식의 차원에까지 나아가보
려는 게, 그 때나 지금의 제 시적 발걸음입니다. 또한 제가 생각하는 시학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또 하나의 작품을 예로 든다
면,「순간의 거울 · 7 -상응」을 들 수 있겠네요.
내가 문득
보조개 이쁜 누이를 바라보듯
꽃 한 송이 바라보니
새하얀 빛깔로
웃는다
가늘게 떠는
그 웃음 소리에 놀라
잠깬 이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이름을 묻는다
난 눈길 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돌.
그대들이 바라보면
소리 없는 소리로
웃는 돌
-「순간의 거울 · 7 -상응」전문
말할 것도 없이 이 시는 그 부제목이 암시하듯, 만물조응의 화답의 세계를 그린 것입니다. ‘내’가 그윽히 꽃을 바라보니까 그 꽃
이 내 눈길에 부딪쳐 미소를 짓고, 또 그 꽃의 웃음소리에 놀라 이슬들이 잠을 깬다고 묘사한 것은 이 우주를 찬란하고 황홀한 인
드라망으로 보았을 때 가능한 세계일 겁니다. 인드라망이란 낱낱의 그물코마다 무수하게 영롱한 구슬을 달고 있는데, 하나의 구
슬에 다른 구슬이 비치고 이것이 다시 다른 구슬에 비치고 또 이것이 먼저의 구슬에 비치는, 이렇듯 무한히 서로 비추어 마침내
한 구슬에 일체가 투영되고 일체가 나타난 구슬이 다시 한 구슬에 비치는 그런 신비로운 그물망을 가리키지요. “천하에 아무 관
계없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는 묵자墨子의 말도, 표현은 좀 다르지만, 세상을 거대한 인드라망의 구조로 본다는 점에서 상통한
다고 하겠습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 피력하시는 인드라망의 구조에 의한 교감 이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현상학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
이네요.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바람개비 별」연작시도 이런 면에서 같은 연결선상에 놓이겠고요.
바람구두를 신고
굴렁쇠를 굴리는 사나이
늘 마음의 귀 쏠리는 곳
그 우체국 앞 플라타너스 아래로
달려가노라면,
무심코 성냥 한 개피
불붙이고 있노라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마중 나오듯
그렇게 마중 나오는
그대의 신발 끄는 소리…
저 포산包山 남쪽에 사는 관기觀機가
불현듯 도성道成을 보고 싶어하면
그 간절함
바람으로 불어가
산등성이 떡갈나무들이 북쪽으로 휘이고
도성 또한 관기를 보고 싶어하면
그 기다림
바람으로 불어가
산등성이 상수리나무들이 남쪽으로 휘이는 것
옛적에 벌써
우리 서로 보았는가
내가 보내는 세찬 기별에
그대 사는 집의 처마 끝이나
그 여린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뜨거운 연통관連通管이 분명 뚫려 있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달려가는
내 눈먼 굴렁쇠여!
-「바람개비 별 ․ 4 -마음의 귀」전문
「바람개비 별」연작시 중「바람개비 별 ․ 4 -마음의 귀」에는 삼국유사의 ‘포산이성包山二聖’ 이야기가 살짝 나옵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바람이 되어 불어간다는 거의 초자연적인 이심전심의 세계를, 오늘날의 애틋한 사랑에 대비시킴으로
써 ‘신화적 대조법’ 의 효과를 살려보려 시도한 작품이지요.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함께 포산包山에 숨
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네요. 서로 10여 리쯤 떨어져 있었으나, 구름을 헤치
고 달을 노래하며 정답게 왕래했다 하지요.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답니다. 또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이와 반대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가게 되었고요.
이와 같이 서로 진정으로 소통하는 차원에 이르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송이 꽃을 바라 볼 때, 그걸 단순한 대상
(오브제)으로만 보게 되면 ‘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아요. 인간이든 물건이든, 같은 중요성과 가치를 지닌 동등성의 위치에 놓고
볼 때 비로소 대화가 이뤄지게 되겠지요. 인간과 물건이 다 같이 사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할 때 참다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
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만물조응의 세계는 신비주의적인 우주관에 기대어 있기 보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대상, 즉
사물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현상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의 정다운 교감, 그리고 현상학적 접근
■ 김명원: 선생님께서 앞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여러 지면에서 밝히신 교감의 시학에 대해 더 자세히 여쭙고 싶은데요. 교감의
시학이라고 하면 보들레르가 말한 교감의 시학이 떠오릅니다. 서로 연관 관계가 있는지요?
□ 이가림: 제가 생각하는 교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과의 현상학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선 어떤 사물에
대해서 사랑을 하지 않으면 교감할 수가 없지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사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고 깊이 이해하지 않
으면 진정으로 교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사물의 거죽만이 아니라 알맹이, 그 깊이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 소중하
고 숭고한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기에 우리가 보통 ‘아름답다’고 간주해 왔던 그런 것 말고 추악하다고 도외시 해왔던 것, 천시하고 외면해왔던 것들에게까
지도 ‘그윽하고 정다운 시선’을 던져야 합니다. 더럽고 추악한 ‘어둠’ 이라고 치부해왔던 것의 실체를 뚜렷이 직시해야 하는 것입
니다. 심지어 시인은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없애버려야 할 쓰레기로 취급하는 도둑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따뜻한 눈
길로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약 여기에 더럽고 혐오스런 똥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자세히 보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습니
다. 시인은 그것을 뚜렷하고 깊이 있게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그려내야 합니다. 허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 김명원: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교감을 잘 해야 하는 성정이야말로 시인으로서의 자격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군요. 선생
님께서 그런 시인을 예로 들어 주신다면요.
□ 이가림: 김시인 말대로 사물과의 정다운 교감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시인인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아쉬움을 크게 느끼게 되지요. 그것은 그 사물과 나 자신이 나누어 가진 어떤 정다운 관계, 즉 ‘우
정’ 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거든요. 사물과의 교류, 그 우정의 느낌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표현했을 때 좋은 시
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프랑시스 잠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석, 윤동주 같은 시인이 퍽 좋아했던 가톨릭적 상상력에 바탕
을 둔 겸허한 단순성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나귀의 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나귀에 관한 시를 많이 쓴 것으로 유명
하지요. 이 시인의 시 가운데「식당」이란 시가 있습니다.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 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어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
소리도 들어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어있는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에 나무로 된 뻐꾹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
마 부서져 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어르신네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
리한테서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것들에 영혼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
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 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안녕하신지요,
잠 씨? -「식당」전문
사실 우리가 식당이라는 비근한 장소를 대상으로 시를 한 편 쓴다고 할 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시를 쓸 때,
노끈 꼬듯이 알 수 없는 말로 혹은 말을 비틀어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프랑시스 잠은 말을 과장하거나 학대하지도, 비
틀지도 않고 쉽게 쓰면서 커다란 감동을 길어 올리는데 성공하고 있거든요. 말은 쉬우면서도 의미의 두께가 층층이 쌓여있는 그
런 시가 가장 ‘좋은 시’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김명원: 잘 알겠습니다. 프랑시스 잠의 시를 통해 선생님께서 정의하시는 좋은 시에 대한 견해를 들어 보았는데요. 이제는
선생님의 시창작법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 이가림: 시를 쓸 때는 말은 쉽고 의미가 많이 담겨지도록 해야 합니다. 의미는 별로 담겨진 게 없고 말만 잔뜩 어렵게 쓸 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가짜 시, 그것을 쓴 시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엉터리 시가 되고 말거든요. 그것은 난해시가 아니
라 불가해한 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난해시는 난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전달이 안 되는 불가
해한 시는 그저 나쁜 시일뿐입니다.
제가 좀 전에 예를 들었던 프랑시스 잠은「식당」이라는 시에서, 장롱을 보면서 할아버지, 대고모, 아버지의 목소리가 풍겨 나
오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시인은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장롱을 보고서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
듯 평범한 사물에 역사와 시간이 묻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깊이 파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깊은 내적 통찰력이라 할 수 있지
요.
가령 우리가 황톳길을 바라볼 때, 아무런 일도 없었던 길처럼 보이는 황톳길이지만, 그 길 위에서 6․25의 수많은 목숨들이 스러
져간 길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황톳길은 숱한 한의 역사와 함성이 숨어있는 슬프고 쓰라린 현장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역
동적 상상력의 눈으로 그 길을 바라보게 되면, 한 많은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는 뜻 깊은 비극의 현장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 김명원: 말하자면 사물을 바라볼 때, 일상의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역사라는 배경 위에 사물을 얹어 두고서 깊은 내적 통찰력
을 가지고 관찰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 이가림: 그렇습니다. 사물을 안이하게 표피적으로 훑어 봐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사물
의 세계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지각’의 시선, 겸허한 정다움의 시선으로 사심 없이 바라볼 때,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요. 삶의 진실을, 그 진실의 실체를 아주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 없는 순수지각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합니
다.
그리고 시인은 특히 언어를 아껴서 정확히 사용해야 하지요. 시인이 쓸데없이 말을 마구 남발한다면 시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 시인은 말을 잘 부릴 줄 아는 뛰어난 장인이어야 하니까요. 시인은 진실의 과녁을 정확히 꿰뚫는 언어의 명사수여야 합니다.
진실의 과녁을 향해 언어의 탄환을 100발 쏴서 겨우 20내지 30발정도 관통시키는 시인은 절대로 좋은 시인이 될 수 없거든요.
진실의 한복판을 백발백중 꿰뚫어야만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이니까요. 언어의 명사수가 되어야만 시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또
한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펜이라는 언어의 총이 300m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 총이라면, 500m 지점에 있는 대상을 쏴봤자 헛일일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언어의 탄환들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자신이 쓰는 언어가 어떻게 어디까지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가, 즉 시적 언어의 성능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진지하게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 김명원: 40여 년 동안 시를 써오시면서 시창작에 대한 고충이나 느끼신 점, 그리고 시인들에게 반드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 이가림: 40년이라고 하면 참 짧지 않은 세월인데요. 저는 그 세월 동안 시를 써오면서 시가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의 조
작이고, 말과 삶 사이의 간격, 즉 빈틈이 있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수없이 절망하기도 했어요. 언어의 사기성과 허구성에 절망
하여 한때 시를 버리기까지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시인들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언어는 불완전하고 한계를 가진 도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불완전하
고 한계를 갖고 있는 언어로써 삶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시
와 삶 사이에는 빈틈, 간극이 어쩔 수 없이 있게 마련이에요. 엄밀한 의미에서 언행일치란 환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상상력의 형이상학자인 바슐라르는『촛불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나의’라는 소유형용사를 붙일 수 있
는 대상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예컨대 전등 같은 경우, ‘나의 전등’ 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나와 전등
과는 단지 기계적인 동작, 즉 ‘켰다, 껐다on, off’하는 동작의 주체와 대상 그 이외의 아무런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와 전
등 사이에는 정다움이라는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은 ‘나의 촛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책상 위에 초를 놓고 성냥을 그어 심지에 불을 붙이고 서서히 타오르는 불꽃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맨 밑의 까만 심지에서 불
꽃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맨 위에는 ‘초超 불꽃surflamme’이라는 우리가 육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꽃처럼 타오르는
불꽃이 있습니다. 정겨운 관계의 대상인 이런 촛불에는 소유형용사를 붙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촛불’ 앞에 소유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성냥을 그어 초를 붙이는 과정에서 ‘나’와 정겨운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고요. 성냥불을 그어서 조심스레 초에 불
을 붙이는 주체가 확실히 ‘나’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찮은 작은 사물과 정다운 대화를 나눌 때 싱싱하고 아름다운 포에지가 태어납니다. 참다운 내
적 울림으로서의 교감을 전해주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라 유행가사에 지나지 않는 너절한 넋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앙에서처럼 언제나, 포도주 향기로 젖기를
■ 김명원: 선생님 시를 읽자면, 바슐라르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번역 작업을 하시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
으신 건 아닐까요? 그리고 불문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인지 선생님 시와 프랑스 시인들의 시와의 연관 관계도 느껴지고요.
□ 이가림: 시인 철학자로 불리는 바슐라르는 70년대 초에 상상력의 형이상학자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지요. 시의 결함
을 과학이 메꿔야 하고, 과학의 결함을 시가 메꿔야 하므로 시와 과학은 상보적인 관계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매혹을 느껴서 바
슐라르의 저서들을 공들여 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당시에 조태일 시인이 만들던《시인》이라는 잡지에 바슐라르의『촛불의 미
학』을 처음 연재하게 되었고요. 그의 책들은 제게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 주었고,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새롭고 획기적인 개안
開眼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나 학생들에게 바슐라르의 책들을 정독하라고 조언하곤 하였지요. 그의 글들은
상상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거든요.
바슐라르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저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현대시를 강의하면서 보들레르나 랭보, 폴 엘뤼아르, 이
브 본느푸아 등에 심취해 연구 논문도 쓴 바 있습니다. 특히 폴 엘뤼아르는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의 창시자지만, 초
현실주의 기법을 사용하되 정치적 상상력이 뛰어나고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명징한 이미지로 대중적인 호소력도 강하게 지니
고 있는 시인이지요. 프랑스 시인들을 연구하며 받은 영향이 제 시에 은연중 스며들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1989년에 프랑스 루앙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셨지요. 프랑스에서 체류하셨던 시절의 이야
기가 듣고 싶습니다.
팍팍하고 고달픈 인생이라는 나그네 길에 그래도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느낀 날이 더러 있었다면, 그 시절은 1985년에서 1989
년까지 프랑스 노르망디의 루앙에서 보낸 한 철이었지 않나 싶어요. 루앙이라는 도시는 ‘간통문학’ 의 본고장(웃음)이라고 할 만
한 곳인데요. 플로베르의 소설『마담 보바리』의 무대가 바로 그 도시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모파상의『여자의 일생』의 무대인
노르망디 바닷가 마을 에트르타, 보들레르의「여행에의 초대」의 산실인 옹플뢰르 항구 등은 저에겐 많은 추억을 안겨준 장소들
이고요. 파도가 세고 단애로만 이루어진 노르망디 해변으로 수 십 번에 걸쳐 털털거리는 차를 몰고 가서 값싼 포도주를 마시며
한국 문단 소식과는 담을 쌓은 채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곤 했답니다.
하지만 시인에게 견디기 힘든 건 파롤parole였지요. 모국어인 엄마의 말, 그 파롤에 대한 절절한 향수랄까, 존재론적인 갈증이
랄까요, 바로 마음의 공동화로 힘겨웠습니다. 거의 우울증을 유발할 정도의 허기와 공허를 저는 그 시절에 느꼈던 것이지요. 솔
제니친이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를 체험적으로 절감했어요. 낯선 땅 루앙에서 이방인으로 살면
서 파롤의 고향을 떠나 공허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불안감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기묘한 행복
을 맛볼 수는 있었어요.
■ 김명원: 한 번의 결호 없이 지난 2010년 겨울 호로 80호를 매김 한 계간시지《시와시학》주간으로 일하시면서 힘든 일이 많
으셨지요?
□ 이가림: 그래요. 문예지 만드는 일이 참 어렵더군요. 잡지사로부터 청탁 받는 입장이었을 때는 문예지를 꾸려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그저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시지를 만드는 현장 속에서 마당쇠 역할을 맡아보니, 정말 힘든 일이구나 하는 걸 피부
로 느꼈어요.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있었고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에 대한 불안감도 늘 있었지요. 하지만 그와 동
시에 내 나름대로 우리 시단이 섹트화 되는 것을 타파하고 균형 잡힌 편집을 해보겠다는 의욕으로 성심껏 일해 왔다고 자부합니
다. 평소의 친소 관계를 떠나서 편집 방향을 설정하고 세계시의 최근 동향을 조명하는 등 이슈가 될 만한 특집을 기획하면서 보
람을 느끼기도 하였으니까요.
■ 김명원: 긴 시간을 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근황을 좀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이가림: 제가 인하대에 명예교수로 있는데요. 일주일에 이틀,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3월 말경에 활판 인쇄로『지
금, 언제나, 지금』이라는 시선집이 발간될 예정이고요. 이 시점을 계기로 좀 더 시작에 박차를 가해, 시작업에 24시간 기투企投
하는 시인으로서 열렬하게 시의 세계로 빠져들려고 합니다. 또 예전에《월간미술》에 1년간 연재하면서 문학계와 미술계의 사
랑을 받았던 미술 에세이를 책으로 엮은『미술과 문학의 만남』에 이은『미술과 문학의 만남 2』를 준비하고 있고요. 요즈음 그
책에 실을 글을 몇 꼭지 썼는데 앞으로 차분하게 완성해 가야겠지요. 번역 작업으로는 이브 본느푸아의 최근 시집인『눈의 처음
과 끝』을 맡아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제가 좋아하는 포도주를 마셔야겠네요. 세어 보지
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대략 천 여병 정도를 마신 듯 한데요. 주류협회에서 인증서를 받은 바는 없지만 사실로 믿어 주세요. 앞으
로 제 생애를 통해 포도주를 한 이 천 여병은 마실 것 같습니다.
■ 김명원: 포도주 말씀을 하시니 금세 포도 향기로 젖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분 좋은 여러 계획들이 있다는 말씀에 저도 활력이
솟는 걸요. 활판 인쇄 시선집 출간 때도 초대해 주실 거지요? 설레도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환한 봄 맞으시기를 기원 드리며
인터뷰를 접겠습니다.
낭만성은 단순한 포즈가 아니다. 근사한 외모에서 풍기는 허세도 아니다. 진정한 낭만성은 세상의 사물 모두를 가슴으로 이해
해고 온 몸으로 감싸 안는 교감의 시학, 그 역동적 상상력의 깊이에서 나온다.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를 강렬한 어조로 노래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모순과 삶의 불행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미학적 구조를 손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윤리적 릴리시즘의 길
을 구현한 이가림 시인. 이는 경직된 도덕의식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타인의 삶과 불행에 대해 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는 휴머
니즘적 참여의식 혹은 연대 감정에 바탕을 두는 시의 길을 가리킨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마도 이러한 시의 길이 시인의 시적 도
정이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는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가림 시인이 설파하는 정다운 교감의 시학이 아니겠
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가림 시인을 낭만적인 교감의 시학자로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근에 시인이 상재한 시집『바람개비 별』은 현실주의적인 사사로운 것에 대한 즉각적 응전應戰에서 벗어나 시인 개체와 우
주와의 비밀을 탐색하는 작업으로, 시인은 이제 우주와의 교감을 꿈꾸고 있다. 시인은『바람개비 별』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
서, 버클리대에 있는 십 미터짜리 천체망원경에 의해 포착된 태양보다 25배나 무겁고 10만 배나 밝은 천체가 바람개비처럼 소용
돌이치는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위대하고 눈부신 사랑의 상징으로서「바람개비 별」연작을 쓰게 됐으며, 시집 제목도 그
렇게 정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기에「바람개비 별」연작 시편들은 우주와의 소통을 열망하는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삼국
유사 혹은 신화에 나오는 소재들을 활용하여 그리움의 대상을 구체적이고 관능적으로 노래한 현대의 애절한 연가戀歌이기도 하
다는 것이다.
그 봄날 저녁, 축하의 마음을 보태기 위해 운집한 여러 시인들이 시집『바람개비 별』에 수록된 시들을 낭독하는 사이, 나는 동
녘 하늘에 돌연 떠오른 ‘바람개비 별’을 보았던 것 같다. 무한하고 영원한 빛의 천체가 광포하게 나의 시심을 흔들고 지나갔던 것
같다. 그래서 우주로 향하는 시인의 교감에, 그 그리움의 영역에, 나도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도 같다. ■
【웹진 시인광장】 2011년 4월호